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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0008.JPG

 

마침 별감 양문환이 찾아왔다 .
"어서 오시오"
최익현은 우이도의 유일한 수령인 그를 반기었다 .
"면암 선생님"
오늘 따라 별감의 얼굴이 편치않다
"어디가 아프오?"
"그게 아니옵고 면암 선생을 대흑산도로 정배 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떨어지었습니다 "
"상감께서 그러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
"가라면 가야지 전하가 그러신다면 내가 버틸 힘이나 있겠소?'
"우리 우이도에 계시다가 해금 되시면 돌아 가셔도 좋은데....."

"고맙소 내 별감의 마음은 잊지 않겠소 , 소흑산도나 대흑산도나 귀양 살이 하기는 마찬가지 인데 아무러면 어떻겠소?"
"하오나 대흑산도는 이곳에서도 엄청나게먼 외로운 섬 입니다 "
"어명이신데 거역할수 있겠소? 전하께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음을 닦으라고 다시 정해 주신 모양 이지요"

최익현이 새로 유배지로 결정 된 곳은 목포에서 남 서쪽으로 97.2km 떨어져 있으며, 홍도· 다물도· 대둔도·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 곳이다 .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했다고 한다.
신라때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하고 난 뒤 서 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 섬에 반월성을 쌓은 곳으로도 유명한 섬이다 .

조선 시대인 1678 년 (숙종 4)에는 흑산진이 설치 되면서 나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무안군에, 1969년에는 신안군에 편입 되어 현재에 이르는 곳이다
흑산도에는 높은 산이 눈에 들어 오는데 문암산(400m) 깃대봉(378m)·선유봉(300m)·상라봉(227m) 등이 솟아 있어 섬 전체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선이 복잡하며, 북동쪽에는 비교적 넓은 만이 있다

섬 전체가 홍갈색을 띤 규암질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홍도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속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가 만들어낸 절경이 있으며,천년의 신비가 서려 있다.
또한 울창한 숲과 물이 맑고 투명해 바람이 없는 날에는 바다 속 10m가 넘게 들여다보여 바다 밑의 신비로운곳이다

절경을 이루는 기암 괴석과 맑고 투명한 물과 함께 빽빽이 자라는 나무와 여름철이면 섬을 노랗게 수놓는 원추리꽃이나 이른 봄 섬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꽃 또한 홍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이다.

푸르다 못해 검은 바다를 간직한 섬,흑산도.
흑산도는 그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니 말이다.

최익현은 모든것을 잊기로 하였다 .
귀양 살이가 끝나기는 다 틀린것으로 생각하였다 .
그러니 이 아름다운 섬 생활에 익숙 해질수 밖에없었다 .
그는 대흑산도에 들어 와서는 한 동안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
유배의 섬으로 알려진 대흑산도에도 비록 멀리 떨어진 섬이라 할 망정 앞서 귀양 살이로 왔다 간 선비들이 남긴 제자들이 예외 없이 최익현을 찾았다 .

최익현은 우이도에서와는 달리 점점 깊어가는 가을 밤 해안에 홀로나가 한양 쪽을 바라 보는 것이 버릇 처럼 되었다
(가족들은 별일이 없을까?)
가족들의 얼굴이 그리웠다
(아내도 이제는 많이 늙었겠구나)
평생 나라 걱정만 하며 가정을 소흘히했던 자신이 새삼 부끄러웠다 ,

평생을 자기의 뒷 바라지를 하느라고 고생 해온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
기약 없이 떠나 온 그였다. 다시는 만나 보지 못 할지도 모를 아내를 생각 하니 생각 할수록 눈물 까지 났다
(그래 ,나 자신을 잊자 , )
이렇게 생각한 최익현은 독서로서 외로움을 달랠수 밖에 없었다.이곳도 유배왔다가남기고 간 서적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제자들이 많이 있으니 그래도 외로움을 글로서 달랠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
특히 앞서 유배를 당했던 추사 김정희의 글과 그림은 그의 큰 위안 거리였다
김정희의 제자들이 최익현의 이름을 모를리가없었다

