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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의 발자취 3: 1955년(7회)부터 1965년(17회)까지
 6 이완규 | 2009·08·13 11:36 | HIT : 4,356 | VOTE : 293 |

(등장하는 인물은 가능한 한 실명으로 하되 경칭은 모두 생략한다)


머리말

모교의 발 자취를 더듬으며 되찾아 가는 길은 우리들 자신의 발자취를 되찾아 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자취는 우리 동문 전체의 발자취이기도 했지만 또한 각자의 제각기 다른 발자취이기도 했습니다. 2007년 4월 12일 저녁 6시 30분부터 LA의 JJ Grand Hotel의 2층 특실에서 열렸던 제2회 좌담회에서 녹음했던 3시간 15분에 걸친 여러 동문들의 회고담을 들으면서, 필자는 이 일이 엄청난 기획이었다다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필자의 능력을 과신했고 또한 과욕을 했습니다. 거의 세시간 반 동안에 녹음이 된 내용이 어느 하나도 내버릴게 없고 그렇다고 다 여기에 게재하기에는 지면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야말로 붓 가는대로 펜 가는대로 지면을 채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제인가 제1회부터 제4회까지의 좌담회에서 녹음되는 모든 내용을 바탕으로 ‘모교의 발자취’ 라는 책자가 나오게 되는 날을 꿈 꿔봅니다.

이번 2회 기사에 도움이 되는 많은 화제를 제공해 주신 김은자(10회), 김인자(11회), 박문경(13회), 서기현(15 회), 장경순(16회, 장 동문은 아예 메모지에 컨닝페퍼를 만든 듯 사전준비를 해 오셨고), 최진석(16회), 유용희(17회) 등 여러 동문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특히 자신이 중요한 화제를 제공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화제가 딴 곳으로 쏠리면 진로를 되잡아주는 항해사 역활을 잘 감당해주신 성기호(13회) 동문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물론 권중건 동창회장(17회) 및 임원진 그리고 이길주 편집인(16회)등 편집위원들의 도움은 당연한 것이고...)


을지로 5가 교사로 이전

1954년 12월 22일부터 성동역(용두동)에 있던 부고 교사가 옛 보금자리 을지로 5가로 이전이 시작되었다. 이는 당시 부중고교 교장을 겸직했던 김영훈교장 체재에서, 중학교에 최창규교장이 부임하게 되어, 그 당시의 고광만 사대학장이 ‘종래의 상태를 벗어나 중 고등학교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려면 먼저 교사의 분리가 전제 조건’ 이라고 하여 부고의 을지로 5가 교사로의 이전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부고 1, 2, 3학년에 해당하는 7, 8, 9회 동문들이 이 날의 좌담회에 한 사람도 참석을 안 했기 때문에 성동역에서 을지로 5가로 이사하는 광경을 경험담으로 이야기 해주는 동문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러나 그 당시 옆 건물 부국(부속국민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박문경(13회) 동문의 증언이나마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필자가 부중 1학년이었던 1947년에 을지로 교사(남자부)에서 성동역 교사(여자부)로 이전했던 그 당시의 상황이  역(逆)으로 재현 되었었다니...

“남학생들이 책걸상을 어깨에 메고 성동역에서 을지로 5가까지 도보행진을 한 것은 그렇다 치고, 연약한 여학생들은 두 여학생이 한개의 책걸상을 함께 들고 걸어 가느라고 그 이사작업이 며칠간 계속 되었었다” 라는 박문경 당시 부국생의 증언이다.

우리(1회에서 5회까지)가 1947년에 책걸상을 들쳐 메고 도보행진했던 것은 남학생에게만 해당된 것이었었는데, 아니 6년이나 지난 후 우리 후배들은 남녀 다 함께 고생을 했었다니,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의 고생담을 당시의 재학생이었던 7, 8, 9회 남녀 동문들에게서 듣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당시의 스승들

