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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엘이이에서 서양화 개인전을 연 바 있던 이병응 화백(10회, 동창회 고문)의 삶과 도전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감동적인 기사가 2013년 9월 20일자 미주 중앙일보에 실렸습니다.
아래는 중앙일보 기사를 퍼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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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서 '도전'이란 어떤 의미일까?
101세로 장수한 미국의 유명 시인 스탠리 쿠니츠(1905-2006)는 '꿈꾸고 도전하는 것은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라며 자신의 장수 비결이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됐다고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프라 윈프리에게 도전이란 우리의 삶이 정체되지 않고 새로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신이 부여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올해로 74세를 맞은 아티스트 이병응씨에게 도전이란 어떤 뜻일까?
그는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기쁨" 이라고.
작은 변화 조차 기피하는 나이에 '챌린지'(Challenge)를 기쁨으로 즐기며 도예가에서, 비즈니스맨으로, 사진작가에서 화가로 끊임없이 변신해 온 이병응씨의 '도전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국에서 홍익대학 미대에 들어가 도자기 공예를 전공한 이병응씨가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것은 그가 시도한 첫 번째 챌린지였다.
당시 도자기 공예로는 최고의 명문이라는 대학에서 도예를 배웠지만 그에게 교실과 스튜디오는 항상 비좁게 느껴졌다. 좀 더 크고 넓은 나라로 나가 세계의 공예를 섭렵하고 싶어 그는 늘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꿈처럼 그는 대학 졸업 후 4년 만에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으로 불리던 은행(한국주택은행)에 사표를 던지고 미네소타 주립대학에 도자기 연구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망망대해를 내려다보자 세계 최고의 대국에서 펼쳐나갈 새 삶에 대한 꿈으로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두 주먹을 쥐었다.
"이제부터다. 거침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 보자"
1971년부터 2년간 머물렀던 미네소타 주립대에서의 연수원 교육은 아티스트로서의 예술적 감각과 공예 기술의 시야를 폭넓게 확장시키는 좋은 계기가 됐다. 동양적 감각에 서구식 디자인을 익힌 그는 세계적 도예가가 되기를 염원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벌이에 무 관심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인들이 화초 가꾸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집 차고에서 전공을 살린 '화분' 제조업을 시도해 보았고 소비자들이 동· 서양을 접목한 독특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리스 포터리'(Lee's Pottery)라는 화분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다른 이민 기업인들처럼 그도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실패와 좌절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주먹 쥐어가며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포기란 용납이 안됐다.
자신이 만드는 화분의 견고함과 사군자 등 동양적 이미지가 도안된 독창적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홍보하면서 선셋가의 작은 상점 한 귀퉁이에서 소규모로 화분을 판매해 온 그는 피어 원(Pier 1), 트리프티(Thrifty) 등 대형 체인업소에 납품하게 되었고 미국내 대형 화분 제조업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리스 포터리가 납품하는 곳은 K마트와 월마트 전국 매장을 포함, 타켓과 노스트롬 백화점. 홈 디포 700여 매장은 리스 포터리의 가장 큰 거래처라고 이병응씨는 자랑스러워 한다.
리스 포터리를 미국내 최대 화분업체로 성장시킨 그는 수년 전 비즈니스를 두 아들에게 인계했다.
자신의 본업인 아티스트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우선 사진이 떠오르더군요. 늘 상상을 하면서 디자인을 창작했었는데 사진은 내 앞에 놓여진 실상을 옮겨 담는 작업이라는 것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홍보차 틈틈이 카메라를 들었던 그에게 사진은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피사체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면서 2년을 보냈던 그는 지난해 3월 아씨 마켓 2층에 자리 잡았던 '애지 아트 갤러리'에서 그동안 미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찍었던 풍경과 새, 꽃 작품 50여점을 모아 사진전을 열었다.
그의 예술가로의 회귀를 너무나 반갑게 여겼던 홍익대학 미술대학 동문들이 대환영하며 전시회를 후원, 졸업 후 50년 만에 가진 전시회의 오프닝 리셉션은 하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붐볐다.
그러나 이병응의 도전은 이렇게 끝을 낼 수 없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피사체가 있어야만 작품이 된다는 제한성에 아쉬움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언제나 캔버스에 붓 칠 할 수 있는 그림으로 세 번 째 도전을 시도했다.
홍익대학 후배인 강태호 화가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병응씨는 "마치 무당이 신 내린 듯 했다"고 캔버스에 붓칠해 나가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사진에 이어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 기쁨을 느끼게 되었지요."
어떤 날은 몬테리 팍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 가족들이 '저러다 쓰러지는 것 아니냐'며 의사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사진에 이어 그림 그리기에 도전했던 그는 1년 만에 50여점의 작품을 완성 지난 5월 16일부터 2주간 팍 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을 그리면서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에 가슴 뛰는 경외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염원은 자신의 작품을 대한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받아들여 힘을 얻고 희망을 갖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 흙을 만지며 도자기를 구워 예술혼을 살려온 오래 된 집터 위에 이제 자연이 발산하는 생동감을 아우르는 그림으로 내 예술세계의 집을 짓고자 한다"는 도전 탐험가 이병응씨. 그의 도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시도하는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병상에서 그리는 것입니다."
육신이 병들었을 때 인간의 진솔함과 순수함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는 "솔직히 다음 도전을 나도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그에게 도전은 기쁨이자 희열이지만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이 신비로움 때문에 도전을 즐기는 지 모르겠다"고 그는 활짝 웃는다.
