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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선조는 차선의 결단을 결심 하였다 .

비변사의 의견도 묻지도 않고 전격적 으로 권율을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 다시 외직 발령을 내렸다.

 

 

영의정 류성룡과 좌의정 김응남이 왕께 아뢰 었다

 

 

"전하 , 권율은 명나라나 왜국 모두 강화 회담에 방해 된다 하여 우리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대상 인물중 첫째 가는 인물이온데 그를 다시 외직인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시면 어찌 하시려 함이오니까?"

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 하였다

 

 

 

이에 왕은 두사람에게 언성을 높여 역정을 내었다

"영상 ,과인이 따로 결심 한바 있어 그를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한것이오 . 영상 들은 지금 기호 지방의 민심이 흉흉 한데 조정의 대책이 무엇 이라고 생각 됩니까

 

 

 

.더우기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 시절 그 공적이 지대 한 인물 로서 앞으로 있을지 모를 왜군의 침공을 막으 려면 충청도 지방의 방비를 하게 할수 있는 중요 인물입니다 .

 

임진년 조령과 죽령에 대한 대비 소흘로 도성이 왜군에게 빼앗 겼던 일을 생각 해 보시오

 

 

과인은 권율이 비록 명과 왜국의 표적 인물이라고 하는 말은 누차 들었지만 그에 대한 전부를 모르는 자들의 모함이라 생각 되오 . 그의 성격이 강직한것이 흠인데 , 장수가 그런 기개가 없다면 어찌 십만 대군을 호령 할수 있겠소?

 

그래서 최전방에 내보낼것을 삼가고 충청도 순찰사로 보낸 것이니 이에 대하여는 이론을 제기 하지 마시오."

 

 

임금의 강한 발언에 더 할말을 잊고 있다가 김응남이 다시 아뢴다

"전하 지금은 권공을 다시 도원수로 임명 하는 것은 때가 아닌것 같습니다. 왜국과 강화 회담이 결열되어 불안한 판국에 권율공 까지 전선 가까이 충청도로 내 보내는것은 기름에 불을 지를는것이 아니겠아옵니까?"

김응남이 조금 거슬릴 정도 말 까지 하였다

 

 

"그래서 과인이 권율을 경상도 순찰사로 보내지 않고 제 2선인 충청도 순찰사로 보낸 것 아니오?. 두고 보오...."

선조의 용안이 편치 않았다

"............"

 

 

두 영상은 왕의 확고한 의지에 할말을 더이상 잊고 물러 나왔다 .

 

 

 

선조 29년 정월 열흘 권율은 충청도 순찰사 명을 받고 공주 감영으로 떠났다.

 

 

오래간 만에 전진(戰塵)을 씻고 조정 대신들과 지내던 그동안 일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었었을 른지 모른다

그는 공주가 까지 내려 가는 길에 공주 감영 에다 미리 마중 나오지 말라 지시 하고 피폐된 농촌 실태를 직접 점검 하며 내려갔다.

 

 

공주 감영에 부임 하고 이틀 후 민심 파악을 위해 사복을 차려 입고 통인 한명을 데리고 저녁때 공주 읍내를 두루 살펴 보았다 , 주막에 들려 잠간 쉬는데 주객들 중 한사람이 권율의 귀를 띄이게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임금과 조정이 무능 한 것이 주 화제 내용이었다

 

 

"얘 , 네가 가서 저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 누구 인가를 알아 오거라 , 눈치 채면 않된다"

통인 소년이 잽싸게 알아 왔다 .

"저 사내 들은 부여 근방에 있는 도천사(道天寺)를 무대로 드나드는 건달 들이옵니다 "

" 저자 들에 대하여 아는 대로 얘기좀 해보거라"

"그들은 동갑회 (同甲會)라는계를 만들어 고을에서 시키는 부역도 응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대 가는 것도 거부 하고 마을에서 저렇게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라 합니다"

 

 

"그럼 저자들의 우두 머리가 뉘든고?"

"한(韓)씨 성을 가진자 라는데 이름은 잘 모르고 소문에 의하면 예전에 벼슬을 하다가 그만 두고 수시로 저 건달 들과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자들이 그동안 민가에 폐를 얼마나 주었든고?"

"저 사람들은 절대 민가에는 피해를 주지않습니다"

"음......."

권율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동헌으로 돌아 오면서 그동안 조정이 백성 들에게 남겨 준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할일이 너무 많다.....외부 전쟁도 중요 하지만 내부의 썩어 가는 관료 사회의 개혁이 없이는 더 큰 환란을 막아 낼 방도가 없다) 권율은 순찰사로 있는 동안 할일을 곰곰히 관찰 하며 며칠을 지났다

 

 

 

소서행장의 심복 부하 요시라는 경상 우수사 김응서를 만나러 의령의 김응서 진을 방문 하였다

 

 

요시라는 그 능숙한 조선 말로 김응서 에게 말한다

"관백께서 귀국이 너무 성의가 없다고 하는데 이러다가는 관백의 성격 으로 보아 또한번 조선 침공을 시작 할것이 분명 합니다.전번에도 황진 같은 미관 말직자만 보내었 다고 화를 내고 계신데 정말 전쟁을 또한번 치르실 의향입니까?"

은근히 협박 까지 하였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그대로 비변사에 보고 하였다.

김응서가 보낸 보고서는 비변사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었다.그 이유는 조선 4도를 일본이 떼어달라는 허무 맹랑한 요구 조건은 철회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담 결열을 제일 반가와 한것은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이었다

 

 

그들은 다시 재침준비에 바쁜 데도 조선의 비변사는 적정(敵情) 파악을 할 방도 라고는 김응서 밖에 없었다

 

비변사 회의 에서는 한산도의 조선 수군이 방비를 더 철저히 하도록하고 구례 현감 이원춘을 조방장으로 하여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경상우도 감사 서성(徐省), 경상우도 병사 김응서 에게 경상도 경비에 철저히 하라는것 이외 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쏟아지는 비변사의 지시에 도원수 직을 맡은 우의정 이원익은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막막하기 만 하였다.

권율은 충청도 전반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세가지 사항을 수령들에게 지시 하였다 .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에 포를 쏠수 있도록 포루를 만들것 .죽령(竹嶺)정상에 토성을 쌓을것. 단양군 청풍부, 풍기군 등에 병사들을 주류 시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신원 뜰 들판에는 둔전(屯田....주둔병의 양식 자급 자족용 밭)을 설치 개간 할것 등이었다

 

 

중요한 비변사 회의가 열렸다

이자리에는 영돈녕 부사(領敦寧府事)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 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 정탁, 경림군(慶林君) 김명원 , 우의정 겸 도원수 이원익(李元翼)등 쟁쟁한 조신 들이 모두 참석 했다

 

 

선조는 왜적 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에 따른 각도 수성(守城)대책과 백성 들의 구호 대책에 대하여 의론 하였다.

 

 

이원익이 먼저 입을 열어 임금께 계청하였다

"전하 신은 도체찰사로. 우의정 으로 도원수로 민사와 병사를 겸직 하는 관계로 급한 일이 생기는경우 두 업무를 모두 한번에 수행한다는것은 불가 하나이다 ,

 

더구나 병사 업무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 하는 중요한 업무인지라 신이 겸직하기에는 부적당 하옵니다

 

차제에 일전에 호조 판서로 있다가 충청 순찰사로 나간 권율공을 다시 도원수로 임명하심이 타당 한줄 아뢰옵니다 "

".........."

 

 

이원익이 권율을 다시 도원수로 하자는 느닷없는 계청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 지었다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두수가 말한다

"전하 명나라 군이 거의 철수 하고 지금과 같이 조선군의 역활의 중요 할때가 없나이다 .그러므로 권율 같은 명장을 충청도 순찰사로 썩힐수는 없습니다 ,

 

다만 권공이 성격이 좀 강직한 면이 있어 그를 시기 하는자 들이 모함을 일 삼는데 그러한자들은 나라를 쓸어 드뜨리려는 역적 보다도 더 한자들 입니다. 이 시기에 왜적을 막아낼 장수는 권율밖에 없나이다 부디 재 기용하소서"

 

간절히 계청 하자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말들이 없었다

 

 

윤두수는 자기가 김응남에게 말 했던것이 권율의 도원수직 박탈까지 갔었던것에 대하여 미안감을 갖고 있었던 터이었다

 

 

권율 이라면 쌍심지를 돋우던 김응남도 눈만 내리 깔고 있었다

 

 

 

선조는 권율을 다시 도원수로 다시 임명했다 .

조선 조정은 강화가 결열되자 왜적이 다시 처들어 올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었지 적정 파악이 너무나 어두웠다

 

 

왜군 동태의 정보는 김응서와 내왕이 잦은 요시라라는 자 에게서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요시라 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는 대마도 출신 으로 왜란 전에도 조선에 자주 드나 든 인물이었다 . 조선어에 능통하여 소서행장이 자기의 심복으로 데리고 통역 군관으로 쓰고 있었다.

 

 

그는 왜란이 정체에 들어 가자 김응서 진을 자기집 문턱 드나들듯이 하면서 조선측에 일본 정보도 조금씩 흘려 주고 한편으로는 조선측의 정보도 수집해 소서행장 에게 보고 하였다

 

 

그가 얼마나 조선 군관 들과 친하게 지냈 는지 조정 에서 조차 그에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정 3품벼슬까지 주어 그를 회유 할정도이니 조정이 얼마나일본의 정보에 대하여 목말라 했을 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체찰부사(副使)한효순(韓孝純)이 김응서와 같이 요시라를 만났다

그가 주는 정보를 듣고 놀라 왕에게 긴급히 보고 하였다 .

가등청정이 내년 2월경에 재침할 계확을 구체화 하려고 조선에 다시 나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변사회의에서는 선전관을 김응서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요시라에게 뇌물이라도 써서 라도 왜적과 접촉을 강화하여 적의 재침 부대명칭, 시기, 규모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고 하라고 지시 했다.

 

 

 

권율이 도원수로써 6 개월 만에 원수부로 돌아와 보니 모든것이 너무 많이 달라저 있었다.

 

 

영의정 류성룡이 제안하여 역점 사업화 되어 있는 소위 堅壁淸野據險積蓄之策... 읍성은 비워놓고 백성들 모두 모두 산성에 들어 가있게 하고 양곡도 모두 산성에 보관토록 하는 동시에 읍성이 있는 들은 모두 비워두어 왜적이 발부치지 못하게 하는 계책이라 하여 강행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산성을 피하여 거리를 방황하는 걸인들로 변하여 있었다 게다가 군량미 조차 제대로 댈수 없어 배곯은 조선군 도망병이 도처에서 도둑으로 변하여 나라 안을 휩쓸고 다닐정도 였다

일선에 나가 있는 도원수 권율과 이순신 에게 까지 엉뚱 하게 불똥이 뛰었다.

 

 

 

조정 에서는 왜군이 철수 않고 있는것은 권율과 이순신이 직접 전투에 임하지 않고 관망만 하는데 있다고 하여 둘을 싸잡아 비난 하였다 .

 

 

권율은 이몽학 난 진압 으로 눈코 뜰새가 없다 싶이 했지만 사실 이순신은 2년 동안 전투를 한번도 치루지 않았다.

 

 

명나라가 왜군을 치지 말라는 권고도 있었지만 왜군도 이제는 만만히 볼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함정이나 화력이 조선군과 상대 해 볼만큼 신장 되어 있기 때문 이었다 .

 

 

조정은 명나라 군이 그동안 거의 철수 한 상태 이므로 명나라 눈치 볼것없이 밀어 부치기를 원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동안 왜군이 남 해안을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조선 백성들 중 먹고 살수 없어 부왜 하는자가 늘자 이들을 섬으로 이주 시켜 왜군 에게 조선군의 정보를 새지 않도록 조치 하고 ,무기 제조와 병선도 확충 토록 하였다 .

 

또 수군 들이 배 위에만 있을수 없는 상태로 사기 앙양을 위해 제승당을 지어 놓기도 했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이몽학난 진압소식을 그동안 다 듣고 있었다.

 

 

이몽학난은 백성 들에대한 지방 수령들의 악정의 원인도 있었지만 그동안 천인 으로 천대 받던 무학 무식한 자들에 대한 차별도 반란의 원인 으로 보고 수군 내에 천인 들에 대한 특별 배려를 하였다.

 

 

전투에 나가서는 양반 출신들 보다 천민 출신 병사 들이 더 싸움을 잘했기 때문 이었다.

 

 

 

군인은 전투가 없으면 빛을 볼수가 없다 . 공을 세워야 앞날이 약속 되는 그들 대로의 속성을 발휘 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더구나 수군은 육군과 달리 한번 동원 되면 승리 해야지 패 하면 집단으로 물속의 고기밥 이되고 만다.

 

 

 

이순신이 함선을 함부로 출동 못 하는데는 그나름 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조정은 왜군들이 일본 본토와 대마도 에서 부산까지 저의집 문턱 드나들듯 하는 데도 무엇 하느냐는 것이다

.

이순신은 일선 사정도 잘 모르는 대신들의 입방아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권율도 이러한 이순신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어 두 말 않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각종 음해의 말들이 오갔다

 

.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고 나더니 오만 방자 해저서 조정의 지시가 없는데도 남부 백성들을 섬으로 강제 이주시켰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왜국 간의 협상에 따른 평화가 닥아 올경우 더이상 군비 확장이 필요 없는데도 무기를 제조하고 함정을 더욱 늘리는등 예산만 낭비를 일삼고 있다는 것과 또 통제사 본영에 호화 건물을 지어 허울만 좋게 제승당이라는 건물을 지어 자기가 마치 군주라도 된양 거들먹 거린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군 내부에 파당을 만들고 천민을 우대 하여 병사들간의 위계질서도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왜인 요시라가 찾아와 가등청정이 불원 일부 철수 했던 대군을 다시 동원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를 김응서에게 주었다 . 김응서가 조정에 이사실을 가감없이 보고 하자 조야가 다시 뒤숭숭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금에게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를 봉쇄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알아 내어 처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선조는 권율과 이순신을 마지막 보루로 알고 아끼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순신의 소문과 행동에 대하여 의구 심이 생기었다 .

 

 

선조는 전라감사 황신(黃愼)을 불러 이순신의 소문 내용의 진상을 정확히 알아 오도록 하였다.

 

 

 

황신은 그길로 이순신을 만났다 .

 

왕의 지시로 오지 않은것 처럼 시침이를 떼고 소문 내용을 하나 하나 관찰 하면서 이순신 에게 왜군 재침에 대한 대책을 슬며시 물어 보았다 .

 

 

이순신은 김응서진을 드나드는 요시라를 경계 해야 한다고 하였다 ,

 

요시라라는 자는 이순신을 부산 앞바다 넓은 곳으로 끌어 내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군은 조선 배와 비교할수 없는 군함을 건조 했을 뿐만 아니라 조총에만 의존 하던 수군 장비를 대포로 바꾸어 그 위력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않된다는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수군이 만용을 부려 망망대해로 나간 다는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으니 나갈 수없고 이제는 지세와 조수의 힘을 빌려 전투 하지 않고는 적들과 대적 하기 힘 든다는것이었다.

 

 

 

황신이 이순신의 얘기를 듣고 보니 하나도 그른데가 없었다 .

 

 

이순신의 의견을 보고 하러 서울로 도착 하니 벌써 김응서의 장계를 본 임금이 황신의 얘기도 듣기전에 조정은 더욱 술렁 이기시작 했다.

 

 

"이순신은 겁쟁 이야"

 

 

"통제사가 되더니 자리만 지키려 한다, 게다가 왜놈 들로 부터 뇌물을 몰래 받았 는지 왜놈 들을 치려 하지 않는다"

각가지 말이 난무 하였다 ,

 

 

대신들중 서인 출신들이 들고 일어 났다.

 

소문 내용을 규명하여 이순신을 처벌 해야 한다는것 이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권율도 대구 원수부 에서 이소문을 듣고 있었다 .

그는 이순신을 도원수의 명예를 걸고 아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침 전선 시찰을 마치고 들린 체찰사 이원익에게 이순신의 뜬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 하였다

   이순신관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군기가 엄할뿐만 아니라 장졸간에도 인화가 원만 하여 단결력이 강한것과 백성들에게도 인심을 얻어 잘따른다는것과 너무 신중한것이 좀 흠이 있으나 그정도는 이해 할만 하다고 설명하였다.

 

 

 

선조는 이원익의 말을 듣고 나자 사헌부 보고와 먼저 들어온 김응서의 보고를 비교 하고 당황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소문의 내용이 극히 불순하니 이순신의 충성도가 의심되니 그를 일단 잡아 올려 국문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정에서는 1월 25일 금부도에게 나졸들 십여명을 시켜 이순신을 체포 하여 서울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의정부로 끌려온 이순신에게 국문관인 윤근수가 물었다.

"죄인은 그동안 국록을 받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적들이 대마도에서 10만병력을 동원 재침 하려고 출동 한다는 정보를 듣고도 나가려 하지 않는가?

 

듣자니 죄인은 왜군 장수 인 가등청정의 뇌물을 받고 나가지 않는다는데 죄를 인정 하는가?"

하고 국문하자

"소인은 왜적들을 칠 시기와 장소가 합당치 않아 나가지 않은것 뿐이지 결코 소문대로 뇌물이나 받고 나가지 않은 일은 없소이다."

하는등 여러가지로 말을시켰으나 이순신을 탓할 근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윤근수는 명석한 사람이 었다.

 

조정 대신들에 입에 오르나리는 소문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어명을 규명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근수는 선조에게 고문 까지 하여 알아 보려 했으나 소문 근거가 터무니 없어 알아 볼수 없다고 보고 하였다.

 

왕은 육조 삼사 대관들을 모아 놓고 이순신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판중추부사 정탁이 이번에도 나섰다.

"이순신은 명장입니다.

 

뇌물이나 받고 있을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

 

그가 가등청정의 대군을 맞아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것은 부산이란 지역이 지형지물이 없는 망망대해로 잘못하면 적의 꾀임에 빠저 전멸당할까 두렵기 때문일것입니다

 

 

 

이 사실은 도체찰사 이원익공이 대구에 있을때 도원수 권율과 상의 한결과 같은 결론이었다 합니다 .

뇌물건도 평소 검소하게 지나온 그의 행적을 도원수가 입증하여 주고 있다 합니다 .

 

뇌물이나 받고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것이옵니다 .

 

그러하오니 이번 한번만 용서 하여 주시고 뒷날 다른 공이라도 세워 보국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심이 옳을까 합니다."

"........"

 

 

정탁의 곧은 성격대로 설명 하자 모두 말이 없었다

 

 

왕은 이순신을 극형을 감하기로 하여 백의종군으로 권율 휘하로 근무 하게 하였다

 

 

임금은 갈수록 불안 하였다 .

 

 

왜군이 대마도에서 상륙 출병하여 부산에 상륙 한다는 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지었다 .

 

이몽학난과 군량미 비축 문제로 여념이 없는 형편에 명군마저 대부분 철수하고 나니 더욱 불안 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

선조는 남아 있는 명군의 불만 이 많다는 보고를 받고 권율에게 명군을 도와 주라고 지시 하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명을 받고 전라도를 거처 원수부로 들려 권율을 찾아 뵈웠다.

일국의 수군 통제사였던 장수가 일개 졸병으로 되어 권율 도원수를 찾은 것이다.

 

 

권율이 이순신을 반갑게 맞이 하였다 .

"이공이 서울로 압송 되어 갔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랬소이다 .

국문관인 윤근수는 내가 소시때 삼각산에서 시국담을 나누던 처지로 친하게 지내었기 때문에 공을 걱정 되든터이라 윤근수에게 이공의 무혐의를 서신을 띄워 알렸고 도체찰사에게는 상장초(上章草)를 올려 공의 결백을 알렸소"

 

 

"고맙습니다 , 소인이 덕이 없고 능력이 없어 적을 막지 못했다 하여 곤욕을 치르는데 원수 께서 배려 하신 덕으로 이렇게 살아남아 원수부에 떨어지게 해 고맙습니다 .

 

제가 살아 있는 한 원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원 별말을 다하시오 ,통제사 까지 지낸 분이 수군으로 가면 않되겠기에 육군으로 그것도 내 수하로 오게 한것이오. 너무 상심 마오 . 공도 아시다 싶이 나라를 걱정 하는것은 육군이고 수군이 어디 있겠소?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 ....."

 

 

권율은 이순신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

 

권율이 인왕산 밑 출신이지만 이순신은 남산밑 건천동 출신이다 .