역시 재학중의 회고담으로는 당시의 스승들의 이야기가 단연 토픽이다. 하기야 스승과 제자의 한 마당이 바로 우리 재학 시절이 아니었던가. 김은자(10회)가 아예 작심을 한 듯 화제의 스타트를 끊었다. “체육을 담당하셨던 이수복선생님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동문들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면서 그 선생의 좋은 점을 예거하는데, 좌담회 참석자 전원이 모두 동의, 이날의 참석자중에는 이수복선생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1994년에 간행된 ‘서울 師大附高 半世紀史'안의 ‘선생님들 프로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수복(李壽福) 선생님(여학생체육과)... “야! 거기 좀 조용히 해!” 강당 조회시 목소리가 꽤 높으시다. 우리 어머니, 우리 장모님, 여학생 한테는 엄모지만, 남학생들한테는 지극히 후하신 장모님이다. 부디 부디 여학생 규율을 바로 잡아 주시기를...’

그리고 이수복 선생이 ‘1964년 5월 31일 교육공로 표창’ 및 ‘1964년 9월 13일 학도체육대회에서 공로 표창’ 을 받으신 기록이 있으니 앞에서 말한 김은자(10회)의 이야기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이수복 선생님께서는 여학생들에게는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 이셨지만 남학생들에게는 너그럽고 따뜻한 어머님이셨고 장모님이셨다. 

그리고 나서 여러 스승들, 한병구(수학), 주길준(교련), 서병희(4회, 수학), 김혜자(9회, 영어), 황석근(지리), 성낙준(영어), 최동희(음악), 변창진(영어), 이풍기(물리), 이필의(수학), 한우택(사회), 이헌재(수학), LA 에 거주 하시는 강신호(지리), 이정규(위생), 차종환(생물), 박지수(역사) 등 등 여러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만발하였는데 지면 관계로 여기에 그 외의 모든 스승들에 얽힌 에피소드를 열거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박문경(남, 13회)의 회고담
가령 ‘A선생’이라고 해 두자. 비록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더라도 그 분의 명예를 위해서 해당 선생의 이름은 절대로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럼 아예 시작하지를 말아야지...

이 A선생이 ‘사진’을 참 좋아 하셨는데...' 그러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어리둥절한 남자동문들을 제쳐두고 김은자(10회) 김인자(11회) 이길주(16회) 여자동문들이 이미 알아차리고 낄낄거린다. 원 응큼 하기는...

박문경이 사진부 부원 이었는데 당시 사진부 암실이 교사 한쪽 여학생 교실 옆의 계단 아래에 있었다. 이 A선생이 하루는 필름을 가져 와서 현상과 인화를 해달란다. 작업하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해서 한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더니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고는 한시간 후에 나타났다. 박문경이 현상하면서 자세히 보니 여자의 누드 사진이다. 그 때의 인상이 어찌나 강렬 했던지 지금도 그 누드 사진이 머릿속에 어른거린단다. 그래서 인화를 하면서 실패한 척 하고 몇 장을 쓰레기통으로 떨어트리고서는 나중에 그 사진을 고이 간직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 A선생의 부인이 학교로 찾아 오셨는데 그 나체의 여인이 바로 A선생 사모님 이더란다.  다음이 이 이야기의 하일라이트.

박문경이 그 A선생 담당 과목을 공부했는데 시험점수가 나쁘게 나왔단다. 그래서 그 나체 사진을 봉투에 넣고 그 A선생을 교무실로 찾아가서 슬쩍 그 봉투를 내밀었단다. 그 후부터는 그 과목이 90점 이하로 내려 간 적이 없었단다. 그래도 그 얘기는 별로 안 믿어지는데... 박문경! 천하부고 출신 맞아?

서기현(남, 15회)의 회고담
“사실 이필의 선생은 수학실력은 그저 그랬다. 그리고 수업강의에 대한 준비도 별로 잘 안 하신 것 같았다. 수학 잘 하는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게 하고는 어쩌다가 당신이 직접 문제를 풀다가 틀려서 학생들이 그것을 지적하면 ‘너희들이 그걸 아나 모르나 테스트하려 한 거다’ 하실 때도 있었다.”
  
필자의 첨언(添言)... 이필의 선생은 부산 피난시절 보수산 임시본교에서 필자가 배웠던 기하 시간에도 늘 그랬으니 그 수법을 수십년간 사용하신 듯. 이필의 선생은 필자가 6.25사변전 부중 3학년때 백남공업에서 그리고 태상근선생(수학)이 서울공업에서 부중으로 부임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두분 모두 69년 3월까지 재직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날 좌담회에 참석했던 모든 동문이 이 두 수승에게 수학을 배웠던 것이 된다. 

