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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1.01 09:33

고구려(24)-국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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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보고 온 장생이 유리왕에게 위나암의 지세를 설명했다
"신이 본 바에 의하면 위나암의 북쪽은 노령산 줄기가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있고 가파른 봉우리들이 첩첩이 솟아있을 뿐만아니라 그 사이에도 험악한 산 골짜기는 어느때라도 부여국으로 부터 공격에 능히 막아 낼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성을 쌓지 않아도 성곽이나 다름 없으니 얼마 좋은 여건이옵니까?.

그리고 위나암은 경제면에서 관동 삼보(關東三寶)라 일컫는 인삼, 돈피, 녹용의 산지로 유명하고 야채 과일 ,약초가 풍부하여 한나라와 교역이 활발 하다 합니다.
결론을 말씀 드리자면 높은 산들은 자연스럽게 북쪽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막아 줌으로서 아늑 하고 양지 바른 지형을 갖고있으며 땅은 비옥하고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당합니다 .
따라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만한 곳이 어디에도 없을것 같습니다 "

실제 장생과 설지가 보고 온 위나암주변은 북쪽으로 이십리 거리에는 우산(禹山)이 웃뚝 솟아 있고 동쪽으로 오리가량 떨어진 거리에는 장백산 줄기인 용산(龍山)이 ,서쪽으로 오리가량 떨어진 거리에는 칠성산(七星山)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다 .벌판 앞 쪽에는 거대한 압록강이 흘러 천연의 요새지로 적지였다

유리왕은 이러한 지형적 유리한 점을 들어 도읍지 이전 문제를 협부와 상의했다
협부 가 이의를 제기한다

" 역사적으로 보아 도읍지를 옮긴다는것은 왕조가 바뀌는 경우 이거나 국호를 고치고 나서 도읍을 옮기는것이 상례이기는 합니다 .
하지만 고구려는 개국 한지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도 않았고 새로 혁명을 이르킨 것도 아닌데 구태어 도읍을 옮기려 하심은 잘못이옵니다 .아무리 지형적 조건이 좋더라도 고구려가 아직 까지는 졸본에 각부와 공신들의 기반이 있는데 구태어 옮긴다는 것은 무리 입니다 "

임금은 협부가 최근 들어 자기 일에 자주 제동을 거는 듯한 발언에 기분이 좀 상했지만 생각해보니 부왕이 정한 도읍지를 하루 아침에 함부로 옮긴다는것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유리왕은 계루부등 구 세력이 뿌리 내리고있는 근거지라는 점이 싫었다
유리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나암성을 축성(築城)하기 시작한다
성문은 남과 북에 한개씩 동서쪽에는 두개씩 모두 여섯 군데 두었고 모두 옹성문(瓮城門)형식이었다

성안에는 궁궐을 짓기시작 하였다.
궁궐 신축으로 인한 나라안의 살림도 쪼들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돈이 필요 했다. 그래서 유리왕은 각부와 공신들에게 기부금을 요구했다 .이유야 그럴듯 했다 .남쪽에 새로 일어 나고 있는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고 ,새 수도인 위나암은 사방이산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로도 손색이 없고,들이 넓어 농사에 적합하며, 반면 졸본은 너무 북쪽에 위치하여 한나라와 교류 하려면 부여를 거처야 함으로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발전 하기에는 졸본이 부적합 하다는 명분이었다 .

그럴듯한 명분 이었다
그러나 유리왕의 진정한 속내는 그것이 아니었다

유리왕은 도읍이전 계획에 대한 명분에서 부여때문이라는 말을 쏙 빼었다 .부여 왕이 알면 오해를 받을까 눈치 보기 위함이 그하나 였고 ,그보다 더 큰 속내는 졸본의 고위급 귀족들이 대부분 토지등의 기반 세력기반을 졸본에 두고있어 천도와 동시 그들의 기반세력을 꺾어 볼 속셈 이었던 것이었다 .

그들의 세력 기반을 꺾으므로 해서 왕의 독재권을 강화 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 이었던것이었다 .
유리왕은 신 도읍지 궁궐 축조비 징수에 있어서 강제가 아니라는것을 표시 하기 위해서 각부에서 자기 분수에 따라 스스로 얼마씩 내라고 하였다 .내기 싫으면 그만두라는식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싫더라도 유리왕의 미움을 살까 싶어 내지 않을수 없는 것이 부족장이나 공신들의 입장이었다

유리왕 2 년 3 월부터 궁터를 딱기 시작했다
수많은 농민들이 성축조를 하는데동원 되었다 .
유리왕은 농민들이 성축조에 동원 되는동안 농사철과 맞물리자 농민들을 돌려보내었다 농사철이 끝나면 나와서 축조 토록했다 .그러나 공사비가 계속 들어 가자 이번에는 속국에게도 건축비를 요구하였다 졸본성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까지 통행세를 징수하였다

드디어 각 부족장들의 불만의 소리가 터저 나오고 공신들도 유리왕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
하지만 유리왕은 눈하나 깜짝 않고 공사를 밀고나갔다
압록 강변의 아람드리나무를 베어오는가하면, 장백산의 석재를 실어오고 심지어는 주몽 선왕 주변으 나무 까지 베어 왔다
갖은 어려움 끝에 궁궐은 우산(禹山)을 등지고 용산(龍山)을 배경으로하여 우람하게 신축되었다
공사를 시작 한지 2 년만에 유리왕 4 년 왕실만이 모두 위나암성으로 이사 하기에이르렀다 .

유리왕은 이성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유리왕이 고구려 개국 이전 부터 역사가 깃든 졸본성을 신수도인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조정이 모두 신 수도인 국내성으로 떠나자 졸본성은 하루 아침에 빈집 같이되어버렸다 .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후 유리왕은 해명 왕자를 졸본성에 남겨 놓고 국내성으로 떠났다 .혹시 만의 하나라도 졸본성에서 다른마음이라도 갖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유리왕은 해명을 졸본성 에남겨 두고 가면서 미처 국내성에 거처를 정하지못한 일부 대신들은 그대로 졸본에 남아있게 하고 해명을 통하여 자기에게 알릴것은 알리라고 지시했다 . 일종의 제2 정부청사 비슷한것이었다 . 말이 제2 정부 청사이지 졸본성은 한 지방으로 전락 된것이나 다름 없었다 .

그런대로 졸본의 조정이 떠난 궁궐은 을씨년 스럽기는 했지만 졸본의 산천은 옛날과 다름 없었다 .일부 대신들과 관속들만 국내성으로 떠났지 해명과 일부대신 및 공신들과 백성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전에 비하면 떠들석하던 졸본성 궁궐 주위에는 이따금 개짖는소리만 요란할뿐 너무 적막하였다
국내성도 마차 가지였다. 새로 축조된 궁궐에서 회의만 하였지 궁궐 인지 빈집 인지 너무나 삭막 하기만 하였다 .
밤이면 인근 우산과 칠성산에서 늑대와 호랑이가 나타나 우짖는 소리로 밤잠을 이룰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긴지 이듬해 유리왕은 송 왕후가 낳은 해명 왕자를 태자로 삼고 그것을 기념 하기 위하여 전국 죄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린다
해명 태자의 나이 20 세였다

해명태자는힘이장사였다. 무술이라면 해명을 따를 사람이 없어 다음 임금 재목감이라고 누구나 칭송하였다 .백성들은 해명왕자의 태자 책봉을 모두 축하했다 .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들도 줄을 이어 축하의 선물을 받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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