 

처음부터 잘 아는 사이는 아니 었지만 임진란으로 서로를 알게된 전우나 다름 없었다.

 

 

 

조정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출동 않던 부산포 앞바다에서의 왜군 선단과 일전을 벌릴것을 기대 했다.적함이 마음놓고 드나 들지 못하도록 부산포를 봉쇄 하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령은 당연 했다.

 

그동안 이순신이 망서리고 나가지 않던 용맹심을 원균에게서 기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균도 그리 호락 호락 조정 명령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되는 부산포 공격 명령을 이행 하지 않고 있었다.

원균이 망서리는것은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 되어 가기 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압송되고 원균이 통제사로 바뀌는 틈을 타 왜군들이 안골포에서 가덕도 를 점령하여 부산방면으로 나가지 못하게 먼저 봉쇄 해버리었다 .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나가기전에 안골포의 적 붙어 공격 해줘야 한다고 주장 했다.

 

 

권율도 이점에 대하여 조정에 보고 했다

비변사에서는 대마도에 주둔하고 있는 10 만 대군을 조선 수군이 막아 내지 못한다면 제2의 환란이 있을지 모르니 기어코 부산 앞바다 해전은 치르지 않으면 않된다고 하였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

 

 

조선의 명령체계는 각 수령들이 왕이나 비변사에 도원수에게 알리지 않고도 누구나 장계를 올릴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위급시에는 도원수를 찾았다 .

 

 

급기야 권율은 원균을 불렀다

"원공 , 조정에서는 대마도의 왜군이 10만명이 부산포로 상륙한다는 보고를 받고 매우 당황 하고 있어 부산앞바다로 나가 치라 하는 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

 

 

"도원수님 , 소장 생각으로는 일본인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의 말만 믿고 김응서 경상 우병사가 보고한 10만 상륙설을 그대로 보고 한 탓입니다.

 

소장 생각으로는 망망 대해인 부산 앞바다에서 그들과 대결하려면 지금 우리 수군의 두배로도 감당 하기 어렵습니다.더구나 이순신이 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

 

 

권율은 원균이 부산포로 나가는것이 어렵다는것을 누구 보다도 잘알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까지만 해도 왜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에는 적들을 눈을 씻고 볼래도 볼수가 없었다.

 

그러던것이 이번 교체기간 동안 전격적으로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하여 항로를 막고 조선 수군 배가 얼 씬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권율은 원균의 속내를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원수사는 이순신이 왜 한성으로 압송 되었다고 생각 하오?"

"두마섬(대마도)에 왜군 10 만이 있으면서 불원 간 부산포로 상륙 한다는 정보를 듣고도 조정의 명령을 묵살 한 탓이지요"

"그러면 원수사는 부산 앞 바다로 나가라는 비변사의 요구 인데 나갈 용의가 없소?"

"........."

 

 

원균은 대답을 못하고 망서리고 있다가 입을 떼었다.

"도원수님 ,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우선 육군으로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 부터 제거 해주십시요 .그렇게 만 해 주신다면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겠습니다."

서울로간 이원익은 임금 에게 전후 사정을 보고 하였다 .

 

 

"전하, 소문 대로 왜적 10만 대군이 두마섬을 출발 할 모양 이온데 이들이 재편 되면 남쪽 에만 머물지 않을것 입니다 .이들이 부산에 상륙 하면 다시 제 2의 임진란이 않 일어 난다고 보장 할수 없나이다 .

엇그제 경상도 에서 출발 할때 도원수 와도 상의 하였는데 새로 통제사로 된 원균 수사도 이순신 수사와 마찬 가지로 부산 앞 바다로 진출 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

 

 

"수사 들이 왜들 그러는 게요?"

 

 

"이번에 건너오는 왜군들은 장비나 함정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합니다 .

 

이를테면 화력면 에서도 전에는 조총이 고작 이었는데 지금은 대포 까지 장착 했다 하옵니다."

 

 

 

"그런 적들을 대적 하려면 어찌 하면 좋겠소?"

 

 

"원균수사는 경주 , 대구, 의령 지역의 육군 뿐만 아니라 의병 까지 망라 하여 수륙 합동 으로 총 공격을 피어 왜적 들을 부산 앞 바다로 밀어 부쳐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건 누가 몰라서 하는 말이오? 관군과 의병 합동 으로 총공세를 펴 몰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 동자 라도 다 알수 있는것이 거늘 제반 사정 상 그렇게 못하니 그렇게 하지 않고 단순히 대마도에서 들어 오는 왜군을 바다에서 사전 막아 내자는 것 뿐이지 쯧쯧...

 

 

원균의 말대로 우리 유군이 총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것은 명나라와 일본국간에 강화 회담 중이라 함부로 칠수 없느사정이 있는것이 아니오?

 

그렇다고 명나라를 무시하고 조선군 단독 작전을 하다가 일을 그르친 다면 명 나라와 외교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것 인가가 큰 문제 인데도 우리 장수 들은 눈앞에것 밖에 모르는 구료"

 

 

"그러 하옵니다, 도원수가 원균수사를 만났다는데 , 도원수가 부산 앞바다로 나가 싸우라 했더니 우선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부터 육군이 먼저 처부숴 주어야 한다고 수정 요청 하였다 합니다"

 

 

"그러면 원 수사는 경주, 대구 의령의있는 육군을 안골포로 바다로 이동시켜 치라는 얘기요"

 

 

"예 전하 ,원균수사의 말은 욱해군 전군이 수륙 합동 총공세를 취하여야 한다는것 같습니다"

 

 

"그러면 경주 대구에서 버티고 있는 왜놈들은 어떡하라는 얘기요?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 당장에 원균 수사에게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부산 앞 바다로 진출 케하여 가등청정의 10 만군이 탄 배를 모두 침몰 시키도록 조치 하오"

"........"

 

 

임금의 추상같은 엄명에 이원익도 할말을 더 못하고 어전을 물러 나왔다.

 

 

도체찰사는 나오면서 이순신 이든 원균 이든 이번 사태 에서는 누구든지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 난국을 타개 할수 없다고 생각 했다.

 

 

 

이원익은 어명에 따라 원균 에게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부산 앞바다로 진출 하여 가등청정과 일전을 불사 하라고 지시 했다.

 

 

 

어명을 받은 원균은 앞이 막막 하였다 .

(차라리 육군을 동원 요청만 하지 않았드라도 않고 나중이야 어찌 되던 왜군을 치러 부산포로 나갔드라면 상감으로 부터 미움 이나 받지 않고 용맹 하다는 말이라도 들었을 것을............)

 

원균은 하고 후회 막심 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 대마도의 대 부대 병력이 부산에 아직 상륙 하지 않았 어도 조선 남부 해안에는 아직도 왜군이 버티고 있는 주둔 왜군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부산진 전함 70척 7천명

안골포 전함 40척 1천명

가덕도 전함 20척 5백명

 

 

소서행장은 부산진에 있었는데 조선군이 스스로 부산 앞바다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바다 에는 얼씬도 않았다.

 

 

그러나 예상 했던 조선군이 나타 나지 않자 대마도의 600 여척의 군함이 부산포를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마도에서 부산의 동향을 노리고 있던 왜선단이 조선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유유히 부산진 앞바다까지 까지 도착되었다

 

 

 

새로운 10만 병력이 상륙 까지 마치었어도 조선 수군은 그림자도 볼수가 없었다

 

 

적수군은 죽도를 거처 웅천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안골포 육망산 (陸望山)과 웅천 리양산(里陽山)위에서 한산도에서 움직이는 조선수군을 감시하였다

 

 

조정에서는 왜군 병력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별전에서 대신들과 비변사 유사 당상관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가기었다

.

영중추부사 이산해가 말을 먼저 꺼냈다

 

 

"전하, 듣기에는 왜적이 부산에 대거 상륙이 완료 되었다 하는데 지금과 같은 배치 상태 하에서 육전 으로 적을 막는 다는것은 생각도 할수 없습니다.

 

 

우선 서해안 으로 넘보지 못하게 수군으로 하여금 적에 대하여 선제 공격 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할줄로 아옵니다."

 

 

"부산 앞 다에서 적의 진로를 처부수라고 지시 했는데도 왜군이 부산진에 무사히 상륙 까지 했다는 말을듣고 과인은 원균수사 만큼은 그러지 않으려니 했는데 원균 수사 까지 관망만 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수사(水師)들이 왜들 그러는거요"

 

 

도체찰사 이원익이 아뢰었다

 

 

"전하, 원균수사는 이유야 어떻든 어명을 어기었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 하오나 원균수사는 자기 한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울 장재입니다

 

중요한 시기에 수사가 처벌을 서울 금부 에서 잡아다 국문 하고만 있으면 누가 적을 막아 내겠사옵니까습니까"

 

 

영의정 류성룡이

"전하.이미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마당에 어쩔수 없이 다음 대책이 중요 합니다 ,

 

원균 문제는 한산도가 천리길로 그를 잡아 오려 했다가 왜적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오니 도원수 에게 처벌하도록 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

하고 아뢰었다 .

 

썰물때 산에가고 밀물때 조개 잡으러 간다는 말이있다

 

조정의최고 책임자 유성룡은 일을 처리하는데 순리에 마지 않은 지시를 해놓고 원균을 처벌하려는 임금의 지시를 놓고 책임을 권율에게 떠 넘기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비변사는 권율에게 전열을 다시 갖추라고 지시했다.

 

 

권율은 도원수 본영을 성주에 두고 있었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 에게는 합천에 있는 의령 지남 산성을 지키게 하였고 ,구례 현감 이원춘 에게는 남원성을 지키게하였다

 

정작 직접 전선을 지켜야할 도체찰사 는 훨신 후방인 선산에 있기로 하였다.

 

 

 

권율이 성주 본영에 돌아 왔을 때였다 .임금이 내린 유서가 와 있었다 ,

 

읽어 보니 원균을 단단히 혼내 주도록 하라는 원균 처벌지시 유서 였다.

 

 

권율은 이금이 내린 글을 다시한번 읽어 보았다

 

서울에 가만히 앉아서 일선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알기나 하고 하는 지시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왜선이 웅천과 안골포 에서 조선 수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판국에 지휘자를 처벌 하라는 것은 서울에서 편안히 앉아 위신만 지키려는 위정자 들이 한편 딱하다고 생각 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이니 어쩌랴?

 

어명이 떨어 지었으니 거역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권율은 한산도 본영에 연락 하여 임시 원수부를 설치한 곤양으로 원균을 불러 오도록 하였다

 

 

원균은 어명이라는 말에 께림직 하였으나 배를 타고 곤양 원수부로 향하였다 .

 

 

원수부에 들어선 원균은 모든것이 질서가 완연하고 조용하기 까지 한데 매우 놀랐다 ,

 

과연 권율은 원수 다운데가 있었다.

 

 

원균이 권율을 찾아 뵙자 찻잔이 나오고 원균에게 말한다

"원공 원공을 내가 여기로 오라 한뜻을 아시겠소?"

"........."

권율은 더 이상 말없이 임금이 내린 유서를 원균에게 내뵈이었다.

 

 

 

원균이 읽어 보니 자신을 처벌하라는 임금의 유서가 틀림 없었다 .

 

 

원균은 순간 자세를 바로 잠으며 권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공 , 참으로 세상은 고르지 못하오, 일선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편안히 있는 조정에서는 현지 사정도 잘 모르고 무조건 공세만 취하면 되는줄 아는 모양이니......

일선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오"

"..........."

 

 

원균은 도원수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리둥절 하였다 ,

 

 

그는 도원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조마조마 하였다 ,

 

그것은 군울을 엄격히 적용하여 원균을 처벌하라는 어명이 권율에게 떨어진 이상 모든 권한은 도원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 앞바다로 나가라는 지시를 어긴 죄가 큽니다. 군율대로 해 주십시요"

"........."

 

 

이번에는 권율이조용히 두눈을 감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두사람간의 침묵이 얼마나 흐르자 권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원공, 지금도 적들과 싸우러 나갈 엄두가 않나오는게요?"

"아닙니다 , 부르시기전까지 그렇지 않아도 함대를 보강 하고 군사들을 쉬게 한뒤 출전 준비를 하다가 왔습니다 ."

 

 

"어떻게 할 참이오?"

"마음 같아서는 육군과 같이 수륙 합동 총 공세를 취하면 좋겠지만 조정 여건이 여의 치 않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

 

 

"그것이 문제요 ,적 10만 병력을 부산 앞바다 에서 막아 주길 원했는데 이미 상륙하고 말았으니 말이오,정보에 의하면 적들의 주력 함대와 주력 육군이 호남 지방부터 공격 한다는 지시가 있다는데 조정 에서는 지금 이라도 늦지 않으니 수군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하여 적들의 사기를 꺾으라느것이외다 .

 

 

조정이 요구 하는 것도 무리 이긴 하오만 어찌 하겠소 .

 

원공을 처벌하라는 어명이니 처벌을 해야겠으나 내 직권으로 공이 망망 대해 보다도 다도해로 끌여 들여 조수 간만과 지형을 이용 적을 처서 공을 세운 다음에 처벌문제를 조정에 다시 주청하여 볼까하니 공을 세워 보도록 해보시오"

 

 

 

역시 권율은 지모가 출중한 지휘관이었다 .

 

사태가 급하다는 이유로 원균의 공을 돋보이게 하여 처벌을 감하든가 빼주려는 계책이었다

 

 

원균은 권율의 깊은 사려에 감격하였다

"장군 , 고맙습니다 , 저의 마음을 알아 주시니 반드시 전공을 세워 보답 하겠습니다"

하고 눈시울까지 뜨거워지었다.

 

 

원균은 즉시 한산도 본진 으로 돌아 갔다 ,

 

권율은 배에 올라 떠나는 원균을 멀리서 바라 보고 한숨을 크게 내리쉬었다

 

"한심한 조정 대신들......"

7월14일 이른 새벽

 

 

원균은 한산도를 떠났다,날이 예상 외로 맑았다 .

잔잔한 남서풍이 불어 왔다 .

 

동쪽 하늘이 붉게 밝아 왔다.

 

 

원균이 방포를 쏘게 하여 이를 신호로 크고 작은 전함 100 여척이 일제히 돛을 달고 뱃머리를 동쪽 으로 하여 다도해를 헤쳤다.

 

 

원균은 수군 배치를 경상도 수로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경상 우수사 배설을 선봉장 으로 중위장 으로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을 ,충청도 수사 최호로 좌부장 으로 ,조방장 배흥립을 전부장으로 ,조방장 김완을 후 부장으로 ,순천 부사 우치적을 우 척후장 으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좌 척후장으로 녹도 만호 송여종을 참퇴장(斬退將)으로 웅천현감 이운룡을 귀선장을 삼고 거제 현령 기효근 에게 본성을 지키게 하였다.

 

 

병선 으로는 판옥선 25척, 협판선 25척,포착선 49척, 거북선이 한척이었다.

 

 

숫자 로는 100 여척이나 병선이라 할수 있는 것은 35척으로 대마도에서 새로 나온 600 여척과 조선 연안에 있던 기존 100여척을 갖고 있는 적군을 맞아 싸우려는것은 누가 보아도 어림 없어 보였다.

 

 

"적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우리 수군이 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만 단단히 먹는 다면야 능히 당하지 않겠는가 ?

 

하늘 이라고 결의찬 우리 조선군의 구국 일념을 그냥 넘기지 않으리라 제장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슴을 바치리라고 생각 하라"

 

 

하고 적들을 경계 하면서 원균은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한 왜군을 경계 하면서 죽도를 거처 부산 앞 바다로 나갔다.

 

 

 

"적선이 보인다"

 

 

제장들을 부르는 깃발을 드니 원균이탄 장선에 전후 좌우에 있던 제장들이 주장인 원균의 지시를 들으러 주위로 모여 들었다.

 

 

제장이 장선에 모두 오르기를 기다려 원균은

"우리는 이제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길목을 끊으려는 중대한 작전을 하러 부산 앞바다에 나와 있오이다.

 

날도 어두워지고 적들의 반응이 없는것을 보아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몰라 내일 아침에 적선을 선제 공격 할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

 

제장 들은 금일밤 경계를 철저히 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기를 바라오.내일이면 나아가 적들을 칠것이니 충용지심(忠勇之心)으로만 나간다면 두려울것이 없을 것이오 ,

 

만일 이 전투에서 물러 가는자가 있을경우에는 군법 으로 처벌 할것이니 그리 아시오"

하고 소리 높여 강조 하고

" 절대 동요 하지 말고 경계를 철저히 하기 바라오"

하고 재삼 당부 하였다.

 

 

 

원균의 선단이 절영도에 도달 하자 하늘도 무심하게 높은 풍랑과함께 돌풍이 불기 시작 하였다 .

 

배는 어두운데 배를 댈곳도 없고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 했다 .

 

 

"적함이 나타났다"

 

 

보변소리가 밤하늘을 울리고 경계중에 있던 조선군이 모두 장선의 신호를 기다리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적함이 나타 났다는 보변 소리를 듣고 있던 군사들은 종일 토록 노 저어온 피로감과 함께 기갈로 우왕 좌왕 하였다 .

 

 

"망동들 하지 말고 적들의 동태를 철저히 살피라"

 

 

장선에서 밤하늘을 타고 소리 첬다 . 파고는 점점 더높아지고 배들이 요동 치기 시작 했다 .

어둠속에서 적함들을 관찰한 그리 많지 않은 숫자에 안도 하고 추격 하라 지시 했다

 

 

 

웬일인지 적함 들은 대적 하려 하지 않고 도망 치기 시작 했다 .적들은 싸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기 불순을 이용 하여 조선 배들을 더욱 피로케 하는 작전이 분명 하였다 .

 

 

 

"장군 안 되겠습니다 , 일기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 일단 뭍으로 물러갔다가 다시 작전을 꾀하는수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권관이 원균에게 권고 하였다

 

.

"아, 하늘도 무심 하고나 내 임금 으로 부터 받은 불신을 이번에 씻으려 했는데....."

 

 

적함 들은 조선 배에 접근 하는척 하다 도망하는 척 하며 정면 도전을 하지 않고 조선군의 주위를 맴 돌기만 하였다

 

 

왜선을 추격하며 쫓다 보니 가까이 섬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너도 나도 명령이 떨어 지지도 않았는데 육지 가까이 배를 정박 시키기 시작 했다 .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배가 먼저 가덕도에 상륙하고 원균이 거느린 주력함은 거제도 영등포에 정박 하였다 . 병사들이 그동안 물때문에 고생한 탓으로 상륙 하자 마자 물 부터 찾았다.

 

 

 

그때였다

조선군이 나무와 물을 찾아 반드시 정박 할것을 예상한 왜군 들이 미리 대기 하고 있다가 벼란간 대포를 쏘아대고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조총을 쏘아 대기 시작 하였다 .

 

 

 

원균 함대는 급히 배에 다시 올라타게 하고 뱃머리를 한산도 본영으로 돌리게 하여 칠천량(漆川梁)에 이르렀다 .

 

 

칠흙같은 밤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방울도 조금씩 쏟아지었다.바닷물의 파고가 높아 배를 띄울수 없어 왜군들도 얼씬 않았다.

 

 

 

이날밤 원균은 제장 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경상 우병사 배설 이 노골적 으로 불만을 토로 하였다

"장군 , 장군 께서는 병사들이 어떤 상태 인지 잘 아시면서 오로지 전투 전투만 강조 하십니까? 보십시요 영등포에서 잃은 병사수만 해도 수백명입니다 ."

 

 

" 일기가 불순 하여 우리가 잠시 실기 한것 뿐이지 . 내일 날씨가 회복 되면 가덕도에 정박중인 함선과 합세 하여 다시 치도록 합시다"

 

 

"용감 할때는 용감 하고 비겁 할때는 비겁 할줄도 아는것이 병가의 요체가 아닌가 합니다 .

 

병사들이 피로하고 병세(兵勢)가 외롭고 약 해진듯 하오니 일단 한산도로 돌아 가심이 옳을가 합니다.

 

병가의 말대로 비겁하다는 말을 듣더래도 일단 물러나는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원균이 이말에 질책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기는 일반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오 ?,

 

의롭게 살다 의롭게 죽는것이나 길바닥에 밟혀 죽는 벌레나 다 똑같다고 같다고 생각 한다면 그런 삶을 왜 살겠다는거요?