그런데 어느 동문도 이필의 선생을 폄하(貶下)하지 않았다. 

“이필의 선생은 수업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10분 정도씩 도덕 훈화를 하셨는데 정말 좋은 말씀들이 많았다. 이러한 것이 전인교육(全人敎育)이 아니겠는가”라는 장경순(남, 16회) 동문의 지적에, “옳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수학을 가르친 B선생의 경우 정말 실력이 있어서 수업 시작하자마자 칠판에 가뜩 수학 공식 등을 쓰기 시작하여 그 수업시간이 끝나기까지 학생들이 베끼기에 바빴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면 머리에 남는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필의 선생의 경우 비록 수학실력이 출중하시진 못했어도 그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나면 한가지 라도 머리에 남는 게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선생님들이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때 제가 자식들이 있었다면 주저없이 사대부고에 보냈을 꺼예요.” 라는 서기현(15회)의 회고가 잇달았다.

유용희(남, 17회)의 회고담
고3때 한우택 선생이 담임이었는데 동기에 권영덕이란 동문이 있었다. 그런데 두뇌는 우수하였으나 공부를 게을리하여 성적이 나빠서 대학진학을 못했다. 필자의 고3때도 그랬지만, 학교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학을 지원할 때 진학(進學) 사정(査定) 회의에서 진학 대학이 결정되었었는데 이 시스템이 계속 유지 됐던 모양이다. 이 회의는 교장, 교감, 각 학과 담임, 그리고 학급담임으로 구성되었는데, 발언권과 영향력이 제일 센 선생은 물론 학급 담임이었다. 

그런데 권영덕의 경우에는 담임 한선생의 철저한 비협조로 끝내 진학을 못하고 육군 제3사관학교로 진학했는데, 앞에 말한 것처럼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여서 졸업후 오히려 정규육군사관학교 출신보다 더 빨리 진급을 거듭하여, 제3사관학교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육군소장까지 진급하였다. 그가 육군소장으로 사단장 재임시절 고교 당시의 은사들을, 물론 한우택선생을 위시해서, 사단 본부로 초청하여 은사들을 사열대에 모시고 사단 장병들의 사열을 하게 했단다. 이 스승들의 감격했던 광경을 떠 올려 본다. 스승만 훌륭했던 것이 아니고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대성한 훌륭한 제자의 실례이다.

이길주(여, 16회)의 회고담
“강신호선생님은 그 당시 총각선생으로 그리고 미남자로서 여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말에, “아니 그 선생이 우리 부고 졸업회기로 비교한다면 1회에 해당되는데, 그러면 15년이나 연상인데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 라는 이완규(6회)의 질문에 여자 동문들 이구동성으로 그렇단다. ‘젠장 그런 걸 진작 알았었다면 결혼도 늦게 하고 미국에 천천히 와도 되는 건데...' (이완규의 독백)


교생실습

우리 모교는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실험학교 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대학교의 각 대학 재학생 중, 특히 사범대학의, 장차 중고교 교원 예정자들이 졸업학년에서 우리 부중고에 와서 교생 실습을 하였다. 우리 학생들로서는 안성 맞침의 먹이감이었다. 

이야기를 약간 되돌려서 필자가 고2때인 부산 피난본교시절에 있었던 일. 그 당시 피난 임시수도에서 공급 태부족인 중고교 교사의 충원을 위해서 단기간의 중등교사 양성소가 있었는데, 수료 직전에 보수산 교사로 대거 수련생들이 내교하였다. 정식 서울사대(우리 큰집) 재학생도 아닌 벼락 수련생이라 이 호기를 우리들이 놓질 리 없다. 

