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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이 죽고 뒤를 이은 고구려 제 4 대 임금이 된 사람은 대무신 왕의 아우 해색주였다 .
이사람이 바로 민중왕(閔中王)이다 .

대무신왕 15년 12월에 태자에 책봉된 맏아들 해우(解憂)는 세살이었다 .대무신왕 26년 왕이죽었을때는 해우 태자의 나이가 겨우 13 세였다. 정실 왕후에게 아이가 없자 두번째 부인을 얻어 호동을 낳았으나 두째부인에게서 해우보다 먼저 태어났던 왕자가 호동이었다
호동이 자살하자 그를 죽게만든 정실왕후는 해우가 다섯살되던해에 알지못할 병으로 죽고만다
외로운 해우태자는 어머니의 따뜻한정을 모른채 자라났다
그런데 부왕이 급작히 돌아가신것이다
당연히 해우가 왕으로 등극하여 했으나 그를 뒷받침해주는 어머니는 죽고 없었으며 대신들은 한사람도 그를 옹호하는자가 없었다 .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숙부인 해색주(解色朱)가 주위의 대신들을 부축여 스스로 왕위에오른다
이사람이 4대왕인 민중왕이다

민중왕이 정권을 잡자 제일 먼저 착수 한것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대신들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아부하는 대신들을 끌어 들이는 작업이었다 .
충성 스럽고 정직한 대신들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고 등극 하던 해 대무신왕이 만들어 놓은 튼튼한 국가 재정이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만 을 조정에 끌어 들여 큰 잔치를 베풀면서 대무신왕 시대의 신하들은 모두가 부패한 탐관오리 들 뿐이라고 몰아 부쳤다

그러면서 자기 만이 백성들로 부터 지지를 받는 현명한 군주라고 자화 자찬 하면서 신하들과는 일체의 상의 없이 자기가 생각 한 대로만 나라일을 끌고나갔다 .
왕의 아우로서 대신들로 부터 그동안 소외 당했던 시절의 분풀이 라도 할듯이 대무신왕 아래서 충성을 다한 신하들은 예외 없이 조정에서 몰아냈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조카인 해우태자를 감싸는소리를 하는 대신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목을 베었다 .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태자 해우는 기를 못 펴고 살았다 .가끔 자기를죽이지나 않을까 하고 주위사람들과 담을 싸고 살았다 .아니 대신들은 의식적으로 태자를 피했는지모른다

그의 주위에는 바른 소리가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
대신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 하면서도 그 보상 이라도 할듯이 별안간 예고도 없이 죄수들을 대사면을 내리는가하면서 대무신왕이 전쟁용으로 비치 해둔 군량미를 풀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생색을 내는척하기도 하였다 .

전쟁 비축미가 줄어 들어 들자 뜻 있는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였다 .
언제 한나라 광무제가 또 침공해 들어와 국내성을 포위 할지 모른다는 우려 에서였다 .
물러난 대신들은 걱정을 하였다
"큰일이야 , 이러다가는 한(漢)의 지배를 받게 될지몰라"

민중왕은 어느정도 자기 의도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자 드디어 본색을 들어 내었다. 나라 안의 정사는 등한시 하고 낮이나 밤이나 쾌락에 젖어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혹 신하들이 급히 보고 들일 일이 있어도 하루 종일 밤이 늦도록 까지 그 신하를 불러 들이지 않았다 .

조정에있는 신하들도 왕을 면접 하기란 하늘의 별 따는것 이상으로 힘들었지만 지방에서 행정을 맡고있는 루초나 처려근지 등이 급한 일로 장계(狀啓)를 올려도 책상 설합 속에서 낮잠 자기 일수였다 .조정의 신하들로 부터 보고서를 듣는 것이 없고 지방의 행정 관료인 처려근지의 보고 서류를 받는것이 없으니 아무리 임금이라도 세상일에 깜깜 한것은 당연하였다 .

그런데 그중에도 임금에게 정확하게 보고가 잘 되는단 한 사람이있으니 조세와 공물(供物) 담당인 대사자 욕중(縟仲)뿐이었다 .
대사자 욕중은 고구려 14 관등중 6 관등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도 왕과 직접 유일하게 독대 할수있는 사람이었다 . 그가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왕이 대무신왕의 아우로서 별 볼일 없는 한직에서 불우한 생활을 했을적 부터 민중왕을 집사로 그림자 처럼 따라 다녔던 경력 때문이었다 .