 

 

 

의로운 삶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날이 온다면 죽을 때 까지는 싸워야 할것 아니오? 나라가 존망지척에 와 우리의 목슴을 의롭게 죽기를 바라는데 비겁하게 목슴이나 부지 하려 한다니 병사는 다음부터는 그런 나약한 말을 하지 마시오 "

 

 

배설이 할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도중 밖에서 정탐병이 급히 들어 와 보고 한다

"적함 수백척이 포구를 포위 하고 있읍니다"

 

 

"무엇이?"

"모두 경계 태세에 임하라 "

포성이 울리고 밖이 소란 해지었다

 

 

벼란간 주위가 환 해지고 콩 볶는 조총 소리와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바닷가를 뒤 흔들렀다 . 적병 들이 조선 배에 올라타 불을 지르고 조선군과 일대 격전이 일어났다

 

 

원균괴 제장들이 급히 나와보니 온 포구가 불 바다가 되고 적병과 육박전이 벌어 지고 있었다

원균은 칼을 빼어들고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었다 .

 

원균은 용장이었다 .

 

종힝무진으로 내려치는 칼날에 추풍낙엽 처럼 적의 목이 달아 났다.

 

 

 

적병중 한명이 원균에게 조총을 겨누어 쏘자 그 자리에 쓸어지고 말았다 .

 

임진란 이래 전장만 누비던 말도 많던 용장(勇將) 원균 통제사가 장열하게 전사 한것이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원균이 죽는등 전세가 극도로 악화 되는것을 보고 급히 전투는 뒷전으로 하고 선수를 돌려 한산도에 상륙하여 한산도 본영과 각종 시설을 불사르고 순천 방향으로 도망 하였다

 

 

 

여기서 장열히 전사한 원균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대하여 집고 넘어 갈 일이있어 지면을 활용 코자한다.

 

 

 

세간에는 도원수 권율이 선조 30년 7월 11일 원수부 곤양 본영으로 원균을 불러 들여 곤장으로 벌하였다는 근거 없는 기록을 과신하고 각종 임진란 관련 허구적 소설에 즐겨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도원수 권율을 모독 하는 인용 인지도 모르고 이순신만 훌륭한 장군으로 묘사하고 악역으로 원균을 등장 시키고 있다 .

 

작가들은 허구로 극적인 효과를 만들려고 원균을 악역으로 등장시켜 이런 대목을 함부로 삽입하고 있는것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이 지하에서 들으면 통곡 할 일이다

 

 

 

작가들은 그런 대목 에서 원균을 악장(惡將) 아니면 겁장(怯將)으로 묘사 하고있다

 

그들은 이순신과 원균을 결부 시키기위한 허구를 조작 위하여 권율까지 악역(惡役)으로 등장시키는것을 서슴치;않고 있다

 

 

 

생각 해 보라 .

 

이순신도 작전상 도저히 나아가 싸울수 없다고 거부한 전투에 세세한 작전 지시까지 일일히 간섭한 조정 대신들은 싸움에 실패하자 자기들은 뒤로 쑥 빠지고 책임을 죽은 원균 통제사나 도원수 권율에게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기록만 보아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임진란의 대표적 작품 이라 할수 있는 징비록을 보자

 

당시 영의정 으로 있다 퇴임 후 쓴 류성룡의 징비록(懲琵錄)에서 보면

권율이 원균을 칠천도(漆川島)진중에 있는 것을 고성 으로 잡아 들여 곤장을 치었다고 기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너무나 어이 없는 기록이다

 

당시 시간상으로 원균이 비변사 명에 의하여 부산 앞 바다 까지 나갔다가 일기 불순 으로 칠천량에 정박하여 있었다 .

 

당시 상황이 웅천만에 왜군이 웅거 하여 언제 조선 수군이 공격 받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하에 칠천량과 고성의 거리가 어디인데 당시 상황 으로는 권율이 있었다는 고성에서 칠천량 까지가서 원균을 잡으러 갈려 해도 풍랑 으로 배도 띄울수 없는 상황이 었고 한참 왜군과 대치중이었다.

 

 

전투중 에 있는 장수를 잡아다 장벌을 가했다니?............. 도저히 이해 안가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칠천량 사정으로 보아 이해가 안가는 것을 꾸며내거나 후세에 원균을 일부러 겁장으로 만들기위여 허구화한 대목일수 밖에 없다.

 

 

 

요사이 초등 학생이 보아도 웃어 넘길 일이다.

 

 

 

징비록을 쓴 작자 유성룡도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곤양의 현장을 직접 목격 한것도 아니고 일선에서 모략하기 위한 불확실한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징비록 자서에도 나타 났듯이 유성룡 만년에 경상도 고향 땅에 돌아가 쓴것 으로 고증도 없이 단순히 전란을 회고 하며 쓴 기록 일 뿐이다

 

 

 

이순신만 예찬하는 유성룡은 이순신과 유성룡이 어렸을 때 같이 공부한 경력이있으며 이순신을 출세토록 추천한 사람도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이쓴 징비록에서는 작자가 권율도 좋게 쓰지 않았다.

 

 

권율은 징비록 작자 유성룡 보다 나이가 위로서 서울 인왕산 밑에서 같이 자랐고유성룡은 남산 북쪽 건천동에서 자라 권율과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권율은 징비록 작자 유성룡에게 이순신 모양으로 평소 그리 고분 고분 하지 않았다

 

권율에게는 유성룡보다 선조가 직접 챙긴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어느덧 무신의 기질이 몸에배어 문신들 같은 아부 소질을 키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선조는 권율을 무척이나 아끼었다.

징비록 작자 유성룡은 자기를 제치고 임금과 직접 독대 하는 유일한 장수 권율을 좋아 할 리가 만무 였다

 

어쨋든 원균은 후세에 주인공과 악역을 등장시켜 글의 재미를 돋구려는 말장난꾼들에 의한 희생물이 아닐수 없다

 

어쨋든 거리나 시간 상으로 맞지 않는 원균 징벌설은 권율 이나 원균을 희화(戱畵)화 하기위한 얘기꾼들의 장난 일뿐이다

원균도 세간 에서는 악장(惡將)으로 묘사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원균이 죽고 난 선조 37 년 10월에 왕이 내린 공신 교서를 보면 잘 알수 알수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 1등공신

 

 

 

권 율(權 慄)

이순신(李舜臣)

원 균 (元 均)

 

 

 

선무 2등공신

 

 

 

신 점 (申 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菴)

이억기(李億棋)

 

 

 

선무 3등공신

 

 

 

정기원(鄭期遠)

권 협(權 俠)

류사원(柳思援)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

조 경(趙 儆)

권 준(權 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槿)

이운룡(李雲龍)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세간 에서는 이순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왕이 원균 만 편애 하고 조정 에서도 원균 편 일색 이라 당쟁의 혜택을 원균이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미워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종6 품 정읍 현감에 있을 때 파격적 으로 전라 좌수사로 임명 한것을 두고 사간원 에서는 반대 상소를 올렸을 때도 임금은 사간원의 상소를묵살 한 것이라던가,왜적과 해전 에서 싸워 이겼을 때 선조가 같은 공을 세웠을 때도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자 원균이 불쾌 하게 생각 하고 있다는 좌의정 김응남의 보고가 있었을 때도 선조는 舜臣捕倭之功則最多矣(이순신이 왜적을 잡은 공이 더 크다)라고 하면서 원균보다 이순신을 더 총애 하였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케 한 요사이 용어로 집행 유예로 한것도 선조의 결심 이었다.

 

그런데 세간의 기록들은 선조가 마치 이순신을 미워한 것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선조의 배려를 두고 선조 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에서는 선조가 잘 못한것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간의 선조에 대한 일방적 견해도 이 선조 수정실록 에서 잘못 기록 한것 들을 인용하고 있는 탓이다.

 

 

 

"원수로 부터 매를 맞고 홧김에 수군을 끌고 나갔다 패했다"라는 선조 수정 실록은 선조 때에 쓴 글이 아니고 인조(仁祖) 21년 에 이식(李植)이 선조 실록에도 없는 원균 에대한 수정 기록을 올림 으로서 왜곡 시키고 있다 .

 

이 대목은 권율 도원수가 원균이 바다에 나아가 나가 싸우지 않는다고 매를 때리었다는 것이고 원군은 권율의곤장을 맞고 화가 나서 수군을 끌고 나아가 왜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는 황당무계한 글을 선조 수정실록에 기록한 사실을 말한다

 

이 기록은 인조시대 이식이 이순신을 우상화 하는 댓가로 만든 완전히 원균을 희화한 말 장난이었다

 

 

 

이 사실은 원균이 왜적과 싸우다 죽자 선조는 원균이 적과 싸우다 죽은것을 애석히 여겨 以身殉之(몸을 바쳐 순국 했다)라고 했는데 훨씬후인 인조때 이식은 敗死(왜적에 패하여 죽었다)했다 라고 기록 한것만 보아도 그 시각 차이가 어떤지 알수 있다.

 

 

 

당시 공신 평가를 담당 했던 이덕형과 이항복은 원균의 인물 평을 "충성 스럽다, 순박하다, 곧다, "라고 평하였다 .

 

윤근수 는 "고지식하다" ,하였는데 유일 하게 도체찰사 이원익만 "성질이 억세다" 라고 평하였는데 그것은 전란중 왜적에 대하여 손수 돌격전을 잘펴 직접 왜군과 전투를 벌리는 용맹성을 보고 한 말일것이다 .

 

 

 

그러나 선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선조 30 년 1 월 27 일 중대한 어전 회의가 열렸을때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같은 경우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다" 라고 발언 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뒷날 유성룡은 자기가 쓴 징비록에서 元均性險(원균은 성품이 험상궂다)라고 틀린 평가를 하는 말을 적어 놓고 이중성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

 

 

 

이와 같이 서울과 천리나 떨어진 남해안 전선 에서 왜적과 목슴을 받쳐 악전 고투 하고있는 장수들을 가지고 서울의 조정에 편안히 앉아서 제 각각의 인물평을 다르게 하고 있는데 대신들의 이중적 평 을 보아 그 평가 라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기록인가는 더 이상 물어 볼 대상도 되지않는다

 

 

 

"원균이 권율 앞에서 장형을 당하였다"라는 내용은 본 선조 실록에는 없다

 

 

 

그러나 인조 때 만든 선조 수정실록은 허무 맹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원균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존재 하지도 않은 장벌론 까지 조작 하여 권율을 악역을 담당 하게 만들고 원균을 악장으로 까지 부각시켜 그럴듯하게 꾸며 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임진란에 대한 선조 이후의 전통 사관은 필요시 마다 이순신과 원균을 등장 시키고 두장수들 에게 선악의 옷을 입히려 들고있디.

 

그 예로 효종의 북벌 때도 군인들이나 국민들의 상무정신을 끌어 내기 위하여 위정자들은 두 사람중 이순신만 이끌어 내어 부각 시켰고, 그후 나온 각종 서적 충무공 전서등과 노량해전 묘비등 각종 묘비에도 온통 원균은 많은 공이 있었으면서도 원균이라는 이름 두자가 빠지기 일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주의 학자들도 민족 정신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순신 만을 내세우고 원균은 항상 그늘 에서 헤어 나지를 못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수군 특성을 잘살려 부지런히 난중 일기를 남기었으나 도원수 였던 권율은 육장 생활을 많이 한 탓으로 육군 특성상 동분 서주 하느라고 한가로이 앉아 일기를 쓰기는 커녕 글도 변변히 한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3자의 엉터리 같은 글이 있어도 편견과 오해를 해명 할만 자료가 없으니 안타까울뿐아다 ,

 

 

원균에 대한 편견적사료(偏見的史料)에 대하여는 이쯤 해두고 원균이 죽은 후에 왜군과 조선군, 명나라의 대치 상태와 앞으로 불어닥칠 조선의 운명에 대하여 다시 살펴 보자

 

 

 

왜적 10만 대병은 600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부산포 앞바다에 정박 했다는것은 앞서 기술하였다.

 

8월 3일 왜군 신임 총사령관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는 좌군 사령관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를 ,우군 사령관을 가등청정으로 삼았다.

 

 

경험이 많은 가등청정의 우군이 먼저 북서진 하여 서생포, 밀양,초계 거창으로 공략 하기로 하였다.

또다른 와도 직무 의 1만 병력은 의령 삼가를 거처 성주성을 처 도원수군율을 잡아 오기로 하였다

 

 

한평 권율은 금산(金山-김천)에 원수부를 두고 적의 동태를 주시 하고 있었다.

 

금산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의 근원지를 서로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체찰사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 조정 에서 강력 하게 집중적으로 조선군을 배치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마땅치 않았다. 감사 수령 시절에 그가 군사 작전권을 갖었었을 때는 체찰사가 뭐라하던 일단 마음만 먹으면 군사를 마음 대로 동원 할수 있었 으나 도원수가 된 후에는 주어진 원수부의 200 여명 밖에 않되는 병사로 한정 되어 있는 탓에 직접 병력을 동원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 대규모 병력을 갖고 있는 각 수령 들을 통제 해서야 만 지휘 할수 있는 모순이 있었다.

 

 

수령 들도 도원수 명령을 받으면 즉각 따라야 하겠지만 지역적으로 떨어저 있는 이유와 개별적 성격 때문에 제대로 명령이 잘 이행 되지 않는 통솔상에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도체찰사는 임금의 명령을 이행 하는 문관 이면서 작전에서 부터 구체적 전술에 이르기 까지 일일히 관여 하면서 모든 명령권까지 자기가 행사 하였다

 

 

도원수가 해야 할일을 일일히 가로 막고 권한 행사를 하고 있어 도원수가 할일이 없었다 .

왜군 10만이 상륙하기 전 에도 권율이 독자 명령을 내려 총 공격 령을 내리려 했을 때도 조정 에서는 이를 가로 막고 체찰사의 의견을 따르라고 명령하기 까지 하였다

 

 

 

서울의 비변사 에서는 왜군이 그 주력 부대가 이번에도 부산에서 출발 , 김해, 현풍, 성주, 금산,추풍령, 영동 , 청주, 죽산,등을 거쳐 공격 할것이 분명 하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비변사 에서는 권율 에게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과 직지천이 합쳐지는 금산에 거점을 두고 조선군 전체를 통활하라 지시 했다.

 

 

 

비변사는 모든 작전 명령이 엄연히 도원수 에게 직접 떨어저야 함에도 불구 하고 그렇지 못하였다.

조정 에서 열리는 의정부 삼사회의(議政府三司會議)에서 부터 비변사 합좌회의(備邊司合座會義)또는 원로회의(元老會議), 군신회의(群臣會議)에 모두 참석하는 우의정 겸 도 체찰사인 이원익이 모두 명령문을 받아 권율에게 전해 주는 형식이었다.

 

 

 

체찰사 이원익은 조정 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먼저 읽고 군사적 각종 지시 에서 부터 작전 용병 에 이르기 까지 도원수를무시하고 월권 행위를 행사 하였다 .

 

 

 

조선은 문신(文臣) 국가이다 .

 

어느덧 문신에서 무신(武臣)으로 변신한 권율 로서는 각종 음해가 날뛰는 조정의 분쟁에 까지 개입 할수도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더구나 한때는 당쟁에 말려 들어 곤욕을 치룬적이 있는 그로서는 선뜻 나서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원익은 권율 에게 적의 주력군이 재침을 할 경우 반드시 조령이나 새재를 넘을것이 분명하므로 신립과 같은 우(愚)를 반복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령 남쪽인 금산에서 적을 방어 하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 .

 

 

 

그러나 권율은 견해가 달랐다, 적들이 이번 에는 영남로가 아닌 다를 길을 택 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왜국의 사정에 대한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켜 놓은 풍신수길이 조선 재침을 다시 결심을 하게 되기 까지는 일본 국내 사정도 그리 간단치 않을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전쟁을 하려면 군인을 징집 해야 하고 군량미를 대어야 하며 전쟁에 쓸 무기가 갖추어저 있어야 한다

왜국도 오랜 전쟁으로 양곡이 부족 할것이 뻔하므로 군량미의 보고인 전라도를 그냥 두지 않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적들이 전라도 침입에 대비해 진주와 덕유산 남쪽 육십령에 조선 주력군을 배치 할것과 조선 수군을 다시 수습 하여 적 수군이 한산도를 못 처들어 오도록 하려면 이순신을 다시 복직 시키자고 체찰사 이원익 에게 의견을 내었으나 이원익은 비변사를 핑계 대며 도원수의 작전 계획을 묵살 하고 금산 수비만을 고집 하였다.

 

 

이원익의 고집은 대단하였다

"왜적은 조선 3 도를 할양 해 주어야 물러 나가 겠다는 것인데 이말은 말도 않되는 소리로 전하 께서는무슨일리 있어도 왜적을 그냥둘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것이오,

 

 

 

반면 적들이 다시 한성 까지 다시 처 올라와 도성을 점령 하고 임금의 항복을 받겠 다는것 아니오? ,적들이 노리는 것은 신속한 한성 공격 이므로 원수의 말 대로 전라도로 우회 할리가 절대 없을 것이오

 

 

 

. 틀림 없이 지름 길인 영남로 로 진격 할것이 분명 한것이므로 금산경비는 필수적이므로 원수의 의견 에는 동의 할수 없소 , 더욱이 전쟁 초기 에도 조령을 적에게 무사히 넘도록 내주어 실패 하였 거늘 같은 실수를 반복 할수는 없소"

 

".............."

 

도원수는  체찰사 이원익의 주장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상소하고 싶은 생각이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

 

아니 그럴만하게 한가 할 시간이 없었는지 모른다.

 할 말을 잊어 버렸다 .

(아, 또 한번의 전쟁의 위기가 닥아 오는 데도 전란 초기에 큰 실수로 의주 까지 물러 났던 대신 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풍신 수길은 7월 15일 칠천량 에서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을 물리친후 양자인 소조천 수차를 대장으로 하여 각 왜장들 에게 총 공격령을 내렸다

 

 

풍신수길은 다음 같은 특별 명령을 내렸다.

 

 

 

첫째,

우군 대장 모리수원(毛利秀元)이 이끄는 선봉 대장 가등 청정이 인솔 밀양을 거처 거창 으로 나아가되 일부 병력을 분산 하여 금산(金山)에 있는 권율군을 자극 하여 적의 주력이 그곳으로 집중 하도록 하게 만들고 대다수 병력은 합천 에서 더이상 나가지 말것

두째,

우군 제 2진 흑전장정군은 광양에 상륙 순천의 조선 수군 본영을 격파 하고 구례로 나오도록 하고 제 3진 와도직무군은 김해 , 창원을 거처 구례 에서 제 2진과 합류 하도록 하는 동시 제 4 진의 소서행장군은 남해에 상륙 사천을 거처 구례 에서 합류 한다. 제 2,3,4진은 구례에서 대기 하고 있도록 한다

셋째,

제 1 진 일부 병력이 금산에서 거짓 패 하는 척 하고 적들과 대치 중을 틈타 가등청정의 주력군은 방향을 바꾸어 전라도 진안 으로 진격 한다.

네째 ,

제 2,3,4,진은 구례 에서 명나라 군이 있는 남원을 공략하고 전주에서 제1진과 합류 한다

다섯째 ,

전주에 합류한 전 부대는 다시 공주, 수원 , 한성 으로 진격 도성을 점령 하고 조선 왕의 항복을 받도록 한다 .

 

 

 

풍신수길의 작전 명령은 각 왜진에 전달 되고 일시에 10 만 대병력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

 

 

 

풍신 수길의 명령 대로 왜군 주력 부대는 고령 방면 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

 

권율은 체찰사 이원익의 명령과는 별도로 긴급히 구례 현감 에게 파발을 띄워 구례 병력 으로 는 적을 막기 힘드니 남원성의 명나라 잔류 병력을 지휘 하고 있는 양호와 협력 남원성을 굳게지키라고 지시 하였다

 

 

다음은 지남산성(之南山城 의령 소재)을 지키고 있는 김응서를 소신 대로 황석산성 으로 이동 하라고 지시 하려 하자 종사관 황여일이 극구 말렸다 .

"원수님 , 쳬찰사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의견 마찰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구례 현감이 거느리는 군사 수는 얼마 않되고 체찰사도 관심 밖이라 다른 말이야 없겠지만 김응서군은 체찰사가 굴뚝 같이 믿고 있는 부대 입니다 .

 

그쪽은 그대로 두시고 우선 급한대로 현재 안음(安蔭), 거창(居昌), 함양(咸陽) 세읍의 백성 들이 청야지책에 의하여 황석산성으로 피난 하여 있으므로 안음 현감 곽준(郭晙)에게 명하여 백성 들을 동원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해놓는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 다음에 적의 동태를 보아 가면서 황석산성 을 지원 해야 할도리 밖에 없을 듯 합니다 "

 

 

"그래도 체찰사 몰래 그런 지시야 할수 있나...."

