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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 송언신은 대동문 성루에서, 평안병사 이윤덕(李潤德)은 부벽루 윗쪽 강변에서, 자산군수(慈山郡守) 윤유준(尹裕俊)은 장경문에서 , 군사들을 지휘 하고 있었다.

 

소서행장은 말탄군사 10명을 뽑아 양각도(洋角島)북쪽 을 통해 대동강을 건너보게 했다. 대동강은 강심이 깊어 들어 간 강물에서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소서 행장은 조선군의 반응이 없자 대동강 남쪽에 진을 치고 일부러 수많은 깃발과 창 칼이 햇빛에 무수히 번뜩이게 하였다.

 

소서 행장이 흑전장정에게 묻는다

"강심이 깊어 배로 건너야 할 텐데 배를 모두 조선군이 북쪽으로 가지고 달아나서 막막 하오. 배가 있다 하여도 우리 대군이 도강 하기에는 턱도 없습니다 , 어찌 하면 좋겠소 "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 적을 자극 하여 대동강 남쪽 으로 유인 하면 이놈들이 강을 건너 올 것입니다 .이때 적의 도강 지점을 알아 내어 그곳으로 도강 하면 될 것입니다"

 

"옳은 말씀이오 , 좋은 방법을 모르고......"

 

조용하게 양측이 모두 날짜만 넘기고 있었다 왜군의 동태를 보려고 , 연광정(練光亭)에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이 나타났다.

 

연광정쪽에 이들 을 향하여 왜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 하였다 . 총소리에 놀란 제신들은 자리를 옮기 었다 .

김명원이 화가나서 군관 강사익(姜士益)을 불러 호통을 친다

"저놈들이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 다더니 함부로 총질 인가 우리도 현자총(玄字銃)이 있지 않은가 그건 두었다 뭐하는거야?"

조선군의 현자 총 에서 발사한 화전(火箭...불화살)이 모래 사장 저쪽에서 서성 거리던 왜군 머리 위로 쏘나기 같이 쏟아젔다. 왜병들이 놀라 모두 숨었다 . 처음보는 무기였다 .

 

한 왜병이 뛰어나와 화살을 갖고 숨어있는곳으로 가져 갔다.

불화살의 위력은 별로 위력이 대단 하지 못했다 .

조총에 비하면 사정거리도 형편 없었고 활을 쏘는 사수가 훈련이 않된 탓인지 반수는 강물로 떨어저 제기능을 발휘 못 했다.

 

좌의정 윤두수가 명령한다

"적군이 석회탄(石灰灘)여울에 나타 난다 하니 용천 군수 허숙(許淑)은 열파정(閱波亭)에, 방어사 김억추(金億秋)는 성천강 쪽에 가서 적들이 도강 못하도록 경계 하오"

.

도원수 김명원이 좌의정 에게 말한다

" 불 화살 의 사정 거리가 짧아 화살의 위력이 대단치 않습니다."

"도원수 , 화살 사정 거리가 짧다면 대책을 마련 해야 할것 아니오 , 평소에 대동강가에 이렇게 직접나와 쏘아만 봤드라도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오 , 그래서 군대는 훈련이 필요 한것이오 , 그 많은 화살은 실전에 써 먹을수 없는 무용 지물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할것이오 "

윤두수가 화난소리로 김명원을 바라보며 질책 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얼굴을 숙이고 고개를 들지 못 했다.

 

윤두수가 계속 질타한다

" 도원수는 아까 군관 강사익을 내앞에 오도록 불러 주시오 "

직접 지시 할 모양이었다.

조금후 강사익이 나타났다.

" 군관은 어찌 하여 화전(불화살)이 적진에 떨어지지 않고 태반이 강물에 떨어질 정도로 형편 없도록 놔 두었는가?"

"소인이 평소 화전을 소흘이 다룬 탓인가 하옵니다"

 

강사익의 말에 좌의정 윤두수는 화나는것을 감추고 말한다

"그래 , 그러면 화살 비축은 얼마나 되는고?"

"창고에 가득 합니다 "

"지금 이렇게 위급한 시기에 그렇게 비축만 해서 될일인가?, "

"화전은 모두 각군에 배당 시켰습니다"

"그러면 또한번 화전으로 공격 하되 실수 없이 적진에 깊숙히 떨어 질수 있게는 할수 있는가?"

" 그것은 사정거리에 한계가 있나이다"

 

"저런 , ...... 저렇게 한심한 군관이 있는가?. 내가 방법을 가르쳐 주지 , 이따가 밤이 되어 어두워 저 지척을 분간 하지 못할만큼되거던 어두움 을 이용 배를 띄워 적이 잠들고 있는 막사를 향해 불화살을 쏘아대면 되지 않겠는가? "

 

 

"옳은 말씀이오나 병선이 강가에 있사오나 모두 정비가 않되어 배를 쓸수 없다 하옵니다 "

윤두수가 참고 있던 화가 치밀었다.

" 도원수는 , 공방리(工房吏)를 당장에 참형(斬刑) 하시오 , 이렇게 해서 무슨 전쟁을 하겠다는 거요 ,다른 공방을 불러 지금이라도 준비 하도록 하시요"

 

6월의 평양은 무정하게도 조선군을 돕지 않는다. 오랫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동강 물이 줄어 들기 시작 했다 .

 

행재소에 임금에게 전황 보고를 위하여 들렸던 좌의정 윤두수와 순찰사 이원익이

" 날씨가 너무 가물어 대동강이 마르면 적들이 손 쉽게 건늘 것이며 , 평양 방어도 어려울것 같습니다 . 참 하늘도 야속 합니다"

하고 임금 에게 아뢰었다 ,

임금은 윤두수의 전황 설명을 듣도록 하라고 신하 들을 불렀다 .

 

 

이 자리에서 정철이 임금 께 아뢴다

"날씨가 가물면 적병들이 도강 할지 모르는데 임금께서 잠시 안전한 명나라 요동으로 피신 하셨다가 적들을 물리치고 난다음 환도 하심 어떨까 하옵니다"

 

윤두수가 이말에 반박한다

"안될 말씀 입니다 , 임금께서 중국 땅으로 피신 하신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누굴 믿고 왜적 들과 싸운단 말씀 입니까 ?. 끝까지 내 국토안에서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윤두수의 말에 모두 숙연해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을 못한다.

"서울이 적에 수중에 있는것도 말할나위 없지만 평양은 우리나라 에서 제일 큰 진(鎭)입니다 ,

평양부는 사방이 험한 지세로 둘러 싸여 있을뿐만 아니라 군사수도 1만명이 넘는데다가 성중에는 힘있는 장사(壯士)가 1000 명이 넘게 있어 든든 합니다. 이나라 국토가 삼천리 에 불과한 나라를 두고 압록강을 건느신다면 그넓은 명나라에서 어찌 다시 돌아 오시겠습니까? "

 

왕이 이 말을 받아 묻는다

"그렇다면 과인이 서울로 돌아 갈 방법은 무엇이요?"?"

윤두수가 아뢴다

"평양을 지키고 있는동안 남쪽 바다에 이순신이 왜적 수군들을 막아 내고 있으면서 전라도 절제사 권율에게 다시 한성 수복을 하도록 조치 한후 적을 공격 하면 자연히 일본 병력이 남북으로 분산 될 것입니다. 이때 평양부 의 조선군이 총 공격을 하여 내려가면 일본군은 자연히 물러 갈것입니다. "

 

임금이 다시 묻는다

"하지만 권율이 과연 한성 수복을 또 할수 있겠소?

우리나라 에는 지금까지 육장(陸將) 다운 육장(陸將)이 없으니 큰일 아니오?"

 

"전하 육장(陸將)은 수군(水軍)과 달라 작전에 어려움이 다릅니다 . 수군은 일단 병선(兵船)에 오르면 수군 장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적선의 공격으로 일거의 파선되어 빠저 죽게 되므로 일치 단결하여 싸우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또 싸움 방식도 육군 모양으로 창검으로 육박전을 벌리는것이 아니라 거의 포사격 아니면 화살로 승부를 가리게 되어 승패가 완연하나 조선 육군은 진관제나 제승 방략에 의하여 유사시에 길가나 들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을 유사시에 긴급 징집 하는 관계로 훈련할 기회가 없습니다 ,

또 숫자가 수군에 비 하면 엄청 나게 많아 질서가 문란 하고 두서가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군사들은 장수에게 소속감이 없고 또 장수들은 병사들을 통솔 할수 없습니다.

