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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1)_0001.jpg

 

 

조선이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일본은 조선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
18 세의 명치(明治)왕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고 천황이라는 이름을 부쳤다 .

일본 메이지 천황은 유신 공신들을 모아 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
이때 조선에 보냈다는 국서가 조선 정부로 부터 거절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
조선 정부에서 일본 국왕의 국서를 거부 하였다는 것이다 .

이유는 관례 대로 조선조정에서 새긴 도장을 대마도 도주에게 주었는데 조선에 국서를 보낼때는 일본국서에는 대마도주가 찍은 도장을 접수 하도록하는 제도를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
그런데 일본은 과거 관례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국서를 직접 조선에 접수하려고 라였다는 것이었다 .
국서를 돌려 보냈다는 말에 일본 조정이 발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

"괫심한놈들....일본을 왜국 왜국 하더니 국서 까지 거부해?"
오쿠보가 말을 꺼낸다
"당장 치시지요"
"아니야 아직 이르다 ,우리 내정이 안정 된 다음 봅시다 "
"그렇다고 그냥 둘수는 없지않소 ?"
명치 천황이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본은 인본 조정이 직접 조선 조정과 외교 관계를 맺기로 하고 대마 도주 경유제도를 없애기로 하는 한편 외무성에서 조선 조정과 다시 시도한후 차후 대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

고종7 년 조선왕국은 대원군의 손 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있었다 .
대원군 이하응의 큰 아들 이재면을 이조 참판으로 만들었고 처가인 여흥 민씨들도 덩달아 벼슬길에오르게하였다 .
민규호가 형조 참판이되고 민치구가 공조 판서로 발령받았다.

영의정이었던 조두순도 75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조정의 돌아 가는 일을 담당한 안필주가 여동생 안상궁을 통하여 급하게 들어 온 정보를 듣고 와서 부리낳게 대원군에게 나타났다 .
"대감 어른 ,급한 일입니다 "
"왜 호들갑이냐?"
"양주 곧은골로 ...."
"양주 곧은 골이 어쨋다는 것이냐?"
"낙향 했던 최익현이가 오늘자로 동부승지로 발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
"무엇이라고?"
대원군은 깜짝 놀랐다 .
"어명인 모양입니다"
"누가 그러든?...."
"안상궁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
".................."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왕이 자기에게 묻지도 않고 정사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였다 .
"어명이 확실 하드냐?"
"확실 합니다"
"어명이라고? 이런 고약한...... 내가 모르는 어명도 있다는 말이냐? "
"대감 어른 너무 흥분 하지 마십시요 "
"당장 대전으로 들어가자"

"대감 고정하십시요 .소인 생각으로는 호조 참판 민승호가 드나 들더니 발령이 난것을 보니까.민승호 참판짓이 분명합니다 "
"민승호가?....."
민승호라면 중전의 오라버니 되는 사람이다 .어쩐지 그동안 민승호의 태도가 이상하였다 .

대원군은 그 길로 대궐로 행차를 서둘렀다 .
대원군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흥분 한채로 임금을 찾았다 .
"상감"
대원군이 목소리가 예상대로 크게 나오자 왕도 결심 한듯 대원군을 바라본다
"상감. 최익현에게 동부승지를 제수 하였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
"나하고 상의 해서 해도 될 일을 가지고 굳이 나도 모르게 발령을 내신 이유가 뭡니까?"
"아버님께 감출려고 그런것은 아니고 제가 데리고 일 할만한 승정원 소속 승지만큼은 제가 직접 임명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미관 말직 승지한 사람 임명을가지고 일일히 아버님께 여쭙기도 그렇고 그래서......"
왕은 얼버무렸다 .

동부승지라면 왕의 비서실 직원이다 .왕은 동부승지는 여섯명의 비서중 맨 나중 비서로 굳이 미관 말직까지 대원군에게 상의해야 하느냐는 말투였다 .

그러나 대원군 이하응으로서는 동부승지야 하잘 것 없는 직위이지만 문제는 최익현이라는 인간이 왕 옆에서 무슨 쓸데 없는 소리를 지꺼릴가하는 의구심 때문에 그냥 두고 볼수 없는 처지였다 .
대원군을 지목하여 상소문을 낸 장본인을 왕이 바로 측근으로 끌어 들이것이 대원군으로서는 괫씸하였다 .
"누가 추천 했습니까?"
"호조참판의 천거도 있고해서...."
"중전도 천거가 있었습니다 "
"예? 중전이?"
"그렇습니다 "
"전하 최익현이는 안됩니다 .먼저 이항로도 그랬지만 역모 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
그러나 고종은 옛날의 고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되겠습니다 "
"예 ? 안되다니요?"
"한번 내린 명령을 걷울수 없습니다 "
"걷을수 없다니요?"

