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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의 발자취 2: 1949년(1회)부터 1954년(6회)까지
 6 이완규 | 2009·08·13 11:37 | HIT : 4,920 | VOTE : 283 |

<8.15광복, 6.25사변, 부산피난 그리고 서울수복>

(등장하는 교사 및 학생은 가능한 한 실명으로, 그리고 관련 증언자의 경칭은 모두 생략한다.)

8.15 당시의 상황

우리 모교의 모체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남자부)는 경성사범학교 보통과(예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여자부)는 경성여자사범학교 심상과(예과)로 이룩된다. 물론 두 학교 모두 그 당시의 명문 학교이다. 1946년 당시 4학년 학생은 4년제 경성사범학교 및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졸업하였고, 당시 3학년 2학년 1학년 학생과 신입생을 합하여서 6년제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가 되었고, 1947년 10월에 을지로 5가에 있던 부중(남자부)이 용두동에 있던 부중(여자부)으로 이전하므로서 새로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가 시작하였다.


남녀공학(男女共學)의 효시(嚆矢)

1947년 10월 2일, 제2학기가 되자 마자 역사적인 서울사대부중 남자부의 대이동이 거행되었다. 당시 최고학년 5학년(제1회)을 시작으로 4학년(제2회) 3학년(제3회) 2학년(제4회) 그리고 입학하여 겨우 제1 학기만 마친 꼬마 1학년(제5회) 까지 수백명의 남학생들이 책걸상(책상과 걸상이 함께 붙은 목제 책걸상)을 어깨에 짊어 지고 을지로 5가에서 성동역에 인접한 용두동 까지 장장 여러 킬로를 도보 행진한 가관(可觀)은 지금의 젊은 후배들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이경(異景)이였음에 틀림 없다. 

그 당시 몸집이 컸던 상급생들은 몰라도 몸집이 아주 작았던 나이 어린 하급생들에게 그렇게 무거운 책걸상을 짊어지고 그 먼거리를 걸어 가게 했다는 당시의 2학년생 이정화(4회) 와 1학년생 이완규(5회)의 원망 어린 푸념에, 그 때에는 학교나 주무부서인 문교부나 모두 돈이 없는 가난한 시절이어서 그런 방법 밖에는 없었다는, 그 당시의 상급생 남녀 동문들 (2회와 3회)의 뒤늦은 위로의 말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남자부 및 여자부의 학생 및 교직원간의 남녀 공학 반대와 알력 등의 상세한 이야기는 앞의 머리말에 나온 ‘서울師大附高 半世紀史'와 ‘附中 六十年史'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상급생 선두진이 교문에 당도하였을 때 남녀공학을 반대하는 여학생들에 의해서 교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입성에 성공한 남자 상급생의 뒤를 이어 줄줄히 도착한 나이 어린 남학생들은, “살벌했던 을지로 교사에서 지나다가, 아담하고 단정하며, 온갖 꽃이 만발한 앞 마당과 연한 붉은 벽돌색 교사를 바라보면서 마음의 포근함을 느꼈다” (당시 2학년이던 이정화(4회)의 회고)라는 표현 그대로 형극의 길을 지나 드디어 파라다이스에 당도한 느낌이었다. 

좌담회에서 “여학생들이 왜 그렇게 반대했어요?”라는 남자 동문의 질문에 “그때에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사상이 뿌리 깊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많은 상급생들이 경기여중 등으로 전학갔다”는 이인영(3회)의 설명에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없었던 게지요” 라는 이정화(4회)의 지적에 웃음이 터졌다. 그 뜻은 현금의 대부분의 중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라는 점이지만, 그러나 고희(古稀)를 훌쩍 지난 남녀 동문이 이렇게 정담(情談)을 나눌 수 있는 귀중한 자리를 감사한다는 뜻도 포함된 것이리라.


