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지회 소식

기별/지회소식

조회 수 119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모교의 발자취 4: 1966(18)이후

 

: 이완규(6)

 

(등장하는 인물은 가능한 한 실명으로 기재하고 경칭은 생략한다)

 




머리말


이 연재도 절반을 넘어 섰습니다. 회를
거듭할 수록 절감하는 사실입니다만
, 이러한 동문들의 모임을 자주 만들어서 그때마다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이게 바로 우리들의 꿈 많던 소년 소녀 시절의 추억인 동시에 우리들 자신의 역사가 아닙니까.


이번에도 출석 약속을 하고서도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동문이 여럿 있었으나, 그래도 이번에는 19회부터 31회까지의 동문들이 골고루 참석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특기할 사실은, 바로 이 좌담회 직전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바로 전날 장례식을 치르고 또 사전에 필자에게도 그러한 연유로 참석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연락까지 해주신 강태완 동문
(31)이 그 경황 없는 중에도
부랴부랴 이 좌담회에 참석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 이것이야 말로 모교와 우리 동창회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또한 2주간의 북유럽여행에서
전날 귀가한 권중건회장
(17)이 여독이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각에 나타나서 이 모임을 주재함으로 솔선 시범하여 우리 동창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


또한 후배 하나를 잘 못 둔 연유로 해서 바늘 가는데 실 가듯(?) 필자를 항상 받쳐주시는 회보 발행인 이중희 선배님(2)이 이 날도 후배들 틈에 앉아서 토픽마다 꾸준하게 화제를 유도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교포사회의 여러 가지 봉사기관에 관계하면서 그야말로 촌가도 없는 입장에 동창회 이사장과
회보 편집인의 중책을 맡아서도 불평 불만 한 마디 없이 항상 모임에서 분위기를 잡아주고 살려주는 이길주 동문
(16)이 이번 좌담회에서도 동문들의 화제를 잘 이끌어 주는 조타수(操舵手) 역할을 해주신 데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부부동문



사실은 이 토픽은 이번 좌담회용으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석자들을 소개하면서 이길주
(16)가 윤재옥(27)에게 “배우자도 준회원이니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기탄없이 말해 달라”고 선심을 썼는데,
이는 그녀가 정봉철(27)의 부인이라고 소개된
때문이었다
. 그러자 윤재옥이 대경실색, 분연히 “저도
27회예요!” 해서 폭소와 더불어 이 날의 첫 화제가 ‘부부 동문’으로 시작이 되었다.


“아니, 이 사람들 학교 때 공부는 안하고
연애만 했어요
?” 라는 필자의 핀잔에 부군 정봉철 왈 “아닙니다. 저희는
얼굴은 서로 알았지만 훨씬 나중에 교제한 겁니다
. 그리고 우리 동기에도 남녀 동기생과 결혼한 커플이 다섯
쌍이나 됩니다” 해서
, “해도 그건 너무 했다”는 이길주의 지적에 만장의 폭소를 자아 냈다.
' 27회 말고도 남녀 동기생간의 결혼이 비일비재하며, 선후배 관계로서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는 이야기에, 필자가 힌트를 얻었다. 이 ‘모교의 발 자취’ 연재가 금년이면 끝나므로 내년부터는 이 곳의
남녀 부부동문들의 특별 탐방기사를 기획연재로 한다는 것이다
. 이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말했더니,
“우리 남가주에도 누구 누구...” 하면서 부부동문 이름이 무수히 거명된다.


 

부부동문 특히 남자동문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어부인 동문'의 환심을 사도록 각별히 노력해서, 우리 편집위원이 탐방을 가면 부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이시도록 지금부터 그 비결을 드립니다
. 그 비결: 결혼기념일과 부인의
생일 아침에는 반드시 꽃을 부인에게 안겨 주고
, 그 날 밤 분위기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서 데이트 했던
시절의 기분을 되 살리도록
.