 

수군의 경우에는 숫자가 한정 된데 다가 평소에도 배를 타고 작전지역을 돌며 훈련할 기회가 많치만 육군은 벼란간 징집 당하여 알지도 못할 산야 에서 전투를 벌려야 하니 모두가 제 각각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전하, 먼저 광교산 전투에서 보여준 권율군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군사를 통솔 했던지 간에 그 부대만은 질서가 정연하고 부대가 꽉 짜여 퇴각 했기 때문에 왜군들 도 감히 권율군을 추격을 못했다는 후문입니다, 다시 이들에게 한성 수복을 하도록 하여 불명예를 씻도록 적당한 기회에 하명하시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윤두수의 구구절절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

"그러면 우선 좌상 말씀대로 평양 방어부터 발등에 불을 끄도록 하시오 ,"

보고가 끝나고 윤두수는 대동강변에 나가 있는 평양감사 이윤덕을 만나 보았다 .

" 이곳은 강물이 깊기 때문에 배가 없는 왜군이 도강할수 없겠지만 저곳 왕성탄(王城灘)이 얕은곳인줄 왜놈들이 알면 걱정이 되오 철저히 지키시오 "

 

윤두수 의 의지대로 평양 수비는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3 일이 지나도 적군은 꿈쩍도 않았다 .도원수 김명원은 좋은 때가 왔다고 생각 했다 .김명원은 영원군수 (寧遠郡守) 고언백에게

"적의 군기가 해이 해진것 같소 , 오늘밤 삼경에 정병 400명을 뽑아 적진을 기습토록 준비 하시오 "

하고 명령 하였다

 

조선군이 대동강을 건느기 시작 한것은 삼경(12시경)이 훨씬 지나서였다

배가 남쪽 강 안에 도착 한것은 새벽 두시 , 대동감은 사방을 분간 할수 없이 어둠이 깔려 있었다 .

조선군 배 4척이 숨소리를 죽여가며 노젓는 소리를 감추기 위하여 강 상류의 물줄기를 이용하였다.

어둠이 깔린 대동강물은 소리 없이 물살을 가르며 떠내려가듯이 내려가는 배를 소리 없이 옮겨 주고 있었다

적진이 강안 여러곳이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났다.

 

배 에서 내리자 마자 적장 종의지(宗義智)의 천막인듯 한 곳을 조선군중에서 힘센 장사 출신 병사 임 욱경(任旭慶)이 맨 앞에서 고함을 치며 뛰어 들었다 .

 

곤 한잠에 빠저 있던 왜군들은 조총을 들고 일어 났으나 누구를 향하여 쏠 지를 몰라 우왕 좌왕 하는사이에 조선군이 휘두르는 칼과 창에 찔려 아비규환이었다

 

임욱경(任旭慶)이 종횡무진 으로 닥치는대로 적의 목을 베고 때려 죽이니 적병들은 여기 저기 쓸어지고 , 얻어 맞은 얼굴에는 피가 낭자 했다.

적의 기병이 기르고 있는 말 300필을 강가로 밀어 부쳤다. 군마의 울음 소리가 더 요란하였다.

 

적병들이 그때서야 잠에 깨어 보니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분간을 할수 없었다..

 

 

 

그때서야 2선에서 잠을 자고 있던 왜군들이 소리 나는 쪽으로 몰려 들었으나 피아를 분간 할수 없는 어둠속의 전투는 아수라장이었다.

순간 강건너 조선군 진영에서 날아드는 불화살이 왜진에 떨어지자 마자 삽시간에 불이 붙기 시작 했다.불빛이 밝아지자 왜군들이 대오를 정리 하여 역습을 가하기 시작 했다.

 

날이 훤히 밝아 왔다 ,

왜군과 조선군의 윤곽이 들어났다.왜군은 조총과 칼을 휘두르며 조선군에 저항 했다 .

 

임욱경이 조총에 쓰러지자 조선군의 사기가 저하 되어 기습을 중지하고 배에 다시 올라탔다. 왜군들이 배를 타는곳에 집중 사격을 하고 벌떼같이 몰려 들었다.

조선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노를 저어 북안으로 저어갔다 .

 

배를 미쳐 못탄 조선군 50 여명이 왜군에 쫓기다 왕성탄(王城灘) 얕은 여울로 물위를 걸어서 북쪽으로 후퇴 하였다.

일본군은 대동강은 수심이 깊어 배가 아니면 도하 못 할 줄로 알았다가 조선군이 건너가고 있던 얕은곳을 발견하고 흑전장정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선군이 치고간 일본군 진지는 난장판 이었다 . 일본군 3 번대 주장 (主將) 흑전장정(黑田長政)은 화가 머리 끝 까지 치밀었다,

밤 사이에 일본군 역전의 용장 들이 모두 목슴을 잃은 것이다 .

 

죽은 장수는 , 중촌평차(中村平次), 평전 장감(平田將監)등 4명이나 목이 잘리 거나 자다가 맞아 죽었다 , 부상 장수중 후등기차(後藤基次) , 질전 대부 대랑 (吉田大浪大夫)는 부상으로 고생 하다 죽고 말았다

 

왜장 흑전장정은 많은 장수를 잃고 , 실망에 빠지기는 커녕 오히려 전의에 불타 있었다. 그것은 왕성탄 여울로 도강로 를 발견 한것이 큰 소득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전장정은 살아 남은 장수를 불러 지시한다

"이번 조선군의 기습은 생각도 못한 일이오 . 아깝게 우리 장수가 희생을 당했소 .

 

다행히 적의 패잔병중 배를 미처 못탄자들 50 여명이 도망치며 강심이 얕은 왕성탄 으로 도강한지점이 발견 되었으니 이곳으로 도강하여 공격 하여야 할것이니 제장들은 만전을 기하시오 ,

그리고 1번대 소서행장 장군에게도 알려 우리와 같이 왕성탄 도하 작전에 참여 토록 하시오 . 이번 작전에 우리군 선봉은 피해가 없는 2진이 맡도록 하오"

결국 조선군 중 50 여명이 도강한 지점으로 일본군 이 일제히 강을 걸어서 건느기시작 했다

 

 

 

일본군의 기세가 노도와 같았다, 다섯 장수를 잃은 소서 행장과 흑전 장정군은 조선군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일본군의 평양 공격 총 공세가 시작 된것이다

왕성탄을 지키던 왕성 (王城) 조방장 박석명(朴錫命), 수탄장(守灘將) 오응정(吳應鼎) , 김응서는 적 의 공세에 혼줄이나 도망 치고 말았다, 흑전장정은 말을 타고 왕성탄을 건느면서 혹시 능라도 방면에 조선군 복병을 만나지 않을가 하여 전전 긍긍 하며 건넜으나 조선군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흑전장정이 모란봉(牧丹峰)에 올라 평양 성내를 들여다 보니 성벽에 깃발만 나부끼고 쥐죽은 듯이 고요 하다 ,

 

옆의 종의지(宗義智)가 간언한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 적들이 우리를 유인하여 기습 하려는 술책이 아닌가 합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여 보이지만 일단 확인은 하여야 하오 . 척후병을 시켜 적의 동태를 알아 오도록 해야 겠소 ,"

 

척후병 한명이 조선군의 동태를 소상히 보고 했다.

" 평양 대동문은 열려 있고 성내 백성들은 모두 인근 산으로 소개 시키고 텅비어 있습니다, "

"사실이냐"

"네 그러 하옵니다 "

" 성문이 열려 있다니 , 일단 경계 하는 뜻에서 오늘 밤은 평양성 밖에 진을 치고 적 동정을 살핀후 공격 해도 늦지 않으니 그리 하오"

 

다음날 흑전장정은 우선 선봉대를 입성시켜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일본군 두장수는 유유히 평양 입성을했다 .

당초 서울에서의 선조의 계획은 평양 방어후 한성 수복이 목표였었다.

