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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1).jpg

 

 

 

 

"전하 신 최익현이 상소 올립니다 .
신이 처음에 지방관원을 통하여 역마로 급히 상경 하라고 전하의 어명을 급히 받았을 때 신은 외람되이 개인의 사정을 말씀드려 전하의 이해를 받고 서울로 올라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지방의 공식 인편을 통하여 봉해 올린 글이 길에서 지체 되어 제 때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적에는 신중히 하지 못하여 여러 대신들이 꺼리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 전하를 모시고 있는 관리들과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렸으므로 마땅히 신에 대한 어떠한 조치가 있을 것으로 알고 행장을 갖추어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 께서는 하늘 같이 큰 도량으로 신을 포용하며 변변치 않은 신의 말도 기꺼히 받아 들이고 조그마한 질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신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럽고 땅에 구부려 남 보기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뜻밖에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요행 면하고 이렇듯 몹시 외람 되고 분수에 넘치게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저 관직과 봉록이란 나라의 진귀한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공직자로서 적임자를 등용하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의 정사에 오점을 가져오게만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에 어긋나는 만큼 그로 인하여 미치는 폐해는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의 진퇴 문제는 예로부터 청렴과 결백의 공직자의 길을 걸어서 잘못 하였을때는 당연히 그 수치함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자리에 연연하는자가 부지 기수인 것입니다 .
이런 공직자들의 태도를 볼때 그들이 과연 자기들이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지 한심스럽습니다 . 벼슬아치들이 할 일치고 나라의 백성을 잘 살게하느냐 아니냐 보다 더 더 큰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신은 전하의 명령에 따라 응당 벼슬에 나가야 하느냐 마느냐로 무척 고민하였습니다
.생각 해보니 어명에따라 나가지 않아도 공손치 못한 것이 되고,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나가는 것도 역시 공손히 못한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신이 오늘날 저의 입장을 놓고 말씀드리면 면 신은 사실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 사람에 불과 합니다 .
설사 문을 지키고 밤에 경비를 서는 일을 맡아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하물며 호조(戶曹) 벼슬을 내리시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동안 있는것 없는것 구실을 부쳐 세금을 백성들로 부터 마구 받아 내어 지금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은 곤궁을 겪고 있는 이때에 신과 같은 무능한 사람이 잠시라도 그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무턱대고 버티고 있을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호조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높은 벼슬과 부(富)를 사양하고 청빈한 공직자가 되는것은 것은 공직자가 똑 지켜야할 큰 지조입니다.
신은 지난날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적있습니다 .
얼마든지 벼슬할 유능한 사람이 대기하고있는데 이 무능한 사람이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만 냥을 주겠다는 전하에게 오히려 신이 10 만 냥을 차지 하겠다는는 욕심과 같으니 그런 염치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신이 감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연전에 망령되게 전하가 하신 정책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일인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갔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지만 권종록(權鍾祿)의 상소에 의하면 신의 죄에는 마땅히 해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권종록의 상소에의하면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신의 스승인 전 참판(前參判) 이항로(李恒老)선생에게 까지 폐를 끼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어찌 몹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도 감당을 못하고 스승이 당한 호된 모함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차마 얼굴을 쳐들고 나갈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전날에 역말로 신을 불렀을 때 은혜와 총애를 탐내어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 염치와 중정을 잃지않게 예의를 다하지 못하여 대신들들에게 수치를 끼쳤으므로 자숙하고 반성 해 보았자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감히 나갈 수 없는 넷째 이유입니다.

태평했던 조정에서는 신이 한번 올린 상소로 시비가 터져 나와 대신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를 올리고 삼사(三司)도 연합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전직과 직무 없는 관리로 있던 신하들 조차도 신에 대하여 성토하는 것을 보면 신의 죄는 만천하에 명명백백 해 지었습니다 .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자숙하고 있다는것을 가엾게 여겨 이미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 하심으로서 나라가 어느 사사로운 인물의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시고 신도 분수에 맞게 살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벼슬길을 마다 하면서 왜 안나가는지 의견도 아뢰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올리는것입니다 .
전하께서 제가 올리는 글을 기꺼히 받아 들이신다면 역시 신하가 간하는 말을 받아 들이는 전하의 성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전하 지난번 상소 가운데 신이 할 말을 다하지 못한것이 있어서 추가하여 아룁니다 .
요즈음 신에 대한 상소를 보니 정변구장 이륜두상(政變舊章?倫?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자가 있는데 , 이에 대하여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훌륭한 임금이 많이 나오고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나타나 후손에게도 넉넉함을 물려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임금이나 후세의 백성들이 혹 하나라도 소흘히 하면 나라의 장래는 암담에 빠지게 될 것이니 하루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
지금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임금이나 대신들이나 백성들이 나라의 도덕상 지켜야 할사 사람 된 행위의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지 하지 못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자기 권력에만 집착 하고 자기 내키는 대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고치려 들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끝장이 날 것입니다.

