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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함대2 (2).jpg

 

 
용암포는 신의주 에서 남서쪽으로 70리, 압록강 하구로부터는 십리 상류 남안에 있는 포구로서 압록강이 용암산 밑으로 휘돌아 황해 바다로 통하는 곳이다 러시아가 황해 바다로 진출하는데 는최적의 포구로 선박의 출입이 자유로운 입지를 갖고 있었다

파브로프와 탁지부대신 이용익의 장난으로 러시아가 대한 제국에 돈을 주고 사려다가 일본의 압력이 거세지자 약속을 깨고 1903 년 러시아가 이곳을 강제 점령 하면서 조차를 강제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 하였다
이에 열강이 반발하여 개항을 요구 하자 한국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조차 계획을 취소하고 관계 했던 대신들 까지 바꾸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였다. .

그리하여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분위기가 험악해지었다 .
양국은 충돌 직전에 러시아 육군 대신 크로파트긴이 일본을 직접 방문하여 중국 여순에서 용암포를 포함하여 서로의 여러가지 현안을 협의 하자고 제의하였다 .

일본측도 어전회의를 열어 러시아의 이런 제의를 받아 들여 러시아측에 제시할 협안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
1. 두나라는 한국과 청나라의 독립을 보장한다
2. 러시아는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승인하고 대신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도 경영권을 승인한다
3. 한국철도가 만주와 중국철도와 장차 연결 할 예정인데 러시아는 이를 막지 않아야한다 .
4. 한국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 정치를 개혁 하여 선정을 베풀 도록 조언 조력을 할 예정인바 러시아는 일본 정부의 한국 정부를 개혁 시키는 일이 일본의 전권 사항으로 인정 전면 승인한다 .

일본의 협안 이라는것 은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 정부를 사이에 두고 균등한 잇권을 챙기자는 구실하에 일본 당국의 우월권을 확보 하려는 얕은 수작이었다 .
이러한 제의를 러시아가 그냥 받아 들일 이유가 없었다 .

러시아는 다른 대안을 내 놓았다 .

그 대안은 다음과 같다 .
1. 청나라 문제는 러시아에 맡기고 한국만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자 .
2.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적 , 경제적 우월권을 승인하되 일본은 한국 영토내에 군사목적으로 영토를 사용 해서는 안되며 한국 해안선에 어 느나라 배이고 자유 왕래를 방해하는 일본 군사 시설을 해서는 안된다 .
3. 한국의 영토를 북위 39도선을 깃점으로 그 이북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중립지대로하자
5. 일본은 만주를 포기한다 .

청나라와 대한 제국을 놓고 두 나라는 제멋대로 요리 하려 들고 있었다 .
러시아 안에서 나오는 한반도 39도선 분활론은 더욱 가관이었다 .
지금 우리나라의 비극의 원천인 38선의 모태는 이때 부터 거론 되었으니 지금의 휴전선이 결코 우연만은아니었다 .
우리나라의 허리를 끊는 39도선의 중립화 첫 논의는 과연 러시아 단독안이었을까?
그것은 결코 러시아 만의 단독 창안이 아니었다 .

그 근원을 따지자변 민영환이 참석도 했었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러시아 황제 대관식때 르바노프 러시아 외무 대신과 일본의 야마가다 특사와의 밀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

이때 일본이 먼저 38도선을 그어 놓고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차지 하자고 제안 했던 장본인이었다 .
그때 러시아는 일본의 38도선 분활 점령을 거부 했다 .
일본은 그때 일본의 제의를 거부 한것 모양으로 이번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39도선 중립론을 거부하였다 .

이렇게 되니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심상치 않게 발전하였다
한국 정부는 용암포사건으로 일본과 러시아 사이가 험악 해지자 아무래도 불안하였다 .
한국 영토내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한바탕 전쟁을 하게 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배터지는격이 되고만다 .

조선 정부는 양국에 밀사를 파견 하였다 .
러시아에는 현상건이 파견되었다 .
현상건은 일본을 견제 하기 위하여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한국을 중립화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이에 러시아는 어느 정도 찬의를 표하였으나 문제는 일본이었다 .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이미 결열 된 사항도 모르는 조선 정부는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력 만 믿고 있었던것이다 .

러시아 정부는 현상건에게 일본도 설득 하라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할일 없이 돌아 온 현상건은 고종에게 보고 하였고 고종은 다시 현영운을 밀사로 일본에 파견 하였다 .
역시 내용은 조선에서 러시아와 충돌을 막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

그러아 일본은 러시아 와는 달리 냉담 하였다 .
일본정부는 현영운에게 즉답을 할수 없으니 주 일 공사에게 별도로 통보 할 것이라고 하면서 돌려 보내었다 .
다음 날 주일본 공사관 고영희에게 전달 된 회답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애당초 부터 자위력도 없는 한국이 국제법만을 내 세워 중립을 하겠다는 것은 받아 들일수 없다 .

한국이 중립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재정 을 혁신하고 병제를 개혁하며 스스로 국력의 충실과 부강을 도모 해야 할 것이다 "
일본과 러시아의 양대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려던 한국에게 일침을 놓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
경제력도 ,군사력도 없는 주제에 무슨 중립이냐는 뜻이다 .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독립자격도 없는 조선이 경제력도 없고 군사력도 없으면서  중립국 대우를 해달라는 얘기와 다른게없다 .
그러나 한반도에는 중립이란 있을수 없다는 진실을 이미 알아 챈 일본의 태도를 간파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한심한 작태를 일본이 비웃고 있는 줄 모르고 대한제국 정부는 러일 양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

결국 일본과 러시아의 이러한 외교적 갈등은 인천 앞바다에서 터지었다 .
어리석은  백성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고있는 사이에.....
인천 앞바다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 2척과 일본 함대사이네 교전이 발생 된것이었다 .
이 싸움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이 침몰하였다.
일본의 첫 대승이었다 .