마침 국어 시간이었는데, 이 수련생중의 하나, 정보를 잘 못 얻고 왔는지 처음부터 고답적으로 나오고 우리들을 어린 아이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오기가 나기 시작한 학생들은 슬슬 이 교생을 조이기 시작했는데, 불쌍한 이 청년 급기야는 감정적으로 나오면서, “그러면 학생들 ‘사랑하는 애인’이 올바른 단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지요! 애인은 명사이고 ‘사랑하는’ 은 형용사이기 때문에 맞는 말입니다. 마치 ‘미운 애인, 못 생긴 애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교생을 공격하자  x 망신을 당하고 이성을 완전히 잃은 불쌍한 이 청년교생왈 “명문인 이 학교가 당신들 같이 이런 정도의 실력밖에 없는 학생으로 가득찬 학교인 줄 몰랐다.”

그러자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서, “당신이 뭐야! 실력이 없으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학교 이름을 왜 들먹여!” 이렇게 해서 이 교생 울면서 뛰쳐 나갔는데 교실 뒤편에서 평가하려고 참관하고 있었던 선생들 모두 혀를 찼다. 이 교생이 교사면허를 받았을 리가 없다.

차종환선생이 서울사대 졸업반때 부중으로 교생실습을 왔었는데, 몇 년후에 생물담임으로 모교(부고)에 정식 부임하였다. 바로 몇 해 전에 교생 실습으로 왔었던 구면이고 교생을 얕잡아 보던 습관대로 허현(13회)과 박문경(13)이 차선생의 첫날 첫 수업시간에 아예 무시하고 되돌아 앉아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차선생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게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앞으로 불러 세우고 얼굴을 치는데, “원 세상에, 내가 그렇게 여러 선생들한테서 매를 많이 맞아 봤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때리는 선생은 처음 봤다” 는 박문경의 회고담.  

그래 어떻게 때렸는데?” 모두들 호기심이 나서 물어 보는데, “아니 보통 빰을 때리려면 손바닥으로 때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선생은 주먹으로 때리는 거얘요.” 그러자 장경순(16회)이 반론을 제기한다. “아닙니다, 그 선생님 절대로 폭력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맞은 당사자가 있는데 어쩌랴. 

그래서 이날의 중론, 아마 차선생이 부임해서 첫 날 첫 시간 강의 시간에 자기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나왔으니 혈기 왕성했던 청년으로서 능히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첫 완력 행사후에 그 선생도 뭔가 느낀바 있었을 게고, 그래서 아마 그 후에 배웠던 후배들에게는 좋은 인상의 스승으로 남도록 노력했을 게다... 라는 결론을 지었다.

참고로, 교생들의 몇 가지 유형.
첫 날 첫 수업에 들어서자마자 아예 자기를 '부고 선배'라고 밝히고 권위적으로 나오면서도 후배들의 눈치를 살피는 타잎 (1회 박붕배 선배), 처음부터 읍소형으로 나오면서 학생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려는 타잎. 그런데 학생들의 눈치도 안 보고 당당하게 실력으로 상대하는 타잎도 있었고 그 대표적인 교생이 6.25 전에 서울사대 영문과를 나와서 부중에 잠간 재직했다가 외교관으로 진출한 황호을(黃鎬乙)선생의 예이다.


을지로 16회와 왕십리 16회


화제로 올리기에는 아주 민감한 사안으로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당사자인 16회 동문들은 담담하였다.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교원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사범학교를 폐지하고 교육대학(2년제)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사범학교 병설고등학교가 1962년 3월 1일에 부고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시설 부족으로 분교 형태로 운영하게 되었고 통합 당시의 분교 2학년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분교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의 졸업회기가 16회(왕십리)라고 일컬어진다.

당시 양쪽 학생들은 통합에 모두 반대했었다고 한다. 본교 16회는 자기들은 특차로 들어왔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다른 쪽은 자기네는 초등학교 교원을 지망해서 들어왔는데 이제 와서 인문고교로 편입시키면 진로를 수정해야 한다고 반대했었다. 교사가 분리되어 있음으로 해서 양쪽 학생들간의 교류는 특별 활동외에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는 이 통합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이 크다. 

비록 고교시절에는 서로가 교통이 없었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교류가 활발했었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16회 전체 회원수는 무려 780명이나 된다. 어디에 가나 서로 마주쳤을 게고 같은 고교 출신들이니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16 회 장경순, 최진석, 이길주의 회고). 

