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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고인의 긍지                                                      청초 이용분 (7회)

 

며칠 전 부여중 여자 졸업생 모임인 한결회 5월 정기모임을 서울대공원에서 가졌다. 이미 봄 꽃들은 다 져 버렸다.이제 초여름의 신록이 푸르르게 우거진 속에 우리는 반가운 해후를 했다.군데군데 심어놓은 조경 꽃들만이 우리를 의례적으로 반기고 있었다.

점심으로는 언덕위에 있는 어떤 음식점에서 가볍게 갈비탕과 냉면으로 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선후배가 한자리에 마주 앉게 되니 자연스럽게 우리 부고의 내력이 화제로 떠 올랐다. 한결회는 2회의 현석훈선배님이(재미) 주축이 되어서 결성이 되어 운영이 되어 오다가 자연스레 젊은 후배들에게 그 운영이 승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대부고 인터넷 싸이트에서 나를 왕 언니라 부르겠다는 후배들이 있어서 내가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어 버린 것에 대해 당혹해 하던 차였다. 그 모임에서는 한결회장직을 10년이나 하였다는 익히 잘 아는 3회 김명자선배님이 오랫만에 나와 계셔서 나는 그만 `후유` 하고 한숨이 놓였다.

우리 부고가 있기 전 일제 시대때 그 분은 옛날 경성여자사범학교의 제일 막내 입학생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면 전국 각도의 도지사가 한 사람만을 추천해 주는 추천서를 받아야만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도 시험을 아주 잘 치뤄야만 입학이 허용이 되는 아주 엄격한 학교였다고 한다. '오렌지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라는 수필에서는 그 글이 하도 장황하고 길어서 생략했었던 부분이다.

우리 교실이 있는 건물에서 청량대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보면 일제시대 38선이 없던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있던 자리다. 우린 점심시간에 종종 찾아가 양지바른 유리창 앞에 앉아서 급우들과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후에 그곳은 우리 부고 선생님들의 사택으로 쓰여졌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너무나 훌륭한 여러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서양사학을 가르쳐 주셨던 김성익 선생님이 제일 존경스럽고 인상에 남아 있다. 그 분은 그 당시 깡마르고 허리도 어깨 부분이 약간 구부정하셨는데 얼굴은 눈도 크고 아주 미남형이었으며 연세는 좀 많으셨다. 어찌된 영문인지 손가락들이 모두 약간씩 뒤틀어져서 뵙기에는 좀 거북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 손가락으로 칠판에 글씨를 쓰면 한문 글씨가 정말 일필휘지(一筆揮之)라 공부가 끝난 다음에 칠판 지우개로 글씨를 지우려면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아까워들 했던 기억...

그 선생님의 시간이 오면 당번이 낭하에 나가서 지켜보고 있다가 '선생님 오신다'하고 큰 소리로 알리면 일제히 교실 바닥의 휴지는 물론 꼬무락지라도 다 줍고, 책상의 줄도 똑바로 잘 정돈한다. 그 다음 선생님께서 들어 와서 강의가 시작되면 다른 시간엔 마냥 졸던 학생들까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공부보다는 인생에 대한 일장 훈시를 등에 땀이 나도록 긴장해서 듣곤 하였었는데...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그 시절, 그 하시던 말씀들이 나의 한 평생에 듣던 어떤 훈시 보다 가장 감명이 깊었다. 그 선생님 시험시간에는 다섯 문항의 문제를 내어 칠판에 써 놓고 그중 네 문제에 대해서만 논(論)하라 하고 써 놓고 바로 나가서 그 시간에 시험감독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그 시험 문제들을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시험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연필을 꺼내 놓고 깎기 시작하곤 했다. 모른다고 우두커니 앉아 있을수도 없고 백지 시험지를 내어 놓고 일찍 나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시험 감독 선생님이 안 계셨는데도...

책을 몰래 보거나 남의 것을 컨닝할 생각은 아예 안했다.

양반이 얼어 죽어도 곁 불은 안 쬔다던가...
양반은 굶어 죽어도 동냥질은 안 한다던가...
하여튼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낙제 과목 점수가 몇이면 그만 퇴학을 당했다. 어떤 친구는 미술이 전국 미술대회 수상자 감인데도 그런 건 감안이 안되고 그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그 곳에선 닭의 머리가 되어서 다시 돌아 왔다나...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나도 아는 그 친구는 결국 부고를 졸업했다.

내가 본인도 아니고 그냥 전해 들었지만, 우리학교 교육의 목표가 전인교육에 무척 힘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그 시험 시간에 연필만 깎았던 친구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그 친구는 후에 나와 함께 한국은행시험에 합격했던 친구다. 오롯하게 자기의 자존심을 지켰던 그 친구를 지금도 가끔씩 생각한다. 몇해전 이미 고인이 된 그 친구는 생전에 전연 기억을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점이, 그 당시 내가 생각하기엔 바로 우리 부고인의 긍지(矜持)를 지켰던 바탕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런 정신으로 사회에 나가서도 자기의 몫에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다보니 부고 졸업생들이 우수한 인재로 등용이 되고, 부고 졸업생이라 하면 자타가 공인하는 착실한 우수인재로 인정 받게 되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굶어 죽어도 썩은 고기는 안 먹는다'라고 전해 오는 말을 생각해 본다.요즈음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그 생태들이 밝혀졌다. 이제 신비의 베일이 모두 벗겨져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그런 속설(俗說)이 모두 무의미해졌지만 우리 사대부고인들은 그 성품이 모두 호랑이같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명문도 새로 생겨나고 교육제도도 자주 바뀌어서 판도가 달라져 가고 있지만 물려 받은 명문을 잘 지키고 가꾸어서 영원히 빛나게 하는 것은 이제 젊고 유능하신 우리의 후배님들의 손에 달렸다고 본다. 부디 서울사대부고인의 긍지를 되살려서 지속적인 명문 천하부고로 이어져 가도록 다 같이 노력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참고: 현재 한결회는 사정에 의해 잠정 휴회상태다.

2003년 5월 25일 씀. 2009년 8월 10일 다시 씀,

 

 

 

                                                  (재일 가운데 서신 분이 김성익 선생님과 4회 졸업생 앨범에서-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