대원군 치하에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실정들을 나열 해 보면 첫째 황묘(皇廟)를 없애 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두째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셋째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네째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다섯째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경복궁 토목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을 핑계로 조정이 세금을 마구 걷워 세금이 백성들과 나라에 큰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벌써 몇 해가 되었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선대 임금들의 치적을 모독하고 천하의 의리는 저바리고 윤리를 썩게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전하께 오늘 날의 급선무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우선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 가나를 주시하셔야 합니다 .
청나라나 일본은 신 문명을 받아 들여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강해지려면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를 살리시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교육시켜 야합니다

그러자면 대륙으로 뻗어나간 고구려 기상을 상징하는 만동묘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교육을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다시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교육으로 인륜이 해체 되는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경제를 파탄시키는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세금 덩어리의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 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참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인심입니다.
백성들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라의장래를 키울수 없고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가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산만한 것을 정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백성들의마음을 살피셔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혹시 전하의 용단이 성급하다고 말하는자가 있다면 신은 그렇게생각 하지 않습니다. 어찌 전하의 용단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서원철페가 양반들의 행퍠 때문이라고는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원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교육 기관입니다.
양반들의 행패가 아니라 일부 교육자들이 탈선 한것에 불과 한것을 가지고 전체 선비들을 모독하고 이나라 교육기관을 모두 없애 문맹국가로 만들자는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서원철폐라는구호는 결국 대원군께서 정치적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술책 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상(庠)을 두었으며 주(州)에는 서(序)를 두었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움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는 윤리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냈었다고 봅니다. 지금 아조(我朝)의 성균관(成均館)이 옛날의 국학이며 향교(鄕校)도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은 옛날의 숙상(塾庠)입니다.

예로부터 500가(家)에 한 개 ‘상’을둔 뜻을 미루어 보면 만호나 되는 고을에 겨우 한두 개의 서원을 둔 것은 소략이 매우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둔 기본 뜻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를 밝히는 것이 사실 주된 것이며 시골의 향선생(鄕先生)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 하려는 일은 그 나머지 일이었습니다.

대원군은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서원을 널리 설치하게 되자 겹쳐서 제사지내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이미 세운 것까지 함께 폐지하였습니다 이 서원 철폐는 학교에 관한 옛 제도 취지에 크게 어그러지는것이며 서원을 창건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게 될 것이니, 교육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폐해 지었다는것을 이웃 나라에 까지 비웃음을 받게할수는 없는것입니다.

중국명나라에도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있었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길상(吉祥)의 일로써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