모국 총동창회에서 발행한 2002년도 동창회 회원명부에 보면 그 당시(2002년도)의 ‘16회 왕십리’ 남녀 회원들의 현직이 그렇게 휘황찬란 할 수가 없다. 통합이 안 되었더라면 오히려 그 아까운 남녀 인재들이 우리 동창이 안 될뻔번 했으니! (6회 이완규의 지적).  우리 남가주동창회의 16회 동문이 50 여명이나 된다. 든든하기 그지 없다.


과외활동

역시 괄목한 활약을 보인 운동 부문은 단연코 수영부와 럭비부였다. 유도부는 한국 유도계의 태두 손종묵선생이 지도교사로 계셨으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전국체전 석권과 같은 활발한 성과는 없었다. 

수영부와 럭비부의 활약상은 모든 동문들의 주지 사항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 동안 거의 언급이 없었던 레스링부로 화제를 옮긴다. 우리 부고의 레스링이 명성을 떨치게 된 효시는 아무래도 이정기(8회)동문일 것 같다. 이정기가 고2 때인 1954년 7월에 레스링연맹주최 전국 신인레스링대회에서 1위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55년 3월 대통령 탄신 80회기념 레스링대회에서 재차 우승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로 레스링부는 괄목한 발전을 거듭하고 승승 장구하여, 남녀 학생들의 선망의 운동부가 되었고, 이건희(13회, 현 삼성구릎 회장)도 레스링선수이었다. 이곳 동창회의 최진석(16회)동문도 당시의 현역선수로서, 그 역시 고3때 전국 신인 레스링대회 일반부에 출전하여 참피언이 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날도 멀리 팜데일 에서 장거리 운전하여 좌담회에 참석하여 여러가지 귀중한 증언들을 하여 주었다. 현재 이곳 남가주에 거주하는 이정기동문과 더불어 앞으로 모교 레스링부의 활약상을 들을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빙상계의 기라성 김석하(金石河) 선수가 우리 부고 11회인 것을 알고 있는 동문들이 매우 드문 것 같다. 좌담회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왔으나 불행히 11회 남자동문이 좌담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그 이상의 화제의 진전이 없었다.

예능 부문에 있어서는 역시 뺀드부(취주악부)가 토픽이었다. 선배들이 졸업한 후에도 계속 뺀드부를 지도 육성한 사실은 모든 동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55년 10월에 개최된 서울음대 주최 음악콩쿨대회에서 '7년 연승' 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여 '취주악=서울사대부고' 라는 공식이 정착되었다.


보이스카웃

“보이스카웃이란 게 부고에 있었어요?”라는 이완규(6회) 동문의 질문이 만장의 폭소를 자아낸 것으로 미루어, 부고의 보이스카웃이 유명했었던 게 틀림 없다. 보이스카웃에 깊이 관여했던 박문경(13회)의 강의가 이윽고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두 생략하기로 하고...

기록에 의하면 부고에 정식으로 보이스카웃이 창설된 것은 58년 9월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박문경이 부중 1학년때 보이스카웃에 가입했다고 하니 부중의 보이스카웃이 부고보다 먼저 창설된 것 같다. 맞나?  이 보이스카웃의 제일 높은 자리가 영조장(領組長)이라고 한다는데 노광길(11회)이 바로 그 영조장 이었다고 한다. 노광길이?  한번 다시 봐야겠네... 그런데 박문경도 영조장을 했다던가? 그날 그가 하도 말을 많이 해서 기억이 얼떨떨하다. 그런데 그가 한국 보이스카웃 대표로 고2때 국제 잼버리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악착같이 기록해 두었다. 그러니 필자에게 섭섭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하여간에, 보이스카웃의 활동은 모교의 여러 자료에 상세하게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서 유명했던 과외활동의 하나이었던 것은 틀림 없다.




특출했던 회기

필자의 기억으로는 모든 회기가 다 우수했지만 그러나 구태여 끄집어 내라면 7, 11, 13 그리고 16회가 될 상 싶다 (필자 주: 이날 좌담회 주체가 된 7회부터 17회 회기 대상을 하여). 그러나 이날의 좌담회에서는 단연 13회와 16회가 거론이 되었다. 이는 이날 좌담회에 7회와 11회가 참석 안 한 대신 대거 참석한 13회 및 16회 동문들에게 대세가 밀린 당연한 귀추이다. 물론 11회에서 김인자가 홀로 참석은 했으나 고군분투 조차 하지 못 하고 밀려 났다. 