유이나 기자
101세로 장수한 미국의 유명 시인 스탠리 쿠니츠(1905-2006)는 '꿈꾸고 도전하는 것은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라며 자신의 장수 비결이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됐다고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프라 윈프리에게 도전이란 우리의 삶이 정체되지 않고 새로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신이 부여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올해로 74세를 맞은 아티스트 이병응씨에게 도전이란 어떤 뜻일까?
그는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기쁨" 이라고.
작은 변화 조차 기피하는 나이에 '챌린지'(Challenge)를 기쁨으로 즐기며 도예가에서, 비즈니스맨으로, 사진작가에서 화가로 끊임없이 변신해 온 이병응씨의 '도전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국에서 홍익대학 미대에 들어가 도자기 공예를 전공한 이병응씨가 미국 유학을 결정한 것은 그가 시도한 첫 번째 챌린지였다.
당시 도자기 공예로는 최고의 명문이라는 대학에서 도예를 배웠지만 그에게 교실과 스튜디오는 항상 비좁게 느껴졌다. 좀 더 크고 넓은 나라로 나가 세계의 공예를 섭렵하고 싶어 그는 늘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꿈처럼 그는 대학 졸업 후 4년 만에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으로 불리던 은행(한국주택은행)에 사표를 던지고 미네소타 주립대학에 도자기 연구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망망대해를 내려다보자 세계 최고의 대국에서 펼쳐나갈 새 삶에 대한 꿈으로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두 주먹을 쥐었다.
"이제부터다. 거침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 보자"
1971년부터 2년간 머물렀던 미네소타 주립대에서의 연수원 교육은 아티스트로서의 예술적 감각과 공예 기술의 시야를 폭넓게 확장시키는 좋은 계기가 됐다. 동양적 감각에 서구식 디자인을 익힌 그는 세계적 도예가가 되기를 염원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벌이에 무 관심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인들이 화초 가꾸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집 차고에서 전공을 살린 '화분' 제조업을 시도해 보았고 소비자들이 동· 서양을 접목한 독특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리스 포터리'(Lee's Pottery)라는 화분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다른 이민 기업인들처럼 그도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실패와 좌절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주먹 쥐어가며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포기란 용납이 안됐다.
자신이 만드는 화분의 견고함과 사군자 등 동양적 이미지가 도안된 독창적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홍보하면서 선셋가의 작은 상점 한 귀퉁이에서 소규모로 화분을 판매해 온 그는 피어 원(Pier 1), 트리프티(Thrifty) 등 대형 체인업소에 납품하게 되었고 미국내 대형 화분 제조업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리스 포터리가 납품하는 곳은 K마트와 월마트 전국 매장을 포함, 타켓과 노스트롬 백화점. 홈 디포 700여 매장은 리스 포터리의 가장 큰 거래처라고 이병응씨는 자랑스러워 한다.
리스 포터리를 미국내 최대 화분업체로 성장시킨 그는 수년 전 비즈니스를 두 아들에게 인계했다.
자신의 본업인 아티스트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우선 사진이 떠오르더군요. 늘 상상을 하면서 디자인을 창작했었는데 사진은 내 앞에 놓여진 실상을 옮겨 담는 작업이라는 것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홍보차 틈틈이 카메라를 들었던 그에게 사진은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피사체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면서 2년을 보냈던 그는 지난해 3월 아씨 마켓 2층에 자리 잡았던 '애지 아트 갤러리'에서 그동안 미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찍었던 풍경과 새, 꽃 작품 50여점을 모아 사진전을 열었다.
그의 예술가로의 회귀를 너무나 반갑게 여겼던 홍익대학 미술대학 동문들이 대환영하며 전시회를 후원, 졸업 후 50년 만에 가진 전시회의 오프닝 리셉션은 하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붐볐다.
그러나 이병응의 도전은 이렇게 끝을 낼 수 없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피사체가 있어야만 작품이 된다는 제한성에 아쉬움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그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언제나 캔버스에 붓 칠 할 수 있는 그림으로 세 번 째 도전을 시도했다.
홍익대학 후배인 강태호 화가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병응씨는 "마치 무당이 신 내린 듯 했다"고 캔버스에 붓칠해 나가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사진에 이어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 기쁨을 느끼게 되었지요."
어떤 날은 몬테리 팍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 가족들이 '저러다 쓰러지는 것 아니냐'며 의사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사진에 이어 그림 그리기에 도전했던 그는 1년 만에 50여점의 작품을 완성 지난 5월 16일부터 2주간 팍 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을 그리면서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에 가슴 뛰는 경외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염원은 자신의 작품을 대한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받아들여 힘을 얻고 희망을 갖는 것이다.
"반세기 동안 흙을 만지며 도자기를 구워 예술혼을 살려온 오래 된 집터 위에 이제 자연이 발산하는 생동감을 아우르는 그림으로 내 예술세계의 집을 짓고자 한다"는 도전 탐험가 이병응씨. 그의 도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시도하는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병상에서 그리는 것입니다."
육신이 병들었을 때 인간의 진솔함과 순수함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는 "솔직히 다음 도전을 나도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그에게 도전은 기쁨이자 희열이지만 미스테리이기도 하다.
"이 신비로움 때문에 도전을 즐기는 지 모르겠다"고 그는 활짝 웃는다.
유이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