민중왕이 왕이 되자 제일 먼저 등용 대상에 오른 사람이 그였다 .욕중은 원래가 배운것 없는 한량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은 줄수가 없어서 결국 6 관등(官等) 재정을 담당하는 대사자 자리를 준것이다 .
욕중은 민중왕에게 안 된다는 소리를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 그가 대사자가 되자 제일 먼저 서두른 것은 지금 까지 내는 세금을 두배로 증액시키고 각지역의 공물을 1 년에 한번씩 내던 제도를 네번 씩이나 바치게 하였다

이렇게되니 민중왕의 내탕금은 늘어 났지만 이를 따르는 백성들의 원망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입버릇 처럼 고구려 기존 공신들 때문에 백성들이 살기 어려우니 가난한 농민들을 잘 살게 하려면 이들 지배층 으로부터 세금과 공물을 많이 걷우어야 한다고 구실을 붙였다 .그렇다고 농민들을 위하여 쓴 돈은 한푼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공신들의 공전(功田)은 그리 많이 소유한 것은 아니었고 이것은 순전히 대무신왕 시대의 지배 세력을 꺾으려는 민중왕과 욕중의 술수에 불과 했던 것이다 .

임금은 조금도 어려움 없이 돈이 펑펑 들어 왔으나 대대로를 비롯하여 태대형, 울절, 대부, 등 벼슬아치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변방을 지키고있는 지방 사령관 격인 당주 ,말객,장군,등은 군량미 공급이 원활치 못하자 불만이 팽배하였다

특히 중국의 낙랑과 인접해 있던 잠우(蠶友)의 경우에는 심각했다 .
원래 잠우라는 곳은 누에치기로 비단을 생산하여 고구려와 중국에 공급하는 이름난 육고하와 북대하 사이에 있는 읍이었다 .비단은 중국인들에게는 고급 옷감으로 각광을 받는 업으로 잠우에서 생산하는 비단은 거의 중국에서 팔아 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낙랑의 온갖 사치와 향락 문화가 접목이 되어 잠우라는 곳은 중국 북부와 고구려 서부의 중요한 곳이 아닐수 없었다 .
그런데 어느날 이 마을에 욕중이 직접 나타나 둘러 보고 간후 중국으로 무역하던 길을 완전 차단하도록 명령이 떨어지고 모든 생산품은 국외 반출을 허용 못한다고 명령하였다 .

살길이 막힌 잠우 마을은 온동네가 초상집으로 변하였다 .중국에서 비단을 사주지 않으면 잠우현은 살길이 없었다
잠우현 대가(大家) 대승(戴升)이 누차 고구려 조정에 중국으로 가는 길을 막지 말것을 건의 하였다 .그러나 욕중은 이를 적극 제지하였다 . 심지어는 고구려 군 경비병을 배치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지나 낙랑으로 들어가는 만가둔(萬家屯)에 경비병을 배치하고 항의 하는자는 무조건 잡아 들였다 .

잠우 마을 주민들이 고구려 관아로 몰려가 항의 했으나 오히려 대표를 잡아 죽이었다 . 격분한 잠우 마을 주민들이 고구려군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고구려 경비병을 모조리 잡아 죽이었다

일이 확대 되자 대승은 고구려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그길로 낙랑태수 최리를 찾아간다
"고구려 민중왕이 우리의 장삿길을 막아 도저히 살길이 막막하니 차라리 귀국에 항복 하고자 하니 받아 주십시요"
낙랑태수 최리는 그렇지 않아도 사위인 호동이 비명에 죽고 딸 까지 자살한 사건 때문에 고구려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고 있던 참에 결심을 한다

"좋소 ,우리 낙랑군이 곧 잠우로 진군 할것이니 우리와 합세하여 고구려군을 막아 냅시다"
이렇게하여 고구려 잠우부락 1 만여호가 중국땅으로 넘어간다
잠우 부락은 어제 까지 고구려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으나 고구려 잠우 백성들의 반란으로 하루 아침에 중국의 경비병이 로 바뀐것이다

민중왕은 이 사실을 이 소식을 듣자 노발 대발한다
"최리, 대승 , 이 두놈들 꼭 잡아다 혼을 내주리라"
큰 소리만 치었지 선뜻 나서지 못하는 민중왕이었다
주색잡기와 세금과 공물 걷기에만 혈안이 디어 있던 민중왕에는 속수 무책이었다 . 군량미는 바닥나고 무기는 창고에서 녹쓸어있으며 군사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감히 낙랑을 칠 엄두는 생각 할수도 없었다. 그동안 그에게 아부만 일 삼던 신하들에게서는 뾰죽한 답이 나올수가 없었다
민중왕은 이러한 전쟁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것은 아예 꿈에도 생각 조차 않고 주지육림 잠에서 아직도 깨어 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일말의 오기는 있었던지 신하들에게 낙랑을 칠 의향을 묻는다
그러나 누구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없었다 . 중국과 싸울 태세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민중왕은 큰 소리만 치었지 전쟁을 치룰 만한 지혜도 용맹도 없는 무능한 임금이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민중왕은 나라의 위기로인한 스트레스와 주색으로 망친 몸은 병들게 되었고 증세가 악화 되어 등극한지 재위 4 년만에 짧은 기간을 왕으로 있다가 죽고만다

그뒤를 이은 왕이 모본왕이다 이 이가 바로 대무신왕의 태자 이자 호동을 죽음으로 몰고간 왕비의 아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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