"아니옵니다, 쳬찰사 어른은 적의 사정이 어떤 가는 잘 모르고 조정에서 내린 죽령 새재 경비 에만 집중 하기만 고집 하여 도저히 말이 먹혀 들지 않습니다 ."

 

 

"딱한 일이야, 작전의 작자도 모르는 자가 작전 명령을 남발 하고 있으니 장차 이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

황여일이 권율의 눈치를 살피다가

"원수님 지금 제가 직접 두곳에 달려가 원수부 명령으로 적에대한 대비를 특별 지시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적들의 이동 정보를 알아 오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일어선다 ,

 

 

"위험한 적진을 거처야 황석산성과 남원에 도달 하거늘 어찌 가겠다는 말인가 "

"염려 마옵 소서 , 이몸 이미 나라에 받친 몸입니다 ,

 

무슨일이 있어도 살아 돌아 오겠습니다 "

종사관 황여일은 장정 5 명을 사복을 입혀 대동 하고 육십령으로가는 지름길을 향하여 떠났다

 

 

 

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이 파죽 지세로 진격 해 오는 소식도 모르고 의령 지남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김응서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었다 .

 

 

한편 왜군은 김응서가 있는 지남산성에 간첩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외 술판을 벌리게 하여 안심 시키고 있는 동안 지남산성을 피하여 한밤중에 합천으로 이동 하였다.

 

 

 

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의 속셈도 모르고 선산의 금오 산성에서 금산 (김천)에 나가 있는 권율에게 금산 방어 계획 지시만 해놓고 조정 에다는 조선군이 철저히 조령을 지키고 있다고 치계(급보)를 올렸다

 

왜군 주력 정예군인 가등청정군은 2 만군사중 1500여명을 차출하여 마치 주력군 인양 성주 방면 으로 투입시켰다

 

 

 

적들이 금산 방향 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척후병 으로 부터 들어 왔다 , 김응서로 부터 보고가 없어 불안 하게 지내던 이원익 에게 원수부로 부터 적 출현 보고가 들어 오자 부리 나게 권율에게 찾아 왔다 .

 

 

"예상대로 적의 선봉대가 조령을 목표로 진격해 오고 있다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즉시 전군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합시다 "

"..........."

권율은 이원익의 말을 잠시 듣고 대답없이 묵묵히 앉있기만 하였다

권율은 지금 까지 손수 모든 작전 배치 까지 해놓고 막상 적 출현 소식을 받고 어쩔줄 몰라 하는 이원익이 가련 하기 까지 하였다

 

 

옆에 있던 경상도 조방장 곽재우가 이를 보다 못하여 말 하였다

"체찰사님 , 서두른 다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 적을 치려면 정면으로 치기 보다는 기계(奇計)를 세워야 합니다 "

"그러자면 ..."

"그러자면 우선 이를 주도 할 주장(主將)을 골라 선두에 서서 싸울 장수를 잘 골라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장수가 누구란 말이오?"

 

 

 

 

왜군 선봉대장 가등청정이 육십령 아래서 고개 위를 바라 보니 정상이 하늘에 닿은것 모양으로 까마득하다 과연 소문 듣던 대로 험준한 고개였다.

"척후병으로 하여금 고개에 복병 이라도 없나 확인 하라 권율이 이곳을 순순히 넘길 위인이 아니다""

가등청정은 고개 주변 상황을 보고 하라 지시 했다.

 

 

척후병이 한참후 돌아 왔다

"고개에 개미 새끼 한마리 않보입니다"

"그래?"

가등청정은 자기 귀를 의심 했다

"진짜 아무도 안 보인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더 확인 하라 조선의 도원수 권율은 병법에 능한자라 이런곳에 복병을 두지 않을리가 없다"

 

 

얼마후 척후병이 나타났다.

 

 

"역시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그래?....."

가등청정이 가소롭다는듯이 웃는다

"음 권율이 병법에 통달한 명장라더니 다 헛소리 구먼 .....하하 이 황석산성은 육십령을 사이에 두고 전주로 가는 요충지이다 .

즉시 전 군은 육십령을 신속히 넘도록 하라"

하고 가등청이 큰소리로 호령 하였다 .

 

 

 

왜군은 조선군과 교전 한번 없이 육십령을 무사히 넘어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여기서 잠간 7월 15일에 일어났던 원균이 전사한 칠천량 해전 패배후의 조정의 동정을 살펴 보자.

 

앞서 권율이 체찰사 이원익에게 이순신을 다시 기용 수륙 병진 을 하자고 했으나 이원익은 못들은척하고 넘겼다는 얘기를 한바 있다.

 

 

권율은 조선 수군의 재건이 급선무라는 것을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 했다.

 

그는 사위이며 병조 판서로 있는 이항복에게 자기 휘하에 백의 종군을 하고 있는 이순신을 하루라도 빨리 재 기용하여야 한다는 간곡한 친서를 두번이나 보내 었다 보내었다

 

 

왜군이 서해를 넘본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다시 한번 이순신을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으나 백의종군 시킨것이 엊그제인데 금방 푼다는것도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마음에 걸리었다

 

 

왕이 제신들에게 조선수군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

 

아무도 대책에대한 대답이 없었다.

 

적군이 다시 쳐들 오고 있는데 대하여 이순신이 설사 죽을 죄를 지었다 해도 적을 막아 내기 위하여서라도 풀어 주어야할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명분만 찾고 앉아 있는 한심한 대신들이었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왜적이 조선 수군이 취약 한것을 알고 함부로 남해 바다와 서해를 넘보고 있습니다 , 대책은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이 주위 제신들의 다른 의견이 있을까 하여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다만 경림군 김명원이 대답할 뿐이었다

"병조 판서의 의견이 옳다고 봅니다 "

임금이 그제서야 힘을 입어 말한다

"비록 순신이 죄 인의 몸이기는 하나 순신 이외에는 수군을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는자가 없소 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려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죄과를 벗게하도록 하겠소"

"........"

 

 

아무도 임금의 결심에 반대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없는 수군이란 어떻게 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대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병판은 오늘 곧바로 선전관에게 교유서를지참하여 보내 순신에게임명장을 전달 하도록하고 근무 토록 하오"

 

 

이순신이 백의종군의 죄목을 벗는 날이 온것이다.

 

 

 

이순신은 수군 통제사 발령장을 받고 권율에게 하직 인사차 원수부에 들렸다

"그동안 돌보아 주시어 다시 통제사로 부임 하게 되었습니다 "

하고 인사를 하자 권율이이순신의 손을 잡는다

"그동안 수고 많았소 왜군이 다시 서울로 진격하여 도성을 다시 뒤 흔들려 획책 하고 있으니 남해 바다를 철통 같이 지켜 주시오"

 

 

 

전라도 침공 의 선봉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왜군 좌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 들어 갔다

 

 

권율은 기회 있을적 마다 이원익 에게 이순신을 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 토록 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못들은척 하고 넘어가기만 했다.

권율은 사위인 이항복이 이순신을 통제사로 다시 임명케 한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 하였다.

 

 

 

반면 이순신은 이번 재 임명이 순전히 영의정 류성룡의 힘으로 알고 있었다 ,

 

서울 건천동에서 어릴때 같이 자란 관계로 평소 사신을 주고 받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류성룡은 조정내 불고 있는 동서인 당파간의 싸움 와중에 올라 있는 이순신을 앞에 나서서 두둔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의 재임명이 권율과 이항복의 작품이라는것을 모르는 이순신은 의례적인 인사로 대신 하였다

 

 

 

권율은 이순신의 두손을 뜨겁게 꼭 잡고 말한다

"그동안 심적으로 얼마나 괴로웠겠소, 부디 남해에 가시거던 다시는 왜적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해 주시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두사람의 애틋한 헤어짐의 장면이었다

 

 

 

이순신은 이날로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을 거처 회령포(전라도 장흥)에 도착 벽파진(碧波津)에 진을 치고 부임지 첫날을 지내었다.

 

 

 

전라도 침공하려는 적의 우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난 후 우희다수가가 지휘하는 좌군은 남원성 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선봉장 소서행장이 남원성에 도착 하자 마자 포를 쏘고 조총을 쏘며 호각을 불어대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명군(明軍)장수 양원(楊元)과 이신방(李新芳)은 남원성 동문에서, 명군장수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을 , 장표(將表)는 남문을 ,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는 북문을 지키고 있던 명군과 조선군은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밤이 되자 적진에서는 잠도 자지 않고 불을 피우고 고함을 지르며 포를 쏘아 대었다. 다음날 오시(12시)가 되자 일제히 적이 총과 포를 쏘며 돌진해 오니 그소리가 뇌성벽력 같았다.

 

 

 

왜군은 사다리와 3층 목책을 높이 세워 남원성을 내려다 보며 총포를 마구 쏘아대니 성안에는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며 도망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양원은 잠깐 잠이들어 깨어 보니 적들이 동문을 부수고 진중으로 왜적이 침투 하였다.

 

그는 놀래어 미처 옷도 못입고 도망 하였다.

양원은 말 한필을 간신히 얻어 타고 도망가자 그 뒤를 열어 병사가 뒤를 따라 도망 쳤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그 능숙한 활 솜씨로 적을 많이 죽이고 마지막에는 대검을 빼어들고 뛰어 들었다.

 

이를 보고 방어가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金慶老), 이복남(李福男)등이 맹렬히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인마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돌격 하다가 전사하였다.

 

위풍도 당당 하게 노루목고개를 오르기 시작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인 협곡으로 명나라 대군의 긴 행열이 고개 정상을 향하여 고개로 뱀처럼 오르기 시작 한것이다.고개를 중턱에 오르자 오유충은 안도의 숨을 거두었다

 

 

정상에 선두가 오르도록 이상하리 만치 주변이 조용 하기만 하였다.

 

 

그때였다. 고개위 양쪽 에서 빗발치듯 총탄이 머리위로 쏟아지자 놀란 군마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여기저기 조총에 맞아 쓰러지니 순식간에 시체가 늘비하고 시체에서 쏟아지는 선혈이 낭자 하였다 상대가 어디 숨어 있는지 어디서 총을 쏘고 있는지 싸울 상대가 없는 전투였다 ,

"와."

왜군의 함성을 구호를 신호로 여기저기 왜군이 튀어나오더니 산아래로 도망 치는 명나라 군을 토끼 사냥 하듯이 몰아 친다.

순식간에 명군의 진영이 어지러히 무너지고 적들이 벌떼 같이 일제히 쏟아저 내려 오기 시작 하였다.

명군이 정신 없이 고개로 내려와 돌아 왔던 계곡을 한참 후퇴하여 내려 오고 있었다 .

 

 

왜군 들은 명군의 선봉대를 전멸 시킬 계산 으로 계곡 아래로 계속 돌격해 내려 왔다 오유충이 당황하여 말을 되돌려 도망 하여 계곡을 달려 내려 오다 적의 총탄이 말에 맞아 말에서 탈마 하였다 .

 

 

뒤에서 지휘하고 있던 왜장이 소리첬다.

"적장이다 . 사로 잡아라"

오유충은 놀라 다시 떨어지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 칼을 빼어들고 왜군과 대항 하였다.

 

그때였다 , 협곡 양쪽에서 빗발 치듯 화살이 왜군 에게 날아들고 성난 호랑들 처럼 날쌘 이름모를 병사들이 오유충 주변에 나타 나더니 그를 외워 싸고 왜군들을 처죽이고 감싸기 시작하였다

 

 

조선군 복병이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응수가 거느리는 조선군 2000명의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계곡아래로 쏟아저 내려왔다. 삽시간에 왜군의 반이 조선군 손에 추풍 낙엽 처럼 목이 달아 나자 모두 반대쪽 산위로 도망 치기 시작 하였다

 

 

 

왜군은 뒤를 놓칠세라 추격하는 조선군에 놀라 고개를 포기하고 아예 울산 방면 으로 도망 하고 말았다.

 

권응수는 출발전 권율로 부터 구체적이 작전 계획을 치밀 하게 지시 받았고 권응수도 그대로 실행 하여 얻은 전과 였다.

권응수는 적들이 버리고 간 산더미 같은 조총과 적장의 머리를 베어 도원수에게 받치었다.

 

 

 

오유충은 패장이 되어 돌아 오고 조선군이 적의 수급을 가저 왔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었다.

"이놈 , 네가 무슨 장군 재목 이더냐 ? 그까짓 왜군들을 못치고 돌아 오다니? 내 오늘 내손으로 네 목을 참수 하리라 "

양호는 오유충의 무릎을 굻어 앉치고 당장 목 베일듯 칼을 빼어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도원수가  옆에서 이것을 보고 양호를 만류 했다 .

 

 

"장군 ,오 총병은 패한것이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았던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 참수만은 면케 하시고 다음 전투에 공을 세울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간곡한 만류에 양호는 짐짓 못이기는척 하고 칼을 칼집에 꽂았다

 곧 권응수에게명하여 노획 해온 왜장의 수급과 조총을 양호 앞으로 갖다 놓도록 하라고 지시 했다

 

 

"장군 , 아무가 적을 첬으면 어떻습니까? 이것들을 모두 경리께 올리오니 황상께 받치도록 하십시오 "

하고 양호에게말하니 양호는 조선군이 만든 공이 자기공으로 만들어 주려는 권율 에게 부끄러럽기는 했으나 명나라 조정에 자기 공으로 보고 할 생각이 더 앞서 체면 불구 하고 명나라 장수들을 불러 모은자리에서

"오늘의 공은 다 우리 연합군의 공이로다.이번 전투 상황을 보건대 앞으로 조명 연합군이 상호 원조 없이는 전투에 승리 하기 어렵 다는것이 증명 되었소 , 오늘 내가 좀 흥분 하여 부총병을을 참하려 했으나 이를 걷우니 제장들은 앞으로는 권도원수의 명령을 내명령같이 생각 하고 절대 복종 하도록 하라 ."

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린다

 

 

 

그는조선 도원수를  바라보며 말한다

"원수께서는 이후 명나라 장병중에 군율을 어기고 행패를 부리는자가 있으면 즉각 처벌 하시고 나에게 만 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이 사건 으로 명나라 총 사령관인 양호는  당초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 예우를 조선 도원수 에게 주기로 결심 한것이었다.이때 부터 양호는 무슨 일이 일어 나던 조선 도원수와  상의 하여 처리 했다.양호는 조선도원수를  부를 때는 깍듯이 예우하고 부대를 순시 할때도 조선 도원수와  꼭 같이 다니었다.

 

 

이때 부터 명나라 군이 조선 군이나 조선 백성들 에대한 태도도 확연히 달라 지었다.

  도원수도  양호로 부터 한 발짝 물러 서서 양호의 체면을 지켜 주었다,항상 양호를 겸손 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명나라 장수 들로 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 명나라 장수들을 덕으로서 대해 그들을 조선전 에서 협력자로 이끌어 내려 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닥아올 월동 준비때문에 그가 원하는 압록강까지의 점령의 꿈을 이루지 못 한것이 한 스러웠으나 가등청정의 건의를 받아 들여 다음해 다시 공격하기로 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조선군 모양으로 문관이 무관 위에 서 작전 지시를 하는 일이 없다.그들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임기응변 하는 전투에 명수들이었다 . 그것은 본국에 있는 풍신수길이 현지 지도를 못하는 이유도 있었겠 지만 풍신수길은 언제나 현지 나가 있는 장수들의 의견을 존중 했다.

 

왜군은 경상도 양산까지 물러났다

 

한편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적함과 대전에서 대승을 걷우었다

 

 

 

명나라군은 이상 하리 만치 산악전 에는 약하였다 . 단지 그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기마전의 명수 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직산과 평택 평야에서는 그 실력을 어김 없이 발휘 하여 왜군은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물러났다 .

 

 

반면 왜군은 물러 났지만 산악전이나 성벽전에는 강하기 짝이 없었다.

 

 

 

명나라군 44000 병력은 드디어 좌중후 협력군 으로 나누어 왜군을 공격 하기로 하고 순천, 사천, 남해, 거제도, 양산, 부산등을 삼면으로 나누어 압박 해 들어 가기로 하였다.

12월 21일 양호는 제독 마귀와 같이 4 만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안동을거처 경주 까지 진군하였다 . 전투 한번 없이 왜군의 뒤를 바싹 추격 한 것이다.

 

 

양호는 삼로 병진의 대전략 (三路倂進之大戰略)이라는 계획을 세워 권율 에게 뵈워 주고 권율의 자문과 조선군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대방략 이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적의 주력군인 가등청정군을 우선 깨뜨리기 위하여 울산성을 먼저 공격 하는데 우선 동정군 전체를 경주를 떠나 울산 으로 진군시킨다.

 

구체적 으로 명나라 동정군의 좌협군 병력 1만 2000명은 경주 남천 상류를 따라 토함산 서쪽로를 거처 울산성 동문을 ,우협군 1만 2000명은 경주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울산성 서문을 , 중협군은 그도 형산강을 따라 진군 하되 모화, 녹동, 척파, 지역을 거처 울산성 남문을 치기로 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조선군은 염두에 두지 않은 동정군 단독의 전투 계획으로 방략도에는 조선군 에대한 기록이 한군데도 없었다.

 

 

 

권율이본 동정군 대 방략 이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무모한 계획 이란것이 한눈에 들어 왔다.명나라 동정군 4만명과 이제는 지원군 신세가 되어 버린 조선군 4 만명이 기책(奇策)하나 없이 무조건 경주 에서 울산 으로 밀어 부치겠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 같은 전투 개념이 었다 .

 

 

잘못 하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가져 올지 모를 무모한 계획임에 틀림 없었다 . 왜군을 너무 가볍게 본 탓이었다. 게다가 양호가 경주 까지 내려 오는 동안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황제 에게 뵈울 명나라 경리 로서의 공다운 공을 세우지 못한것을 만회 하려는 생각이 그속에 숨어있는 속보이는 수작이었다.

 

 

"소장의 생각 으로는 이 삼로병진(三路倂進)계획은 무모 한것으로 밖에 생각 되지 않습니다"

 

 

권율은 단도 직입적 으로 계획을 반대 하였다.

무조건 찬성 할줄 알았던 양호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 지었다 .

 

한성에서 출병 할때 선조 까지 자기 뒤를 배웅했고 조선의 조정대신들이 자기에게 비굴할 정도로 자기에게 아부를 일삼던것만 보아온 양호 로서는 권율의 당당한 대응에 한편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찌하여 그렇단 말씀이오?"

"이 계획은 적의 주둔 병력을 단순 하게 생각 하고 조명 연합군 병력을 한곳 으로만 쏟아 붓는 격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경리 양호는 한곳으로 쏘다붓는다는 대목이 귀에 거슬렸다.

 

 

양호는 도면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한다

" 장군, 이 지도로 말하면 귀국의 병조판서로 있었던 이덕형 접반사가 작성한 도산(島山-울산) 태화성(太和城)의 배치도인 동시에 상황도 이오 , 적들은 태화강을 배수진 으로 치고 울산성을 지키 려는 것이니 성만 포위 한다면 저놈 들이 어찌 하겠다는것이오?"

 

 

권율이 도면을 뚫지게 한참 들여다 보고 있다가 말한다

" 이 도면은 단순한 포위를 위한 지도에 불과 한것이지 적들과 적들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을 너무 무시한 작전입니다. 소장은 경리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할수 없습니다 .재고 하시는것이 옳을줄로 믿습니다"

 

계속

 

다음 날 선조는 차선의 결단을 결심 하였다 .

비변사의 의견도 묻지도 않고 전격적 으로 권율을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 다시 외직 발령을 내렸다.

 

 

영의정 류성룡과 좌의정 김응남이 왕께 아뢰 었다

 

 

"전하 , 권율은 명나라나 왜국 모두 강화 회담에 방해 된다 하여 우리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대상 인물중 첫째 가는 인물이온데 그를 다시 외직인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시면 어찌 하시려 함이오니까?"

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 하였다

 

 

 

이에 왕은 두사람에게 언성을 높여 역정을 내었다

"영상 ,과인이 따로 결심 한바 있어 그를 충청도 순찰사로 임명한것이오 . 영상 들은 지금 기호 지방의 민심이 흉흉 한데 조정의 대책이 무엇 이라고 생각 됩니까

 

 

 

.더우기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 시절 그 공적이 지대 한 인물 로서 앞으로 있을지 모를 왜군의 침공을 막으 려면 충청도 지방의 방비를 하게 할수 있는 중요 인물입니다 .

