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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사적지이자 국가 명승, 그리고 임진왜란 유적지인 해남 대흥사

 두륜산의 위용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흥사는 대단한 풍경을 자랑하는 사찰이다.
 대흥사 일원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도로명주소 : 대흥사길 400)
 대흥사 입구, 여느 절에서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표지석 하나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표지석은 '해남군 도로명 관광안내도' 설치판 아래에 있는데,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5.18민주항쟁 사적지- 대흥사 여관터'!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 이곳 대흥사는 여관이 많아 5.18 시민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였다.
당시 시민들의 탑승 차량 7∼8대가 광주여관, 안흥여관(지금은 없어짐),
 유선여관에 도착, 이곳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곳 주민들은 5월 22일 아침 광주로 향하던 시민들에게
 김밥과 음료수 등을 지원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뜻을 함께 했다.'

 서산대사의 창의

1592년(선조 25)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
조정에서는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묘향산에 있는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불러 중을 모집하여 군대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總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돕게 하였다. 
또 휴정은 격문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의 유정(惟政)과 호남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승군은 제대로 접전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일을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을 의지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의승군(義僧軍) 총대장 서산대사의 유물과 부도가 남아 있는 사찰답게
 이곳은 후대인들도 민주화를 위해 뜨겁게 일어섰구나, 싶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물론 대흥사는 국가 사적 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명승 66호로도 지정되어 있다. 
명승은 '경승지로서 예술상, 관람상 가치가 큰 곳(문화재청 누리집)'이다.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대흥사 안내판도
 '대흥사는 백제 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해남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로 글을 시작, 대흥사 일원이 명승으로 지정된 근거부터 설명한다.

문화재청은 전국 109곳을 명승으로 지정했다. 
그중 사찰과 관련되는 명승은 경북 울진 불영사 계곡,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장성 백양사 백학봉,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 법주사 일원, 해인사 일원, 화엄사 일원,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 구례 오산 사성암 일원 등 모두 11곳이다. 
사찰들이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에 많이 세워졌으리라는
 선입견을 감안하면, 11곳은 생각보다 적은 숫자이다. 
아무튼 대흥사는 11곳 사찰 관련 명승지 중 한 곳이므로
 절에 깃든 역사와 더불어 눈부신 경치까지 함께 감상하는 것이 좋다.

 대흥사의 보현전과 문수전 사이로 보이는 두륜산의 모습

명승 설명에 이어 안내판은 대흥사의 이름과 창건 시기,
 사적으로 지정된 까닭에 대해 해설한다. 안내판을 읽어본다.

'(대흥사는)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으나,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과 관련해서는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13대 종사(宗師)와 13대 강사(講師)가 배출되면서
 (대흥사는) 선(禪)과 교(敎)를 겸비한 팔도의 종원(宗院)으로 자부하였다.'

그 후 대흥사는 1789년에 이르러 정조대왕으로부터
 '表忠祠(표충사)' 편액을 하사받아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게 된다. 
정조가 직접 붓을 들고 '表忠祠' 세 글자를 대흥사로 써서 보내어
 서산대사를 기리는 사당의 현판으로 걸게 한 것이다.

 대흥사의 대웅보전. 보통의 절은 대웅전 등 중심 법당이 사찰 경내의 가운데에 위치하지만
 대흥사는 특이하게도 대웅보전이 경내의 (들어가면서 볼 때) 왼쪽 구석에 있다.
 이는 사찰의 규모가 커지면서 천불전, 표충사 등의 부속 건물들이 한쪽에 계속 증설된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대흥사의 사찰 경내는 북원, 남원, 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과 응진당, 삼층석탑(보물 320호) 등이 있고, 
남원에는 경주 옥돌로 만든 천 분의 부처님(유형문화재 52호)을 모신
 천불전(유형문화재 48호)과 용화당(유형문화재 93호) 등이 있으며,
 별원에는 표충사(기념물 19호), 대광명전(유형문화재 94호),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그리고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30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301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1347호) 등의 성보 문화재가 있다.