"사람은 한번 써 보아야 합니다.과연 아버님 말씀이 옳은지?"
"그러면 내 말은 옳지 않고 최익현 말은 옳다는 말씀이오?"
"그런뜻이 아닙니다 .옛글에도 임금이 명령을 한번 내리면 쉽게 걷워 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나라의 임금인데 일구이언을 할수 있습니까? "

대원군 이하응은 더 이상 주장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잘 알았습니다 .이 몸물러 가오"
대원군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대궐을 나와 운현궁으로 향하였다 .

다음날부터 대원군은 왕으로 부터의 배신감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
이하응은 이제는 정신이 약간 실성한 사람 처럼 행동하였다
안필주를 불러 영의정 김병기를 운현궁으로 오게 했다
"영상 , 서원 정리는 어느 정도 되었소?"
"진주 충민사 문제가 좀 남았습니다 "
"충민사라면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사당아니오?"
"진주성을 방어한 김시민 장군의 사당을 250 년간이나 내려온 사당인데 이곳 사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제사 지내는것을 금지시켰더니 헌종 임금때 사액 까지 받은곳을 왜 철폐하느냐고 항의가 빗발치듯 합니다.유서 깊은호국의사당을 왜 철폐하느냐 하는것이지요"
"호국의사당 좋아하네 ..... 당장 철폐 해버리시요 .훈련대장 이경하는 뭣 하는거야 .그런놈들 부터 잡아 들여야지"

"하오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 대첩의 공로를 인정 받아 영의정 상락 부원군에 추증 까지된분의 사당을 철페하면 유생들이 들고 일어 날터인데요"
"어떤놈들이 그 따위 소리를 한다는 말이오? "
".................."
"보나 마나 유생놈들이겠지 .그앞잡이 최익현이 같은 놈들......"
"합하 ,최익현이는 충민사와 관련 없습니다 "
"여러 소리 말고 철폐 하라면 하시오 "

충민사는 임진 왜란때 진주성을 방어하고 전사한 목사 김시민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사당인데 창렬사와 더불어 250 년간이나 존속한 유서 깊은 호국을 상징하는 사당이다.
이 사당을 유생들이 제사 지낸다하여 없애라는 것이다 .
최익현을 미워하는 마음이 엉뚱한데로 발동한 것이다 .
어쨋든 충민사는 철폐되었다 .

철페 된후 김시민의 위패는 유생들에 의해 충렬사로 옮기었다 .
대원군 이하응의 말 한마디에 250 년간 유지되어 오던 서원과 사당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게 된 것이다 .
아까웁게도 훗날 충민사터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의식민지로 있을때 진주에 맑은물을 공급한다는이유로 여과지로 물탱크를 두곳이나 세워지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었다
서원철폐후 간신히 남아있던 사당문과 기초석도 흔적마저 없애버렸다 .

대원군 이하응의 이러한 만행은 훗날 일제가 마음 놓고 없앨 구실을 준셈이었다 .
이하응은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임명하는것을 도왔다는 민승호와 중전에 대한 보복의 마음도 움 돋았다 .
왕비가 싫어 하는 완화궁을 배려 하기시작 한것이다
완화궁이란 궁녀 이씨에게에서 낳은 서자이다
완화궁을 대원군이 끌어 않어 민비의 속을 긁어놓을 속셈이었던것이다 .

고종7년 대원군은 충민사를 필두로하여 각지에 남아아 있는 서원 마저 모두 없애라는 특명을 내렸다 .
서원 보다도 유생들이 더 미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동부승지로 발령 받은 최익현은 대원군과 그 일파들이 모두 요직을 점령하고 있는지라 옴싹 달싹 할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
대신들이라는 것들이 대원군의 모두 앞잽이노릇이나하고 임금께 바른말 하는자를 눈을 씻고도 볼수가 없고 대사헌 등 대간들도 옳바른 말을 못하고 대원군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
모두가 간신이요 기회주자들이 대원군의 하수인 역활만 하고 있었다 .