한국에서 이렇게 교전이 있을때 러시아는 중국 여순항을 점령 해 버리고 청나라의승인을 받아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그런데 여순항에 정박 된 일본 함정들이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킨다 .
결국 두 나라는 선전포고에 이르렀다 .
소위 노일 전쟁의 서막이올려진 것이다.
노일 전쟁의 첫 개전은 한반도에서 발생 되었다.

한반도와 중국 만주 문제가 직접 도화선이 된 노일전쟁의 무대는 한국 정부의 중립화무기로 막아 보려는 노력이 무산 된것이다 .
2월 3일 중국 여순에서 첫 포성이 울려올때 러시아 함대를 바다 속에 수장 시킨 일본군은 때를 놓질세라 인천에 상륙하여 노도와 같이 서울로 입성하였다.
일본군의 주한 공사 하야시는 외부 대신 이지용의 안내로 고종을 만나 러시아와의 개전을 설명하고 한국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2 월 12 일 러사아공사 파브로프가 서울을 아무 소리 없이 떠났다.
거리에는 일본군만 북적이었다.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게(林權助)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은 한일 의정서를 작성하여 교환하게 된다


그요지는 다음과같다 .
1.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과 일본은 친교를 밎되 일본은 한국 정부의 혁신을 도운다
2.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
3. 일본은 조선의 영토를 보장한다
4. 한국을 타국이 침범 하거나 한국내에 내란이 일어 날 경우에는 황실과 나라를 지켜 주기 위하여 일본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 해 주도록한다 . 한국은 일본의 행동을 지원 해 주기 위하여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 한국내 군사 작전상 필요한 경우 토지 수용도 감수할것
5. 한일 양국은 상호 승인없이 제3국과 체결 하지못한다.
6. 기타는 수시로 일본과 한국 대신들이상의하여 추인한다 .

이 헙정 내용은 완전히 대한 제국의 주권을 무시한 일방적 조약이었다
여론이들 끓었다 .
이 한일 의정서를 작성한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이지용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잠간 알아 보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외부대신 이지용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북 완산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5대 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며 이희하의 아들인데 완영군 이재긍에게 입양되었 으니 고종의 종질이 된다.
188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그뒤 1895년에 는 칙명으로 신사 수십 명과 함께 일본을 유람,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 왔으며, 1898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궁내부 협 판이 되고 다시 이듬해 주일 전권공사를 거쳐 의정부 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 전권 공사로 부임하였다.

관찰사 시절 그는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는 등 결코 깨 끗치 못한 인물로 통했다. 그의 할아버지 이최응은 매관 매직으로 재물을 모아 9개나 되는 곳간에 온갖 보화를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했는데, 이지용도 그런 집 안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한편 주일공사를 여러 차례 지낸 덕에 주한 일본 공사관과 밀통하였고 결국 의정서 쳬결시에는 일본으로 부터  1만 엔의 로비 자금을 뒷거래로 받아 먹었다

누가 그랬는지 이 헙정을 체결한 외부 대신 이지용과 참서관 구완희의 집에 폭탄 까지 던지는 사태가 발생 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약은 체결 되었고 이를 성사시킨 기념으로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

이등박문이 서울에 머문 기간은 10 일이었지만 그효력은 대단했다 ,
그 때문에 조정에는 친일 세력이 두각을 나타 내기 시작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지용이보빙사로 일본에 파견 되었다.
일본은 한일 의정서 내용대로 군대를 전국에 재배치 하고 군대가 필요한 땅도 서슴치않고 어명이라며 수용하여 군용지로 차지하였다 .

토지는 군용지로 변했고 통신은 군사용으로 전용되었다.
경부선 경으선 철도도 군사용으로 전용되었다.
이후 2월 25일경부터 일본 군마와 병사들은 경성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입경 일본군의규모는 5만여 명으로 군마가 1만여 필이었는데, 대궐 주변과 각 성문, 창덕궁, 문희묘, 원구단, 저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모두 18개처를 군영으로 삼고, 서문 밖 민가 수백 채를 헐어서 마굿간을 만들었다.

또 5강(한강, 동작진, 마포, 서강, 양화 진) 연안에 천막을 치고 숙영지를 만들었으니 밥짓는 연기가 수백리 까지 퍼졌다.

또 3남 각 지방에도 일본군이 속속 도착하여 각처에 전선을 가설하고 병참을 설치했 다. 일본군은 동래에서 대구로, 남해에서 남원으로, 군산에서 전주로 향하여 세 방향으로 배치하였고 또한 북쪽으로는 평양, 원산· 성진까지 가는 곳마다 민가 에 주둔하거나 군수에게 군수품을 청하니 민심이 뒤숭숭하였다

이어 육군 중장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 川好道)가 새로 사령관에 임명되어 서울에 부임하였다.
하세가와는 부임하자 마자 군용 전선 및 철도선 보호라는 명목으로 치안유지를 주둔군이 담당한다고 조선 정부에 통고 하더니, 1905년 1월에는 서울과 그 주변의 치안경찰권을 조선 경찰 대신 일본군이 장 악한다는 군령을 발포하였다.
군사방위권, 치안권이 모두 일본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 가는 순간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동학란의 제2교주인 최시형의 처형후 그의 3 세인 손병희와 일본으로 망명했던 송병준, 이용구 두 사람을 귀국 시켜 친일 색채가 농후한 일진회를 설립 하게 하였다 .
어용 시민 단체를 만들어 저희들이 하는 짓을 돕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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