당시의 스승 (교사)

좌담회에 참석한 동문들의 화제에 오른 스승들은 1947년에 비명에 간 초대 주사(主事) 신기범선생을 비롯하여 2대 주사 겸 초대 교장 김연영(金演榮) 선생, 2대 교장 최복현(崔福鉉) 선생, 초대 교감 권상철선생, 2대 교감 김종렬 선생 등이었고, 일반교사로 심의린, 안병찬, 황찬호, 김창화, 김호량, 조대행, 손종묵, 정화영, 조병화, 최규하(대통령 역임), 김종건, 김성익, 김치옥, 김순용, 이경팔, 최동희, 노신옥, 박시인, 현영학, 김연옥, 손정애, 이석철, 유재우, 나형섭, 전형국 선생과 외국인 영어강사 뉴맨 등이었고, 각 스승에 관한 추억과 촌평이 있었으나 지면 관계로 여기 그 이야기들을 모두 실을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영어 선생이던 황찬호 선생이 제자 여학생(3회)과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황찬호 선생은 후에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여러 해 근무했으며, 이 때의 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 생도, 노태우 생도 등이 있었고, 이들이 대통령이 된 후에 황찬호 은사를 청와대로 몇 번 모셨다는 이야기를 전문한 바 있다. 

역시 미남 총각선생으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던 음악교사 이경팔(李璟八)선생도 제자였던 여학생(1회)과 결혼했는데 부부가 6.25 직후 월북하였다. 8.15 이전 일본 육군사관학교(57기) 출신의 일본군 포병소좌 이었던 수학담당 김호량(金鎬樑)선생은 작달막한 키에 안경을 쓰고 눈매가 날카로운 인상의 수재형 수학자였는데 6.25가 나자 마자 자취를 감췄더니 얼마 안 있다가 인민군 장군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그 후의 소식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음악을 담당 했던 김순용(金淳龍) 선생은 수업여가를 타서 그 당시 국산영화 “연화(蓮花)”의 주제가와 배경 음악을 담당 제작하는 등 다재(多才)하고 활기 있던 선생이었고 많은 가곡과 명곡을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등 많은 추억을 남긴 선생이었는데 6.25 사변 중에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된 후 국군에 포로가 되어 반공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중, 휴전 직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용단으로 반공 포로로 석방되어 옛 보금자리(이미 이 때에는 부고로 바뀐 용두동 옛 교사)로 돌아와서 그후 여러 해를 모교에서 봉직했다는 후일담이다.

수학을 담당했던 김창화(金昌化) 선생은 8.15 광복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서 월남한 투철한 반공사상의 소유자이었고 그의 반공교육과 더불어 명강의로 학생들의 신망이 두터웠는데, 6.25 직후 좌익학생들에게 학교 뒷산 청량대(후의 선농단)로 끌려가서 제자들의 손에 학살당했다. 전술한 신기범선생에 이어 두번째로 제자들에게 죽음을 당한 우리 모교의 치욕의 역사 이다. 

공민을 가르쳤던 유재우선생은 일정(日政) 시대 학병으로 징집되어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환하고 8.15 해방을 맞이한 후 부중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강의중에 만주 벌판에서 강행군했던 고생 이야기 등 학생들의 흥미를 끄는 화제들이 많았는데 6.25 전란으로 국군으로 종군 중에 전사하였다는 후문이다.

좌담회에서 흥미 있던 화제는 실력이 있던 선생과 엉터리 선생들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다음은 이중희(2회)의 회고담이다. “황찬호 선생은 학생들에게 영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갈파하고 그 해박한 영어지식을 무료로 과외수업 및 개인교수를 하는 등 많은 학생들이 그 혜택을 받았다. 김창화 선생은 영어 원서로 된 수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그때 배웠던 수학실력으로 후에 도미유학해서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물리를 가르쳤던 조병화 선생은 경성사범의 럭비선수 였는데 럭비부 지도교사로서 부중 럭비부를 명문부중 럭비로 키웠고 나중에는 시인이 됐는데 그의 문인 시절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이 생활을 꾸려갔다는 숨은 이야기, 공민담당 미남자 김치옥 선생과 예쁘장했던 무용담당 손정애 선생간의 염문 등 시효가 지난 이야기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附中 六十年史'에는 부중 창설부터 재직했던 황찬호(黃燦鎬))선생은 본문에는 아예 없고 부록에는 포함되었으나 부임 일자가 48년 9월로 되어 있는 오류를 범했고, 필자의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이종현(李鍾賢) 선생은 이 책의 어느 구석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종현 선생은 8.15 직후 군정청 통역관으로 재직하다가 1948년 4월 필자가 2학년으로 진급하자마자 부중으로 부임하여 담임이 되었고 그 유창한 영어 회화 실력과 거무스름한 용모에 안경까지 쓴 모습이 당시 주한(駐韓) 유엔사절단 수석(首席) 메논 박사를 닮았다고 해서 학생들로 부터 ‘메논박사’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6.25 중 납북되었다는 후문이다.