육조에서 정책이라고 내 놓는것도 모두가 옛 것을 베끼거나 수박 겉핥기식 정책자료만을 만들어 대원군의 재가 부터 받아야 했다 .
충신들이 발 붙일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 한다는짓이 백성들로 부터 세금이나 뜯어 낼 궁리나하고있 는 한심하고 무능한 인간들 뿐이었다 . 개혁이라는 말들만 늘어 놓고 속으로는 온갖 사리사욕에만 정신팔린자들만 득실대었다 .

오히려 안동김씨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못하였다 .
임금과 중전만이 이러한 상황하에서 어떻게하면 나라를 바로 잡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붓을 들었다 .
"전하 , 신이 조정에 들어와 보니 대신과 육경들은 대원군의 눈치만 보며 바른 말로 전하에게 한사람도 간하는자가 없습니다 .대간들이라는 사람들도 당연히 대원군의정책이 잘못 되었을때는 시시비를 공정하게 가리어 옳바른 정치를 하게끔 전하를 보필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을 의식하여 직언을 회피하고 있으며 조정대신들이라는 사람들은 무능하여 공리공론으로 날을 새우고 봉록만 축을 내고 있습니다,

충신은 물러가고 별 볼일 없는 자들만이 조정에 남아 백성들의 피땀 어려 벌어들인 돈만 세금으로 걷워 들일 궁리만하고있습니다 .
전하 , 백성은 그들의 먹이 감으로만 생각 하는 이러한 염치 모르는 인간들이 득세하는세상에 어찌 신과 같은 사람이 한솟밥을 먹겠습니까? ....."

다음날 최익현의 상소문은 왕에게올려지었다
"동부승지가 왜 상소문을 ....."
안상궁이 모처럼 왕비와 망중한을 지내고 있는때 왕에게 상소문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 왕도 당황하였다 .
민비는 안상궁에게 상소문을 가져 오라하였다 .
고종이 상소문을 읽는표정을 살피던 중전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전하, 무슨 일이있습니까?"
"이것보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이나 대간들이 모두 과인을 허수아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려"

상소문을 읽어보던 민비가 말을 한다
"하나 틀린 소리 없습니다 . 아버님이 곳곳에자기 사람들을 심어 놓고 전하를 압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
"이런 때일수록 대담하게 조정을 혁파할수 있는 인물이 필요 합니다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두실것이 아니라 육조에 내보내어 무능한 인물들을 점차적으로 갈아 치우도록 하셔야합니다 ,아울러 아버님도 정치에서 손을 떼게하여야 합니다 "

"그동안 최익 현 발령 문제를 두고도 반대가 만만치않았소. 나도 육조로 발령을 낼가 연구중입니다 최익현같은 충직한 인물은 내가 놓지 않을거요"

최익현의 상소는 조정애 당장 큰 파장을 일으키었다 .
대신들은 임금과 대신은 물론 사헌부등 삼사 까지 모독 한것이라며 최익현에게 벌을 주라는 항소문이 잇달아 들어왔다

영의정 김병학은 최익현의 상소문을 읽고 입을 다문채 아무런 반응을 나타 내지 않았다.
대원군의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계원은 항소문을 올렸다
“방금 동부승지 최익현의 상소문을 보니, 대신과 육조의 판서들이 먼저 건의하여야 힐일을 신하들이 아무 의견이 없는데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상소 내용을 보니 나라의 일을 위해 우려하고 탄식 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신들이 잘못으로 생각되오며 , 그 책임도 감히 벗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들은 나라를 위한 계책과 백성들의 걱정 거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아무 대책도 취하지 않고 오로지 그럭 저럭 침묵만 지키고 있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

최익현이 신들을 보고 태도가 모호 하다는 비난과 입들이 없다는 비방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임금은 있으나 신하 같은 신하가 없어서 나랏일이 날로 잘못 되어 간다면 이를 소흘히한 죄에 대하여 신들이 어찌 모르는척 할수 있습니까? 이에 좌우의정이 연명 차자를 올리니, 속히 신들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고종은 자기가 할말을 시원스럽게 최익현 상소문을 통하여 영상들에게 공개한것이 마음에 후련하였다 .
예상대로 영상인 김병학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계원은 약삭빠르게 임금에게 사의를 표 해 본것이다 .사의를 표할지라도 대원군 허락 없이는 자기들의 목을 칠 임금이 못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
사실그랬다 .설사 왕이 자기들을 일방적으로 해임 시킨다해도 대원군이 자기들을 구원해줄것은 뻔하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교활한 대신들이 아버지 대원군을 믿고 그러면서도 엄살 떠는것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
그렇다고 최익현 때문에 영상을 바로 바꾸는것도 문제가 있었다 .
고종은 일단 조정이 최익현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않았다
"어제 최익현이 올린 상소는 충심에서 우러 나온 말이었소.
경들이 스스로 책임 질 일일 뿐이며 과인 역시 여러 문제를 명심하고 직접 실천해야 할 일이오. 그런데 경들이 사표를 낸다면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니 좀지나치지 않은가 생각되오 ? 경들은 잘 이해하오.”