이해가 1877 년으로 고종의나이 26 이고 민비의나이 27세 였으니 70 세의 대왕대비 조씨로 부터도 인정 못 받고 있는 대원군 이하응이 전전 긍긍하고 있을때지만 대흑산도에 들어간 최익현은 모든것을 잊기로하고 전부터 있던 서당에서 거처를 마련하였다 . 지금의 흑산면 진리에 자리를 잡고있던 일신당 (日新堂)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최익현 의지를 담은 많은 글씨를 남기었다. 일신당 이라는 곳은 어린애들의 글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그곳 젊은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전수시키는 장소였는데 현재 옛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위치만 전한다.
다만 현재 일신당 터 앞에서는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이를 마을 사람들은 최익현과 관련하여 서당샘 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

1877 년 대흑산도에 들어가서 1879 년에 유배에서 풀려 나기 까지 그는 서당에서 유학을 논하는 것 외에 육지에 친지들과 서신 교환을 했는데 있는 지금 남아있는 면암집에 흑산도 유배시절에 지은 글들이 자세히 실려 있다.
서당을 열었던 이야기, 지장암에 바위에 글씨를 새긴 이야기, 섬을 둘러 본 풍경에 대한 소감 등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고, 지방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료로 옛 지명에 관한 내용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는 특히 그의 스승인 이항로와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수 있는 기정진(奇正鎭)에게 서신을 띄워 그의 심경을 토로 하기도 했다
그가 기정진에게 쓴 서신은 다음과 같다

기노사(奇蘆沙)님,

지난 겨울에는 저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 주시어 감사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지난번 제가 귀양을 갈 때에, 선생께서 마음이 아팠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몸둘곳을 몰랐습니다 .제가 귀양길에 그곳을 잠깐 들릴수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귀양지인 흑산도에 가기를 독촉 했었기 때문에 자유로이 할 수가 없어 찾아뵙지 못 하였습니다 , 지금 까지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

삼가 듣건대, 선생은 인의(仁義)로서 세상을 제도 하셔야 한다고 늘 말씀 하셨지만 세상은 하수상하여 인의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지 않았사옵니까? , 그 동안 선생께서는 선현의 학문을 계승 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 주어, 나라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는 데도 말씀입니다

이 난세에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 선생이하셨으니 선생의 그런 지극한 정성은 마땅히 하늘도 이를 들어 주시어 큰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
죄인으로 있는 소생(小生)은 부모를 떠나고 임금을 멀리하고서 외로운 섬에 들어와 있어 보니 제 자신이 초라해 보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얼마나 산다고 어찌 백년의 예의(禮義)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참혹하게 무너질 줄 알았겠습니까?
선생님 지금 같아서는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홀가분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날씨가 서늘 하여 졌으니 높은 뜻을 길이 간직하시어 몸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기정진(奇正鎭)은 처음 이름은 금사 이다 아래 하사(下沙)에서 살았다하여 노사(蘆沙)라고 부르는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자질이뛰어나고 영특하며 처세세가 신중함으로 일반의 존경을 받았다.
7~8세에 이미 경서를 읽고 사기(史記)에 능통하였으며 독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라도 순창(淳昌)에서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31 신묘년(辛卯年)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후 평안도도사, 무장현감,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했고 후에 호조참판을 하라고 명하였으나 이것도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성리학으로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등과더불어 성리학의 대가로 통하였다 .
그는 독자적으로 노사의 학설을 호남에 뿌리 깊게 박게하여 그이 학설은 손자인 기우만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위대한 학설로 숭배하여 오고 있다.

흑산도에 지장암 이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이곳에는 지금 최익현이 새긴 글씨가 잘 남아 있다. 유배시절 최익현이 유배지인 흑산도 천촌 마을의 바위에 기봉 강산 홍무 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지장(指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글을 해석 하면 다음과 같다 .

""이 나라의 금수강산은 고조선 시절부터 있어왔고, 이 나라의 해와 달은 조선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는 의미로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립국가라는 표현이다.