대웅보전이 남원에 있다는 설명은, 대흥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
 사찰 경내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남쪽 비탈에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대흥사가 본래 지금의 남원 위치에 대웅보전과 응진당, 그리고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점차 그 오른쪽으로 여러 절집들을 추가하여 짓고,
 또 더 나아가면서 표충사를 건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대흥사를 찾은 나그네는 '두륜산 대흥사' 현판이 걸린
 해탈문을 지난 후 곧장 직진하여 들어가면 안 된다. 
대흥사 누리집 스스로가 자신의 절집 배치를 두고 통상적인
 '가람 배치 형식이 아닌, 자유롭게 배치한 독특한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바를 염두에 두고 답사해야 한다. 
결론을 말하면, 나그네는 해탈문을 지난 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걸어야 한다.

 대흥사의 표충비각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한글판 표지석.
 서산대사비의 내용을 줄여서 한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끝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아'
 표지석을 세웠다는 표현이 있어 독재정권 시대의 구태의연한 정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대흥사는 특이한 공간 배치 탓에 우왕좌왕할 가능성이 높은 답사자들을 배려,
 해탈문 바로 뒤에 '대흥사 참배 순서 안내' 입간판을 세워 두었다. 입간판은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답사하라면서 1시간 걸리는 길과 2∼3시간 걸리는 길, 두 길을 안내해준다. 
그런데 두 길은 모두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동다실을 넣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대흥사 일원은 우리나라 차(茶) 문화를 일으켜 세운 초의선사(1786~1866)가 40여 년간 머문 곳이다. 
선사에게는 다성(茶聖)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선사는 도암면 만덕리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의 10년 등 무려 18년에 걸쳐
 대흥사 인근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24년 연상의 정약용과 깊은 교류를 했다. 
정약용 또한 호가 다산(茶山)인 것으로 짐작이 되듯이,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선구자였다.

 국왕의 임란 관련 편액을 보유한 사찰은 세 곳

안내판의 두 길을 하나로 묶어 본다. 
제목이 '호국대선사 서산스님의 호국 도량, 초의대종사 차의 성지'이므로 그 정체성에 맞춘다. 
그렇게 하되, 가장 간략하게 길을 구성하면
 '대웅보전→ 응진전 3층석탑→ 천불전→ 보현전과 문수전 사이에서 두륜산 감상→
 표충사→ 초의선사 흉상→ 성보박물관→ 동다실'이 될 것이다.

 대흥사 천불전(유형문화재 48호)에는 천 분의 부처님(유형문화재 52호)이 모셔져 있다. 
사진은 천불전으로 들어가는 문 아래 턱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표충사 앞에 장군샘이 있다. 여름이면 시원하고 가을이면 따뜻한 물이 솟는 이 샘
은 해마다 한 번씩 호수의 흐름을 보였는데, 물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지붕 추녀 끝까지 솟구쳤을 때
 받아 마신 어떤 스님이 모든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이후 이 샘의 물은 약을 달이고 차를 끓이는 데에 최고의 물로 꼽혀왔다.

장군수라는 이름은 의승군과 관계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만, 샘 앞 안내판은
 '윤선도가 이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는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길어다 먹으면서 그런 이름이 유래되었다'라고 안내한다.

외삼문인 호국문과 내삼문인 예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표충사와 표충비각이 나온다. 
표충사(表忠祠)는 전라남도 기념물 19호로, 정조대왕이 직접 쓴 '表忠祠' 편액이 걸려 있다. 
그래서 표충사 편액 옆에는 '임금의 글씨가 있는 집'이라는 뜻에서
 별도로 '御書閣(어서각)' 편액을 하나 더 걸어 두었다.