모교의 유전기 (流轉記)



천하의 명문교가 한 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집시’ 처럼 이곳 저곳을 유랑했다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지만, 실은 필자 자신도
1947 4월에 서울 을지로 5가 교사에서
5회로 입학하고 같은 해 9월에 성동역 바로 옆의 용두동 교사로 이전한 후,
전란으로 부산에서 일년 늦게 6회로 복학하고 나서 1953년 가을에 정부의 서울 환도와 함께 부산 임시 본교가 서울 임시분교가 있던 옛 교사 용두동으로 복귀하여 1954 3월에 그 곳에서 졸업 한 후로는, 모교의 유랑(流浪) 역사 그리고 현재의 종암동 교사로 정착이 된 역사를 전혀 알지를 못하였다.
이번 연재 ‘모교의 발자취’를 기획하는 동안 관련 서적들을 들치면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모교가 이전될 때마다 그 당시의 현장에 있던 동문들의 증언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1947년의 모교(남자부)의 ‘을지로 5가에서 용두동’으로의 이전 이야기는 제1회에서 언급이 되었고, 1954년의 ‘용두동에서 다시
을지로
5가’로의 이전 이야기도 제2회에서 소개되었다.
이번 회에서는 ‘을지로 5가에서 청량리’로, 그리고 ‘청량리에서 현재교사 종암동’으로의, ‘인생유전기 아닌 모교유전기’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 (아니, 이건 옛날의 신파극(新派劇) 제목 같네!)


용두동 교사에서 을지로 5가 교사로 재 이전 된지
14년만에, 구 경성제국대 예과이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이학부 자리였던
청량리 교사로
1967 5 26일에 이전하여 6 7일에 서울대 총장,
대학원장 및 사대학장 등 내빈을 모시고 정식 이전식이 거행되었다. 그 당시의 을지로
교사는 그 대부분을 미
8군이 사용 중이었으므로 딴 곳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 당시 서울
문리대 이학부가 이전하여 교사가 비어 있었으므로
, 그런 연유로 해서 청량리 교사로 이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했던 박영훈(21)이 고2
때 그리고 김동윤(22)이 고1 때였는데 박영훈의
일년 후배인 김동윤이 그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했더니 실은 자기
(김동윤)는 박영훈과 입학동기였는데 고1을 두 번 다녔다고 한다. 자신도 그 연유를 안 밝혔고 또 아무도 묻지를 않았는데 설마 천하 명문교에 입학했던 영재가 공부 못해서 낙제 했을 리는 없고...
대화 중에 학교 이전이 1967년이 아니고 68년이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그러나 햇수를 따져 보면 ‘서울師大附高 半世紀史'(1995년 간행)에 기술된 1967년이 맞는 것 같다.


 

박영훈과 김동윤이 증언한대로 그 당시의 청량리 교사는 그야말로 도깨비라도 나타날 정도의 폐허였고 넓은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 전체 학년의 체육시간은 아예 잡초 뽑는 일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낡은 건물을 이용하여 영화의 ‘로케’ 장소로 쓰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1965년도에 청량리에 살던 정봉철(27)은 국민학교 재학 중으로 바로 그 뒤켠에 살았었는데 어른들이 아이들의 접근을 금지했을 지경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에 이 교사의 황폐한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나 당시의 후배들은 우리 선배들처럼 책걸상을 짊어지는 이사행진은 안 했다고 하니,
과연 어느 쪽이 더 편 했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낡은 교사는 남학생용으로 사용되고 여학생용 교사는 신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토픽에서 조수호(23)와 이매자(23)는 ‘꿀 먹은 벙어리’였던 것이 의아했다.
이 글을 쓰면서 연대를 계산해 보니 그럴 수 밖에... 을지로 교사에서 청량리 교사로
이사 갔을 당시의 재학생은 고
3 20, 2 21, 1 22회였고, 청량리 교사에서 현재의 종암동 교사로 이사 갔을 당시의 재학생은 고3 24, 2 25, 1 26회였으니, 하필이면 바로 그 한 복판 23회만 쑥 빠진
그들은 말하자면 무임승차한 셈이다
(얄미워라!).