정치인으로서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깨끗한 이미지의 소유자 홍사덕(13회)을 시작으로 정계 및 관계에서 활약했던 여러 동문들의 이야기가 나왔고, 재계로는 이건희(13회)의 화제가 단연 톱이었다. “사실 나는 그가 부잣집 아들인 줄 전혀 몰랐어요. 하루는 친구들 몇이서 방과후에 을지극장으로 영화구경을 갔는데, 이건희도 그 중에 있었지요. 극장 앞에서 ‘나는 돈이 없어서 집에 돌아가련다’ 하고 그냥 돌아 가더라구요. 아니 걔가 극장 구경할 돈이 없어서 그랬겠어요?”  그 다음 날 시험이 있어서 집에 일찍 돌아가서 공부해야겠다고 그랬단다. 이건희는 그렇게 그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13회 성기호의 회고). 

이건희와 각별한 교우관계에 있었던 박문경과 성기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축성(築城)보다도 수성(守城)이 더 힘든 게 아닙니까. 한국에서 차지하는 현금의 삼성의 그 어마어마한 비중 때문에, 우리 같으면 변소에 가서 소변을 보려고 해도 몸 전체를 짓누르는 중압감 때문에 오줌이나 제대로 나오겠어요. 그 친구, 인물은 인물입니다... 희로애락을 절대로 가볍게 나타내지 않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았던 모양이얘요. 학교 다닐 때도 웬만해서는 자기 감정을 안 나타냈어요. 하기야 그렇지요. 수만 명을 거느리는 그룹 총수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부하들이 겁을 먹겠고 또 너무 많이 웃으면 만만하게 여길 것이고...” 그러면서도 판단력도 특출하고 지도력도 남달라야 한다. 

필자도 80년대 초(80년 1월 부터 및 82년 7월까지 2년반) 사우디 재벌그룹의 중역으로 재직할 때 사우디 재계인사들과 서울의 삼성본사를 방문, 이건희 부회장(당시)과 공식 면담을 두 번 가진 적도 있고 오찬도 함께 하고 호암미술관 소장 이조청자의 모조품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우리와의 공식 회담에서는 미국에서 교육 받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비서를 회담의 통역으로 배석시켜서 회의를 하면서도 적재적소에서는 자기가 직접 영어로 설명을 하는 등 조용하면서도 자상하고 그러면서도 사리를 예리하게 판단하는 그런 사람, 역시 그는 인물이었고, 우리 부고의 자랑스러운 동문임에는 틀림없다.
16회에 관한 자랑은 생략한다. 이미 ‘16회/16회(왕십리)’ 항목에서 지면을 크게 할애한 바 있으니 “불만신고”는 없으렸다.


우리들의 보람과 자랑, ‘부중, 부고’

부중 부고의 우수성은 재론할 것도 없다. 더 이상 거론하면 간첩이다. 그런데 학구제와 평준화에 묶여서 우리 모교가 표류하고 있다. 국립 학교로서, 그리고 연구학교와 실험학교로서 부설 중고교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하여야 한다. 모국의 동창회에서 모교발전위원회를 설치하여 동문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도 가시적인 결실은 없다. 지금은 우리 모든 동문들이 바야흐로 중지를 모을 때이다.
마지막으로 서기현(15회)과 장경순(16회)의 말을 인용하고 제2회 기사를 마감하려고 한다.
“우리 부중 부고는 선생님들 거의 모두가 진정한 교육자이셨다. 지식을 돈과 맞 바꾸는 그런 현금의 선생들이 아니고, 지식과 함께 인간됨을 가르치시는, 말하자면 전인교육(全人敎育)을 하신 분들이었고, 그러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큰 행복이었다. 거기에 더 보태서 남녀공학을 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대단히 자랑스러운 행운이었다.”
(제2회 끝. 제3회 이야기는 졸업회기 18회부터 이어집니다.)


