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도 / 조선 후기 화가 '조희룡 유배지'

by 이기승 posted Aug 23,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조희룡은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문인화의 대가이다. 
1789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후기 매화도와 묵란도에서
 고유의 화풍을 확립한 화가로, 중국 남종 문인화로부터
 이념미를 배제하고 조선의 감각을 가미한 화풍을 연 인물이다.





조희룡은 장례절차를 둘러싼 예송 논쟁에 휘말려 1851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생활을 했던 장소는 임자도의 이흑암리 마을이다.



유배 초기 임자도의 낯선 환경 속에서 공포를 느꼈던 그의 심리는
 그가 그렸던 그림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섬에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에 애정을 느낀 그는 유배지 오두막집에
 "마나마리 갈매기가 우는 집"이라는 뜻의 '만구음관'이란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임자도 유배 시기 조희룡의 기량은 이론의 정립과 기량의 완숙으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1853년 조희룡은 3년간 임자도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후배 지도와 은거생활을 계속하다가 1866냔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조희룡이 살았던 임자도의 이흑암리 유배 적거지에
 '적거지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조희룡은 임자도 유배시절 예술적 기량을 더욱 꽃 피웠고,
 임자도 이야기를 많은 저술로 남겨놓기도 했다.



조희룡이 임자도 유배시 남긴 글 속에는 용난굴과 관련된 설화가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이 용이 승천한다고 소리치자, 자신도 용 구경을 하기 위해 쫓아나갔더니
 이미 용은 승천하고 난 뒤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굴을 용난굴(용이 나온 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Who's 이기승

19회 이기승 . cima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