 

1971 11 6,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 에 의하여,
관악 캠퍼스 건설 재원 확보 책의 일환으로 청량리 교사가 매각되고, 그 당시 종암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 운동장 남쪽에 임시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 바로 이것이 현재의 모교(부고)이다. 당시 고2였던 차학송(25)이 그 일의 증인이었고, 자기들도 책걸상을
들쳐 매는 이사 행진은 안 했다고 한다
.?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모교 유전기’는 ‘부고(남녀)’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위의 과정에서 ‘부중’이 ‘부고’와 분리되고 또 다시 ‘부중’과 ‘부여중’으로
분리 되어 현재에 이루고 있다
. 그런데 필자가 여기까지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기술하는 데에도 머리가 핑핑
돌아서
, ‘부중’ ‘부여중’ 의 ‘유랑방랑기’까지 밝히는 것은 기력도 부족하므로, 이 토픽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하겠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동문께서 의당 “그러면 모교의 관악 캠퍼스 이전은 어찌된 거냐
?” 하시리라. 그 설명은 아래 이중희 동문(2)의 ‘모교 방문기’에
나온다
.




이중희(2, 서울공대섬유과 출신) '모교(서울사대부고) 방문기' 중에서

... 강연이 시작되기 전 교장실에서, 교장,
교감, 과학부장, 그리고 나를 도우러 동행
했던 청암회원동문들과 함께
- 서울6회동기회장 최남석(서울공대화공과), 최순평(6, 서울공대섬유과), 조진호(6, 서울공대전자과) 및 이완규(남가주동창회보주필,
서울공대건축과) - 우리 사대부고가 관악의 서울대학교 캠퍼스에 지금껏 못 들어 가는
이유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다
. 강사민 당시 교장(2008
2월에 정년 은퇴하여 그 후임으로 현 김현중교장이 부임)의 이야기인즉,
첫째 예산부족, 둘째로 서울대 시설확장 및 발전계획에 말단기관인 우리 부중고가 항상
뒤로 밀리거나 누락된다는 것
, 셋째 주무부서인 문공부의 무관심이 주원인이지만, 마지막으로 모교가 위치하는 자치구 주민들이 현재의 장소에 남아 있기를 강력히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녔을 때의 전국 4대 명문교의 하나였던 과거의 영광은 지금은 아예 그 잔재도 없지만,
그 나마도 이 지역의 명문교로서 주민들의 이전반대가 크다는 것이다.?

안타까웠던 것은 과거 청와대와 입법기관(국회) 그리고 여러 관련 행정부에 우리 동문들이 포진하고 있을 때 이 절호의 기회를 미리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강교장의 희망은 몇 년 안에 서울대가 법인화 된다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때나 돼야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비관적인 견해였다
.




여기에서 재미 있는 이야기 한가지

25회와 26회에 해당하는 부중 남녀 학생들이 부중과
부여중으로 분리되는 바람에 본의 아닌 이산가족이 되었는데
, 종암동 부고로 진학하면서 이 남녀 학생들이 다시
한 교사에서 배우게 되어 그야 말로 이산가족 재결합이 되었다는데
... 가만 있자? 서두에서 정봉철(27)이 동기끼리 결혼한 사람들이
5쌍이나 된다고 했지. 그럼 상식으로나 통계적으로 볼 때 25회와 26회에서 동기끼리 결혼한 수효는 틀림 없이 27회 보다 많을 것이겠다. 한번 알아봐야겠네.