이 때 글씨를 새기면서, 바위의 이름을 지장암(指掌巖)이라 새겨 놓아서 지금도 지장암이라고 불린다.
또 그 앞에는 1924년 9월 그의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그의 애국정신과 후학 양성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면암 최선생적려 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가 있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와 같은 수학 동문인 중암 김평묵과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 .외로운 섬생활을 토로한 편지였다

세월이 유수와같은데 내 옷차림은 전과 같으나 소새은 불효자식으로 이섬에서 제 할도리 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기후가 전과 같이 강녕하시고 제절도 두루 평안하신지?
제가쓴 글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지고 전하의 의 노하심을 받아 귀양 길로 이곳에와 제몸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제가 떠난 후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얏잡아보게 된것은 사실 근본을 캐어 보면 한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약한 군사력으로 나라를 지탱하려는 것때문입니다 , 이것은 바로 갈대 하나로 강을 막으려 것 과무엇이 다릅니까? . 다만 지금 조정은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만 있고 나라의 이익에 있어서 득실과 성과에 대하여는 모두가 영점입니다

여러 벗들의 생각과 저와 생각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개인집에 비유하면 우리나라는 당분간  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여서 외부의 날카로운 기운을 우선 막아내고 그 사이에 무기를 연마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공격하면 됩니다.

저는 다시 바다를 건너와서 거듭 위리안치라고 부르는 가시울타리 속에 들었으나, 본인의 한 일은 본인이 책임을 지어야 마땅하니 당연한것으로 마음에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부모가 늙고 자식이 어려서, 봉양하고 응접함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지극히 심란하게 여길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늘이 정한 것이 있으니, 다만 편안히 여길 뿐입니다.
.

이편지를 보낸 상대방 김평묵은 본관 청풍으로 호가 중암(重庵)이다 경기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다 . 1880년(고종 17) 선공감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1881년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한 1만여 명의 영남 유생들의 위정척사상소문 사건 이후 자기도 7월 다시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소(疏)를 초안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고 유배되었으나, 다음해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난 인물이다 . 이항로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홍직필에게서도 배우는 등 학업에 전념한 사람이었다 .
최익현에게는 김평묵 만이 이항로의 동문으로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할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는 유배 중에도 인편을 통하여 그 서로 서신 교환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일수 있었다

최익현이 유배중인때 조정에서는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급격히 가까워 지었다 .
정사에 감기수를 임명하여 75 명이나되는 수신사를 편성하여 일본으로 떠니기로 하였다 .
이제는 일본과의 수신사 교환을 반대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일본으로 수신사가 떠나난 다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술렁대었다 .75 명이나 되는 수신사가 떠난다는 것은 너무 많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조선이 일본과 수교를 맺은지 첫 사신 교환인 만큼 조선의 위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75명이라는 숫자도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
조선의 위의를 갖추는것 말고도 일본이 조선 보다 개화가 되었으므로 일본의 문물을 배우기 위 해서라도 많이 갈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
조선의 사신이 탄배가 5월5일 출발하여 이틀 만인 5월 7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 했을째는 일본의 외무성 직원들이나와 있었다 .

75명의 대 인원을 이끌고 김기수는 거드름을 피우고 큰기침으로 위엄을 보이며 일본 항구에 상륙하였다 ,
요코하마에서 일본 수도인 도꾜 까지는 기차를 타야 했다 ,
생전 처음 타 보는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며 75 명의 수신사들은 어린애 처럼 감탄사를 연발 하였다 .
일본 외무성 직원들의 묘한 웃음 띄우고 있는줄도 모르고.....
기차가 도꾜에 도착하면 사신들이 묵을 도꾜시 금정(錦町)에있는 연료관(延僚館)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

연료관으로 가는데는 가마를 타고 행차하였다 .
도꾜 시민들은 난데 없는 이들의 행렬에 모두 구경 거리가 되었다
연료관에 여장을 푼 이들은 일본왕을 알현 하고 태정대신 ,외무대신, 이베푸는 환영식에서 참석하여 생전 조선에서 보지 못하던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
강화도에 왔던 이노우에가 별도로 주연을 대접하자 모두들 입이떡 벌어지었다 .
제법 흥취가 무르익었다 ,
일본의 기생인 게이샤(妓女)까지 붙여 주었다 .
정신 없이 대접만 보고 며칠이 지났는데 일본인들은 술대접만 하고 있었다 .