그래서 임금은 좌의정 윤두수와 도원수 김명원에게 평양 사수를 명했던것이었다 ,

평양 부민들은 평양성 사수가 될줄로 믿고 있었으나 임금이 평양을 떠나려 하자 소문을 들은 부민 들이 지레 보따리를 싸들고 성밖 산속으로 피난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놀란 임금이 백성들이 믿게 하기 위하여 세자에게 지방 노인 어른들을 찾아 가 피란을 않하도록 안심 시키라고 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평양은 사수 할것이니 염려 말라 "

하고 안심 시켰던 것이었다.

 

그러자 왕세자 까지 나서서 하는 말에 이런 언약을 믿고 피난가 숨어 있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어 성내는 제법 안정 되는 듯 했다.

 

군량미 10 만석 까지 확보 해 놓으니 백성들은 걱정이 없었다

"평양은 적에게 내주지는 않을 모양 이네, 군량미가 저렇게 싸여 놓는데 쉽게 왜적에게 내줄리가 있는가?"

하고 안도의 숨까지 쉬었다 .

그러나 의외로 대동강 남쪽 까지 들이 닥친 왜군이 호시 탐탐 평양을 넘 본다는 소문에 평양성이 술렁거리기 시작 했다.

선조가 태도를 바꾸어 북행(北行)을 결의 했다

왕이 평양을 떠나던날 과격한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가려는 궁비들과 대신들에게 마구 욕설까지 퍼부어대고 맨나중에 호종 하던 호종원에게는 애꿎게도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려 상처까지 내었는데도 아무 소리 하나도 못하고 평양을 떠났다.

 

호종원이 화가나서 때린 백성을 노려보며 대항 할 뜻을 보이자 대신들이 뜯어 말려 북행을 재촉 했다 . 이런 망신을 당하고도 누구 하나 백성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고 만것이다.

 

게다가 왕성탄 쪽에서 기습 공격 했던 조선군이 오히려 패배 하여 뿔뿔이 도강후 도망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평양성은 술렁이기 시작 했다 ,왕성탄에서 쏘아 대는 조총소리가 성밖 가지 가차워지기 시작 했다 .

백성들이 모두 인근 산간속으로 피난가기 시작 했다 . 조선군 정예군이 왜군 습격에 실패 했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군 들도 하나 둘씩 도망치기 시작 하더니 배치군이 완전히 어디로 갔는지 성루에는 병사들 모습 까지 볼수 없게 되었다 .

 

윤두수와 김명원은 왜군이 조선군 복병을 염려 해 하룻밤을 성밖에서 주둔하고 있는동안 이미 사태가 기운것을 한탄하고 피난 못간 노약자들을 동원 적의 노획물이 될만한 군수품, 화약등을 연못에 집어 쳐넣었다 . 그리고 평양성을 빠저 나왔다 ,

 

이렇게 하여 조선군은 왜군에 대한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 조선의 3도(三都)라 일컫는 서울 , 개성, 평양을 모두 왜군에게 내주고 만것이다 . 부산에 왜군이 상륙 한지 두달만에 일이었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천, 안주를 거쳐 의주로 향하였던것이다 .

선조는 평양 함락 소식을 듣고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 하기로 했다 .

 

광주(光州)에 내려 온 권율은 임금으로 부터 전라 도절제사 발령장과 임금의 교서가 와 있었다 . 교서 에는 나라가 존망지척의 와중에 전라도의 병권을 맡기니 책임을 지고 만반을 기하라는 내용도 겯들였다.

권율은 교서를 읽고 눈시울이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적셔 왔다

 

자기가 직접 총지휘한 용인전투는 아니로되 임금이 바라고 있던 한성 수복의 꿈도 못 이루어 드린 패장이나 다름 없는 자기를 믿고 이런 중책을 맡긴 임금의 심정을 십분 헤아려 볼것 같았다.

 

 

 

권율은 한숨이 나왔다 .

어처구니 없이 광교산과 용인에서 참패 당한것이 자꾸만 되살아 나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에게서 축하글이 도착했다,

다음날은 이광이 권율에게 축하 편지와 함께 일전에 권율의 철저한 엄호로 무사히 후퇴 할수 있던것에 대하여 고맙다는 인사가 겯들였다 .

황진 , 위대기 ,공시억 같은 의병출신 장수 들이 권율의 이번 작전에서 보여준 용기와 침착성에 에 감복하여 권율의 휘하에 있기를 자청 하였다 .

 

그들은 자기 휘하의 의병을 권율군에 합병 시켜 권율의 지휘하에 있기로 하였다 .

"장군은 문관 출신으로서 어찌그리 나오고 들어감이 분명한 장수인가? 권율이야 말로 훌륭한 장수다"

그결과 광주로 돌아온 권율군은 군사를 잃기는커녕 오히려 군사 숫자가 엄청나게 더 늘어 있었다.

 

권율은 앞으로 할 일이 많은것을 느끼었다. 우선 전라도 군은 모두 광교산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사기를 되 살려야 한다, 앞서 전라 도 순찰사 이광이 충청도 공주까지 진출 하였다가 임금의 서천(西遷)소식을 듣고 전주 감영으로 되돌아와 해산 했을 때만 해도 호남의 일부 사림들이 싸움 한번 않고 내려온 이광을 흴란 하자 이광은 다시 남도 3군을 지휘 서울 수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근왕군으로 나섰던것이 아니 었던가?.

 

근왕군으로 용인 을 거쳐 한성으로 진격 할려고 했을 때만 해도 이강이 모병 활동에 들어 가자 전라도 전역에서 이광의 앞서 공주 회군(回軍)에 회의를 느끼었던 백성들이 모병에 응하지 않자 이를 보다 못한 전라도 내 사림(士林)들이 나서 겨우 모병을 해 근왕군을 만들었던 것이 다.

 

좌우간 이광의 제2차 근왕군에 혼이난 백성 들이나 호남 사림들이 앞으로의 모병 활동에 잘 응 해 줄 것인가도 문제 였다 .

그러나 권율은 외롭지 않았다 ,

 

권율군은 앞서 용인 전투에서 한사람도 희생자 없이 광주 까지 북을 치며 행군 해 나려온 휘하 에 사기 왕성한 군사들이 건재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딸아온 의병이 적지 않기 때문이 었다 .

 

문제는 모병으로 숫자를 늘리는것도 중요 하지만 새로 구성 하는 관군의 정예화가 더 큰 문제 였다.

 

사실 관군이란 , 평소에 잘 훈련된 군사들을 군비와 조직을 갖추워 국가가 통수 하는 군을 말한다, 일찍이 전쟁 초기 수도 한성에서 신립이 3일 씩이나 걸려서 훈련 잘 된 군사 300명 모으는데도 상비군이 없어 절절 매었던것이 당시에 조선의 현실이 었었다.

 

 

더구나 호남의 군사들을 강군으로 만들려면 군사 모집에서 부터 조직 편제 무기 체제 , 수성 (守城)과 보수 , 군량미 조달, 민심 수습 등 과제가 보통이 아니었다.

 

권율은 호남의 사림들과는 다행히 협조가 잘 되었다 . 고경명(高敬命), 류창노(柳彰老), 양대박(梁大樸), 최상동(崔尙動), 김천일(金千溢)같은 사림들과는 권율이 전쟁전 전라 도사 시절 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 였다 . 또 기대승(奇大升). 정철 , 성흔 , 고경명,등의 서인 학연 과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어쨌던 권율이 할일은 누가 뭐래도 이광이 남긴 전라도 백성의 사기가 문제였다,

 

평양 , 의주로 피난간 피난 정부가 백성들에게는 여간 걱정이 되는것이 아니었다 .

 

그 충격으로 민심이 동요되고 왜군이 언제 전라도를 침범 할지 모른다는 위기 감으로 공포심만 더해갔기 때문이었다

앞서 이광이 근왕군으로 3도 육군 총사령관으로 서울로 진군 할려고 병사 모집을 했을 때만 해도 순창과 옥과에서 형대원(刑大元)이란자와 조인(趙仁)이란자들이 가족들과 멀리 떨어저 1000리길이나 먼 경기도 지방에 까지 출병하여 왜 싸우러 가느냐며 반란을 일으켜 향사당(鄕射堂)과 감옥을 불태우는등 소동이 있었다 .