과외활동(課外活動) - 명문교(名門校)로의 발판

당시 활발했던 운동부로서는 수영부, 럭비부, 유도부, 축구부, 탁구부, 배구부(남녀), 농구부(남녀) 등이 있었고, 예능부로서는 취주악부, 합창부, 무용부, 미술부 그리고 변론반(웅변부)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수영부는 전국 중학교 수영대회 제1회부터 매년 연속 우승하여 서울사대부중의 남녀공학으로서의 나약한 인상을 깨트리는 선두 주자가 되었다. 그 밖에도 럭비부, 축구부, 유도부 등이 각종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남녀공학인 학교가 남자들 만의 중학교들을 체력적으로 능가하는 대기염을 토했다. 또한 여자농구부도 전국 여자중학교 농구대회에서 우승, 준우승을 거두는 등 작금의 젊은 후배들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대활약이었다. 

그 당시 현역 선수였던 축구부의 오영균(2회) 및 윤응중(3회), 럭비부의 이정화(4회), 배구부의 심정선(4회) 및 이정애(5회) 등이 우리 남가주 동문들 중의 산 증인이다. 소년 축구부는 중학교 하급학년 - 주로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학생 - 으로 이루어진 각 학교의 축구부로서, 전국 중등학교 소년 축구대회는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시합이었는데 당시 3학년이었던 윤응중(3회)은 키가 커서 시합에 못 나가고 오히려 4학년이었던 오영균(2회)은 키가 작아서 시합에 나갔다는 뒤늦은 폭로가 있어서 좌담회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소년 축구부의 명 골키퍼였던 육동창(2회, 한국거주, 별명 똥자루)은 땅딸막한 작은 키 덕택에 만년 골 키퍼였다.

각종 운동시합에는 의당 각 학교마다 응원단의 활약이 있게 마련. 이 응원 시합은 운동경기 시합 못지 않게 관중의 흥미거리였다. 우리 부중에도 남자부 응원단장과 여자부 응원단장이 있었는데, 특히 남자부 응원단장 이었던 박득춘(1회)은 스스로 고안한 응원방식과 응원구호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차차차! 차차차! 차차차차 차차차!”(박수소리) 로 시작되는 삼삼칠(三三七)박수를 시작으로 그가 목청을 높여 “어허라 이겨라!”(차차차), “이기기만 하면은” (차차차), “고기만두 나온다!”(차차차), “짜아장면 나온다!”(차차차) , “싸알밥이 나온다!”(차차차), “강냉이 나온다!”(차차차), “달걀이 나온다!”(차차차)... 이런 식이었는데, 그 당시는 모두가 가난하여 식량사정이 나빴던 시절이었고 주로 잡곡이 주식으로 하얀 이밥만 먹는 학생은 부유층의 자제였다. 

특히 한참 발육이 왕성했던 청소년 선수들로서는 먹는 것 이상의 매력은 없었을 터였다. 특히 삶은 계란은 아주 매력적인 매뉴이었다. 그래서 응원단장 박득춘이 응원구호속에 달걀을 넣었는데 구령에 맞추느라고 “어허라 이겨라!”(차차차), “달기얄이 나온다!” 그런데 (차차차)가 뒤 따르지 않고 학생들이 배꼽을 쥐고 웃는다. “닭의 다리 나온다”로 들은 것이다. 

지금은 식생활이 바뀌어서 풍요로운 식탁에도 각종 닭발 요리가 나오는 세상이 되었지만, 가난했던 그 당시인데도 닭발은 음식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하필이면 닭다리냐 하고 웃었던 것이었는데, 여기에 힌트를 얻은 박득춘응원단장, “달기다리 나온다!”가 그의 단골 응원구호가 되었다. 

다음은 당시 럭비부의 주력선수였던 악동(惡童) 이정화(4회)의 회고. “그 때의 여학생들이 어찌나 남학생들에게 도도했는지, 우리 반에 럭비선수 12명이 있었는데, 방과후 교실청소하고 나서 물걸레를 빤 빠케쓰에 소변들을 보고 (교사 바깥에 있는 변소로 가기 귀찮아서) 교정 화단에서 꽃을 가꾸고 있던 여학생들에게 이층 교실에서 확 뿌리고는 도망쳤는데, 그 다음 날 아침, 담임이던 안병찬선생이 범인을 찾으려고 난리 났었다.” 이 날 좌담회에서 모두들 듣고 웃기만 한 것을 보니 그 때의 피해 여학생은 우리 남가주 동창회원 중에는 없었던듯 하다.

