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LA의 올림피아 양로병원에 계신 이인영 선배님에게 최근 희소식이 있었다.
20여년 동안 괴롭혀 왔던 높은 혈당수치가 100 이하까지 떨어져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건강을 많이 회복하시었다. 시력을 거의 잃을 뻔한 위기에서 매일 7번 정도의 인슈린 주사와 본인의 끈질긴 식사 조절과 관리, 그리고 간호사등 주위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신다.
그동안 당뇨로 눈이 많이 상하여 12월 4일 녹내장 수술을 받으신다.
병원에서도 늘 동창회와 동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난번 이사회비와 선농합창단 후원금을 선뜻 내어주신 이 선배님은 우리 동창회와 모교의 산 역사이시다. 마치 인쇄된 역사서처럼 과거 우리 모교와 이곳 남가주동창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건의 장소와 이름을 죄다 기억하고 계신다.
최근 알려 주신 모교 합창단의 원조 이야기 – 본인이 앨토 파트를 맡았던 최초의 서울사대부고 혼성합창단이 육이오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공연한 적이 있었고, 우리 모교는 미션 스쿨은 아니었지만 당시 이맘때 쯤이면 크리스마스 캐롤을 애써 연습하여 최동희(바이얼린 주자) 음악선생님의 지휘로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영락교회등 그 당시 가장 큰 교회에서 공연한 바 있다고 한다. 또한 합창단내에 사중창단도 있어 우연히 모두 2회인 현석훈(바리톤 현재명씨의 여동생), 서보영, 안정희, 이상진등 네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지난 9월 27일에 있었던 선농종합예술전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내보내 주지 않아 카탈로그에 인쇄된 작품들만을 보시고 너무 감탄하시었다고 한다. 특히 서예 작품을 좋아 하시어 출품하신 최신정(5회, 정신의 박사) 동문에게 전화를 드리고 격려해 주시면서 축하인사를 전해 주셨다고 하신다.
20여년 동안 괴롭혀 왔던 높은 혈당수치가 100 이하까지 떨어져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건강을 많이 회복하시었다. 시력을 거의 잃을 뻔한 위기에서 매일 7번 정도의 인슈린 주사와 본인의 끈질긴 식사 조절과 관리, 그리고 간호사등 주위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신다.
그동안 당뇨로 눈이 많이 상하여 12월 4일 녹내장 수술을 받으신다.
병원에서도 늘 동창회와 동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난번 이사회비와 선농합창단 후원금을 선뜻 내어주신 이 선배님은 우리 동창회와 모교의 산 역사이시다. 마치 인쇄된 역사서처럼 과거 우리 모교와 이곳 남가주동창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건의 장소와 이름을 죄다 기억하고 계신다.
최근 알려 주신 모교 합창단의 원조 이야기 – 본인이 앨토 파트를 맡았던 최초의 서울사대부고 혼성합창단이 육이오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공연한 적이 있었고, 우리 모교는 미션 스쿨은 아니었지만 당시 이맘때 쯤이면 크리스마스 캐롤을 애써 연습하여 최동희(바이얼린 주자) 음악선생님의 지휘로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영락교회등 그 당시 가장 큰 교회에서 공연한 바 있다고 한다. 또한 합창단내에 사중창단도 있어 우연히 모두 2회인 현석훈(바리톤 현재명씨의 여동생), 서보영, 안정희, 이상진등 네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지난 9월 27일에 있었던 선농종합예술전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내보내 주지 않아 카탈로그에 인쇄된 작품들만을 보시고 너무 감탄하시었다고 한다. 특히 서예 작품을 좋아 하시어 출품하신 최신정(5회, 정신의 박사) 동문에게 전화를 드리고 격려해 주시면서 축하인사를 전해 주셨다고 하신다.
그런데 불과 2년 학년차이라도 어느부분의 기억은 확연히 차이가 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고...사실 우리 어릴때 그리고 자랄때 나이의 1년차이란게 여러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2년차이라면 굉장한 차이가 나지요.
6.25때 까지는 이인영 선배님은 나보다 2년 선배이셔서(3회와 5회), 거의 모교 전반에 관한 기억에 공통점이 많고 또 어떤 부분은 내가 전혀 모르는것도 기억하고 계시기도 하고....
그런데 위 최영일회장의 글중 두가지 정정할게 있읍니다.
최동희선생과 또 합창단 창단에 관한것입니다.
어느 글에서던가? 내가 우리 모교 합창단에 관한 회고를 썼던적이 있는데요. 내가 부중 2학년때, 즉 이인영서배가 4학년때, '흘러서 그침 없는...' 으로 시작되는 모교교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당시교장(2대) 최복현선생님의 작사, 당시 최고 작곡가 이셨던 나운영선생의 작곡으로 교가가 만들어 졌고, 그래서 교가발표회를 열기 위하여 처음으로 모교 남녀학생 혼성합창단이 만들어졌읍니다. 그리고 짧은 시일에 최동희음악선생님의 맹훈으로 드디어 내외 귀빈들 문교부 서울대 그리고 사대 중요교수님들을 모시고 발표회를 가졌읍니다. 왜 내가 이런 사항을 잘 아는고 하니 바로 내가 그 합창단단원으로 있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1학년(6년제)은 현6회이고요, 최고학년 6학년은 제1회선배님들이십니다.
그리고 당시(6.25전까지) 음악선생님은 세분이 계셨는데요, 원래 을지로5가의 남자부 부중에 김순용선생, 용두동 여자부에는 이경팔선생이 계셨고, 내가 부중 1학년 2학기 시작하자마자 남녀공학으로 결정, 남자부가 역사적인 대이동 거행(자세한 것은 여기 '남가주동창소식'에 재연재를 막 마친 졸작 '모교의 발자취'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선생이 두분이 되셨는데, 용두동 남녀합동이 무사히 매듭지어진 후에 새로히 최동희선생이 부임하셨는데, 그때가 내가 부중2학년이고 이인영선배는 4학년때였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바이올린주자가 아니고 성악가(테너)이셨습니다. 일본에서 음악학교 수학하시고 테너가수로 활약하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 이경팔선생은 말 할것 없고 김순용선생도 피아노를 잘 치셨습니다. 그런데 최동희선생은 거의 못치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 강당조회때 교가제창할때 이경팔선생이나 김순용선생이 그 조회에 참석 안 하셨을때는 교가 피아노반주는 의당 남은 음악선생 최동희선생 담당이였는데요, 삥땅 띵똥 전혀 음정도 안 맞는괴상한 소리만 내셔서 최복현교장 이하 앞에 도열한 여러 선생님 위시해서 모두들 눈쌀 찌프리고, 그런데 사실 우리 학생들도 "어째 저런 사람이 음악선생이냐?!" 했었는데요, 당시 우리 생각에는 음악선생이라면 의당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줄 알았지요. 그래서 최동희선생 차례가 되면 두번에 한번은 "야... 정순빈. 네가 대신 쳐!" 그러셨는데요. 정순빈선배는 몸집이 작고 유독 수줍음 타는 미녀 학생으로서 나보다 1년 선배, 피아노 재원이고 서울음대주최 음악콩클에서 피아노 1등을 했었지요. 그리고 여기 사시는 임춘원선배(2회)는 클라리넷 1등 하셨고요. 정순빈선배는 뉴욕에 사시는걸로 알고 있으나 근황은 모릅니다.
이런 나의 의견을 최영일회장이 기회 있으시면 이인영선배께 전해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