필자 후기 (2009년 8월 7일)

본 제2회 '모교의 발 자취' 좌담회에 참석해서 마치 컨닝페이퍼를 마련하듯 깨알같은 글씨로 노트를 미리 준비해 와서 무궁무진한 화제를 제공해주셨던 장경순동문(16회)이 오랜 지병끝에 이 좌담회 참석 일년 남짓후인 2008년 6월 27일에 별세하였습니다. 이 비보를 뒤늦게야 듣고 우리 남가주 동창회보 제22호에 제가 '고 장경순동문(남, 16회)을 기리는글' 을 실은 바 있는데 그 중의 한 구절을 다음에 인용합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언제나 듣기 반가운 이길주 후배님(16회, 동창회 이사장 겸 회보편집인)의 음성이다. 그런데 음색이 좀 다르다. 
선배님, 우리 동기생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동기생 누구예요?
장경순씨인데 어제 저녁 입관예배에 참석하고 오늘은 방금 장례식 다녀오는 길이에요.
순간 숨이 멈추고 이윽고 가슴이 아려 온다. (아니, 내게 연락이나 해 줄 것이지... 아마 늙은이가 멀리서 드라이빙 하는 걸 걱정하느라고 소식을 안 알렸나 보다...)
그의 영상이 되 살아났다. 작년 4월 12일 저녁 LA에서 열렸던 '모교의 발자취' 좌담회에서의 모습이다. 왜소한 체구에 이미 그 때에도 병색이 완연했던 장경순 동문은 그러나 이미 생사를 초월한 거인의 모습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이 후배, 아니 어쩌면 내 기억에도 가물가물했던 이 후배는, 자기 병세를 내게 설명하고 그리고 여생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도 초연한 자세로 우리 좌담회에 임하여 모교 재학시절의 화제들을 무궁무진하게 연방 제공했다.

잠시 명상에 잠긴다. 나이로 봐서는 분명 내가 10여년 연상의 큰 형님인데, 그러나 우스갯말로 '먼저 가는게 형님' 이다. 내가 앞으로의 여생을 예견할 수 있고 내 능력의 한계를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이 형님' 처럼 대범할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가슴이 아려 오고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하늘나라에서 미소 지으면서 내려다 보고 계실 장경순후배님을 다시금 기린다.

9 김상각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11임효제
 
재미있습니다. 
이제는 빙상계에 유명하던 11회 김석하도 타계했고... 
손종묵 선생님도 초청 해 올리면, 휠체어를 타고 겨우 나오십니다. 
1955년도에 부고에 오신 국어과 조문제 선생님과 한우택 박붕배 선생님이나 가끔 뵈울 수 있답니다. 
저는 서울서 부중에 들어 갔습니다만, 선배님의 집필로 여러가지를 회상해 봅니다. 
선농단 앞 운동장에서 고3 여자 선배인 학도 호국단 대대장님의 구령 소리도 들었고, 
주길준 선생님께 36개 동작 훈련도 받았지요. 
(비 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는, 625 전쟁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선생님을 조르기도 했구요) 
훌륭한 회고록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

 

15 이종웅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warnerklee 2014.11.02 00:00
    아니군요. 글이 길어서 짤린게 아니고, 애초에 (이 남가주 웹사이트가 개설되었던 그 옛날) 여기 실었던 글을 bugoUSA로 전재하였던 글을 다시 여기로 되돌려 오려니까, 그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요, 이것을 제대로 고치는 기술은 아마도 우리 웹마스터 정봉철팀장이 나서던가 본국 동창회 웹관리자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좌우간에, 내 혼자 힘으로도 할수 있는지 계속 노력해보겠습니다.
  • warnerklee 2014.11.02 00:00
    행여나? 해서 이 편의 #3-1과 #3-2로 갈라진것을 다시 한데 부쳐 보려고 시도했더니 되는군요.
    그런데...아직도 안심이 안됩니다. 이 상태로 하루 이틀 지내보고 무사히 그대로 실려 있으면 #3-2를 삭제하고 제목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습니다.
  • warnerklee 2014.11.02 00:00
    #3-1과 #3-2 두편으로 나눠 실었던것을 한곳으로 봉합하는 작업이 완성하였으므로 이젠 안심해서 필요없는 문장들을 삭제 하겠읍니다.
    아아 컴캥의 설음 독독히 맛 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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