한편, 남녀 공학의 정서적인 부문의 톺을 이룬 취주악부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주최 전국 중학교 음악 콩쿨대회에서 제1회부터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전통은 그 후로도 10 여년이 계속되어 부중이라는 이름이 전국 취주악계의 대명사가 되었다. 임춘원(2회)은 동 콩쿨대회 클라리넷 부문 우승자이며 우리 취주악부의 산 증인이다. 미국 동부에 거주하는 정순빈(4회, 여)은 피아노 부문 우승자 이다. 부중은 당시 보유했던 피아노 18 대 및 올갠 70 여대와 기악 실습실 등이 갖추어진 명실 공히 음악학교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의 음악 부문의 명문교이기도 하였다. 

한편 합창부도 남녀 학생으로 조직이 되어 최동희 선생( 해방전 일본에서 테너 가수로 활약)의 지도로 그 첫번째 발표회가 바로 유명한 “흘러서 그침 없는 한강의 물과…” 로 시작되는 교가 발표회였다. 잘 알려진 대로 당시의 최복현 교장선생 작사, 유명 작곡가 나운영 선생 작곡이다. 강당에서 작사자 작곡가 두분과 내빈들을 모시고 교사 전원, 남녀 전교생을 앞에 하고 처음으로 교가를 불렀던 그 합창단의 일원이었던 필자도 그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필자가 2 학년이던 1948년의 일이다.

무용부도 학예회 때 마다 관중(남녀 학생)의 이목을 집중하였고 그 당시의 주역의 한 사람이 LA에 거주하는 이인영(3회)이고, 역시 LA 거주 소보영(2회)은 후배 동문들에게 증언할 기회도 없이 애석하게도 연전에 서거하였다.


중국호떡집

용두동 교사에서 공부했던 학생치고 이 호떡집을 모르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집에 얽힌 에피소드도 무궁무진하다. 이 호떡집은 교문을 나서자 마자 오른 쪽으로 몇 걸음만 가면 있는데 그 허술한 판잣집에서 만들어 내는 중국인 부부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래야 호떡에 고기만두 그리고 찐빵(앙꼬빵)이 전부 였는데.

다음은 취주악부 부원 이었던 임춘원(2회)의 회고... 그 당시의 취주악부 부원은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소집되어 연습하곤 했는데 물론 그 특권 남용의 한 예. 수업 중에 상급생 몇 명이(물론 임춘원을 포함해서) 그 중국호떡집에서 (그 조그만 집에도 이층이 있었다) 만두를 먹으면서 잡담을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남녀 다투는 소리가 요란하여 얇은 나무 벽을 쳐서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건장한 소방관이 나타나서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이 호떡집 바로 건너 편에 성동소방서가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 학생들과 취주악부주장 등이 소방서장에게 항의하러 갔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대낮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호떡집에 주저 앉고 있었으면서 무슨 할 말이 많으냐는 서장의 응수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주장 왈, 그러는 당신의 부하는 엄연한 근무 중에 중국 집에 작부를 데려와서 술 마시고 소란 피우고 우리 취주악부 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해서 입이 터져서 며칠 후에 있을 콩쿨대회에 출전도 못하게 됐으니, 이 사실을 당신 상부 기관에 고발하겠다는 통첩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소방서장이 헐레 벌떡 직접 학교로 와서 강당에 모인 전교생에게 사과를 했다.