 

임진년 조령과 죽령에 대한 대비 소흘로 도성이 왜군에게 빼앗 겼던 일을 생각 해 보시오

 

 

과인은 권율이 비록 명과 왜국의 표적 인물이라고 하는 말은 누차 들었지만 그에 대한 전부를 모르는 자들의 모함이라 생각 되오 . 그의 성격이 강직한것이 흠인데 , 장수가 그런 기개가 없다면 어찌 십만 대군을 호령 할수 있겠소?

 

그래서 최전방에 내보낼것을 삼가고 충청도 순찰사로 보낸 것이니 이에 대하여는 이론을 제기 하지 마시오."

 

 

임금의 강한 발언에 더 할말을 잊고 있다가 김응남이 다시 아뢴다

"전하 지금은 권공을 다시 도원수로 임명 하는 것은 때가 아닌것 같습니다. 왜국과 강화 회담이 결열되어 불안한 판국에 권율공 까지 전선 가까이 충청도로 내 보내는것은 기름에 불을 지를는것이 아니겠아옵니까?"

김응남이 조금 거슬릴 정도 말 까지 하였다

 

 

"그래서 과인이 권율을 경상도 순찰사로 보내지 않고 제 2선인 충청도 순찰사로 보낸 것 아니오?. 두고 보오...."

선조의 용안이 편치 않았다

"............"

 

 

두 영상은 왕의 확고한 의지에 할말을 더이상 잊고 물러 나왔다 .

 

 

 

선조 29년 정월 열흘 권율은 충청도 순찰사 명을 받고 공주 감영으로 떠났다.

 

 

오래간 만에 전진(戰塵)을 씻고 조정 대신들과 지내던 그동안 일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 힘든 일이 었었을 른지 모른다

그는 공주가 까지 내려 가는 길에 공주 감영 에다 미리 마중 나오지 말라 지시 하고 피폐된 농촌 실태를 직접 점검 하며 내려갔다.

 

 

공주 감영에 부임 하고 이틀 후 민심 파악을 위해 사복을 차려 입고 통인 한명을 데리고 저녁때 공주 읍내를 두루 살펴 보았다 , 주막에 들려 잠간 쉬는데 주객들 중 한사람이 권율의 귀를 띄이게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임금과 조정이 무능 한 것이 주 화제 내용이었다

 

 

"얘 , 네가 가서 저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 누구 인가를 알아 오거라 , 눈치 채면 않된다"

통인 소년이 잽싸게 알아 왔다 .

"저 사내 들은 부여 근방에 있는 도천사(道天寺)를 무대로 드나드는 건달 들이옵니다 "

" 저자 들에 대하여 아는 대로 얘기좀 해보거라"

"그들은 동갑회 (同甲會)라는계를 만들어 고을에서 시키는 부역도 응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군대 가는 것도 거부 하고 마을에서 저렇게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라 합니다"

 

 

"그럼 저자들의 우두 머리가 뉘든고?"

"한(韓)씨 성을 가진자 라는데 이름은 잘 모르고 소문에 의하면 예전에 벼슬을 하다가 그만 두고 수시로 저 건달 들과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자들이 그동안 민가에 폐를 얼마나 주었든고?"

"저 사람들은 절대 민가에는 피해를 주지않습니다"

"음......."

권율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동헌으로 돌아 오면서 그동안 조정이 백성 들에게 남겨 준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할일이 너무 많다.....외부 전쟁도 중요 하지만 내부의 썩어 가는 관료 사회의 개혁이 없이는 더 큰 환란을 막아 낼 방도가 없다) 권율은 순찰사로 있는 동안 할일을 곰곰히 관찰 하며 며칠을 지났다

 

 

 

소서행장의 심복 부하 요시라는 경상 우수사 김응서를 만나러 의령의 김응서 진을 방문 하였다

 

 

요시라는 그 능숙한 조선 말로 김응서 에게 말한다

"관백께서 귀국이 너무 성의가 없다고 하는데 이러다가는 관백의 성격 으로 보아 또한번 조선 침공을 시작 할것이 분명 합니다.전번에도 황진 같은 미관 말직자만 보내었 다고 화를 내고 계신데 정말 전쟁을 또한번 치르실 의향입니까?"

은근히 협박 까지 하였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말을 그대로 비변사에 보고 하였다.

김응서가 보낸 보고서는 비변사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었다.그 이유는 조선 4도를 일본이 떼어달라는 허무 맹랑한 요구 조건은 철회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담 결열을 제일 반가와 한것은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이었다

 

 

그들은 다시 재침준비에 바쁜 데도 조선의 비변사는 적정(敵情) 파악을 할 방도 라고는 김응서 밖에 없었다

 

비변사 회의 에서는 한산도의 조선 수군이 방비를 더 철저히 하도록하고 구례 현감 이원춘을 조방장으로 하여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경상우도 감사 서성(徐省), 경상우도 병사 김응서 에게 경상도 경비에 철저히 하라는것 이외 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쏟아지는 비변사의 지시에 도원수 직을 맡은 우의정 이원익은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막막하기 만 하였다.

권율은 충청도 전반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세가지 사항을 수령들에게 지시 하였다 .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에 포를 쏠수 있도록 포루를 만들것 .죽령(竹嶺)정상에 토성을 쌓을것. 단양군 청풍부, 풍기군 등에 병사들을 주류 시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신원 뜰 들판에는 둔전(屯田....주둔병의 양식 자급 자족용 밭)을 설치 개간 할것 등이었다

 

 

중요한 비변사 회의가 열렸다

이자리에는 영돈녕 부사(領敦寧府事)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 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 정탁, 경림군(慶林君) 김명원 , 우의정 겸 도원수 이원익(李元翼)등 쟁쟁한 조신 들이 모두 참석 했다

 

 

선조는 왜적 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에 따른 각도 수성(守城)대책과 백성 들의 구호 대책에 대하여 의론 하였다.

 

 

이원익이 먼저 입을 열어 임금께 계청하였다

"전하 신은 도체찰사로. 우의정 으로 도원수로 민사와 병사를 겸직 하는 관계로 급한 일이 생기는경우 두 업무를 모두 한번에 수행한다는것은 불가 하나이다 ,

 

더구나 병사 업무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 하는 중요한 업무인지라 신이 겸직하기에는 부적당 하옵니다

 

차제에 일전에 호조 판서로 있다가 충청 순찰사로 나간 권율공을 다시 도원수로 임명하심이 타당 한줄 아뢰옵니다 "

".........."

 

 

이원익이 권율을 다시 도원수로 하자는 느닷없는 계청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 지었다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두수가 말한다

"전하 명나라 군이 거의 철수 하고 지금과 같이 조선군의 역활의 중요 할때가 없나이다 .그러므로 권율 같은 명장을 충청도 순찰사로 썩힐수는 없습니다 ,

 

다만 권공이 성격이 좀 강직한 면이 있어 그를 시기 하는자 들이 모함을 일 삼는데 그러한자들은 나라를 쓸어 드뜨리려는 역적 보다도 더 한자들 입니다. 이 시기에 왜적을 막아낼 장수는 권율밖에 없나이다 부디 재 기용하소서"

 

간절히 계청 하자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말들이 없었다

 

 

윤두수는 자기가 김응남에게 말 했던것이 권율의 도원수직 박탈까지 갔었던것에 대하여 미안감을 갖고 있었던 터이었다

 

 

권율 이라면 쌍심지를 돋우던 김응남도 눈만 내리 깔고 있었다

 

 

 

선조는 권율을 다시 도원수로 다시 임명했다 .

조선 조정은 강화가 결열되자 왜적이 다시 처들어 올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었지 적정 파악이 너무나 어두웠다

 

 

왜군 동태의 정보는 김응서와 내왕이 잦은 요시라라는 자 에게서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요시라 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는 대마도 출신 으로 왜란 전에도 조선에 자주 드나 든 인물이었다 . 조선어에 능통하여 소서행장이 자기의 심복으로 데리고 통역 군관으로 쓰고 있었다.

 

 

그는 왜란이 정체에 들어 가자 김응서 진을 자기집 문턱 드나들듯이 하면서 조선측에 일본 정보도 조금씩 흘려 주고 한편으로는 조선측의 정보도 수집해 소서행장 에게 보고 하였다

 

 

그가 얼마나 조선 군관 들과 친하게 지냈 는지 조정 에서 조차 그에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정 3품벼슬까지 주어 그를 회유 할정도이니 조정이 얼마나일본의 정보에 대하여 목말라 했을 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체찰부사(副使)한효순(韓孝純)이 김응서와 같이 요시라를 만났다

그가 주는 정보를 듣고 놀라 왕에게 긴급히 보고 하였다 .

가등청정이 내년 2월경에 재침할 계확을 구체화 하려고 조선에 다시 나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변사회의에서는 선전관을 김응서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요시라에게 뇌물이라도 써서 라도 왜적과 접촉을 강화하여 적의 재침 부대명칭, 시기, 규모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고 하라고 지시 했다.

 

 

 

권율이 도원수로써 6 개월 만에 원수부로 돌아와 보니 모든것이 너무 많이 달라저 있었다.

 

 

영의정 류성룡이 제안하여 역점 사업화 되어 있는 소위 堅壁淸野據險積蓄之策... 읍성은 비워놓고 백성들 모두 모두 산성에 들어 가있게 하고 양곡도 모두 산성에 보관토록 하는 동시에 읍성이 있는 들은 모두 비워두어 왜적이 발부치지 못하게 하는 계책이라 하여 강행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산성을 피하여 거리를 방황하는 걸인들로 변하여 있었다 게다가 군량미 조차 제대로 댈수 없어 배곯은 조선군 도망병이 도처에서 도둑으로 변하여 나라 안을 휩쓸고 다닐정도 였다

일선에 나가 있는 도원수 권율과 이순신 에게 까지 엉뚱 하게 불똥이 뛰었다.

 

 

 

조정 에서는 왜군이 철수 않고 있는것은 권율과 이순신이 직접 전투에 임하지 않고 관망만 하는데 있다고 하여 둘을 싸잡아 비난 하였다 .

 

 

권율은 이몽학 난 진압 으로 눈코 뜰새가 없다 싶이 했지만 사실 이순신은 2년 동안 전투를 한번도 치루지 않았다.

 

 

명나라가 왜군을 치지 말라는 권고도 있었지만 왜군도 이제는 만만히 볼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함정이나 화력이 조선군과 상대 해 볼만큼 신장 되어 있기 때문 이었다 .

 

 

조정은 명나라 군이 그동안 거의 철수 한 상태 이므로 명나라 눈치 볼것없이 밀어 부치기를 원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동안 왜군이 남 해안을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조선 백성들 중 먹고 살수 없어 부왜 하는자가 늘자 이들을 섬으로 이주 시켜 왜군 에게 조선군의 정보를 새지 않도록 조치 하고 ,무기 제조와 병선도 확충 토록 하였다 .

 

또 수군 들이 배 위에만 있을수 없는 상태로 사기 앙양을 위해 제승당을 지어 놓기도 했다.

 

 

이순신은 도원수가 이몽학난 진압소식을 그동안 다 듣고 있었다.

 

 

이몽학난은 백성 들에대한 지방 수령들의 악정의 원인도 있었지만 그동안 천인 으로 천대 받던 무학 무식한 자들에 대한 차별도 반란의 원인 으로 보고 수군 내에 천인 들에 대한 특별 배려를 하였다.

 

 

전투에 나가서는 양반 출신들 보다 천민 출신 병사 들이 더 싸움을 잘했기 때문 이었다.

 

 

 

군인은 전투가 없으면 빛을 볼수가 없다 . 공을 세워야 앞날이 약속 되는 그들 대로의 속성을 발휘 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더구나 수군은 육군과 달리 한번 동원 되면 승리 해야지 패 하면 집단으로 물속의 고기밥 이되고 만다.

 

 

 

이순신이 함선을 함부로 출동 못 하는데는 그나름 대로의 고민이 있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조정은 왜군들이 일본 본토와 대마도 에서 부산까지 저의집 문턱 드나들듯 하는 데도 무엇 하느냐는 것이다

.

이순신은 일선 사정도 잘 모르는 대신들의 입방아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권율도 이러한 이순신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어 두 말 않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이러한 태도를 두고 각종 음해의 말들이 오갔다

 

.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고 나더니 오만 방자 해저서 조정의 지시가 없는데도 남부 백성들을 섬으로 강제 이주시켰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왜국 간의 협상에 따른 평화가 닥아 올경우 더이상 군비 확장이 필요 없는데도 무기를 제조하고 함정을 더욱 늘리는등 예산만 낭비를 일삼고 있다는 것과 또 통제사 본영에 호화 건물을 지어 허울만 좋게 제승당이라는 건물을 지어 자기가 마치 군주라도 된양 거들먹 거린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군 내부에 파당을 만들고 천민을 우대 하여 병사들간의 위계질서도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왜인 요시라가 찾아와 가등청정이 불원 일부 철수 했던 대군을 다시 동원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를 김응서에게 주었다 . 김응서가 조정에 이사실을 가감없이 보고 하자 조야가 다시 뒤숭숭 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금에게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를 봉쇄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알아 내어 처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선조는 권율과 이순신을 마지막 보루로 알고 아끼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순신의 소문과 행동에 대하여 의구 심이 생기었다 .

 

 

선조는 전라감사 황신(黃愼)을 불러 이순신의 소문 내용의 진상을 정확히 알아 오도록 하였다.

 

 

 

황신은 그길로 이순신을 만났다 .

 

왕의 지시로 오지 않은것 처럼 시침이를 떼고 소문 내용을 하나 하나 관찰 하면서 이순신 에게 왜군 재침에 대한 대책을 슬며시 물어 보았다 .

 

 

이순신은 김응서진을 드나드는 요시라를 경계 해야 한다고 하였다 ,

 

요시라라는 자는 이순신을 부산 앞바다 넓은 곳으로 끌어 내기 위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군은 조선 배와 비교할수 없는 군함을 건조 했을 뿐만 아니라 조총에만 의존 하던 수군 장비를 대포로 바꾸어 그 위력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않된다는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수군이 만용을 부려 망망대해로 나간 다는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으니 나갈 수없고 이제는 지세와 조수의 힘을 빌려 전투 하지 않고는 적들과 대적 하기 힘 든다는것이었다.

 

 

 

황신이 이순신의 얘기를 듣고 보니 하나도 그른데가 없었다 .

 

 

이순신의 의견을 보고 하러 서울로 도착 하니 벌써 김응서의 장계를 본 임금이 황신의 얘기도 듣기전에 조정은 더욱 술렁 이기시작 했다.

 

 

"이순신은 겁쟁 이야"

 

 

"통제사가 되더니 자리만 지키려 한다, 게다가 왜놈 들로 부터 뇌물을 몰래 받았 는지 왜놈 들을 치려 하지 않는다"

각가지 말이 난무 하였다 ,

 

 

대신들중 서인 출신들이 들고 일어 났다.

 

소문 내용을 규명하여 이순신을 처벌 해야 한다는것 이었다.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권율도 대구 원수부 에서 이소문을 듣고 있었다 .

 

권율은 이순신을 도원수의 명예를 걸고 아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침 전선 시찰을 마치고 들린 체찰사 이원익에게 이순신의 뜬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 하였다

 

 

권율은 이순신관을 몇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군기가 엄할뿐만 아니라 장졸간에도 인화가 원만 하여 단결력이 강한것과 백성들에게도 인심을 얻어 잘따른다는것과 너무 신중한것이 좀 흠이 있으나 그정도는 이해 할만 하다고 설명하였다.

 

 

 

선조는 이원익의 말을 듣고 나자 사헌부 보고와 먼저 들어온 김응서의 보고를 비교 하고 당황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소문의 내용이 극히 불순하니 이순신의 충성도가 의심되니 그를 일단 잡아 올려 국문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정에서는 1월 25일 금부도에게 나졸들 십여명을 시켜 이순신을 체포 하여 서울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의정부로 끌려온 이순신에게 국문관인 윤근수가 물었다.

"죄인은 그동안 국록을 받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적들이 대마도에서 10만병력을 동원 재침 하려고 출동 한다는 정보를 듣고도 나가려 하지 않는가?

 

듣자니 죄인은 왜군 장수 인 가등청정의 뇌물을 받고 나가지 않는다는데 죄를 인정 하는가?"

하고 국문하자

"소인은 왜적들을 칠 시기와 장소가 합당치 않아 나가지 않은것 뿐이지 결코 소문대로 뇌물이나 받고 나가지 않은 일은 없소이다."

하는등 여러가지로 말을시켰으나 이순신을 탓할 근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윤근수는 명석한 사람이 었다.

 

조정 대신들에 입에 오르나리는 소문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어명을 규명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근수는 선조에게 고문 까지 하여 알아 보려 했으나 소문 근거가 터무니 없어 알아 볼수 없다고 보고 하였다.

 

왕은 육조 삼사 대관들을 모아 놓고 이순신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판중추부사 정탁이 이번에도 나섰다.

"이순신은 명장입니다.

 

뇌물이나 받고 있을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

 

그가 가등청정의 대군을 맞아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것은 부산이란 지역이 지형지물이 없는 망망대해로 잘못하면 적의 꾀임에 빠저 전멸당할까 두렵기 때문일것입니다

 

 

 

이 사실은 도체찰사 이원익공이 대구에 있을때 도원수 권율과 상의 한결과 같은 결론이었다 합니다 .

뇌물건도 평소 검소하게 지나온 그의 행적을 도원수가 입증하여 주고 있다 합니다 .

 

뇌물이나 받고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것이옵니다 .

 

그러하오니 이번 한번만 용서 하여 주시고 뒷날 다른 공이라도 세워 보국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심이 옳을까 합니다."

"........"

 

 

정탁의 곧은 성격대로 설명 하자 모두 말이 없었다

 

 

왕은 이순신을 극형을 감하기로 하여 백의종군으로 권율 휘하로 근무 하게 하였다

 

 

임금은 갈수록 불안 하였다 .

 

 

왜군이 대마도에서 상륙 출병하여 부산에 상륙 한다는 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지었다 .

 

이몽학난과 군량미 비축 문제로 여념이 없는 형편에 명군마저 대부분 철수하고 나니 더욱 불안 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

선조는 남아 있는 명군의 불만 이 많다는 보고를 받고 권율에게 명군을 도와 주라고 지시 하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명을 받고 전라도를 거처 원수부로 들려 권율을 찾아 뵈웠다.

일국의 수군 통제사였던 장수가 일개 졸병으로 되어 권율 도원수를 찾은 것이다.

 

 

권율이 이순신을 반갑게 맞이 하였다 .

"이공이 서울로 압송 되어 갔다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랬소이다 .

국문관인 윤근수는 내가 소시때 삼각산에서 시국담을 나누던 처지로 친하게 지내었기 때문에 공을 걱정 되든터이라 윤근수에게 이공의 무혐의를 서신을 띄워 알렸고 도체찰사에게는 상장초(上章草)를 올려 공의 결백을 알렸소"

 

 

"고맙습니다 , 소인이 덕이 없고 능력이 없어 적을 막지 못했다 하여 곤욕을 치르는데 원수 께서 배려 하신 덕으로 이렇게 살아남아 원수부에 떨어지게 해 고맙습니다 .

 

제가 살아 있는 한 원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원 별말을 다하시오 ,통제사 까지 지낸 분이 수군으로 가면 않되겠기에 육군으로 그것도 내 수하로 오게 한것이오. 너무 상심 마오 . 공도 아시다 싶이 나라를 걱정 하는것은 육군이고 수군이 어디 있겠소?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 ....."

 

 

권율은 이순신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

 

권율이 인왕산 밑 출신이지만 이순신은 남산밑 건천동 출신이다 .

 

처음부터 잘 아는 사이는 아니 었지만 임진란으로 서로를 알게된 전우나 다름 없었다.

 

 

 

조정은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출동 않던 부산포 앞바다에서의 왜군 선단과 일전을 벌릴것을 기대 했다.적함이 마음놓고 드나 들지 못하도록 부산포를 봉쇄 하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령은 당연 했다.

 

그동안 이순신이 망서리고 나가지 않던 용맹심을 원균에게서 기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균도 그리 호락 호락 조정 명령에 넘어가지 않고 계속 되는 부산포 공격 명령을 이행 하지 않고 있었다.