 

그때 남원 판관 노종차에 의해 곧 진정 되었지만 이것만 보아도 백성들의 국가관이란것이 어땠는가를 알수 있었다 , 그들은 내가족 내향토라도 지키는 것이었더라면 기꺼이 반항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권율은 전라도 백성들이 이광의 수치를 만회 하고 사기를 북돋아주어 국가관을 심어 나라를 구원 하는 일레 동참하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 했다.하기야 5 만 대군을 겨우 1600명의 패잔병으로 돌아 온데다가 진중에 가지고 있던 ,임금의 교서 부터 , 인부(印符)와 군기(軍旗) , 각종 군기(軍器) 군량 까지 모두 잃고 왔으니 이광이 저지른 몰지각 한 실전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권율은 광교산 전투의 패인을 가만히 생각 해 보았다

우선 지휘자인 이광의 통솔력 부족이었다.

 

전주 감영에서 용인까지 행군시 보여준 각처 에서 모여든 군졸들이 산만하고 통일성이 없어 앞뒤 행열이 억망이었다 , 그것은 이광이 부대 구성 기볍 자체 부터도 모르는 이광의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

 

 

권율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난다 ,

 

통인 이 알린다

"조헌이라고 하는분이 오셨습니다"

순간 권율은 귀를 의심 했다.

"아니 방금 누구라 했느냐?"

" 중봉, 조헌이라면 아실것이라 했습니다"

권율은 순간 , 조헌 이라면 처사 시절 시국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들어와 있을 때도 친하게 지내었던 인물이다.

조헌은 강화도 같은 고향 사람일 뿐만 아니라 . 그는 집안이 모두 국가에 공을 세운 집안이다,

 

명종 20년에는 성균관에 진학 했는데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면서 불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중 보우를 벼슬까지 주는등 문정 왕후의 행동에 대하여 동료들과 같이 보우 탄핵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엎드려 왕의 응답을 받으려 했으나 왕이 어머니 문정 왕후의 눈치만 살 피느라고 우물 쭈물 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학생 들은 모두 귀가 했는데도 끝까지 버티었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24세 되든 해에 문과에 급제 하여 교서관 부정자직으로 있으면서 선조7년 명나라 사행(使行)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따라 갔다가 오면서 명나라에서 본 총병관(摠兵官) 척계광(戚繼光)부대의 구율이 엄격 함을 보고 선조에게 군비를 이와같이 할것을 상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명나를 다녀와서 느낀점이 있어 상소 올리나이다,

다름이 아니오라, 병사에 관한 몇가지 를 우리나라가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어 소견을 올리오니 통촉 하시 옵소서,

 

병가(兵家)나 유가(儒家)에서 이르기를

"군사란 많다고만 좋은것이 아니라 정예(精銳)해야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군대를 살펴 보면 편제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으며 무기도 견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리 하지도 못 합니다. 또 군사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땅은 땅이 넓고 사람도 많이 사니 마땅히 군사와 말이 정예롭고 튼 튼 해야 할터인데 튼 튼한 말도 없고 무기도 견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활과 화살도 제대로 갗춘 곳이 없습니다. 열명중 8,9명은 나무 활을 갖고 있습니다 .

 

그나마도 군사들이 훈련을 받지 않아 군인으로서 익혀야 할 법식을 아는자가 드믑니다,

국가가 안으로는 부지런히 군사 훈련을 실시 하고 밖으로는 탄탄히 의로운 병사들을 배치 하여 두는것은 예상외로 벌어질 난리를 막기 위한것입니다.

 

신이 직접 보았는데 중국의 소진 총병관 척계광 (戚繼光)부대는 참으로 규율이 엄격 하였습니다 ,신이 살펴 보았는데 그 편제와 무기 체제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진법(陳法)을 익히고 있어 각진의 장수들은 한가로이 식사 할 시간도 없습니다.

명나라는 나라가 크고 , 군사도 많아 국방력이 튼튼한데도 이처럼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북쪽 , 남쪽 모두 오랑캐들이 언제 처들어 올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훈련이라도 좀 시키려면 어떤 신하는 "백성이 굶어 죽고 있으니 시킬수 없다"느니 무기라도 수리 한다치면 "국고가 비었으니"하고 모든것을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국고가 비었다고 오랑캐 들이 처들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언제 오랑캐가 처들어 올지 모르므로 신이 이에 대비 하기 위하여 이번에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신 병서를 중국에서 가저 왔습니다.

청컨데 신이 이책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편집하여 활용 토록 주청 하오니 나라를 지키는 교범이 되게 하소서 "

선조는 당시 이 상소문을 보고서 조헌의 충정을 이해 하고 책을 만들게 하였으니 이름 하여 지지당고(止止堂稿)라 하였다

 

당시 조헌은 책을 만들어 임금께 보고 하여 유용하게 조선군에쓰여지기를 원 했으나 시대가 태평 세월 이라 그런지 임금은 대략 만 훑어 보고 조헌에게 돌려 주었을 뿐이었다,.

 

이에 조헌은 임금의 무관심에 기분이 상하여 급한성질을 참지 못하고 권율에게 찾아와 하소연 하였다

'"이따위 책을 내가 왜 중국서 가져오고 밤새워 썼는지 모르겠소 , 읽어 줄 사람은 권공 밖에 없을 듯하여 드리니 참고 하시오"

당시 권율은 조헌과 만나기만하면 성리학 이론에서 부터 시국 대담으로 화제가 바뀌어 장차 왜국이 조선을 침범할것을 우려하는 사이 였다 .

 

또 권율이나 조헌 모두 병서 7서(書)를 다 섭렵 한 사람 들 이어서 병서에 대해서 만은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

당시 권율이 읽어 보니 그동안 읽은 병서중에는 아주 현실에 맞아 떨어저 현실에 맞는 책 이었으므로 . 권율은 이 책을 재미 있게 두번이나 읽었고 지금 권율이 거느리고 있는 부대에 실제로 응용 하여 사용 하고 있다.

 

권율은 조헌을 들라 했다

" 조공, 오래간 만이오 . 그동안 어디 있으셨오 ?'

권율이 반갑게 맞이 하며 두손을 잡아 자리에 앉쳤다

 

"권장군 , 우선 이번에 전라도절제사 로 되신것을 축하합니다,사실은 저도 그 동안 청주로 가서 이우(李瑀), 이봉(李逢) , 김경백(金敬白)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했는데 잘 않되어 옥천에 있었는데 홍주 (洪州) 서남 지구에 있는 조광륜(趙光輪)과 사인(士人) 장덕익(張德益)으로 부터 군사 800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있다며 도와 달라기에 그곳으로 가는 길인데 곳곳이 왜적이 있어서 가는길에 아직 안전 지역인 전라도를 거쳐가는길에 잠간 들렸습니다.

 

지나다 생각해보니 장군 께서 이번에 중책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전에 드렸던 명나라 병서 기효신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기회가 왔읍니다. 옛날 제가 드린 기효신서를 다시 한번 검토 하시기를 권해드릴겸 해서 잠간 들렸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조공이 주신 기효신서가 저의 교과서나 마찬 가집니다 . 이 번 광교산 전투에서 왜군과 싸워 보니 참으로 유용 했습니다 "

 

""저는 충청도로 다시 떠나야 합니다 . 장군 께서는 제가 편집한 지지당고(止止堂稿)책도 함께 참고 하여 보시면 잘쓰지 못한 책이 었기는 하지만 한성 수복을 하여 적을 몰아내는데는 좋은 책일것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

"조공 하루만 묶고 가십시요"

 

조헌은 이말에는 대꾸 않고 무슨 부탁인가 한다

"권장군 ,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시 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신지 ?

"다름이 아니 오라, 말 두필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걱정마십시오 제가 조치 해놓겠습니다, 그럼 하룻 밤만 주무시고 가시 지요"

"아닙니다 바로 떠나야 합니다 "

조헌이 충청도로 훌쩍 떠났다

 

조헌을 떠나 보내 놓고 권율은 새삼스러히 기효신서와 지지당고를 서재에 꺼내 놓고 다시 한번 독서 삼매에 들어 갔다 .권율이 읽고 있는 기효신서는 중국 병서 중에서 생소하고 아주 현실적이었다.