다음은 윤정현(6회)의 회고... 1학년 때 부중 바로 옆의 부국(부속국민학교) 교정의 국기 게양대에 인공기(人共旗)가 좌익학생에 의해서 한 밤중에 게양된 사건이 있었다. 그 직후부터 학생들의 야경대가 결성되어 매일 밤 각 학년의 각 학급에서 남학생 두 명씩 차출되어 교대로 밤을 새우며 야경을 돌았다. 그 때의 야경대 본부는 교사 뒤에 있던 유도부실이었는데, 그 곳에서 야식을 교대로 먹으면서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휴식을 취하였다. 이 때의 야식이 그 호떡집의 유명한 별미 고기만두였다. 한복판 책상 위에는 큰 쟁반에 담긴 별미 고기만두가 김을 무럭무럭 내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상급생이 야경 순찰로 나간 틈에 휴식중에 있던 1학년, 2학년 하급생들이 한개 두개식 야금야금 훔쳐 먹다가 거의 절반을 먹어 버렸다. 순찰 돌고 돌아와서 절반 이상 없어진 고기만두 접시를 보고 상급생들이 경악할 수밖에. 그래서 집단 기합을 받았는데 키가 크고 몸집이 컸던 하급생이 제일 많이 기합을 받았는데 감히 실명을 밝히자면 당시 2학년 1반에서 몸집이 제일 컸던 럭비선수 조창희가 그 억울했던 희생자였고, 실상 몸집에 관계없이 똑 같이 훔쳐 먹었는데, 실토를 하자면 그 악동들의 하나가 바로 2학년 2반에 있었던 필자였다.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1949년 3월에 문교부 및 국방부령으로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이 정식으로 결성되었고, 초대 부속장교로 황수엽(黃秀燁) 교관이 부임하였다. 넓은 교정에서 남녀 전체 학생을 앞에 하고 우람한 몸에서 터져 나온 그의 부임 제일성은 “본관은 대한민국 육군소위 황수엽이다” 라는 그야말로 우렁찬 사자후(獅子吼)였다. 

남자부 여자부를 통 털어서 연대로 편성, 남자부는 제1대대, 여자부는 제2대대, 그리고 남녀 각각으로 6학년(2회)이 제1중대, 5학년(3회)이 제2중대, 4학년(4회)이 제3중대, 3학년(5회)이 제4중대, 2학년(6회)이 제5중대, 1학년(7회)이 제6중대가 되었다. 연대장은 6학년생(2회) 김여순(金麗淳), 제1대대장은 같은 6학년생(2회) 김원희(金元熙), 제2대대장은 6학년생(2회)유춘실(劉春實)이었고, 중대장은 상급반에서, 소대장은 해당 학급 반장이 겸임하였다. 

교련과목이 정식 학과로 되어 연일 제식훈련, 격투기, 전투과목 등 제반 군사교련이 시작되었고, 각종 행사 때마다 취주악대를 선두로 동대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서울역까지의 시가행진에 걸핏하면 동원되는 등, 공부만 하기도 바쁜 시절에 불우한 시절에 태어난 불운의 학생들의 나날이었으나, 지금은 다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다. 대대장이었던 김원희(2)는 이곳 오랜지 카운티에 건재하며, 좌담회에 참석 예정이었으나 사정으로 그 날 참석을 못했고, 그가 풀어갈 학도호국단에 관련된 비화들은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기록에 남기고 싶다.


임시 휴교(休校), 부산 임시 본교(本校), 서울 임시 분교(分校)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미명(未明), 악몽의 이북 괴뢰군(그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의 남침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우리들이 이렇게 새파랗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남한에서 먼저 북침을 했다고 주장하는 일부의 한심한 학자 정치인들은 어디에서 태어난 이방인들인지 참으로 요상한 일이다. 6월 26일 (월요일) 아침에 등교한 학생들은 온 종일 뒤숭숭한 하루를 보내다가 그 다음 날인 27일 (화요일) 수업이 시작되지 않는 아침시간을 한 동안 보내다가 각기 담임 선생으로부터 기한 없는 임시 휴교의 통지를 받고서 마치 뜻밖의 임시 방학을 만난 듯 모두들 환호하면서 교실을 나섰다. 그러나 이 순간이 많은 학우들과 영영 생이별이 될 줄이야 어느 누구인들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각설(却說)하고, 대한민국의 임시수도가 한반도 최남단 항구도시 부산으로 옮기고, 이어서 몇몇 교사들의 노력으로 부산 시가의 남쪽에 위치한 보수산(寶水山) 중턱에서 서울사대부중 임시본교가 2월 20일에 개교하였다. 이어서 5월에 3대 교장 김영훈(金泳薰) 선생이 부임하였고 그 해 8월에 제3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것이 현재 우리 3회 동문이다. 

이어서 학제 변경으로 6년제 중학교가 각각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리되어서 ‘부중’과 ‘부고’로 개편이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부중'과 '부고'로 분리된 것뿐, 실제로 분리로 인하여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52년 4월 15일에 미수복 수도서울의 본교사에서도 서울 임시분교가 개교하였다. 