다만 제사를 그만둔 서원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일생을 논하여 덕망도 공로도 없고 음사(淫祠)에 가까운 것은 모두 폐하되, 도덕이나 절의가 한 마을의 스승으로 될 만한 사람은 본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온 나라와 천하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은 주(州)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하여 곳곳에서 높여 제사를 받들도록해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늘 오늘날의 서원은 실효는 없고 폐단만 있다고 하여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매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중국의 자공(子貢)이 희생으로 쓰는 양을 없애자고하자 공자(孔子)가 말 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의를 아낀다.’ 하였습니다.
양이 남아 있으면 예도 회복될 가망은 있습니다 , 마찬가지로 서원을 철폐한다고 보면 학문도 예의도 영원히 살아 남을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올바르게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정사도 거행되는 것이니 서원을 두면 실제 성과는 자연히 있게 될 것이고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른바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소급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에대하여 감히 말씀 드립니다 .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윤리는 천하의 대륜(大倫)이며 이 천지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속된 무리들이 이상한 말들을 퍼뜨렸습니다 . 그런데 전하께서는 사기성이 있는지 정직한지를 묻지않고 충성을 다하는지 역적질을 하는지도 살피지 않고는 그저 죄명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을 다 같이 원통한자를 풀어주고 부끄러운자를 씻어주어 화합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 화합을 하려면 공평(公平)해야 옳은 것입니다.
하늘에 비유하면 비가 오던가 개던가 춥던가 덥던가 하는 것이 각각 때에 알맞아야 야 화기롭다고 하는것입니다 .
사람을 놓고 말하면 기뻐하고 성내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은 연후에야 화기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 오고 개고하는 것이 때를 어기거나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혹 항상 비가 오거나 기쁨에만 치우친다면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화평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원통함을 풀어주고 부끄러운일을 씻어 주어야 해 주어야 화합을 이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통함과 부끄러운 것을 해주지 말아야 할 사람을 해결 해 준다면 그것이 화해를 이끌어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응당 해결 할것을 해결 해 주지 않으면 물론 화합를 손상시키게 되고 벗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벗겨주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해결해 준 사람들 중에서 해결해 주어서는 안 될 자들은 특히 나라의 역적들이며 이 나라의 역적들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한효순(韓孝純)과 이현일(李玄逸)과 목내선(睦來善)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륜(大倫)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뜻에 따라 천벌을 주는 공정한 원칙을 어기면 안됩니다 .
떳떳한 윤리와 도리에 어긋나면 안됩니다 .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시고 법과 의리로 재단하여 용서할 것은 용서하되 마치 화기로운 바람에 단비가 내리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당 죄를 주어야 할 자들은 죄를 주기를 드센 우뢰가 울고 된 서리가 내리듯이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인륜을 세워 화기를 가져 올릴 것이며 만물의 운명을 바로 잡아 많은 복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더없이 다행하게 되고 만대를 두고 더없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중국의 호전(胡錢)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 하건대 . 옛부터 오랑캐들의 물건 매매를 금지하였던 일로 보면 호전을 쓰는 것은 역시 옛적 중국의 신하 노릇이나 하고 첩 노릇한헀던 고려시대 원나라로 부터 당했던 수치를 잊거나 하는데 있습니다 . 중국 돈이 우리나라에 통화 된다는 것은 우리경제를 뒤흔들게되는것입니다

신은 전날에 벌써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할 것을 청한 바 있었는데 오랑캐 돈의 폐해는 당백전보다도 심합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모든 물건들이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돈의 폐해는 모든 물건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마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와 같아서 배를 씻어 내리는 약을 써서 내려가게 하면 전과 다름없이 나아지지만 오랑캐 돈의 폐해는 설사증과 같아서 원기가 날로 빠지는데 그것이 다 빠지면 죽어버리게 되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그렇고 이해관계를 보아도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다시 쓰는 문제는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위의 모든것들은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 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입니다 ,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이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말에 이끌리지 말고 옆에서 아부하거나 교활하거나 무식한 대신들 말에 속지 말며 대신들이 객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합니다 .

명령을 내릴 때는 응당 집행해야 할 것은 과감히 시행하며 응당 제거하여야 할 것은 쇠를 끊듯이 단호하게 잘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대신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 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여야합니다 .
보잘것 없는 신이 비록 시휘에 저촉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천만 번 죽더라도 구구한 광영이 가문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고종은 최익현이 거론한 한효순. 이현일.목내선에대한 반역죄를 물었다 .

한효순은 1610년 (광해군 2) 이조판서때 이이첨과 일당이 되어 반대파를 몰아내고, 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 한후 폐모론을 발의하여 인목대비의 삭호를 주청한 뒤,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1618년 폐모를 실현시켜서 궁에 유폐하게 하였으며

이현일은1694년 4월 숙종때 중전 민씨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만들게한 갑술환국 때 함경도로 유배 되었던자로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 된자였다 . 1871년(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있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 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화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들은 이어서 김수흥 ·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 ·김덕원 ·목래선(睦來善) ·여성제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민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숙종은 장씨를 총애하여 희빈(禧嬪:희빈장씨)을 삼았으며 아들을 낳자 나중에는 왕비로까지 책봉하였다,