책에 나오는 것중에 생소 한것은 조선군에게서 볼수 없었던 불랑기(佛狼器)같은 무기는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무기였다 .

왜적의 조총은 군기시에 있었던 장인에게서 많이 들어 와 잘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무기에 소흘히 한 조정의 대비책을 이제와서 탓 해야 소용 없는 짓이였다 권율은 당시 조헌이 책을 권율에게 내동댕이 치듯이 주고가면서 한 얘기가 떠 올랐다

중국 명나라 중국 절강성(浙江省)은 왜구들이 노략질이 심해 명나라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 그지방에 장수들을 배치 할적 마다 왜구를 격퇴 시키기는커녕 왜구들의 조총과 칼에 찔려 죽기가 일수 였다 .

척계광이란 사람이 장수로 절강성에 배치되었다 .

그는 왜구 와의 싸움에 번번히 패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부임 하자 마자 골돌히 생각 했다 . \명나라 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마병을 숭상 했고 활 아니면 창검이 전부 였다

 

그것도 명조정에서 는 적극적으로 무기 지원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나가 왜구를 물리 치라 하기가 일수였다 .

 

척계광이 절강성 해변가에서 왜구와 첫 접전 하던날 왜구가 버리고 간 조총을 들고

"아 , 내 명나라 장군으로 있어 본 이래 이러한 신기(神器)는 보지 못했다 , "

하고 감탄 하였다

 

 

 

그는 명군의 전래의 기마전법을 과감하게 보병 전법으로 바꾸었다 . 조총이라는 신기(神器)에는 보병전 밖에 없다고 생각 하였다 .

그리고 총과 칼을 잘 쓰는 왜구에게는 집단 살상 무기인 포가 필요 하였다 .

보병전을 중시 하다 보니 용의 주도한 지휘 체계도 필요 했다 .

 

그는 랑전(狼箭)이라는 무기를 만들었는데 왜구와의 싸움중 중국 절강성에 풍부한 대나무로 만든 무기로 왜구의 군도(軍刀)를 상대하는데 아주 중요한 무기였다

또 탕포라는 것은 평소 어민이나 농민들이 쓰느농기구로 두갈래로 갈라진 기구 였다

척계광은 무기 체게를 기효신서 에서 , 냉병기와 화기(火器)로 나누었다

 

냉병기는 칼 활 같은 무기로 화약을 쓰지 않는 무기였고 , 화기는 조총, 포 와같이 화약을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척계광은 왜구와의 전투를 기마 편제 에서 보병 편제로 바꾸 면서 왜구를 치는데는 보병의 일사 불란 한 명령 전달 체계와 정보가 필요 했다 .

 

그가 생각 해낸것이 소위 편오법(編伍法)이란것으로 부대를 사(司)-초(哨)-기(旗)-오(伍)로 세분해서 1오(伍)는 5명 , 2오(伍)는 10명 , 10명이 대(隊), 5대는 1사(司)이런식으로 보병을 조직화 했다

권율은 척계광의 신 병법을 조헌이 책을 주고 간 이래 수시로 필요시 마다 이를 사용했다

권율이 이 책을 중요시 하는것은 이때 까지 조선군에서 볼수 없는 새로운 여러가지 군제(軍制)와 왜군을 물리칠수 있는 여러가지 비법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용인 전투에서의 권율의 왜적과의 전투에서 매복 작전으로 적을 더이상 추격 못하게 한것 이라던가 권율군 만이 질서 정연 하게 움직여 준것도 다른 병서 덕 택도 있었 지만 기효신서의 전법 덕도 톡톡히 본셈 이었다.

권율은 관계에 나오기전 처사 시절에 엄청난 책을 많이 읽었다 . 또 현지 사정에도 많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이 바야흐로 지휘자 권율의 힘이 되어줄것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

권율은 종전의 조선군의 취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태평성대의 녕일(寧日)에 젖어 있던 조선은 군비에 너무 소흘 했다

조선의 군사 제도는 양인(良人) 개병제(皆兵制...전국민이 병역을 지는 제도)와 농병 (農兵)일치제 를 원칙으로 한다 .

 

16세에서 60세 까지 양인들은 병역을 지켜야 했다 ,

 

 

 

그러나 이런 원칙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

소위 대립제라는것이 발생 하여 공사 노비 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을 무명 과 비싼 삯을 주고 사서 병역을 대신시켰다.

나중에는 관가에서 조차 대립가를 받고 군역을 대신 시켰다.

 

그런데다가 조선군 자체가 기강이 문란 한데다가 대립병을 가혹 하게 다루어 도망 병이 속 출 하였다 .

이를 역사는 방군 수포(放軍收布)라 이른다

 

권율은 권율군 내에 이런 방군 수포(放軍收布)행위를 절대 용납 하지 않았다 . 그는 다른 부분만은 관인(寬仁) 했으나 병역에 대한것 만큼은 추호도 용서 않았다 .

권율군이 강한것으로 인정 받는것도 그런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던 조선의 군제는 문제가 있었다 .

조선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다 .

중앙군은 5위로 나누어저 있고 각 위는 5부 -4통-여-대-오로 되어 있고 , 5위는 갑사와 정병으로 나눈다 , 갑사는 시험으로 되어 계급도 높고 보수도 받는직업 군인 이다

 

그리고 정병은 양인 인 의무병으로 서 보수는 안주고 계급만 받는다. 비교적 중앙집군적 국가 답게 중앙의 군제는 그런대로 잘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지방군은 그렇지 않았다 ,

지방군은 양인 (良人)인 농민 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

이들은 병영에 교대로 근무 했다 .

농민들은 자기 순번이 아닐 때는 농업에 종사 했다 .

그야 말로 병농 (兵農) 일치의 군대 였다

 

그러니 지방군의 지휘자는 여간한 똑똑한 장수가 아니면 지휘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지방군의 편제는 이러한 취약 점이 있었다 .

권율은 이러한 지방군에 기효신서의 분군법(分軍法)을 적용했다 ,

 

사-초-기-오(司-哨-旗-伍)로 군편제를 잡았다 . 5사(司)는 영(營) 5영(營)은 사(師)로 하여 최고 지휘부 까지 편제를 갖춘것이었다.

 

기껏 해야 왜구 방어 에만 관심을 두던 힘없는 지방군이 바야 흐로 군다운 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 조정이 지방군이 강 해지는것을 견제 한것은 조선은 도로망이 좋지 않으데도 원인이 있지만 지방 군이 강해지면 왕권이 도전 받을지 모른 사태가 벌어 질까 우려 하는 정치적 의도가 밑바닥에 다분히 깔려있었다 .

그러다 보니 이번 같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 같이 규모가 큰규모의 전쟁이 발생 되었을 때는 중앙군이나 지방군 모두 추풍 낙엽이 되어 손쓸수 없는 사태에 봉착 되고 만다.

 

만약 권율도 태평성대 시절에 지방군을 지금과 같이 기효신서에 의한 일방적 인 조직적 편제를 구성 했었 더라면 조정 의 간신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모함을 받아 역모 음모로 화를 당했었을 런지 모른다

 

권율은 후속 조치로 각 리(里)나 각 촌(村) 중심 으로 가까운 주민들 을 합쳐 대오를 구성 토록 하였다 . 거주지 우선으로 하되 다른 편제에 들어 가지 않도록 연고 주의로 하여 훈련시나 행군시 군병이 뒤섞일 염려가 없도록 하였다 .

따라서 위에서의 명령은 중간 끊임 없이 정학히 전달 되었다

 

이렇게 된 편제는 장수가 부하를 통솔 하는데 는 크게 걱정 할것이 없게 되었다., 각급 지휘관은 각각 3-5 명의 차하급 지휘관 만 장악 하면 되기 때문에 아무리 큰 부대라도 통솔은 크게 걱정 할필요가 없었다

기효신서에 의한 편제는 조선 실정에 아주 잘맞고 군에 징집된 농민에게 아주 적합한 체제 였다

 

, 그이유는 척계광이 개발한 신무기는 거의가 우리 농촌이나 어촌 에서 쉽게 구할수있는 기구 들로 금방 무기화 할수 있고 , 농민들이 쓰기 편리한 무기 였다. 별도의 훈련이 없더라도 냉병기가 아닌 화기라도 농민들이 사용가능했다

 

편제 면에서도 일반 농민 상대인데다가 병역 대상이 아닌 천인들도 슬수 있도록 된 제도 였다 또 척계광의 군체제는 우리 지형에 아주 잘맞는 제도 였다 그 이유는 기병의경우 평지가 이롭고 보병은 험한 지형이 이롭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구릉이나 산지 논이 많아 보병에 적합 했다 .