미증유의 전란으로 인하여 그 수 많던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인 영재(英材)들을 잃었지만, 반면에 부산 피란지에서 제일 먼저 개학을 한 부중 및 부고이었던 연유로 면학에 불타는 타교의 영재들을 영입하는 전기(轉機)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서울의 임시분교에서도 영재들이 운집, 그렇게 해서 후술하는 명문고교로의 재도약기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附中 六十年史'의 중대(重大) 오류(誤謬)

6.25 전란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을 때 3회는 6학년, 4회는 5학년, 5회는 4학년이었다. 1951년 8월에 임시수도 부산의 보수산 임시본교에서 제3회 졸업식이 거행되면서 3회 졸업생이 6년제 중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그 직후 학제가 변경되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 되면서, 4회가 고교 3학년, 5회가 고교 2학년으로 편입되었고, 6회는 고교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 바로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이다. 

불행히 부산 임시본교나 서울 임시분교로 복학을 하지 않고 타교로 진학했거나 취업전선으로 들어가는 등 복학을 하지 못한 6.25 당시의 재적 재학생들에게 그 후에 비공식 구제대책이 마련되었다. 즉 6.25 당시 6학년이었던 재학생은 졸업식에 참석을 못했더라도 6년제의 졸업장(3회), 5학년은 5년제의 졸업장(4회), 4학년은 4년제의 졸업장(5회)을 주기로 한 임시조치가 마련되어 적지 않는 학생들이 이 혜택을 받았다. 그 당시 그 조치에 직접 관여 했던 교장 교감 담임선생들이 모두 타계한 현재로서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음이 정말 유감이다.

어쨌건간에, 이 ‘附中 六十年史'의 부록(414 페이지)에 있는 5항 졸업생 명단에 ‘통합 부중.고’ 라고 제목을 단 것 자체가 첫째 오류이고, 제3회, 제4회, 제5회의 졸업생 명단 자체가 잘못된 것이 둘째 오류이다. 이 졸업생 명단은 부중 졸업생 명단이지, 부고나 부중고 졸업생의 명단이 아니다. 따라서 ‘제1회(6년제)’ ‘제2회(6년제)' ‘제3회(6년제)’ 로 제목을 달고, 1회와 2회는 6.25전에 졸업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으나, 3회인 경우는 부산에서 6년제 마지막 졸업식에 참석했던 학생과 6.25 당시에 재적했던 학생이 모두 포함 되어야 했다. 그리고 제4회와 제5회는 부산 본교 또는 서울 분교에서 부고를 졸업했던 학생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회는 ‘제4회(5년제)’, 5회는 ‘제5회(4년제)’로 제목을 달고 6.25 당시에 재적했던 학생들의 명단을 해당 회기 졸업생으로 수록했어야 했다. 

6.25 이후에 편입했던 학생들은 모두 부고 졸업생으로서 ‘서울師大附高 半世紀史'에 당당하게 수록되어 있으나, 어려운 난관을 뚫고 입학하여 6.25 때까지 재학했던 천하의 영재들의 이름을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당시 인기 학생중의 한 사람이었던 필자의 이름도 증발하였다. 다행히 일년 늦게 복학하여 '부고' 에는 수록되었지만 부중졸업자명단에는 존재조차 없고, 뒤늦게라도 복학하지 않았던 학생들은 이러한 요행도 없다. 마찬가지 이치로서 6.25 당시 3학년(6회)이었던 학생은 3년제 부중의 제1회 졸업생으로 포함됐어야 했다.

온갖 고생과 심혈을 기울였을 간행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그리고 집필자들의 노고는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정작 부중 역사의 주인공들이, 그 것도 한 두 사람도 아닌 수백명이나 누락된 이 사실을 중대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기대되는 ‘附中 七十年史'에는 이들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한사람의 누락도 없이 볼 수 있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 마지 않는다.


6회 졸업반(卒業班)의 졸업 거부(拒否) 사건

이야기는 건너 뛴다. 대한민국 정부의 환도와 더불어 '부산의 서울사대부중.고'도 서울의 용두동 교사로 복귀, 1953년 9월 1일에 임시본교와 임시분교가 통합되고, 분교를 대표해서 고교 3년생 최광률의 열렬한 환영사, 그리고 본교를 대표에서 역시 고교 3년생 어윤배의 감격에 넘치는 답사가 있었다. 그 직후부터 고3학생 전원이 대학입시 준비로 돌입했다. 매일 아침 조회도 없이 곧장 수업으로 들어 갔고 지망 대학의 선택 과목을 따라 특별 수업이 개시되는 등, 교사와 졸업반 학생 전원이 비상태세로 들어갔다.