원균이 망서리는것은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 되어 가기 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압송되고 원균이 통제사로 바뀌는 틈을 타 왜군들이 안골포에서 가덕도 를 점령하여 부산방면으로 나가지 못하게 먼저 봉쇄 해버리었다 .

 

 

원균은 부산 앞바다로 나가기전에 안골포의 적 붙어 공격 해줘야 한다고 주장 했다.

 

 

권율도 이점에 대하여 조정에 보고 했다

비변사에서는 대마도에 주둔하고 있는 10 만 대군을 조선 수군이 막아 내지 못한다면 제2의 환란이 있을지 모르니 기어코 부산 앞바다 해전은 치르지 않으면 않된다고 하였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

 

 

조선의 명령체계는 각 수령들이 왕이나 비변사에 도원수에게 알리지 않고도 누구나 장계를 올릴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위급시에는 도원수를 찾았다 .

 

 

급기야 권율은 원균을 불렀다

"원공 , 조정에서는 대마도의 왜군이 10만명이 부산포로 상륙한다는 보고를 받고 매우 당황 하고 있어 부산앞바다로 나가 치라 하는 데 공의 생각은 어떻소?"

 

 

"도원수님 , 소장 생각으로는 일본인 이중간첩인 요시라라는 자의 말만 믿고 김응서 경상 우병사가 보고한 10만 상륙설을 그대로 보고 한 탓입니다.

 

소장 생각으로는 망망 대해인 부산 앞바다에서 그들과 대결하려면 지금 우리 수군의 두배로도 감당 하기 어렵습니다.더구나 이순신이 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

 

 

권율은 원균이 부산포로 나가는것이 어렵다는것을 누구 보다도 잘알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을 때 까지만 해도 왜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에는 적들을 눈을 씻고 볼래도 볼수가 없었다.

 

그러던것이 이번 교체기간 동안 전격적으로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하여 항로를 막고 조선 수군 배가 얼 씬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권율은 원균의 속내를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원수사는 이순신이 왜 한성으로 압송 되었다고 생각 하오?"

"두마섬(대마도)에 왜군 10 만이 있으면서 불원 간 부산포로 상륙 한다는 정보를 듣고도 조정의 명령을 묵살 한 탓이지요"

"그러면 원수사는 부산 앞 바다로 나가라는 비변사의 요구 인데 나갈 용의가 없소?"

"........."

 

 

원균은 대답을 못하고 망서리고 있다가 입을 떼었다.

"도원수님 ,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우선 육군으로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 부터 제거 해주십시요 .그렇게 만 해 주신다면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겠습니다."

서울로간 이원익은 임금 에게 전후 사정을 보고 하였다 .

 

 

"전하, 소문 대로 왜적 10만 대군이 두마섬을 출발 할 모양 이온데 이들이 재편 되면 남쪽 에만 머물지 않을것 입니다 .이들이 부산에 상륙 하면 다시 제 2의 임진란이 않 일어 난다고 보장 할수 없나이다 .

엇그제 경상도 에서 출발 할때 도원수 와도 상의 하였는데 새로 통제사로 된 원균 수사도 이순신 수사와 마찬 가지로 부산 앞 바다로 진출 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

 

 

"수사 들이 왜들 그러는 게요?"

 

 

"이번에 건너오는 왜군들은 장비나 함정이 옛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합니다 .

 

이를테면 화력면 에서도 전에는 조총이 고작 이었는데 지금은 대포 까지 장착 했다 하옵니다."

 

 

 

"그런 적들을 대적 하려면 어찌 하면 좋겠소?"

 

 

"원균수사는 경주 , 대구, 의령 지역의 육군 뿐만 아니라 의병 까지 망라 하여 수륙 합동 으로 총 공격을 피어 왜적 들을 부산 앞 바다로 밀어 부쳐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건 누가 몰라서 하는 말이오? 관군과 의병 합동 으로 총공세를 펴 몰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 동자 라도 다 알수 있는것이 거늘 제반 사정 상 그렇게 못하니 그렇게 하지 않고 단순히 대마도에서 들어 오는 왜군을 바다에서 사전 막아 내자는 것 뿐이지 쯧쯧...

 

 

원균의 말대로 우리 유군이 총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것은 명나라와 일본국간에 강화 회담 중이라 함부로 칠수 없느사정이 있는것이 아니오?

 

그렇다고 명나라를 무시하고 조선군 단독 작전을 하다가 일을 그르친 다면 명 나라와 외교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것 인가가 큰 문제 인데도 우리 장수 들은 눈앞에것 밖에 모르는 구료"

 

 

"그러 하옵니다, 도원수가 원균수사를 만났다는데 , 도원수가 부산 앞바다로 나가 싸우라 했더니 우선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부터 육군이 먼저 처부숴 주어야 한다고 수정 요청 하였다 합니다"

 

 

"그러면 원 수사는 경주, 대구 의령의있는 육군을 안골포로 바다로 이동시켜 치라는 얘기요"

 

 

"예 전하 ,원균수사의 말은 욱해군 전군이 수륙 합동 총공세를 취하여야 한다는것 같습니다"

 

 

"그러면 경주 대구에서 버티고 있는 왜놈들은 어떡하라는 얘기요?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 당장에 원균 수사에게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부산 앞 바다로 진출 케하여 가등청정의 10 만군이 탄 배를 모두 침몰 시키도록 조치 하오"

"........"

 

 

임금의 추상같은 엄명에 이원익도 할말을 더 못하고 어전을 물러 나왔다.

 

 

도체찰사는 나오면서 이순신 이든 원균 이든 이번 사태 에서는 누구든지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 난국을 타개 할수 없다고 생각 했다.

 

 

 

이원익은 어명에 따라 원균 에게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부산 앞바다로 진출 하여 가등청정과 일전을 불사 하라고 지시 했다.

 

 

 

어명을 받은 원균은 앞이 막막 하였다 .

(차라리 육군을 동원 요청만 하지 않았드라도 않고 나중이야 어찌 되던 왜군을 치러 부산포로 나갔드라면 상감으로 부터 미움 이나 받지 않고 용맹 하다는 말이라도 들었을 것을............)

 

원균은 하고 후회 막심 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 대마도의 대 부대 병력이 부산에 아직 상륙 하지 않았 어도 조선 남부 해안에는 아직도 왜군이 버티고 있는 주둔 왜군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부산진 전함 70척 7천명

안골포 전함 40척 1천명

가덕도 전함 20척 5백명

 

 

소서행장은 부산진에 있었는데 조선군이 스스로 부산 앞바다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바다 에는 얼씬도 않았다.

 

 

그러나 예상 했던 조선군이 나타 나지 않자 대마도의 600 여척의 군함이 부산포를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마도에서 부산의 동향을 노리고 있던 왜선단이 조선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유유히 부산진 앞바다까지 까지 도착되었다

 

 

 

새로운 10만 병력이 상륙 까지 마치었어도 조선 수군은 그림자도 볼수가 없었다

 

 

적수군은 죽도를 거처 웅천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안골포 육망산 (陸望山)과 웅천 리양산(里陽山)위에서 한산도에서 움직이는 조선수군을 감시하였다

 

 

조정에서는 왜군 병력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별전에서 대신들과 비변사 유사 당상관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가기었다

.

영중추부사 이산해가 말을 먼저 꺼냈다

 

 

"전하, 듣기에는 왜적이 부산에 대거 상륙이 완료 되었다 하는데 지금과 같은 배치 상태 하에서 육전 으로 적을 막는 다는것은 생각도 할수 없습니다.

 

 

우선 서해안 으로 넘보지 못하게 수군으로 하여금 적에 대하여 선제 공격 하여 적의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할줄로 아옵니다."

 

 

"부산 앞 다에서 적의 진로를 처부수라고 지시 했는데도 왜군이 부산진에 무사히 상륙 까지 했다는 말을듣고 과인은 원균수사 만큼은 그러지 않으려니 했는데 원균 수사 까지 관망만 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수사(水師)들이 왜들 그러는거요"

 

 

도체찰사 이원익이 아뢰었다

 

 

"전하, 원균수사는 이유야 어떻든 어명을 어기었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 하오나 원균수사는 자기 한몸을 돌보지 않고 용감히 싸울 장재입니다

 

중요한 시기에 수사가 처벌을 서울 금부 에서 잡아다 국문 하고만 있으면 누가 적을 막아 내겠사옵니까습니까"

 

 

영의정 류성룡이

"전하.이미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마당에 어쩔수 없이 다음 대책이 중요 합니다 ,

 

원균 문제는 한산도가 천리길로 그를 잡아 오려 했다가 왜적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오니 도원수 에게 처벌하도록 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

하고 아뢰었다 .

 

썰물때 산에가고 밀물때 조개 잡으러 간다는 말이있다

 

조정의최고 책임자 유성룡은 일을 처리하는데 순리에 마지 않은 지시를 해놓고 원균을 처벌하려는 임금의 지시를 놓고 책임을 권율에게 떠 넘기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비변사는 권율에게 전열을 다시 갖추라고 지시했다.

 

 

권율은 도원수 본영을 성주에 두고 있었다

 

경상 우병사 김응서 에게는 합천에 있는 의령 지남 산성을 지키게 하였고 ,구례 현감 이원춘 에게는 남원성을 지키게하였다

 

정작 직접 전선을 지켜야할 도체찰사 는 훨신 후방인 선산에 있기로 하였다.

 

 

 

권율이 성주 본영에 돌아 왔을 때였다 .임금이 내린 유서가 와 있었다 ,

 

읽어 보니 원균을 단단히 혼내 주도록 하라는 원균 처벌지시 유서 였다.

 

 

권율은 이금이 내린 글을 다시한번 읽어 보았다

 

서울에 가만히 앉아서 일선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알기나 하고 하는 지시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왜선이 웅천과 안골포 에서 조선 수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판국에 지휘자를 처벌 하라는 것은 서울에서 편안히 앉아 위신만 지키려는 위정자 들이 한편 딱하다고 생각 해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이니 어쩌랴?

 

어명이 떨어 지었으니 거역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산도 본영에 연락 하여 임시 원수부를 설치한 곤양으로 원균을 불러 오도록 하였다

 

 

원균은 어명이라는 말에 께림직 하였으나 배를 타고 곤양 원수부로 향하였다 .

 

 

원수부에 들어선 원균은 모든것이 질서가 완연하고 조용하기 까지 한데 매우 놀랐다 ,

 

과연 도원수는  도원수로서  원수 다운데가 있었다.

 

 

원균이 권율을 찾아 뵙자 찻잔이 나오고 원균에게 말한다

"원공 원공을 내가 여기로 오라 한뜻을 아시겠소?"

"........."

권율은 더 이상 말없이 임금이 내린 유서를 원균에게 내뵈이었다.

 

 

 

원균이 읽어 보니 자신을 처벌하라는 임금의 유서가 틀림 없었다 .

 

 

원균은 순간 자세를 바로 잠으며 권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공 , 참으로 세상은 고르지 못하오, 일선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군인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편안히 있는 조정에서는 현지 사정도 잘 모르고 무조건 공세만 취하면 되는줄 아는 모양이니......

일선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오"

"..........."

 

 

원균은 도원수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리둥절 하였다 ,

 

 

그는 도원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조마조마 하였다 ,

 

그것은 군울을 엄격히 적용하여 원균을 처벌하라는 어명이 권율에게 떨어진 이상 모든 권한은 도원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 앞바다로 나가라는 지시를 어긴 죄가 큽니다. 군율대로 해 주십시요"

"........."

 

 

이번에는 도원수가 조용히 두눈을 감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두사람간의 침묵이 얼마나 흐르자  먼저 말을 꺼냈다

 

 

 

"원공, 지금도 적들과 싸우러 나갈 엄두가 않나오는게요?"

"아닙니다 , 부르시기전까지 그렇지 않아도 함대를 보강 하고 군사들을 쉬게 한뒤 출전 준비를 하다가 왔습니다 ."

 

 

"어떻게 할 참이오?"

"마음 같아서는 육군과 같이 수륙 합동 총 공세를 취하면 좋겠지만 조정 여건이 여의 치 않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

 

 

"그것이 문제요 ,적 10만 병력을 부산 앞바다 에서 막아 주길 원했는데 이미 상륙하고 말았으니 말이오,정보에 의하면 적들의 주력 함대와 주력 육군이 호남 지방부터 공격 한다는 지시가 있다는데 조정 에서는 지금 이라도 늦지 않으니 수군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하여 적들의 사기를 꺾으라느것이외다 .

 

 

조정이 요구 하는 것도 무리 이긴 하오만 어찌 하겠소 .

 

원공을 처벌하라는 어명이니 처벌을 해야겠으나 내 직권으로 공이 망망 대해 보다도 다도해로 끌여 들여 조수 간만과 지형을 이용 적을 처서 공을 세운 다음에 처벌문제를 조정에 다시 주청하여 볼까하니 공을 세워 보도록 해보시오"

 

 

 

역시 도원수는  지모가 출중한 지휘관이었다 .

 

사태가 급하다는 이유로 원균의 공을 돋보이게 하여 처벌을 감하든가 빼주려는 계책이었다

 

 

원균은 도원수의 깊은 사려에 감격하였다

"장군 , 고맙습니다 , 저의 마음을 알아 주시니 반드시 전공을 세워 보답 하겠습니다"

하고 눈시울까지 뜨거워지었다.

 

 

원균은 즉시 한산도 본진 으로 돌아 갔다 ,

 

권율은 배에 올라 떠나는 원균을 멀리서 바라 보고 한숨을 크게 내리쉬었다

 

"한심한 조정 대신들......"

7월14일 이른 새벽

 

 

원균은 한산도를 떠났다,날이 예상 외로 맑았다 .

잔잔한 남서풍이 불어 왔다 .

 

동쪽 하늘이 붉게 밝아 왔다.

 

 

원균이 방포를 쏘게 하여 이를 신호로 크고 작은 전함 100 여척이 일제히 돛을 달고 뱃머리를 동쪽 으로 하여 다도해를 헤쳤다.

 

 

원균은 수군 배치를 경상도 수로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경상 우수사 배설을 선봉장 으로 중위장 으로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을 ,충청도 수사 최호로 좌부장 으로 ,조방장 배흥립을 전부장으로 ,조방장 김완을 후 부장으로 ,순천 부사 우치적을 우 척후장 으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좌 척후장으로 녹도 만호 송여종을 참퇴장(斬退將)으로 웅천현감 이운룡을 귀선장을 삼고 거제 현령 기효근 에게 본성을 지키게 하였다.

 

 

병선 으로는 판옥선 25척, 협판선 25척,포착선 49척, 거북선이 한척이었다.

 

 

숫자 로는 100 여척이나 병선이라 할수 있는 것은 35척으로 대마도에서 새로 나온 600 여척과 조선 연안에 있던 기존 100여척을 갖고 있는 적군을 맞아 싸우려는것은 누가 보아도 어림 없어 보였다.

 

 

"적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우리 수군이 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만 단단히 먹는 다면야 능히 당하지 않겠는가 ?

 

하늘 이라고 결의찬 우리 조선군의 구국 일념을 그냥 넘기지 않으리라 제장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슴을 바치리라고 생각 하라"

 

 

하고 적들을 경계 하면서 원균은 안골포와 가덕도에 주둔한 왜군을 경계 하면서 죽도를 거처 부산 앞 바다로 나갔다.

 

 

 

"적선이 보인다"

 

 

제장들을 부르는 깃발을 드니 원균이탄 장선에 전후 좌우에 있던 제장들이 주장인 원균의 지시를 들으러 주위로 모여 들었다.

 

 

제장이 장선에 모두 오르기를 기다려 원균은

"우리는 이제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길목을 끊으려는 중대한 작전을 하러 부산 앞바다에 나와 있오이다.

 

날도 어두워지고 적들의 반응이 없는것을 보아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몰라 내일 아침에 적선을 선제 공격 할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

 

제장 들은 금일밤 경계를 철저히 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기를 바라오.내일이면 나아가 적들을 칠것이니 충용지심(忠勇之心)으로만 나간다면 두려울것이 없을 것이오 ,

 

만일 이 전투에서 물러 가는자가 있을경우에는 군법 으로 처벌 할것이니 그리 아시오"

하고 소리 높여 강조 하고

" 절대 동요 하지 말고 경계를 철저히 하기 바라오"

하고 재삼 당부 하였다.

 

 

 

원균의 선단이 절영도에 도달 하자 하늘도 무심하게 높은 풍랑과함께 돌풍이 불기 시작 하였다 .

 

배는 어두운데 배를 댈곳도 없고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 했다 .

 

 

"적함이 나타났다"

 

 

보변소리가 밤하늘을 울리고 경계중에 있던 조선군이 모두 장선의 신호를 기다리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적함이 나타 났다는 보변 소리를 듣고 있던 군사들은 종일 토록 노 저어온 피로감과 함께 기갈로 우왕 좌왕 하였다 .

 

 

"망동들 하지 말고 적들의 동태를 철저히 살피라"

 

 

장선에서 밤하늘을 타고 소리 첬다 . 파고는 점점 더높아지고 배들이 요동 치기 시작 했다 .

어둠속에서 적함들을 관찰한 그리 많지 않은 숫자에 안도 하고 추격 하라 지시 했다

 

 

 

웬일인지 적함 들은 대적 하려 하지 않고 도망 치기 시작 했다 .적들은 싸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기 불순을 이용 하여 조선 배들을 더욱 피로케 하는 작전이 분명 하였다 .

 

 

 

"장군 안 되겠습니다 , 일기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 일단 뭍으로 물러갔다가 다시 작전을 꾀하는수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권관이 원균에게 권고 하였다

 

.

"아, 하늘도 무심 하고나 내 임금 으로 부터 받은 불신을 이번에 씻으려 했는데....."

 

 

적함 들은 조선 배에 접근 하는척 하다 도망하는 척 하며 정면 도전을 하지 않고 조선군의 주위를 맴 돌기만 하였다

 

 

왜선을 추격하며 쫓다 보니 가까이 섬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너도 나도 명령이 떨어 지지도 않았는데 육지 가까이 배를 정박 시키기 시작 했다 .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배가 먼저 가덕도에 상륙하고 원균이 거느린 주력함은 거제도 영등포에 정박 하였다 . 병사들이 그동안 물때문에 고생한 탓으로 상륙 하자 마자 물 부터 찾았다.

 

 

 

그때였다

조선군이 나무와 물을 찾아 반드시 정박 할것을 예상한 왜군 들이 미리 대기 하고 있다가 벼란간 대포를 쏘아대고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조총을 쏘아 대기 시작 하였다 .

 

 

 

원균 함대는 급히 배에 다시 올라타게 하고 뱃머리를 한산도 본영으로 돌리게 하여 칠천량(漆川梁)에 이르렀다 .

 

 

칠흙같은 밤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방울도 조금씩 쏟아지었다.바닷물의 파고가 높아 배를 띄울수 없어 왜군들도 얼씬 않았다.

 

 

 

이날밤 원균은 제장 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경상 우병사 배설 이 노골적 으로 불만을 토로 하였다

"장군 , 장군 께서는 병사들이 어떤 상태 인지 잘 아시면서 오로지 전투 전투만 강조 하십니까? 보십시요 영등포에서 잃은 병사수만 해도 수백명입니다 ."

 

 

" 일기가 불순 하여 우리가 잠시 실기 한것 뿐이지 . 내일 날씨가 회복 되면 가덕도에 정박중인 함선과 합세 하여 다시 치도록 합시다"

 

 

"용감 할때는 용감 하고 비겁 할때는 비겁 할줄도 아는것이 병가의 요체가 아닌가 합니다 .

 

병사들이 피로하고 병세(兵勢)가 외롭고 약 해진듯 하오니 일단 한산도로 돌아 가심이 옳을가 합니다.

 

병가의 말대로 비겁하다는 말을 듣더래도 일단 물러나는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원균이 이말에 질책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기는 일반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오 ?,

 

의롭게 살다 의롭게 죽는것이나 길바닥에 밟혀 죽는 벌레나 다 똑같다고 같다고 생각 한다면 그런 삶을 왜 살겠다는거요?

 

 

 

의로운 삶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날이 온다면 죽을 때 까지는 싸워야 할것 아니오? 나라가 존망지척에 와 우리의 목슴을 의롭게 죽기를 바라는데 비겁하게 목슴이나 부지 하려 한다니 병사는 다음부터는 그런 나약한 말을 하지 마시오 "

 

 

배설이 할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도중 밖에서 정탐병이 급히 들어 와 보고 한다

"적함 수백척이 포구를 포위 하고 있읍니다"

 

 

"무엇이?"