 

척계광 이 착안한 병법이 중국 절강성이 산지 구릉, 논의 지형이 조선과 흡사 했다

일본군은 전선이 너무 길어 보급로 유지가 힘들었다 . 최선봉부대가 서쪽은 평양을 거점으로 묘향산에서 접전이 벌어 지고 있었고 , 동북쪽은 함경도 길주를지나 경성까지 올라가 있었다

 

일본군은 전선이 길어 지자 왜장 모리 휘원(毛利輝元)은 안동, 예안, 문경, 무계, 등에 부하장수들을 파병하여 주 보급로 확보 하기 위하여 험하기로 소문 난 조령(鳥嶺)주변 고을 확보 유지에 안간 힘을 다 쏟고 있었다.

특히 조선은 산이 많은 지형이라 도로 발달 사정이 좋지 않아 주로 수로(水路)를 많이 사용 하게 되었는데 배를 낙동강이 태백산맥 깊숙히 까지 운반이 가능 하였다

 

 

 

선봉부대를 제외한 일본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5번대 왜장 복도정칙(福島正則)군 4800명은 경기도 안성군 죽산부(竹山府)에 ,

왜장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은 충청도 충주에 7200명

경상도 문경현에 주둔한 장증아부원친(長曾我部元親)군 은 3000명이,

소조천 융경(小早川隆景)이 거느리는 부대는 경상도 선산부(善山府)에

 

입화 통호(立花統虎)군 2500명은 경상도 금산(金山)에

주요 길목을 확보 하고 있는 모리휘원 본대 30000명은 경상도 성주(星州)에

9번대 우자수승(羽紫秀勝)군의 8000명은 부산 부근에

경상도 현풍현(玄風縣)에 도진의홍(島津義弘)군 이 12000명 을 배치 시키고 있었다 .

 

풍신 수길은 조선 침략을 장기화 하기 위하여 점령 기간동안 왜군과 조선 포로들을 이용 성을 곳곳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 하였다.

그동안 왜군이 쌓은 왜성은 서생포(西生浦), 기장(機張), 부산(釜山),김해, 동래, 가덕도(加德島) , 안골포(安骨浦),웅천(熊川),거제도(巨濟島)등이었다 ,

 

풍신수길은 점령군이 엉뚱한 생각을 못하게 점령기간동안 이라도 잠시 틈을 주지않고 성을 쌓지 않으면 각종 훈련을 하도록 그냥두지 않았다.

조선 왕 선조는 임금이 죽으면 조선이란 나라는 구심점이 깨저 망하고 말것이라 생각했다 .

 

사수(死守), 사수(死守)하는 윤두수의 기개는 높이 살만 하나 , 우선 적 점령하에 왜군앞에서 왕이 두 무릎은 굽힐수는 없는것이다 .

왕이 전쟁에서 죽는다는것은 그 전쟁을 통하여 적에게 나라와 백성을 넘겨 주는 무책임한 군주가 되지 않는것이라고 누가 장담 할것인가?

 

 

선조도 한때는 대신들 주장대로 서해 바다를 이용 아직 점령되지 않은 강화나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조선군의 지휘관으로 직접나서 장열하게 싸우다 죽는것도 생각 해보았으나 그것은 이시점에서 조선을 완전히 일본에게 넘겨 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

 

왕은 왕으로서의 할일이 따로 있다 .

왕이 손수 나가 전투 현장에서 싸우는것 쯤이야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이다 .

 

그러나 일국의 왕은 전투 현장의 일개의 장수 역활만은 할수 없는것이다 .

무책임한 자들은 임금을 호종하는 대신들이었다 . 전쟁중에도 파당적 행동이 여전했다 . 물론 모든 책임은 왕에게 있다 .

 

그러나 왕도 앞서 생각한대로 왕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 였다.

 

인간들 이란 모이면 음모가 마음속에 꿈틀거린다 . 피난중의 조정도 예외는 아니다

임금은 만일을 생각했다 . 앞일은 한치도 내다 볼수도 없는 세상이다

 

고사(古事)에서도 보듯이 전쟁을 당하여 수많은 군주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넘어 진다음에는 꼭 외부와 내부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고 만다

,그런 사례는 중국 역사에 무수히 보아 왔다 .

 

중국의 중원은 한족(漢族)이 대표 민족이면서도 번번히 왕권을 만주족 아니면 몽고족에게 넘긴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

 

최근 만주족이 득세 하여 순수 한족(漢族)국가인 명나라를 괴롭히는것도 범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임금은 조선 차제에 조선 왕국이 붕괴 위기로 갈것이 두려 웠다 .

왕조 붕괴가 문제가 아니었다 ,

조선민족이 소위 대화족이라 자칭하는 일본의 속국이 된다는것은 꿈에서라도 생각 해서는 않될일이다. 선조는 생각 하였다 ,

 

왕이 살아 있어야 한다 ,

그래야 조선의 모든 백성이 사는것이다

 

, 왕이 살아 끝까지 벋히어 백성들에게 힘을 넣어 주어야 한다 .

왕은 혹시라도 자기가 죽더라도 조선 백성의 지주가될 왕세자 에게 전쟁을 계속할 권한을 주기 위하여 분조(分朝..조정을 나누어 설치 하는것)를 결정 하였다 ,

 

왕명에의하여 왕세자는 우의정 유홍이 모시기로 하고 왕이 혹시 만의 하나라도 변을 당하여 죽게 되면 영의정 과 좌의정이 세자를 모시고 나라를 지키도록 최후의 배수진을 첬다 .

그래서 왕세자는 강계(江界)에 따로 분조 할것을 명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의주까지 처들어 오면 중전까지 치욕을 당하면 안되라 생각되어 중전을 우찬성 최황(崔滉)에게 함흥방면으로 피신케 하려다가 계획을 바꾸어 왕이 있는 의주로 모시었다.

 

왕세자 광해군(光海君)은 왕명을 받고 평안도 영변 개평원(開平院)을 거쳐 일행은 희천에 있던 우찬성 최황과 만나 왕세자를 딸으게 하였다.

 

왕세자는 강계로 들어가는 설한령(雪寒嶺)쪽으로 향하다가 희천군 광성령(廣城嶺)에 이르러 고개 저쪽을 내려다보니 웬 군대 행열이 왕세자 쪽을 향하여 올라 오고 있었다

 

, 일행이 놀라 모두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왕세자가 묻는다

"저건 적이 아니오?" 하고 황망히 주위 제신을 처다본다 .

 

우의정 우홍이

"깃발을 보니 조선군 같습니다 . 걱정 마시 옵소서, "

군대 행열이 가차워지고 보니 조선군이었다

 

.함경도 남병사 이흔 이 이끄는 군사 들이었다. 이흔은 강원도와 함경도를 나누는 철령(鐵嶺)을 함경감사 유영립(柳永立)의 명을 받고 지키고 있다가 왜장 모리군이 왜군 4000명을 인솔하고 고개위로 떠들석하게 올라오는 소리에 놀라 수만군사로 착각 하고 적에게 패하여 관북에 있는 조선군을 찾아 후퇴하는 참이었다.

 

왕세자 일행은 강계쪽 방향을 바꾸어 맹산쪽으로 향하였다.

우의정 유홍(兪泓)이 왕세자에게 아뢴다

"아무래도 강계쪽은 위험합니다. 이흔의 말에 의하면 왜군 가등 청정(加藤淸正)군과 모리 길성(毛利吉成)군이 철령 을 넘었다 합니다 .황해도 곡산쪽으로 피하시는것이 오를듯 합니다."