25회 졸업반의 동맹휴학 (同盟休學)



드디어 특종(特種)을 낚았다

‘모교의 발자취’ 제1회에서 ‘6회 졸업반의 졸업거부 사건’ 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6회 졸업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오프 더 레코드’ 로 전해 내려 오면서 모교의 어떤 관련 서적에도 기술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그 날 좌담회에서 차학송(25)이 필자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또 다른 토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있었으므로 차학송과 필자만 대담을 한 것처럼 되었지만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토픽으로 나오는 ‘스승들 이야기’ 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우리 후배들이 재학했을 때는 교사들의 체벌(體罰)이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 사실 6.25 전만 하더라도 선생이 학생을 때린다는
것은 있지도 않았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기껏해야 출석부로 학생 머리를 가볍게 때리는 정도였고,
수업 중에 떠드는 학생이 있으면 교사가 교단에서 그 학생을 향하여 쓰던 백묵(분필)을 던지는 정도였다. 그야말로 인격과 실력이 출중하신 스승들이었고 또 우리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 교육을 받았다
.



각설하고, 차학송이 고3 때로 학급의 반장이었는데, 유독 몇 명의 선생들은 특히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다고 완력을 휘둘렀고,
어떤 때는 반장이었던 차학송이 대표로 맞게 되어 교단 바로 앞에서 맞기 시작하여 낭하(복도)로 밀릴 때까지 계속 때리는 선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날 이 선생의 실명이 거명이 되었으나 여기서는 안 밝힌다. 이러한 체벌 및 기타 여러 가지
불만 등이 표출하여 드디어 고
3 전체 학생이 교문을 뛰쳐 나가고 3일간을
동맹휴학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1972 6월의 일이었다.
그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학원 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공포하고 또 위수령을 발표하는 등 국가비상사태
시기였으므로 교장
(당시 김영기교장) 이하 교직원들이 혼비백산했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


물론 공권 기관이 이 사건을 캐치 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어쨌건 간에 학교측의 강경책으로 주모자인 2명이 퇴학 당하고 3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당시의 고3 학생들도 이제 평균 53세가 되었다. 그 당시를 회고해
보면 그 비상시국에 그러한 극단적인 행동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방법의 집단의사 표시도 있었을 것으로 지금 와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앞길이 구만리같은 소년들을 상대로 ‘사형’ 과 ‘무기징역’
이나 마찬가지의 형벌을 주모자 몇몇 학생들에게 가하여 마무리를 지은 것은 원인을 제공한 교직원 자신들의 보신책에만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
교육자로서의 올바른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재일교포 2세 교육



서울대학교 재외국민 교육연구소에 소속되었던 재외국민(재외교포)의 ‘고등학교 예비과정부’가 문교부 지시로 1973년에 모교 서울사대부고로 이관되었고,
이 예비과정을 수료한 학생은 자동적으로 부고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당시 재일본 거류민단 간부이며 재일교포 실업가였던 인사가 모교를 방문하여 재일교포 2세 교육을 상의했고, 정봉철(27)이 재학했던 고1 때부터 남녀 두 학급 합계 4학급에
각 학급
2명씩 합계 8명의 재일교포가 입학하여 함께 공부하고 졸업하였다고
한다
. 


그 당시의 교포학생들이 민박했는지 하숙을 했는지 역시 이런 섬세한 질문은 여자 동문 이길주(16)에게서 나왔다. 정봉철, 윤재옥, 심재호 등 당시 함께 공부했던 당사자들 얘기가 '모두 민박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 부유했던 교포 가정에서 자녀들을 고국에
유학을 보내고 하숙을 시켰던 것 같다
. 3년전에 서울의
27회 동기생 하나가 일본에 가서 그 동기들을 찾아서 회포를 풀었다 하고 그 후에 이들이 서울로 나와서 동기생들이 함께
모인 기회도 있었다고 한다
. 이들은 현재 재일 실업가로서 성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길주(16)가 질문하기를, “그 모임에서 동문들이 일본어로 이야기 했어요? 한국어로 했어요?” 이런 걸 우문현답(愚問賢答)
이라고 한다. 현답은 “물론 한국어.