서인인 김춘택과 한중혁 등이 보다 못하여 폐비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집권파인 남인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서인 일파를 축출할 목적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그후 숙종은 희빈 장씨가 차차 방자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그를 싫어하고 민씨를 폐한 일을 뉘우치게 되었다
숙종은 김춘택 등의 민비 복위운동을 옳게 여겨, 권대운과 목내선(睦來善)·김덕원을 유배하였다,
동시에 민씨를 지지했던 소론의 남구만,·박세채,·윤지완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최익현은 전날,고종에 상소한 세사람중 한효순은 광해군 시절때 이조판서로 이이첨(李爾瞻)과 일당이 되어 반대파를 몰아내고, 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한후 이듬해 폐모론을 발의하여 인목대비의 삭호(削號)를 주청한 뒤, 이에 반대하는 충신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하고도 버젓이 공신으로 있는 불의(不義)와 숙종때사람 이현일이 중전 민씨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만들게한 죄로 함경도로 유배 되었다가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 된자로 오히려 1871년(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있는것도 불의이며 목래선도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서리를 맞은 김수흥 ·김수항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하게 모함한자로서 불의를 저지른자가 조정에서 공신으로 버젓이 행세하고있는것을 비난하였던것이다


“호조 참판 최익현의 상소문을 보았는데 한효순, 이현일, 목내선의 반역 행위에 대하여 호조 참판이 논의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공론이오. 이 세 죄인의 죄명은 종묘(宗廟) 사직과 관계되는것으로 용서할 수 없는것이므로 모두 파직 하겠으니 그리 아오"
대신들은 이미 지난날의 조정의 일을 그르친자에 대한 파직조치이니 그리 신경쓸바는 아니었으나 당장 자기들에게도 불어 닥칠 소위 "불의(不義)의 바람"이 아무래도 불안하였다
조용하던 조정에 최익현이 들어오자 모두 긴장하였다

최익현을 처벌해야 한다는 대원군 측의 상소가 또 다시 빗발쳤다.

다음날 조회때 왕은 조정 분위기를 의식한듯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지금 호조 참판 최익현의 상소문을 다시 읽어 보니 나를 다그치는하는 어구들이 많았소. 아주 해괴한 일이니, 찬배(竄配....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하라는 처분)의 법을 시행하겠소"

왕은 그 길로 대원군의 하수인이나 다름 없는 대사헌 서당보와 대사간 박선수를 갈아 치우고 김익문(金益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자승(尹滋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대신들은 자기 자리가 불안 해지자 대원군을 찾았으나 대원군은 별장에서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최익현을 처벌 해야 한다는 대원군 측의 상소가 또 다시 빗발쳤다.

다음날 임금은 어전 회의에서 최익현 문제를 두고 고민한듯한 발언을 하였다 '
발언요지는 최익현(崔益鉉)의 전번 상소문은 진실로 옳았다고 전제 한뒤에 어제 올린 상소문 중의 위의 조목들은 채택할 만한 것들이 더러 있었지만 아래 조목에는 왕을 다그치는 말들이 있었다고 말한 뒤 앞에 것은 상과벌을 동시에 줄것이라고 말하였다 .

고종의 이번 전교는 아리송한 전교였다


강관(講官) 조병휘(趙秉徽)가 아뢴다
“최익현이 어제 올린 상소문을 보지는 못 하였으나 그 원본의 요점에 대해서는 대략 들었습니다.
대체로 최익현의 첫 번째 상소는 시골의 소외 된 선비의 처지에서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의견을 아뢰었으니 가상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어구를 전혀 세심하게 택하지 않아서 애매 모호하게 말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일단 시골에서 식견이 없는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올린 상소의 경우에는 심히 도리를 벗어나서 제 멋대로 말을 했을 뿐 아니라 국태공과 임금을 핍박하는 말이 많으니 사람들이 몹시 놀라고 분개하는 마음이 어떠 하였겠습니까?
그가 저지른 죄를 따져 볼 때 그저 찬배(竄配..... 언행을 삼가 하고 조심 하라는 처분) 로 그쳐서는 않됩니다 .”

참찬관 김원성(金元性)이 아뢴다 ,
“최익현의 상소문은 구절 마다 흉악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 치고 간담이 떨리고 뼈가 시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어제 비록 찬배(언행을 조심 하라는 처분)을 내리기는 하시었으나 무거운 죄를 가볍게 처벌 하셨기 때문에 이번 조치는 공론의 억울 함은 풀어 줄 수 없나이다.”
하였다.

이에 고종은 한탄 한다
(또 그놈의 공론 핑계,.......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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