 

일행은 다시 강원도 이천(伊川)을 거쳐 다시 황해도 신계로 갔다가 평안도 성천(成川)에 이르렀다.세자는 대신들에 이끌려 피난 하기에 바빴다

성천으로 영의정 최흥원이 찾아와 함경도로 갔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왜군에게 잡히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일본군은 낙동강 수운을 이용 하여 보급로를 확보 하였다 ,

 

이들은 영산(靈山), 현풍, 무계, 창녕, 성주, 등에 거점을 다시 정하고 일본군을 나누어 주둔 시켜 놓았다.

왜장들은 부산 상륙 이래 동래 에서 그들의 진로를 동, 중, 서,로 나누어 한성을 향하여 북상하여 조선 왕을 잡아 죽이고 자기 국토화하려는 풍신수길의 계획에 충실 하게 수행 하려고 갖은 노력 을 다 하고 있었다 .

겉으로는 명나라 칠길을 달라 면서 속셈은 음흉한 흉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왜군 후방 점령군 들은 왜군 수송로 확보가 중요 한것이기 때문에 경상 , 전라, 충청도 의 속속 들이 까지는 장악 하지 못 하였다 .

 

 

 

왜군의 헛점은 바로 이런 곳에 있었다 .

 

왜군은 바다 에서 연전 연패 하였다 , 그것은 그들 배의 약점도 있었지만 바다 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 바다는 승부 결정에 있어 전부(全部)아니면 전무(全無)였다

 

 

.망망 대해 에는 오로지 승리 아니면 패배 뿐이다

 

.

 

그러나 육지에의 승리는 통치권자인 임금을 잡아 죽이기전 까지는 점령군의 무력 행사 구역 외에는 미치지 못한다 .

 

 

이점이 육장(陸將)들이 겪는 애로 였다 .

 

승리가 온전치 못한 승리로 보이는것이다.

 

일본 점령군이 미치지 못하는 고을에는 일본군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 들이 많다.

 

 

 

이런곳에 자기 고을을 지키고자 하는 이른바 향병(鄕兵). 민병(民兵)또는 선비 출신의 충의지사(忠義之士)라는 정규군이 아닌 병사들이 동네 별로 결성되었다 .

 

 

이를 역사는 의병(義兵)라 일컫는다.

 

처음에 일본과의 전투에서 처음 관군이 패하였을 때 는 조정의 무관심과 군사 제도의 결함 이 원인이라 할수 있다 .

오위(五衛)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병농(兵農)일치제적 군사제도는 적을 막아 내는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 하지 못 하였다.

 

 

농민 들이 현역 복무 대신 포(布)를 내고 병역을 면제 받는 제도가 생기면서 군포라 일컫는 제도로 군역이 문란 해젔었다

 

그러니 그 포(布)수입으로 병사들을 고용하는 병농 분리적 용병(兵農分離的 用兵)을 하려 했던 제도는 용병 이라도 제대로 유지 했으면 좋으련만 그 수입을 각 군영의 일반 경비로 전용 하거나 지휘관 개인 욕심 채우기에 급급 하였으니 군사 제도의 헛점을 항상 안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 조선과 일본 전투에서 관군이 무력 해진것도 그 병역 제도 폐단의 연속이 아니라고 아무도 장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을 일어 나게 한 책임을 갖고 조정은 모두 일선 지휘관들 에게 만 책임을 지웠다

조정은 자기들의 정권 다툼이 이런 결과가 돌아 왔다는 것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 하고 있었다 .

 

전쟁 기간 동안에는 적어도 당파 싸움만은 잠잠 한것은 영의정 최흥원 같은 인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최흥원은 삭녕(朔寧)사람이다

 

,호는 송천(松泉)으로 영의정이었던 최항의 증손이다.

 

중종 28 년에 출생 하여 선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진을 거듭 하였다.

 

전쟁이 일어 나면서 황해도 도 순찰사를 했다, 유성룡(柳成龍)과 교대하여 좌의정 으로 있다가 영의정으로 된 사람이다.

 

 

사람됨이 어질고 후덕하며 의지가 굳고 뜻을 넓게 잡는 인물이었다 .

주위 어느 파에 치우치지않고 몸을 항상 근신하여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도 겨울에도 춥게 살아 집에 사는것이나 음식이 너무나 검소 하게 살아 나중에 조선에 청백리로도 뽑힌 사람이다 .

 

 

그는 전쟁중에는 파직된 전직 중신들도 벼슬 없이도 임금을 호종케 하고 동인 계통이나 서인계통 사람들은 구별없이 될수있으면 벼슬은 주지 않되 정사에는 관여 하게 하였다 . 이산해, 유성룡 , 정철, 같은 인물이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이 었다.

 

 

전쟁 전에 일어난 실정을 마무리 하려는 전시 조정이 오죽 했으랴 마는 백성들이나 사림은 이런 고충을 알아 주지 않고 민심이 조정과 같이 하지 않았다.

 

한성을 떠날때나 개성이나 평양을 떠날때 백성들은 왕과 전시 조정을 을 원망한것이 그 예(例)였다.

 

 

 

조선의 의병들은 서로가 혈연 지연으로 맺어진 지역의 사람 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왜군들이 그들의 주요 간선 고을만을 지키고 있는동안 미처 왜군들이 점령 하지 못한 자기 고을을 지켜야 했다 . 그들은 멀리 있는 임금보다 가까이 있는 부모 처 자식의 안위가 더문제였다.

 

 

전쟁이 나자 경상도 등에는 백성 들의 징집은 없어 젔으나 왜적들의 약탈과 만행이 더 무서웠다.

그들은 향토 방위의 의무감이 자연 발생적으로 발생 되기 시작 했다. 거기에다 지역의 정치적 , 경제적 기반을 가진 기득권층의 인물들은 일본군이 접근 해 올때 마다 그들의 기득권을 왜적들 에게 송두리채 무너질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백성들의 가족 보호 의지와 사림 들의 유교 충효 사상이 접목 되어 조정에 내건 근왕 (勤王...왕에대한 충성)을 위한 국난 극복 등의 3 박자가 맞아 떨어져 의병이란 새로운 비정규군이 탄생 하게 된 것이다.

 

 

고을의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가진 자들의 대표격이라 할수있는 의병장은 처음에는 기득권 보호가 동기였지만 현실적 이해 관계가 유교적 명분론과 결합하면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않될 위치에 서게 된것이다.

 

 

 

조정에서도 그동안 관군이 전쟁에서 계속 패하자 조정은 지역 방어에 나서고 있는 향군(鄕軍)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 했다 .

 

임금은 전쟁 직전 일본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와서 허위 보고로 말썽 부리던 김성일을 이용하여 의병 활동을 돕게도 했다

 

 

이때의 의병장들의 신분을 보면 대부분 전직 관료나 유생들로 곽재우 같은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는데 적극적이었다 .

 

의병을 처음 일으킨 곽재우(郭再佑) 는경상도 의령(宜寧)사람으로 왜적이 경상도를 휩쓸고 북상 할때부터 심대승(沈大升)과 만나 나라가 국난을 당하여 비분 강개 하고 하고 있었다 .

 

 

 

부산 김해방면에서 상주 하던 왜군은 방향을 서북으로 바꾸어 함안군, 창녕현(昌寧縣), 영산현(靈山縣)에서 남강(南江)을 건너 경상 우도(慶尙右道)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으려 하였다

 

 

 

곽재우는 의령현 자택에서 심대승과 간단히 술잔을 나누면서 말한다

"듣자하니 왜적이 의령군으로 쳐들어 오고 있다는데 경상감사 가 나 서야 할텐데도 불구 하고 계속 왜군에게 밀려 어쩔줄 모르고 있다니 이야말로 큰 변고가 아니고 무었이오. 또 의령 현감도 적을 친다고 하며 슬며시 없어진지 오래 된다는데 이래가지고 이지역은 누가 지킨다 는 말이오?""