과외수업



을지로 교사에서 공부했던 박영훈(21)과 김동윤(22)의 회상

그 당시 매주 토요일은 야외수업 날로서 전교 학생들이 줄줄이 걸어서 장충단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고 한다. 하기야 장충단 공원은 을지로 5가교사에 다녔던
5회 이상의 재학생 상식으로서는 엎드리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우리
학생 때야 대중교통 수단이 전혀 없던 시절이어서 주말이면 급우들과 함께 내가 살던 신당동이나 급우 한 사람이 살던 장충동에서 시작하여 한강까지
걸어 가서 보트를 타는 것이 가장 사치스러운 즐거움이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


장충단 공원에서 합창도 하고 여러 가지 곤충채집도 하고 개구리들을 잡아서 생물시간에 해부 교재로 쓰기도 했다는 등, 그 당시의 과외 수업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은
장충단 공원은 흔적도 없고 왼쪽에는 장충체육관 오른쪽은 신라호텔
, 그리고 한남동으로 가는 큰 도로도 있고,
그런데 따져 보니 박영훈과 김동윤의 이야기도 이미 40년전의 추억이다.





스승들 이야기, 그리고...



이 항목이 역시 가장 흥미진진하고 좌중을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이끌어 모임의 분위기가 단연 뜨겁게 달구어지는 토픽이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했던 동문들의
재학
(부고) 시절의 스승들은 교장에 원흥균, 김영기, 정해수 선생까지 나왔고, 교사로는 황석근(지리), 강신호(지리), 윤건집(국어), 유종생(생물), 유상태(체육), 이명수(영어), 윤동선(수학), 이주행(국어), 주대식(국사), 조태을(체육) 선생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나왔으나 나머지는 생략하기로 하고... 특히 기억에 남은 스승의 에피소드도 무진장 나왔는데 좋은 이야기의 주인공 선생은 실명으로 반대 경우의 선생은 가명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


 

김동윤(22)이 테이프를 끊었다. 1967년에 평화봉사단(Peace Corp)의 일원으로 내한했던 Mrs.Baker가 영어를 가르쳤는데 살아 있는 생활 영어를 배웠던 것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했다
. 아마도 당시에 이러한 살아 있는 영어를 가르친 것은 우리 모교가 그 효시가 아니었겠나
하는 김동윤의 의견이었다
.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그날 참석했던 남자동문들이 혹평하는 남자 스승들은 오히려 여자 동문들에게는 정반대로 호평이었다는
것이다
. 국어 담당 유건집 선생은 경기여고에서 전근해 왔는데 실력도 출중했지만 깔끔한 복장의 멋쟁이
선생으로서 특히 여학생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 기록에는 69년부터
71년까지 재직한 것으로 되어있고 박영훈(21), 김동윤(22), 조수호(23), 이매자(23)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승이 너무 튀니까 오히려 싫어하는
여학생들도 있었다는 이매자의 추억이다
. 설마 자기 이야기는 아니겠지.




다음은 한 스승에 대한 조수호(23)의 기억

자기 담임이었던 ‘아무개’ 선생은 수업시간에 강의는 전혀 없고 걸핏하면 학생들의 트집을 잡고 때리기만 했단다. 그 선생에 관한 기억이란 배운 건 아무것도 없고 맞은 기억 밖에 없단다. 그러고선 체벌을 가한 선생들을 거명하는데, 참석했던 남자동문들은 대개 이에 수긍하였다.

그런데 어느 동문 왈, 사실 그 당시 체벌을 가할
때는 아무리 보고 생각해도 ‘스승으로서의 매’ 가 아니고 감정적인 폭력이었다고 단정했지만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사랑의 매질’ 이었으리라고 생각도 된다고 했다
. 필자는 중고교 교사의 경험이 전혀 없으므로 판단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교사도 인간이므로 매를 들었을 때는 ‘사랑의 매’였을 수도 있고 때리다 보면 감정이 몰입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본다
.


그런데 조수호 학생, 실은 학교 때 말썽만 부리고 매
맞을 짓만 하고 다닌 것 아니야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매를 더 맞았고 온통 맞은 기억 밖에 없지,
그래서 대오각성(大悟覺醒)하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그 후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그래서 의과대학에도 들어 갔고 그래서 오늘날의 조수호
성형외과의사로서 대성한 것 아닌가
! (아니, 내가 소설을 쓰고 있나?)