 대흥사 표충사 안에 처영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물론 가운데가 스승인 사명대사의 진영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서
 왜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란 때 많은 업적을 쌓은 사명당 유정 스님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정여립의 난과 서산대사

1590년(선조 23) 4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 : 
향산(香山, 묘향산)의 승통(僧統) 휴정(休靜, 서산대사)도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휴정에게는 저서가 있었는데 문장이 단아하고 대부분 임금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상(上, 선조)은 즉시 석방시키도록 하고 어서(御書)인 당시절구(唐詩絶句)와
 묵죽(墨竹) 한 장을 하사하여 위로한 후 돌아가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불교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에는
 서산대사를 기려 세워진 이곳 대흥사의 표충사와,
 1794년(정조 18)에 편액이 하사된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 그리고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43년(영조 19)에 편액이 하사된 경남 밀양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어서각 현판 오른쪽에는 오래된 비석 둘과, 그 두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두 비석에는 서유린(1738∼1802)이 1791년(정조 15)에 지은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명'과,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이 1792년(정조 16)에 지은 '건사 사적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각 건물은 1860년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

 대흥사의 표충비각(오른쪽)과 표충사.
 표충비각 오른쪽의 작은 표지석에는 서산대사비의 내용이 요약되어 한글로 새겨져 있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이곳의 비석들 역시 비문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 
비각 안에 들어 있고, 눈으로 읽어낼 수 있을 만큼 글자가 선명하지도 않으며,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비각 바로 옆에는 임창순이 원문을 축약한 한글 문장을 짓고, 김병남이 글씨를 쓰고,
 전라남도가 세운 안내판용 빗돌이 1979년에 세워졌다.

 독재정권 시절의 과시용 전시행정이 엿보이는 표충비각

1979년판 빗돌의 끝 문장에는 독재정권 시절의 낡은 구태가 넘쳐 흐른다. 끝 문장의 전문은
 '서유린이 지어 1791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이다.

한문 비석의 내용을 축약하여 한글로 번역하고, 그것을 새긴 작은 빗돌을 세우는 것조차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시행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한글로 쓰인 이 빗돌도 읽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지레짐작으로 말하면,
 아마 이 표충사와 표충비각을 찾은 사람들 중에도 십중팔구는 읽지 않고 돌아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흥사의 표충비각과 성보박물관 사이에 있는 초의선사 동상. 
우리나라 차 문화의 초석을 다진 초의선사는 40여 년 동안 대흥사 일원에 머물렀다.

표충사 외삼문을 나오면 초의대사의 동상이 바로 왼쪽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몇 걸음 앞에 서산대사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서산대사 휴정의 유물(보물 1357호)을 전시하기 위하여 1978년에 문을 연 공간이다.

유물관 안에는 서산대사가 쓰던 바루·칠보염주·신발 등을 비롯하여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서산대사에게 내려진 선조의 교지와 친서, 금병풍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양식의 탑산사 동종(보물 88호)과 조선시대 양식의 태극무늬 동종 등은 덤이다.

 서산대사의 유물을 볼 수 있는 대흥사

이제 대흥사 답사를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면서 돌아나오다가,
 일주문 바로 안에 있는 부도밭을 빠뜨렸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곳은 다양한 모양의 부도가 50여 기나 모셔져 있어
 대흥사의 깊은 역사를 가늠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게다가 부도밭 담장 안 맨 뒷줄 오른쪽에는
 '淸虛堂(청허당)' 글자가 선명한 서산대사의 부도까지 있다. 
1647년(인조 25)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1347호,
 서산대사의 부도를 어찌 놓치고 그냥 돌아설 것인가.

 서산대사의 부도 등 50여 기의 대흥사 부도밭은 이 사찰의 깊은 역사를 말해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서산대사의 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흥사의 천연기념물 173호 왕벚나무 두 그루
대흥사에는 천연기념물 173호로 지정된 왕벚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이곳에 자생한 왕벚나무는 1965년 4월에 발견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일자 강점기 때 일본인 식물학자 소천원일(小泉源一, 고이즈미 겐이치)의 주장,
 즉 일본 왕벚나무가 한국에는 제주도에만 있으므로 제주도의 것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학설이 통용되었다. 
그런데 대흥사 벚나무가 발견됨으로써 이 학설은 부정되었고,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에는 제주도와 해남 땅이 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 오마이뉴스 : 정만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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