이노우에가 김기수에게 묻는다 .
" 수신사 영감, 조선의 사절로 오시려면 몇분만 오시지 웬 인원을 이렇게 많이 데리고 왔습니까?"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오? 전하께서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워 오라고 해서 이렇게 대규모 수신사를 보내온 것이오"
"허, 우리는 조선의 수신사를 모실 목적이 천황폐하와 정계 요직과 상견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실 의도가 있었으면 미리 알려 주실 일이지요 "
"그래서 75 명이라 하지 않았소?"

" 저희들은 대접할 준비만 돼있지 다른 계확은 준비되어 있지않았습니다 "
"허허 .....우리는 귀국의 선진기술을 익히기 위하여 지금 역관을 비롯하여 군관, 화공, 노자, 교자군, 악공 숙수, 등을 데려 왔는데 지금 와서 준비가 안 돼있다 무슨 말씀이요?"
"대감 흥분 하지 마십시요 , 그렇게 많이 오신다고 몇일 안 되는 사이에 얼마나 일본에서 배우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천황 폐하에게 알현하는 것으로 끝내시고 앞으로 차차 조선에 훈련 장교와 기술자를 파견해 드릴 터이니까 너무 화내지 마십시요"

"............"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할일없이 대규모 사절단만 이끌고 일본 유람만 하고 돌아 가는 꼴이니 말이다 .
임금에게 뭐라고 돌아가서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

 요란하게 떠났던 수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실컷 술이나 얻어 먹고 배운 것 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부산포로 돌아왔다 .
수신사 대표로  갔던 김기수가 어전에 복명하기 위하여 대전에 들어섰다 .
"전하 그 동안 일본을 다녀 오느라고 오랫 동안 우럴어 살피 못하여 죄송하옵니다 "
하고 인사를 하였다
"경이 바다 건너 일본 땅 까지 다녀 오느라고 수고 많았소 . 그래,막중한 소임을 수행 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황감 하오이다"
"그래 일행이 다 무고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그래 일본이 많이 발전 하였다는데 어떻소?"
"부지런한 국민들 같았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기차며 별 희한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
김기수는 천황과 몇몇 대신들과 술판에서 기생들과 술만 퍼먹고 왔으니 기차 타고 온것 밖에 생각이 날리가 없었다 .
"우리 기술자들이 뭐좀 배워좀 왔소?"
"예. 전기라는 것이 있는데 불을 키면 우리 등불 보다 백배나 더 밝았습니다 .이번에는 보고만 왔습니다 "
전깃불 밑에서 기생들고 술만 퍼먹었으니 그 전등 설명이란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웠다
"허 그런 것이 있소?"
"아까 기차 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떤것이오?"
" 뱀모양으로 기다란 수레를 끌고 달리는데 그 힘이 대단하였습니다 ."
"그게다 서양에서 배운것이라며....."
"그렇습니다 . "
"허허 ,참 우리나라도 정말 정신 차려야겠소 . 늦기는 했지만 일본에 수신사를 자주 파견하여 우리도 배워야겠구려"
"지당 하신 말씀인지 아뢰오"
왕과 김기수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

수신사를 파견 하느라고 엄청난 돈을 써가며 일본에 다녀 왔다는 것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
그런대로 거침 없이 받아 넘기는 김기수의 달변에 임금은 아무 소득도 없이 다녀온 그를 오히려 격려하는 것이었다 .
나랏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이 가엾은 임금과 간교한 신하들은 어떻게 나라 재정이 돌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애타는 것은 돈을 마련 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호조가 바쁘고 애꿎은 백성들은 다시 조정의 세금 공세에 시달려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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