"모두 경계 태세에 임하라 "

포성이 울리고 밖이 소란 해지었다

 

 

벼란간 주위가 환 해지고 콩 볶는 조총 소리와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바닷가를 뒤 흔들렀다 . 적병 들이 조선 배에 올라타 불을 지르고 조선군과 일대 격전이 일어났다

 

 

원균괴 제장들이 급히 나와보니 온 포구가 불 바다가 되고 적병과 육박전이 벌어 지고 있었다

원균은 칼을 빼어들고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었다 .

 

원균은 용장이었다 .

 

종힝무진으로 내려치는 칼날에 추풍낙엽 처럼 적의 목이 달아 났다.

 

 

 

적병중 한명이 원균에게 조총을 겨누어 쏘자 그 자리에 쓸어지고 말았다 .

 

임진란 이래 전장만 누비던 말도 많던 용장(勇將) 원균 통제사가 장열하게 전사 한것이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원균이 죽는등 전세가 극도로 악화 되는것을 보고 급히 전투는 뒷전으로 하고 선수를 돌려 한산도에 상륙하여 한산도 본영과 각종 시설을 불사르고 순천 방향으로 도망 하였다

 

 

 

여기서 장열히 전사한 원균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대하여 집고 넘어 갈 일이있어 지면을 활용 코자한다.

 

 

 

세간에는 도원수 권율이 선조 30년 7월 11일 원수부 곤양 본영으로 원균을 불러 들여 곤장으로 벌하였다는 근거 없는 기록을 과신하고 각종 임진란 관련 허구적 소설에 즐겨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도원수 권율을 모독 하는 인용 인지도 모르고 이순신만 훌륭한 장군으로 묘사하고 악역으로 원균을 등장 시키고 있다 .

 

작가들은 허구로 극적인 효과를 만들려고 원균을 악역으로 등장시켜 이런 대목을 함부로 삽입하고 있는것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이 지하에서 들으면 통곡 할 일이다

 

 

 

작가들은 그런 대목 에서 원균을 악장(惡將) 아니면 겁장(怯將)으로 묘사 하고있다

 

그들은 이순신과 원균을 결부 시키기위한 허구를 조작 위하여 권율까지 악역(惡役)으로 등장시키는것을 서슴치;않고 있다

 

 

 

생각 해 보라 .

 

이순신도 작전상 도저히 나아가 싸울수 없다고 거부한 전투에 세세한 작전 지시까지 일일히 간섭한 조정 대신들은 싸움에 실패하자 자기들은 뒤로 쑥 빠지고 책임을 죽은 원균 통제사나 도원수 권율에게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기록만 보아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임진란의 대표적 작품 이라 할수 있는 징비록을 보자

 

당시 영의정 으로 있다 퇴임 후 쓴 류성룡의 징비록(懲琵錄)에서 보면

권율이 원균을 칠천도(漆川島)진중에 있는 것을 고성 으로 잡아 들여 곤장을 치었다고 기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너무나 어이 없는 기록이다

 

당시 시간상으로 원균이 비변사 명에 의하여 부산 앞 바다 까지 나갔다가 일기 불순 으로 칠천량에 정박하여 있었다 .

 

당시 상황이 웅천만에 왜군이 웅거 하여 언제 조선 수군이 공격 받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하에 칠천량과 고성의 거리가 어디인데 당시 상황 으로는 권율이 있었다는 고성에서 칠천량 까지가서 원균을 잡으러 갈려 해도 풍랑 으로 배도 띄울수 없는 상황이 었고 한참 왜군과 대치중이었다.

 

 

전투중 에 있는 장수를 잡아다 장벌을 가했다니?............. 도저히 이해 안가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칠천량 사정으로 보아 이해가 안가는 것을 꾸며내거나 후세에 원균을 일부러 겁장으로 만들기위여 허구화한 대목일수 밖에 없다.

 

 

 

요사이 초등 학생이 보아도 웃어 넘길 일이다.

 

 

 

징비록을 쓴 작자 유성룡도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곤양의 현장을 직접 목격 한것도 아니고 일선에서 모략하기 위한 불확실한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징비록 자서에도 나타 났듯이 유성룡 만년에 경상도 고향 땅에 돌아가 쓴것 으로 고증도 없이 단순히 전란을 회고 하며 쓴 기록 일 뿐이다

 

 

 

이순신만 예찬하는 유성룡은 이순신과 유성룡이 어렸을 때 같이 공부한 경력이있으며 이순신을 출세토록 추천한 사람도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이쓴 징비록에서는 작자가 권율도 좋게 쓰지 않았다.

 

 

권율은 징비록 작자 유성룡 보다 나이가 위로서 서울 인왕산 밑에서 같이 자랐고유성룡은 남산 북쪽 건천동에서 자라 권율과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권율은 징비록 작자 유성룡에게 이순신 모양으로 평소 그리 고분 고분 하지 않았다

 

권율에게는 유성룡보다 선조가 직접 챙긴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어느덧 무신의 기질이 몸에배어 문신들 같은 아부 소질을 키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선조는 권율을 무척이나 아끼었다.

징비록 작자 유성룡은 자기를 제치고 임금과 직접 독대 하는 유일한 장수 권율을 좋아 할 리가 만무 였다

 

어쨋든 원균은 후세에 주인공과 악역을 등장시켜 글의 재미를 돋구려는 말장난꾼들에 의한 희생물이 아닐수 없다

 

어쨋든 거리나 시간 상으로 맞지 않는 원균 징벌설은 권율 이나 원균을 희화(戱畵)화 하기위한 얘기꾼들의 장난 일뿐이다

원균도 세간 에서는 악장(惡將)으로 묘사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원균이 죽고 난 선조 37 년 10월에 왕이 내린 공신 교서를 보면 잘 알수 알수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 1등공신

 

 

 

권 율(權 慄)

이순신(李舜臣)

원 균 (元 均)

 

 

 

선무 2등공신

 

 

 

신 점 (申 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菴)

이억기(李億棋)

 

 

 

선무 3등공신

 

 

 

정기원(鄭期遠)

권 협(權 俠)

류사원(柳思援)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

조 경(趙 儆)

권 준(權 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槿)

이운룡(李雲龍)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세간 에서는 이순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왕이 원균 만 편애 하고 조정 에서도 원균 편 일색 이라 당쟁의 혜택을 원균이 누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미워 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종6 품 정읍 현감에 있을 때 파격적 으로 전라 좌수사로 임명 한것을 두고 사간원 에서는 반대 상소를 올렸을 때도 임금은 사간원의 상소를묵살 한 것이라던가,왜적과 해전 에서 싸워 이겼을 때 선조가 같은 공을 세웠을 때도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자 원균이 불쾌 하게 생각 하고 있다는 좌의정 김응남의 보고가 있었을 때도 선조는 舜臣捕倭之功則最多矣(이순신이 왜적을 잡은 공이 더 크다)라고 하면서 원균보다 이순신을 더 총애 하였다.

 

 

이순신을 백의 종군케 한 요사이 용어로 집행 유예로 한것도 선조의 결심 이었다.

 

그런데 세간의 기록들은 선조가 마치 이순신을 미워한 것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선조의 배려를 두고 선조 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에서는 선조가 잘 못한것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간의 선조에 대한 일방적 견해도 이 선조 수정실록 에서 잘못 기록 한것 들을 인용하고 있는 탓이다.

 

 

 

"원수로 부터 매를 맞고 홧김에 수군을 끌고 나갔다 패했다"라는 선조 수정 실록은 선조 때에 쓴 글이 아니고 인조(仁祖) 21년 에 이식(李植)이 선조 실록에도 없는 원균 에대한 수정 기록을 올림 으로서 왜곡 시키고 있다 .

 

이 대목은 권율 도원수가 원균이 바다에 나아가 나가 싸우지 않는다고 매를 때리었다는 것이고 원군은 권율의곤장을 맞고 화가 나서 수군을 끌고 나아가 왜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는 황당무계한 글을 선조 수정실록에 기록한 사실을 말한다

 

이 기록은 인조시대 이식이 이순신을 우상화 하는 댓가로 만든 완전히 원균을 희화한 말 장난이었다

 

 

 

이 사실은 원균이 왜적과 싸우다 죽자 선조는 원균이 적과 싸우다 죽은것을 애석히 여겨 以身殉之(몸을 바쳐 순국 했다)라고 했는데 훨씬후인 인조때 이식은 敗死(왜적에 패하여 죽었다)했다 라고 기록 한것만 보아도 그 시각 차이가 어떤지 알수 있다.

 

 

 

당시 공신 평가를 담당 했던 이덕형과 이항복은 원균의 인물 평을 "충성 스럽다, 순박하다, 곧다, "라고 평하였다 .

 

윤근수 는 "고지식하다" ,하였는데 유일 하게 도체찰사 이원익만 "성질이 억세다" 라고 평하였는데 그것은 전란중 왜적에 대하여 손수 돌격전을 잘펴 직접 왜군과 전투를 벌리는 용맹성을 보고 한 말일것이다 .

 

 

 

그러나 선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선조 30 년 1 월 27 일 중대한 어전 회의가 열렸을때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같은 경우 "원균은 나라를 위한 정성이 지극하다" 라고 발언 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뒷날 유성룡은 자기가 쓴 징비록에서 元均性險(원균은 성품이 험상궂다)라고 틀린 평가를 하는 말을 적어 놓고 이중성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

 

 

 

이와 같이 서울과 천리나 떨어진 남해안 전선 에서 왜적과 목슴을 받쳐 악전 고투 하고있는 장수들을 가지고 서울의 조정에 편안히 앉아서 제 각각의 인물평을 다르게 하고 있는데 대신들의 이중적 평 을 보아 그 평가 라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기록인가는 더 이상 물어 볼 대상도 되지않는다

 

 

 

"원균이 권율 앞에서 장형을 당하였다"라는 내용은 본 선조 실록에는 없다

 

 

 

그러나 인조 때 만든 선조 수정실록은 허무 맹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원균을 깎아 내리기 위하여 존재 하지도 않은 장벌론 까지 조작 하여 권율을 악역을 담당 하게 만들고 원균을 악장으로 까지 부각시켜 그럴듯하게 꾸며 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임진란에 대한 선조 이후의 전통 사관은 필요시 마다 이순신과 원균을 등장 시키고 두장수들 에게 선악의 옷을 입히려 들고있디.

 

그 예로 효종의 북벌 때도 군인들이나 국민들의 상무정신을 끌어 내기 위하여 위정자들은 두 사람중 이순신만 이끌어 내어 부각 시켰고, 그후 나온 각종 서적 충무공 전서등과 노량해전 묘비등 각종 묘비에도 온통 원균은 많은 공이 있었으면서도 원균이라는 이름 두자가 빠지기 일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주의 학자들도 민족 정신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순신 만을 내세우고 원균은 항상 그늘 에서 헤어 나지를 못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수군 특성을 잘살려 부지런히 난중 일기를 남기었으나 도원수 였던 권율은 육장 생활을 많이 한 탓으로 육군 특성상 동분 서주 하느라고 한가로이 앉아 일기를 쓰기는 커녕 글도 변변히 한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3자의 엉터리 같은 글이 있어도 편견과 오해를 해명 할만 자료가 없으니 안타까울뿐아다 ,

 

 

원균에 대한 편견적사료(偏見的史料)에 대하여는 이쯤 해두고 원균이 죽은 후에 왜군과 조선군, 명나라의 대치 상태와 앞으로 불어닥칠 조선의 운명에 대하여 다시 살펴 보자

 

 

 

왜적 10만 대병은 600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부산포 앞바다에 정박 했다는것은 앞서 기술하였다.

 

8월 3일 왜군 신임 총사령관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는 좌군 사령관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를 ,우군 사령관을 가등청정으로 삼았다.

 

 

경험이 많은 가등청정의 우군이 먼저 북서진 하여 서생포, 밀양,초계 거창으로 공략 하기로 하였다.

또다른 와도 직무 의 1만 병력은 의령 삼가를 거처 성주성을 처 도원수군율을 잡아 오기로 하였다

 

 

한평 권율은 금산(金山-김천)에 원수부를 두고 적의 동태를 주시 하고 있었다.

 

금산은 한강 유역과 낙동강의 근원지를 서로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체찰사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 조정 에서 강력 하게 집중적으로 조선군을 배치 하도록 하였다 .

 

 

이러한 조치를 권율은 마땅치 않았다. 감사 수령 시절에 그가 군사 작전권을 갖었었을 때는 체찰사가 뭐라하던 일단 마음만 먹으면 군사를 마음 대로 동원 할수 있었 으나 도원수가 된 후에는 주어진 원수부의 200 여명 밖에 않되는 병사로 한정 되어 있는 탓에 직접 병력을 동원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어 대규모 병력을 갖고 있는 각 수령 들을 통제 해서야 만 지휘 할수 있는 모순이 있었다.

 

 

수령 들도 도원수 명령을 받으면 즉각 따라야 하겠지만 지역적으로 떨어저 있는 이유와 개별적 성격 때문에 제대로 명령이 잘 이행 되지 않는 통솔상에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도체찰사는 임금의 명령을 이행 하는 문관 이면서 작전에서 부터 구체적 전술에 이르기 까지 일일히 관여 하면서 모든 명령권까지 자기가 행사 하였다

 

 

도원수가 해야 할일을 일일히 가로 막고 권한 행사를 하고 있어 도원수가 할일이 없었다 .

왜군 10만이 상륙하기 전 에도 권율이 독자 명령을 내려 총 공격 령을 내리려 했을 때도 조정 에서는 이를 가로 막고 체찰사의 의견을 따르라고 명령하기 까지 하였다

 

 

 

서울의 비변사 에서는 왜군이 그 주력 부대가 이번에도 부산에서 출발 , 김해, 현풍, 성주, 금산,추풍령, 영동 , 청주, 죽산,등을 거쳐 공격 할것이 분명 하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비변사 에서는 권율 에게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과 직지천이 합쳐지는 금산에 거점을 두고 조선군 전체를 통활하라 지시 했다.

 

 

 

비변사는 모든 작전 명령이 엄연히 도원수 에게 직접 떨어저야 함에도 불구 하고 그렇지 못하였다.

조정 에서 열리는 의정부 삼사회의(議政府三司會議)에서 부터 비변사 합좌회의(備邊司合座會義)또는 원로회의(元老會議), 군신회의(群臣會議)에 모두 참석하는 우의정 겸 도 체찰사인 이원익이 모두 명령문을 받아 권율에게 전해 주는 형식이었다.

 

 

 

체찰사 이원익은 조정 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먼저 읽고 군사적 각종 지시 에서 부터 작전 용병 에 이르기 까지 도원수를무시하고 월권 행위를 행사 하였다 .

 

 

 

조선은 문신(文臣) 국가이다 .

 

어느덧 문신에서 무신(武臣)으로 변신한 권율 로서는 각종 음해가 날뛰는 조정의 분쟁에 까지 개입 할수도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더구나 한때는 당쟁에 말려 들어 곤욕을 치룬적이 있는 그로서는 선뜻 나서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원익은 권율 에게 적의 주력군이 재침을 할 경우 반드시 조령이나 새재를 넘을것이 분명하므로 신립과 같은 우(愚)를 반복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령 남쪽인 금산에서 적을 방어 하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 .

 

 

 

그러나 권율은 견해가 달랐다,

권율은 적들이 이번 에는 영남로가 아닌 다를 길을 택 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왜국의 사정에 대한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켜 놓은 풍신수길이 조선 재침을 다시 결심을 하게 되기 까지는 일본 국내 사정도 그리 간단치 않을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전쟁을 하려면 군인을 징집 해야 하고 군량미를 대어야 하며 전쟁에 쓸 무기가 갖추어저 있어야 한다

왜국도 오랜 전쟁으로 양곡이 부족 할것이 뻔하므로 군량미의 보고인 전라도를 그냥 두지 않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권율은 적들이 전라도 침입에 대비해 진주와 덕유산 남쪽 육십령에 조선 주력군을 배치 할것과 조선 수군을 다시 수습 하여 적 수군이 한산도를 못 처들어 오도록 하려면 이순신을 다시 복직 시키자고 체찰사 이원익 에게 의견을 내었으나 이원익은 비변사를 핑계 대며 권율의 작전 계획을 묵살 하고 금산 수비만을 고집 하였다.

 

 

이원익의 고집은 대단하였다

"왜적은 조선 3 도를 할양 해 주어야 물러 나가 겠다는 것인데 이말은 말도 않되는 소리로 전하 께서는무슨일리 있어도 왜적을 그냥둘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것이오,

 

 

 

반면 적들이 다시 한성 까지 다시 처 올라와 도성을 점령 하고 임금의 항복을 받겠 다는것 아니오? ,적들이 노리는 것은 신속한 한성 공격 이므로 원수의 말 대로 전라도로 우회 할리가 절대 없을 것이오

 

 

 

. 틀림 없이 지름 길인 영남로 로 진격 할것이 분명 한것이므로 금산경비는 필수적이므로 원수의 의견 에는 동의 할수 없소 , 더욱이 전쟁 초기 에도 조령을 적에게 무사히 넘도록 내주어 실패 하였 거늘 같은 실수를 반복 할수는 없소"

 

".............."

 

권율은 체찰사 이원익의 주장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상소하고 싶은 생각이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

 

아니 그럴만하게 한가 할 시간이 없었는지 모른다.

 

 

권율은 할 말을 잊어 버렸다 .

(아, 또 한번의 전쟁의 위기가 닥아 오는 데도 전란 초기에 큰 실수로 의주 까지 물러 났던 대신 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풍신 수길은 7월 15일 칠천량 에서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을 물리친후 양자인 소조천 수차를 대장으로 하여 각 왜장들 에게 총 공격령을 내렸다

 

 

풍신수길은 다음 같은 특별 명령을 내렸다.

 

 

 

첫째,

우군 대장 모리수원(毛利秀元)이 이끄는 선봉 대장 가등 청정이 인솔 밀양을 거처 거창 으로 나아가되 일부 병력을 분산 하여 금산(金山)에 있는 권율군을 자극 하여 적의 주력이 그곳으로 집중 하도록 하게 만들고 대다수 병력은 합천 에서 더이상 나가지 말것

두째,

우군 제 2진 흑전장정군은 광양에 상륙 순천의 조선 수군 본영을 격파 하고 구례로 나오도록 하고 제 3진 와도직무군은 김해 , 창원을 거처 구례 에서 제 2진과 합류 하도록 하는 동시 제 4 진의 소서행장군은 남해에 상륙 사천을 거처 구례 에서 합류 한다. 제 2,3,4진은 구례에서 대기 하고 있도록 한다

셋째,

제 1 진 일부 병력이 금산에서 거짓 패 하는 척 하고 적들과 대치 중을 틈타 가등청정의 주력군은 방향을 바꾸어 전라도 진안 으로 진격 한다.

네째 ,

제 2,3,4,진은 구례 에서 명나라 군이 있는 남원을 공략하고 전주에서 제1진과 합류 한다

다섯째 ,

전주에 합류한 전 부대는 다시 공주, 수원 , 한성 으로 진격 도성을 점령 하고 조선 왕의 항복을 받도록 한다 .

 

 

 

풍신수길의 작전 명령은 각 왜진에 전달 되고 일시에 10 만 대병력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

 

 

 

풍신 수길의 명령 대로 왜군 주력 부대는 고령 방면 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

 

권율은 체찰사 이원익의 명령과는 별도로 긴급히 구례 현감 에게 파발을 띄워 구례 병력 으로 는 적을 막기 힘드니 남원성의 명나라 잔류 병력을 지휘 하고 있는 양호와 협력 남원성을 굳게지키라고 지시 하였다

 

 

다음은 지남산성(之南山城 의령 소재)을 지키고 있는 김응서를 소신 대로 황석산성 으로 이동 하라고 지시 하려 하자 종사관 황여일이 극구 말렸다 .

"원수님 , 쳬찰사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의견 마찰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구례 현감이 거느리는 군사 수는 얼마 않되고 체찰사도 관심 밖이라 다른 말이야 없겠지만 김응서군은 체찰사가 굴뚝 같이 믿고 있는 부대 입니다 .

 

그쪽은 그대로 두시고 우선 급한대로 현재 안음(安蔭), 거창(居昌), 함양(咸陽) 세읍의 백성 들이 청야지책에 의하여 황석산성으로 피난 하여 있으므로 안음 현감 곽준(郭晙)에게 명하여 백성 들을 동원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해놓는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 다음에 적의 동태를 보아 가면서 황석산성 을 지원 해야 할도리 밖에 없을 듯 합니다 "

 

 

"그래도 체찰사 몰래 그런 지시야 할수 있나...."