고종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이들의 망동을 일단 불을 껐다 .
다음 날 영돈녕부사 홍순목이 최익현상소와 관련하여 항소문이들어왔다 .
내용은 최익현의 상소문중 영돈녕부사인 자기의 의견도 아닌데 대원군 시책과 대신들의 비위를 들처내어 상소한것이 마치 돈녕부의 의견인것처럼 돈녕부 도정인 최익현이가 상소문을 올려 영돈녕부사를 모독하는 상소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최익현의 상소한 사건은 자기가 돈녕부 도정인 최익현의 상소를 막지 못했으니 그죄를 받고 물러나겠다는 사직서였다.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이럴때는 영돈녕부사를 무시한 상소라는 원칙을운운하는 자들이었다 .
고종은 이번에도 영상들의 사표를 반납 했듯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사표를 반려 하였다

"어제 최익현이 올린 상소에 나온 내용은 사실 경이 스스로 감당한 바가 아니라 생각하오 .
모든 것은 모두 내 자신에게 달린 것인데 경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 사직을 내겠다는거요?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경은 이것을 이해 바라오 .”
교활한 대신들은 왕이 왕역활을 못하는 임금에게 온갖 쑈를 다 부리고 있는 참이었다 .
또 다음 날은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대간들이연서로 항소문이 들어왔다

정언(正言)박홍수(朴弘壽), 사간(司諫) 오경리(吳慶履), 장령(掌令) 김복성(金復性)·김동식(金東軾), 지평(持平) 이인규(李麟圭), 정언(正言) 심동헌(沈東獻)등이었다.

"전하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문을 보니 우리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 죄가 명백해져서 더는 회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생각 해보니 어떤 벌이든 받겠습니다 , 그렇다고 저희들이 상소문의 내용을 논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오나 최익현의 상소문 중에는 의혹스러운 바가 있어 보고 드립니다 .

무슨 일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그것을 논하고 명백히 지적하여 진달한다면 무엇인들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최익현은 조정이 초법적인 행위를 한다느니 떳떳이 지켜야할 도리를 파괴되었다고느니 하면서 근거도 없이 얼버무려 넘기고있으니 그 취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 있는 높고 낮은 모든 관리들을 모두 매도하여 단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에게 고하는 글이겠습니까?

대간과 시종신들의 위법 행위가 있는데도 이를 사헌부와 사간원이 회피한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사실 신들이 잘못했다는 얘기 입니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대간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논핵하는 뜻에서 서로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호소하니, 속히 신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법률로 다스려 주소서.”
대원군 앞잡이 대간들의 진정 내용이었다 .
이번에는 임금이 화가 났다

"경들이 올린 이 상소는 실로 대간의 체통에 어긋 나는 것으로 몹시 개탄스럽소. 경들이 꼭 원한다면 경들이 원하는대로 법대로 하겠소 "
이번에는 다음날 승정원에서도 최익현 상소문에 대하여 자신들을 규탄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

도승지(都承旨) 정기회(鄭基會), 좌승지(左承旨) 이계로(李啓魯), 우승지(右承旨) 이현익(李玄翼),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자승(尹滋承),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운귀(鄭雲龜)이었다 .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문 내용과 관련하여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자신들을 탄핵하였다.
이번에는 왕이 대노하였다
"다른 상소문을 양사에 내려 보낸 지 며칠 되어도 여태 아무 소리도 없다가 지금에와서 오늘 또 책임을 지고 사표낸다고 하니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어디있는가? 정말 몹시 개탄할 노릇이오. 좋소!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법대로 하겠소.”
이들은 왕이 사직을 만류 할줄 알았다가 왕이 자신들의 직위를 파직 하기에 이르자 당황하였다 .
그들은 믿을 곳이있는 운현궁에 반응을기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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