동기생 심재호(27)에 관한 정봉철(27)의 폭로

심재호가 동급생에서는 IQ가 가장 높았는데
(이렇게 추켜 올리고선) 담임 이명수선생(영어
담당
)에게 얻어 터진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심재호가 날름 화제를 낚아챘다.
실은 그 당시 클라식기타(classic guitar)를 쳤었는데,
(그러자 이길주가 가로 막고 “우리 산악회에서 산행 후에 모여서 노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guitar 치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데...” 해서 만장의 폭소), 이명수 담임선생이 우연히 심재호의 오른손 손톱이 긴 것을 보았다. 물론
guitar를 치기 위해서였다. 심재호는 지금도 늘 말이 없고 항상 잔잔한 웃음을
띄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그 당시의 상황도 상상해 볼 수 있다
. 아무리 주의를 해도 그 긴 손톱을 깎지 않으니
그 선생이 자기에게 반항하는 걸로 오해하고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 얻어 맞아도 되게 얻어 맞은 모양이니까
정봉철이 지금껏 기억하고 있고 심재호도 진상을 털어 놨지
. 그런데 어느 정도로 맞았는지는 끝내 실토 하지
않았다
.




이명수선생에 대한 또 다른 추억담

윤재옥(27)이 고3 때 이명수선생이 담임이었고 또한 부군 정봉철(27)이 고2 때 담임이었던 연유로 해서 그 스승과 서로
친분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결혼한 후에 그 스승을 상봉한 기회가 있어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단다
. 그 당시
이명수선생은 다른 고교 교장과 교육위원을 역임한 후 은퇴하셨다고 한다
. 윤재옥이 고교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대학진학을 단념했을 때 이명수선생이 격려해 주셔서 진학을 했다고 한다
.


필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53년 여름,
정부 환도와 함께 부산의 임시본교(부중고)
환도하기로 됐는데
, 우리 아버님은 6.25 사변 중에 이북으로 납치되셨고
당시에 서울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며 우리 집의 생계를 유지하던 큰 누님이 불시에 별세함으로 진학의 길이 막혀서 자퇴를
결심했을 때 당시 고
3 담임이던 송상근 선생(수학)의 간곡한 설득과 또 당시 안병찬 교감선생과의 협의로 남은 2학기의 수업료를 면제받도록 배려해
주셔서
, 용기 백배하여 서울로 와서 동급생 집에 기거하면서 남은 2학기를
마치고 서울공대에 진학하였는데
, 그 때 그 스승이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어디 쯤에 있을지 가끔 생각해 본다.


그래서 지난 4월 이중희 선배의 모교강연을 수행하고
난 바로 그 다음 주에 동기생 대여섯과 함께 지금은 홀로 사시는
90이 다 되신 노스승님을 분당에서 뵙고
청요리도 대접하고 약간의 선물과 촌지도 표시하였다
. 동문 여러분, 혹시
마음에 담아 둔 스승이나 친우가 있으시면 그냥 추억으로만 담아두지를 마시고 서로가 아직도 건강하고 왕래할 수 있을 때 기회를 만들어서 꼭 만나셔서
회포를 푸십시요
. 인생은 단 한번뿐이며 또 인생에는 재수(再修)란 없습니다.




이 토픽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자기 학생 때 가르쳤던 스승들이 나중에는 거의 모두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라는 이중희(2)의 지적에 후배들도 모두 동의. 실제로 수 많은 스승들이 대학교수가 되었고 이날 좌중의 공통된 의견들이 부중고에서의 ‘선생’은 대학교수가 되는 중간과정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한다
. 이 말은 우리를 가르친 스승들의 실력이 그 만큼 뛰어 났었다는 증좌이리라.





다시, 그리고...