그런데 임시분교 시절부터 용두동 인근에 진을 치고 활약하는 타교 불량배 학생 및 깡패들의 집단이 있어 부중 부고의 여학생들을 괴롭혔었다. 그러는 중에 부산 본교가 복귀하였고, 이 중에는 싸움이 본업이라고 할 정도의 주먹이 아주 센, 이들 깡패들도 감당 못할 정도의 열혈 학생들이 많았다. 1953년 겨울철로 접어 들면서 짧은 해는 더 한층 짧아져서 졸업반 남녀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설 때는 캄캄한 칠흑의 밤이었다.

귀로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동네 불량배들의 행패에 이들 의혈학생들이 드디어 도전장을 보냈다. 엄동설한의 한낮에 성동역과 학교 교정 옆 담 사이에 있는 넓은 개천 한 복판이 지정된 결투장이었다. 한 겨울이라 개천은 말랐고 평평한 하상(河床) 은 결투장으로는 안성 맞춤이었다. 싸움의 명장 4 용사와 함께 적지 않은 고3 학생들이 수업시간을 몰래 빠져 나와 이 세기의 대결을 목도하려고 모여 들었다.

그런데 양측 대다수가 어울리는 난장판의 결투를 피하기 위한 신사 협정이 제안되었다. 양측에서 대표로 한 사람 씩을 뽑아 결투를 하고 그 결과에 양측이 무조건 승복하기로 하고 상대방에게 인선 지명권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측에서는 4명 가운데 가장 얌전하고 모범생처럼 보이는 '이영중'을 상대측에서 지명하였다. 

관전자중의 한 사람인 서영해가 그 날 아침 형이 소유하는 권총을 몰래 훔쳐가지고 나와서 그 결투장에서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빼들고서는 만일 상대방 깡패 측에서 ‘룰’을 어길때에는 모두 쏴 죽인다는 엄포의 경고를 신호로, 드디어 혈전이 시작 되었고 이영중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상대방을 철저히 때려 눕혔다. 결전은 끝났고, 그렇게 해서 여학생 희롱사건은 일단락 됐는가 했는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중상을 입은 상대방 불량배의 아버지가 관할파출소 소장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관할서인 동대문경찰서 본서로 보고가 되고 이 사건이 본서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김영훈 교장과 관련 주모 학생 4명의 담임선생이 동대문서로 불려가는 등 사건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동대문서로 부터 무조건 관련 학생 4명을 퇴학시키지 않으면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최후 통첩을 받고서, 교직원회의에서 난상토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이 4명 학생들의 담임이었던 태선생이 가장 강력하게 퇴학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과 졸업을 한달 앞두고 의리의 사나이들 김성섭, 이달우, 이영중, 남궁철 4명이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 관련 학생중 3명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김영훈교장과 담임이었던 태선생도 타계를 했으므로 필자는 그들의 실명을 아예 여기에 거명하였다. 살인사건에도 결과만으로 판결을 하지 않는다. 결과에는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원인과 결과를 철저히 검토하여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진다. 하물며 인명과는 무관한 상해사건이며, 그 것도 동급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경고를 주는 목적으로, 또한 혈기 왕성한 젊은 학생들의 의협심으로 불량배 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것인데, 여러 해를 동고 동락했던 급우들에게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취해진 학교측의 가혹한 조치에 남녀 200여 졸업반 학생들이 분개하고 드디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고 한달 후에 거행될 졸업식의 참석을 거부하고 졸업장을 받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사상 초유의 일로 기록될 대사건이 벌어질 찰나였다. 크게 당황한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늦도록 교직원회의가 열렸고 그 다음날 아침 졸업반 남여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대교실(고3녀교실)로 드디어 김영훈교장이 나타났다. 

매끈한 화술과 노련한 인상 그대로 그러나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설득을 시작한 김교장, “퇴학 당한 학생 김성섭의 아버지와 나는 친구간이다. 그가 아들의 퇴학 소식을 듣고 교장실에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 응접소파에 주저 앉고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안주머니에서 아들의 사진을 꺼내 들고는 ‘이놈아 ! 네가 학교 온 날이 많으냐 ? 내가 더 많으냐?’ 하면서 소리 내고 울 때에 나도 함께 울었다” 했을 때 흥분했었던 학생들도 조용해 졌다. 