"아니옵니다, 쳬찰사 어른은 적의 사정이 어떤 가는 잘 모르고 조정에서 내린 죽령 새재 경비 에만 집중 하기만 고집 하여 도저히 말이 먹혀 들지 않습니다 ."

 

 

"딱한 일이야, 작전의 작자도 모르는 자가 작전 명령을 남발 하고 있으니 장차 이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

황여일이 권율의 눈치를 살피다가

"원수님 지금 제가 직접 두곳에 달려가 원수부 명령으로 적에대한 대비를 특별 지시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적들의 이동 정보를 알아 오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일어선다 ,

 

 

"위험한 적진을 거처야 황석산성과 남원에 도달 하거늘 어찌 가겠다는 말인가 "

"염려 마옵 소서 , 이몸 이미 나라에 받친 몸입니다 ,

 

무슨일이 있어도 살아 돌아 오겠습니다 "

종사관 황여일은 장정 5 명을 사복을 입혀 대동 하고 육십령으로가는 지름길을 향하여 떠났다

 

 

 

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이 파죽 지세로 진격 해 오는 소식도 모르고 의령 지남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김응서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었다 .

 

 

한편 왜군은 김응서가 있는 지남산성에 간첩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외 술판을 벌리게 하여 안심 시키고 있는 동안 지남산성을 피하여 한밤중에 합천으로 이동 하였다.

 

 

 

체찰사 이원익은 왜군의 속셈도 모르고 선산의 금오 산성에서 금산 (김천)에 나가 있는 권율에게 금산 방어 계획 지시만 해놓고 조정 에다는 조선군이 철저히 조령을 지키고 있다고 치계(급보)를 올렸다

 

왜군 주력 정예군인 가등청정군은 2 만군사중 1500여명을 차출하여 마치 주력군 인양 성주 방면 으로 투입시켰다

 

 

 

적들이 금산 방향 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척후병 으로 부터 들어 왔다 , 김응서로 부터 보고가 없어 불안 하게 지내던 이원익 에게 원수부로 부터 적 출현 보고가 들어 오자 부리 나게 권율에게 찾아 왔다 .

 

 

"예상대로 적의 선봉대가 조령을 목표로 진격해 오고 있다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즉시 전군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합시다 "

"..........."

권율은 이원익의 말을 잠시 듣고 대답없이 묵묵히 앉있기만 하였다

권율은 지금 까지 손수 모든 작전 배치 까지 해놓고 막상 적 출현 소식을 받고 어쩔줄 몰라 하는 이원익이 가련 하기 까지 하였다

 

 

옆에 있던 경상도 조방장 곽재우가 이를 보다 못하여 말 하였다

"체찰사님 , 서두른 다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 적을 치려면 정면으로 치기 보다는 기계(奇計)를 세워야 합니다 "

"그러자면 ..."

"그러자면 우선 이를 주도 할 주장(主將)을 골라 선두에 서서 싸울 장수를 잘 골라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장수가 누구란 말이오?"

 

 

 

 

왜군 선봉대장 가등청정이 육십령 아래서 고개 위를 바라 보니 정상이 하늘에 닿은것 모양으로 까마득하다 과연 소문 듣던 대로 험준한 고개였다.

"척후병으로 하여금 고개에 복병 이라도 없나 확인 하라 권율이 이곳을 순순히 넘길 위인이 아니다""

가등청정은 고개 주변 상황을 보고 하라 지시 했다.

 

 

척후병이 한참후 돌아 왔다

"고개에 개미 새끼 한마리 않보입니다"

"그래?"

가등청정은 자기 귀를 의심 했다

"진짜 아무도 안 보인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더 확인 하라 조선의 도원수 권율은 병법에 능한자라 이런곳에 복병을 두지 않을리가 없다"

 

 

얼마후 척후병이 나타났다.

 

 

"역시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그래?....."

가등청정이 가소롭다는듯이 웃는다

"음 권율이 병법에 통달한 명장라더니 다 헛소리 구먼 .....하하 이 황석산성은 육십령을 사이에 두고 전주로 가는 요충지이다 .

즉시 전 군은 육십령을 신속히 넘도록 하라"

하고 가등청이 큰소리로 호령 하였다 .

 

 

 

왜군은 조선군과 교전 한번 없이 육십령을 무사히 넘어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여기서 잠간 7월 15일에 일어났던 원균이 전사한 칠천량 해전 패배후의 조정의 동정을 살펴 보자.

 

앞서 권율이 체찰사 이원익에게 이순신을 다시 기용 수륙 병진 을 하자고 했으나 이원익은 못들은척하고 넘겼다는 얘기를 한바 있다.

 

 

권율은 조선 수군의 재건이 급선무라는 것을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 했다.

 

그는 사위이며 병조 판서로 있는 이항복에게 자기 휘하에 백의 종군을 하고 있는 이순신을 하루라도 빨리 재 기용하여야 한다는 간곡한 친서를 두번이나 보내 었다 보내었다

 

 

왜군이 서해를 넘본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다시 한번 이순신을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으나 백의종군 시킨것이 엊그제인데 금방 푼다는것도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마음에 걸리었다

 

 

왕이 제신들에게 조선수군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

 

아무도 대책에대한 대답이 없었다.

 

적군이 다시 쳐들 오고 있는데 대하여 이순신이 설사 죽을 죄를 지었다 해도 적을 막아 내기 위하여서라도 풀어 주어야할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명분만 찾고 앉아 있는 한심한 대신들이었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왜적이 조선 수군이 취약 한것을 알고 함부로 남해 바다와 서해를 넘보고 있습니다 , 대책은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왕이 주위 제신들의 다른 의견이 있을까 하여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다만 경림군 김명원이 대답할 뿐이었다

"병조 판서의 의견이 옳다고 봅니다 "

임금이 그제서야 힘을 입어 말한다

"비록 순신이 죄 인의 몸이기는 하나 순신 이외에는 수군을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는자가 없소 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려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죄과를 벗게하도록 하겠소"

"........"

 

 

아무도 임금의 결심에 반대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없는 수군이란 어떻게 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대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병판은 오늘 곧바로 선전관에게 교유서를지참하여 보내 순신에게임명장을 전달 하도록하고 근무 토록 하오"

 

 

이순신이 백의종군의 죄목을 벗는 날이 온것이다.

 

 

 

이순신은 수군 통제사 발령장을 받고 권율에게 하직 인사차 원수부에 들렸다

"그동안 돌보아 주시어 다시 통제사로 부임 하게 되었습니다 "

하고 인사를 하자 권율이이순신의 손을 잡는다

"그동안 수고 많았소 왜군이 다시 서울로 진격하여 도성을 다시 뒤 흔들려 획책 하고 있으니 남해 바다를 철통 같이 지켜 주시오"

 

 

 

전라도 침공 의 선봉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왜군 좌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 들어 갔다

 

 

권율은 기회 있을적 마다 이원익 에게 이순신을 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 토록 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못들은척 하고 넘어가기만 했다.

권율은 사위인 이항복이 이순신을 통제사로 다시 임명케 한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 하였다.

 

 

 

반면 이순신은 이번 재 임명이 순전히 영의정 류성룡의 힘으로 알고 있었다 ,

 

서울 건천동에서 어릴때 같이 자란 관계로 평소 사신을 주고 받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류성룡은 조정내 불고 있는 동서인 당파간의 싸움 와중에 올라 있는 이순신을 앞에 나서서 두둔할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의 재임명이 권율과 이항복의 작품이라는것을 모르는 이순신은 의례적인 인사로 대신 하였다

 

 

 

권율은 이순신의 두손을 뜨겁게 꼭 잡고 말한다

"그동안 심적으로 얼마나 괴로웠겠소, 부디 남해에 가시거던 다시는 왜적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해 주시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두사람의 애틋한 헤어짐의 장면이었다

 

 

 

이순신은 이날로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을 거처 회령포(전라도 장흥)에 도착 벽파진(碧波津)에 진을 치고 부임지 첫날을 지내었다.

 

 

 

전라도 침공하려는 적의 우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난 후 우희다수가가 지휘하는 좌군은 남원성 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선봉장 소서행장이 남원성에 도착 하자 마자 포를 쏘고 조총을 쏘며 호각을 불어대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명군(明軍)장수 양원(楊元)과 이신방(李新芳)은 남원성 동문에서, 명군장수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을 , 장표(將表)는 남문을 ,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는 북문을 지키고 있던 명군과 조선군은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밤이 되자 적진에서는 잠도 자지 않고 불을 피우고 고함을 지르며 포를 쏘아 대었다. 다음날 오시(12시)가 되자 일제히 적이 총과 포를 쏘며 돌진해 오니 그소리가 뇌성벽력 같았다.

 

 

 

왜군은 사다리와 3층 목책을 높이 세워 남원성을 내려다 보며 총포를 마구 쏘아대니 성안에는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며 도망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양원은 잠깐 잠이들어 깨어 보니 적들이 동문을 부수고 진중으로 왜적이 침투 하였다.

 

그는 놀래어 미처 옷도 못입고 도망 하였다.

양원은 말 한필을 간신히 얻어 타고 도망가자 그 뒤를 열어 병사가 뒤를 따라 도망 쳤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그 능숙한 활 솜씨로 적을 많이 죽이고 마지막에는 대검을 빼어들고 뛰어 들었다.

 

이를 보고 방어가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金慶老), 이복남(李福男)등이 맹렬히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인마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돌격 하다가 전사하였다.

 

위풍도 당당 하게 노루목고개를 오르기 시작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인 협곡으로 명나라 대군의 긴 행열이 고개 정상을 향하여 고개로 뱀처럼 오르기 시작 한것이다.고개를 중턱에 오르자 오유충은 안도의 숨을 거두었다

 

 

정상에 선두가 오르도록 이상하리 만치 주변이 조용 하기만 하였다.

 

 

그때였다. 고개위 양쪽 에서 빗발치듯 총탄이 머리위로 쏟아지자 놀란 군마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여기저기 조총에 맞아 쓰러지니 순식간에 시체가 늘비하고 시체에서 쏟아지는 선혈이 낭자 하였다 상대가 어디 숨어 있는지 어디서 총을 쏘고 있는지 싸울 상대가 없는 전투였다 ,

"와."

왜군의 함성을 구호를 신호로 여기저기 왜군이 튀어나오더니 산아래로 도망 치는 명나라 군을 토끼 사냥 하듯이 몰아 친다.

순식간에 명군의 진영이 어지러히 무너지고 적들이 벌떼 같이 일제히 쏟아저 내려 오기 시작 하였다.

명군이 정신 없이 고개로 내려와 돌아 왔던 계곡을 한참 후퇴하여 내려 오고 있었다 .

 

 

왜군 들은 명군의 선봉대를 전멸 시킬 계산 으로 계곡 아래로 계속 돌격해 내려 왔다 오유충이 당황하여 말을 되돌려 도망 하여 계곡을 달려 내려 오다 적의 총탄이 말에 맞아 말에서 탈마 하였다 .

 

 

뒤에서 지휘하고 있던 왜장이 소리첬다.

"적장이다 . 사로 잡아라"

오유충은 놀라 다시 떨어지자리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 칼을 빼어들고 왜군과 대항 하였다.

 

그때였다 , 협곡 양쪽에서 빗발 치듯 화살이 왜군 에게 날아들고 성난 호랑들 처럼 날쌘 이름모를 병사들이 오유충 주변에 나타 나더니 그를 외워 싸고 왜군들을 처죽이고 감싸기 시작하였다

 

 

조선군 복병이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응수가 거느리는 조선군 2000명의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계곡아래로 쏟아저 내려왔다. 삽시간에 왜군의 반이 조선군 손에 추풍 낙엽 처럼 목이 달아 나자 모두 반대쪽 산위로 도망 치기 시작 하였다

 

 

 

왜군은 뒤를 놓칠세라 추격하는 조선군에 놀라 고개를 포기하고 아예 울산 방면 으로 도망 하고 말았다.

 

권응수는 출발전 권율로 부터 구체적이 작전 계획을 치밀 하게 지시 받았고 권응수도 그대로 실행 하여 얻은 전과 였다.

권응수는 적들이 버리고 간 산더미 같은 조총과 적장의 머리를 베어 도원수에게 받치었다.

 

 

 

오유충은 패장이 되어 돌아 오고 조선군이 적의 수급을 가저 왔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하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었다.

"이놈 , 네가 무슨 장군 재목 이더냐 ? 그까짓 왜군들을 못치고 돌아 오다니? 내 오늘 내손으로 네 목을 참수 하리라 "

양호는 오유충의 무릎을 굻어 앉치고 당장 목 베일듯 칼을 빼어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권율이 옆에서 이것을 보고 양호를 만류 했다 .

 

 

"장군 ,오 총병은 패한것이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았던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 참수만은 면케 하시고 다음 전투에 공을 세울수 있도록 해주십시요"

권율의 간곡한 만류에 양호는 짐짓 못이기는척 하고 칼을 칼집에 꽂았다

 

 

 

권율은 곧 권응수에게명하여 노획 해온 왜장의 수급과 조총을 양호 앞으로 갖다 놓도록 하라고 지시 했다

 

 

"장군 , 아무가 적을 첬으면 어떻습니까? 이것들을 모두 경리께 올리오니 황상께 받치도록 하십시오 "

하고 양호에게말하니 양호는 조선군이 만든 공이 자기공으로 만들어 주려는 권율 에게 부끄러럽기는 했으나 명나라 조정에 자기 공으로 보고 할 생각이 더 앞서 체면 불구 하고 명나라 장수들을 불러 모은자리에서

"오늘의 공은 다 우리 연합군의 공이로다.이번 전투 상황을 보건대 앞으로 조명 연합군이 상호 원조 없이는 전투에 승리 하기 어렵 다는것이 증명 되었소 , 오늘 내가 좀 흥분 하여 부총병을을 참하려 했으나 이를 걷우니 제장들은 앞으로는 권도원수의 명령을 내명령같이 생각 하고 절대 복종 하도록 하라 ."

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린다

 

 

 

그는 권율을 바라보며 말한다

"원수께서는 이후 명나라 장병중에 군율을 어기고 행패를 부리는자가 있으면 즉각 처벌 하시고 나에게 만 알려 주도록 해 주십시오"

 

 

이 사건 으로 명나라 총 사령관인 양호는 권율 에게 대하는 당초 생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 예우를 권율 에게 주기로 결심 한것이었다.이때 부터 양호는 무슨 일이 일어 나던 권율과 상의 하여 처리 했다.양호는 권율를 부를 때는 깍듯이 예우하고 부대를 순시 할때도 권율과 꼭 같이 다니었다.

 

 

이때 부터 명나라 군이 조선 군이나 조선 백성들 에대한 태도도 확연히 달라 지었다.

 

 

권율은 양호로 부터 한 발짝 물러 서서 양호의 체면을 지켜 주었다,항상 양호를 겸손 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명나라 장수 들로 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 권율은 명나라 장수들을 덕으로서 대해 그들을 조선전 에서 협력자로 이끌어 내려 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닥아올 월동준비때문에 그가 원하는 압록강까지의 점령의 꿈을 이루지 못 한것이 한 스러웠으나 가등청정의 건의를 받아 들여 다음해 다시 공격하기로 하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조선군 모양으로 문관이 무관 위에 서 작전 지시를 하는 일이 없다.그들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임기응변 하는 전투에 명수들이었다 . 그것은 본국에 있는 풍신수길이 현지 지도를 못하는 이유도 있었겠 지만 풍신수길은 언제나 현지 나가 있는 장수들의 의견을 존중 했다.

 

왜군은 경상도 양산까지 물러났다

 

한편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적함과 대전에서 대승을 걷우었다

 

 

 

명나라군은 이상 하리 만치 산악전 에는 약하였다 . 단지 그들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기마전의 명수 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직산과 평택 평야에서는 그 실력을 어김 없이 발휘 하여 왜군은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물러났다 .

 

 

반면 왜군은 물러 났지만 산악전이나 성벽전에는 강하기 짝이 없었다.

 

 

 

명나라군 44000 병력은 드디어 좌중후 협력군 으로 나누어 왜군을 공격 하기로 하고 순천, 사천, 남해, 거제도, 양산, 부산등을 삼면으로 나누어 압박 해 들어 가기로 하였다.

12월 21일 양호는 제독 마귀와 같이 4 만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안동을거처 경주 까지 진군하였다 . 전투 한번 없이 왜군의 뒤를 바싹 추격 한 것이다.

 

 

양호는 삼로 병진의 대전략 (三路倂進之大戰略)이라는 계획을 세워 권율 에게 뵈워 주고 권율의 자문과 조선군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대방략 이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적의 주력군인 가등청정군을 우선 깨뜨리기 위하여 울산성을 먼저 공격 하는데 우선 동정군 전체를 경주를 떠나 울산 으로 진군시킨다.

 

구체적 으로 명나라 동정군의 좌협군 병력 1만 2000명은 경주 남천 상류를 따라 토함산 서쪽로를 거처 울산성 동문을 ,우협군 1만 2000명은 경주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울산성 서문을 , 중협군은 그도 형산강을 따라 진군 하되 모화, 녹동, 척파, 지역을 거처 울산성 남문을 치기로 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조선군은 염두에 두지 않은 동정군 단독의 전투 계획으로 방략도에는 조선군 에대한 기록이 한군데도 없었다.

 

 

 

권율이본 동정군 대 방략 이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무모한 계획 이란것이 한눈에 들어 왔다.명나라 동정군 4만명과 이제는 지원군 신세가 되어 버린 조선군 4 만명이 기책(奇策)하나 없이 무조건 경주 에서 울산 으로 밀어 부치겠다는 것은 어린애 장난 같은 전투 개념이 었다 .

 

 

잘못 하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가져 올지 모를 무모한 계획임에 틀림 없었다 . 왜군을 너무 가볍게 본 탓이었다. 게다가 양호가 경주 까지 내려 오는 동안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황제 에게 뵈울 명나라 경리 로서의 공다운 공을 세우지 못한것을 만회 하려는 생각이 그속에 숨어있는 속보이는 수작이었다.

 

 

"소장의 생각 으로는 이 삼로병진(三路倂進)계획은 무모 한것으로 밖에 생각 되지 않습니다"

 

 

권율은 단도 직입적 으로 계획을 반대 하였다.

무조건 찬성 할줄 알았던 양호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 지었다 .

 

한성에서 출병 할때 선조 까지 자기 뒤를 배웅했고 조선의 조정대신들이 자기에게 비굴할 정도로 자기에게 아부를 일삼던것만 보아온 양호 로서는 권율의 당당한 대응에 한편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찌하여 그렇단 말씀이오?"

"이 계획은 적의 주둔 병력을 단순 하게 생각 하고 조명 연합군 병력을 한곳 으로만 쏟아 붓는 격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경리 양호는 한곳으로 쏘다붓는다는 대목이 귀에 거슬렸다.

 

 

양호는 도면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한다

" 장군, 이 지도로 말하면 귀국의 병조판서로 있었던 이덕형 접반사가 작성한 도산(島山-울산) 태화성(太和城)의 배치도인 동시에 상황도 이오 , 적들은 태화강을 배수진 으로 치고 울산성을 지키 려는 것이니 성만 포위 한다면 저놈 들이 어찌 하겠다는것이오?"

 

 

권율이 도면을 뚫지게 한참 들여다 보고 있다가 말한다

" 이 도면은 단순한 포위를 위한 지도에 불과 한것이지 적들과 적들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을 너무 무시한 작전입니다. 소장은 경리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할수 없습니다 .재고 하시는것이 옳을줄로 믿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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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03.08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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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08Mar

    소박한 바램 행복하소서

    Date2022.03.08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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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7Mar

    건강 조심하세요

    Date2022.03.07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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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07Mar

    마음이 다치는 것은 욕심 탓

    Date2022.03.07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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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04Mar

    소중한 하루 건강하세요!

    Date2022.03.04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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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04Mar

    소박한 바램은 그저 건강과 무탈입니다

    Date2022.03.04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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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04Mar

    참 좋은 아침입니다!

    Date2022.03.04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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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04Mar

    동행 늙지말고 건강하고 행복 가득하세요

    Date2022.03.04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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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3Mar

    안개

    Date2022.03.03 By성광필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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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7Feb

    오늘도 언제나 건강과 기쁨을 선사합니다.

    Date2022.02.27 By사무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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