좌담회에서 만발하는 화제를 제한된 지면에 모두 다 실을 수 없는 것이 이 연재의 필자에게는 항상 안타깝다. 이번에도 여기 자세하게 쓰지 못한 이야기들... 장난꾸러기
조수호 반장 학생의 갖가지 짓궂은 이야기들
, 생물반에서의 난지도 생태계 연구 (이매자 회상), 황석근 선생의 인솔로 제주도로 생활환경반 여행 중 현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숙박
중에 장민숙 학생
(나중에 수녀가 됨)의 짓궂은 장난 ‘아까징끼 사건’
(이매자 회고) .


마지막으로 이날의 참석자로서 막내인 강태완 동문(31)에게 화제를 돌렸는데 그 당시 교장은 정해수선생이었다고 했고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으나
시간 관계로 기회를 만들지 못하였다
. 요 다음 마지막 좌담회에 꼭 나와서 추억거리를 제공해 주시기 바란다.





4회 좌담회 예고



‘모교의 발 자취’ 마지막이 되는 제4
좌담회가 오는
11 8 ()
오후 6 30분부터
Korea Town 에 있는 JJ Grand Hotel 에서 열립니다.
이 좌담회는 우리 동문 모두에게 참가자격이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는 참가 회기와
토픽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 그날 오시는 동문들은 음식을 즐기시면서 모교에 관련이 되는 추억거리를 한 가지씩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 또 특별한 토픽이 없으셔도 그날 다른 동문이 제공하는 이야기에 관련이 되는 추억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 이러한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이 본 기획연재의 의도입니다. 이 마지막 좌담회에 관한 초대장이나 공고는 따로 나가지 않습니다. 일주일 내지 열흘 앞서서
권중건 회장
(213-739-8678) 또는 차학송 총무(310-293-2663)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3회 끝. 마지막
4회에 이어집니다.)




  1. 서울사대부고 교장 환송 및 신임교장 환영식

    Date2021.03.17 By사무처 Views136
    Read More
  2.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10)

    Date2021.03.17 By선농문화포럼 Views61
    Read More
  3.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9)

    Date2021.03.16 By선농문화포럼 Views56
    Read More
  4. 한국문화재재단 ‘징검다리교실’ (가야금 교실)

    Date2021.03.15 By사무처 Views66
    Read More
  5.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8)

    Date2021.03.15 By선농문화포럼 Views59
    Read More
  6.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7)

    Date2021.03.12 By선농문화포럼 Views84
    Read More
  7.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6)

    Date2021.03.11 By선농문화포럼 Views58
    Read More
  8.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5)

    Date2021.03.10 By선농문화포럼 Views65
    Read More
  9. ◈[선농포럼] 영화제 관람신청_4/8(목) 14시

    Date2021.03.09 By선농문화포럼 Views118
    Read More
  10.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4)

    Date2021.03.09 By선농문화포럼 Views44
    Read More
  11.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3)

    Date2021.03.08 By선농문화포럼 Views48
    Read More
  12. 미주동창회보 제5호

    Date2021.03.08 By선농문화포럼 Views109
    Read More
  13. 2021년 3월 21일 정기산행 안내문 (관악산)

    Date2021.03.05 By사무처 Views235
    Read More
  14. 서울사대부고 졸업50주년 기념 예술작품집 (22회) - 그침없는 물, 푸르높은 하늘

    Date2021.03.05 By사무처 Views55
    Read More
  15.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2)

    Date2021.03.05 By선농문화포럼 Views30
    Read More
  16. ◈[선농포럼] 유튜브로 만나는 목요강좌(1)

    Date2021.03.04 By선농문화포럼 Views36
    Read More
  17. 한경준(31회) 동창회보 편집위원장 선임

    Date2021.03.04 By사무처 Views154
    Read More
  18. 선농유튜브 방송국 개국식현장 모습

    Date2021.03.03 By사무처 Views56
    Read More
  19. ◈[선농포럼] 제20기 목요강좌_4/1(목) 온라인개강

    Date2021.03.02 By선농문화포럼 Views40
    Read More
  20. 22회 동기회 책 발간 '흘러서 그침없는 물 언제나 푸르높은 하늘'

    Date2021.02.28 By사무처 Views132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67 Next
/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