이어서 하는 말, “나 인간 김영훈으로서는 절대로 이 4명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교장 김영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렸고 안경을 벗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간간히 이어 갔다. 만장의 학생들도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혈기는 있으되 직선적이고 단순했던 학생들을 교묘하게 설득해 나갔다. 그리하여 졸업반 학생들이 드디어 흥분을 가라 앉히고 한 달후의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게 되어, 건국후 처음으로 있을 뻔 했던 미증유의 사건이 터지지를 않았다. (이상은 이기준, 윤정현, 이완규(6회)의 회고)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옳았던 방법이고 결말이었을까? 그 당시의 김교장의 나이보다도 20년이나 더 먹고, 담임선생의 나이의 갑절이나 더 먹은 이 나이가 되어 그 당시를 회고해 본다. 앞 길이 구만리 같았던 젊은 학생들의 장래를 그렇게 망치는 해결책 밖에 없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되풀이 해도 자기들의 보신책에 급급했던 나머지, 해당 학생들을 희생시키고 공권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교직을 걸고 목숨을 거는 각오로 끝까지 학생들을 감쌌어야 했다. 진정한 교육자들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은사였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과오를 덮고 항상 스승으로만 미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문교 천하부고(天下附高)로의 재도약(再跳躍)

1954년 3월 2일에 드디어 졸업을 마친 6회의 졸업생들(남자 140명, 여자 80명)은 일부 취업학생을 제외하고 일제히 각자가 목적한 대학입시(入試)에 응시했다. 그 해의 대학 입시는 전국의 고교 졸업 직후에 시행되었다. 6.25 전의 특차(特次)로 입학했던 수재들과 6.25 후의 피난 본교와 서울의 분교로 입학했던 천하의 영재(英材)들로 이루어진 6회 남녀 졸업생들은 스승들과 후배들의 여망에 훌륭하게 보답하였다. 남녀 졸업생 200 여명중, 110 여명이 서울대에 합격, 그리고 명문 사립인 연대, 고대, 이화여대에 합격, 졸업생의 거의 전원이 일차 대학에 진학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렇게 해서 6.25 동란으로 흩어졌던 명문교의 명성을 되찾고, '천하부고'로의 재도약이 시작된 것이다.

(모교의 발자취 - 제1회 끝. 제2회는 동창회기 7회부터 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1 임효제





이완규 선배님께서 하시는 회고록이.. 
저희 1953년에 부중에 입학한 저희 11회에도, 가물 가물 기억 나는 일들이 더러는 있습니다. 
참 오래 전 이야기인데... 훌륭한 부고의 산 증인이십니다. 
후배인 저희들도 매우 잘 읽었습니다. ^^*

09·08·13 12:12 

6 이완규




임효제후배님: 
1953년에 부중 입학이시면 본문(제1회)에 나오는 부산임시본교 또는 서울임시분교중 한쪽의 기억, 그리고 1953년 2학기 시작때 부산본교와 서울분교의 합병광경도 직접 경험하셨군요. 정말 백만원군을 얻은듯 용기 백배입니다. 실은 여기에 전재를 시작하면서 지난 이야기 그것도 수십년전의 모교 이야기 회상 따위에 별로 관심을 가질 동문들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김호중관리자님께 사전 의논을 했는데, 김동문의 절대적인 지지로 실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금명간에 제2회 본문이 게재될것이며, 매주 초에 3회 그리고 4회(최종회)도 게재될 것입니다. 용기를 북돋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임후배님을 비롯 많은 동문들께서도 학창시절의 회상, 에피소드 등 감춰진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서 부고 사이트에 게재하시면, 언젠가는 후배님들 가운데 유지가 나타나셔서 한데 묶어서 잘 정리한 '모교의 야사'를 만들어 주실 날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09·08·13 12:13 




15 김호중







17회 안선미 동문이 전해준 답글입니다. 

Thank you for the precious article with valuable information. I enjoyed reading it. 
Sun Mi Ahn

09·08·13 12:14 

15 김호중


남혜우(15), 박연숙(21), 이승관(15) 동문 등 세 분이 좋은 글을 잘 읽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는 내용으로 비슷한 답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09·08·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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