하고 한탄 하였다

 

 

"우리가 나서야 하겠습니다 , 경상감사가 저럴진대 고을 현감이라고 별다르겠습니까 ,"

"그렇긴 하오마는 우선 적들을 막으려면 군사를 모아야 하고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어른 께서 평소에 무예를 익히게 한 동료 장사가 50명정도 있지 않습니까 , 지금 적이 처들어오면 의령현과 초계군(草溪郡)에 있는 창고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인즉 내일 우리 50 명의 장사들과 함께 창고 문을 열고 양곡을 일부 확보 해놓고 우선 우리가 갖고 있는 활과 칼을 이용하는동시에 관가에서 방치 하고 있는 기강(岐江)의 배를 이용 왜군이 의령으로 침공 못하게 하겠습니다

 

 

 

.군사 모집 문제는 내 부모 처자와 고을의 안위에 관한 문제이니 내일부터라도 아마 호응이 많을 것입니다, "

"그래도 나라의 창고를 현감이 출진중이라는데 함부로 양곡창고를 열어도 되겠소?"

"출진은 무슨 출진입니까 ? 지금쯤 어디 론가 도망가 숨어서 왜놈들 거동만 보고 있을 겁니다 .

 

그냥두더라도 왜놈들이 들어 오면 그놈들이 군량미로 쓸것이 뻔한 것인데 의병을 모아 싸우겠다는데 어찌 할겁니까?"

"그럼 좋소 ,그리 하도록 합시다"

 

 

곽재우와 심대승은 당장 이튿날 실천에 옮겼다 .

 

 

예상외로 의병 모집은 순조로웠다 .도망가지 않고 있던 합천 군수 전견룡(田見龍)은 도망치기에 바쁜 경상감사 김수에게 곽재우가 제멋대로 군사를 모집 해 관청 창고의 양곡을 털어 군량미로 사용하고 관용 배를 이용 기강 도강 훈련을 하는 등 수상한짓을 한다고 악평(惡評)하여 보고 하였다 .

 

 

그러나 도망 치기에 바쁜 김수 귀에 이런 보고가 제대로 들어 올리가 없었다

6월 30일 적장 안국사(安國寺)라는자가 창원에서 함안군으로 처들어 온다는 첫 보고가 들어왔다 .

 

곽재우는 붉은색의 군복을 차려 입고 당상립(堂上笠...당상관이 쓰는 삿갓)을 쓰고 준마에 올라타 1000여명의 의병들에게 호령했다

"적이 지금 의령을 향하여 처들어 오고 있으니 우리의땅 , 우리의 부모 처자식을 지키기위하여 목슴을 받처 싸우라"

 

"만세 홍의 장군 만세 "

의병들이 함성으로 화답 하였다 .

 

 

 

모처럼 들리는 우렁찬 소리에 의병장 곽재우, 의병대장 윤탁(尹鐸) 소모관(召募官), 오운(吳澐)의 눈시울이 뜨거워젔다,

 

 

곽재우 뒤에 대장군기(大將軍旗)가 날리고 있었다.

천강 홍의대장군 (天降紅衣大將軍)"이라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왜군은 의령땅 정진(鼎津)나루에서 남강 을 건느려고 하였다 .

곽재우는 안개가 자욱히 낀 저쪽 강안에 일마의 군사들이 집결하여 있음에 그들을 관찰 하고 있었다 , 그때였다

 

 

"거기 있는 군사들은 소속이 어디인가?"

왜군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말로 안개속 강건너에서 소리가 들린다

"대장군님 , 저게 조선 군사가 아닙니까? "

소모관 오운이 놀라 말한다

"아니오 그래도 안개속이니 이쪽에서 저쪽 소속 을 물어 보시오 조선군중에서 경상 우도로 나올 군사가 없는데......"

 

 

대장 윤탁이 지시 한다

"너이들은 누구냐 ? 우리는 천강 홍의대장군 군이니라"

저쪽에서 대답이 왔다.

"우리는 전라도에서 온 원군이오 , 전라감사 외다 .우리가 도강을 하겠으니 그리 아시오"

 

 

 

이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곽재우가 묻는다

" 대답소리가 힘이 없는것을 보니 필히 조선인 포로를 앞세운 왜적이 분명하오 , 제장들은 들으시오 , 우선 적들에게 안개가 걷히고 난다음 건느라고 알려 시간을 번다음 군사들일부를 그사이에 저쪽 정진(鼎津) 언덕 뒤에 동서로 나누어 매복 시켜 두시오 ,그리고 그 뒤쪽에는 붉은 옷을 입힌 병사들 일부를 높은곳에 매복시켜 주시오 ,

 

 

 

내가 호각을 불면 사방에서 나를 딸아 요란히 호각을 불고 적이 미처 상륙 하기 전에 활를쏘아 배를 침몰 시키도록 하고 그래도 상륙하는자가 있으면 모두 쏘아 죽이시오"

 

 

 

적들도 처음에는 어리 둥절 하다가 안개가 걷히면 자기네들의 정체가 들어 날것 을 우려했는지 일제히 배를 타고 도강 하기 시작 했다

 

 

 

호각이 울리자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진동 하며 화살이 벌떼같이 날라 왔다 ,왜군이 깜짝놀라 어쩔줄 몰라 우왕 좌왕 하는사이에 의병들이 나가 적병 을 백여급을 베어 버리니 미처 상륙 못한 왜군이 모두 도망 치고 말았다

 

 

 

곽재우의 첫승리였다 .

곽재우는 의령 사람 이다. 호는 망우당(忘憂堂), 황해도 관찰사 였던 곽월(郭越)의 아들 로서 명종7년 의령에서 출생 하였다. 남명 조식(曺植)선생 에게서 글을 깨우치고 그사위가 되었다.

 

 

 

선조 18 년 34세때 과거 급제를 하였으나 과거 급제 내용이 조정의 당파적 부패상을 신랄히 비평하는내용이 있어 합격이 취소 되자 벼슬을 않고 강촌에서 수많은 서적과 무예를 익히며 처사로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권율 모양으로 처사 시절에 배웠던 병서에 영향을 받아 의령에서 거병하였다 .

 

 

 

그도 경제적으로는 고통을 받지 않는 집안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전쟁이 나면서 곽재우는 평소에 무술 연습을 자주하던 조식선생의 영향을 받아 자기 고향에서도 건장한 청년 50 명을 항상 주위에 두고 무예 연습을 해오던 터이었다

 

 

 

의병장이 라는 중책을 맡다 보니 군사 유지비가 보통 많이 드는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가산을 모조리 털어서 경비로 충당하였다. 부하가 전쟁터에 나갈때 옷이 없어 헐벗은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자기 옷을 벗어 주는등 병사를 아끼는것이 자기 몸같이 하였다 .

 

 

 

처음에 의병에 가담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의병과 같은 마을 사람들이거나 같이 공부 하던 유생 들로 맺어저 그 연대 의식은 각처에서 강제 징집 되어온 무질서 한 관군과는 확실히 달랐다.

 

 

거기에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르침은 근왕의 정신으로 유생들에 머리에 가득 차있어서 패전 만 하는 관군의 장수를 이해 못하고 욕하고 있었다.

 

 

 

그리 하여 "충(忠)과 효(孝)로써 나라를 지키는것은 근왕(勤王)의길 밖에 없다"는 논리로 의병들을 임금과 접목 시켰던 것이다.

 

 

 

의병의 봉기는 향토방위라는 개념과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부터 내지역을 구하여야 한다는 현실감이 우선이었던것은 사실이었다.

 

 

 

경상 우도 방면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에 정인홍(鄭仁弘), 예안에 김해(金垓), 초계에 이대기(李大期), 이 왜적을 괴롭혔다 .

 

이들은 모두 일본군 미점령지역이기 때문에 궐기 할수 있었던것이다

 

.명망있고 힘있는 유생들이 각처에서 궐기 하니 그동안 불안에 떨기만 했던 백성들이 지연, 학연, 친 인척,등 여러 맥을 통하여 자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 했다

 

 

 

의병모집과정은 의병장 힘도 컸지만 유생들 힘이 컸다. 거기에 조정에서도 의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임금이 직접 교서를 작성하여 의병장에게 내려 줌으로서 의병장은 더 힘을 받을수가 있었다.

 

 

조선 왕조의 제도는 1 품 에서 9 품 까지 아홉 단계의 등급 으로 나누는 관계(官階)로 나누어저 있다.

또 각 관계는 다시 정(正)과 종(從)으로 나누어 모두 18 개의 관 품으로 나누어 지고 동반 , 서반, 종친, 내명부 외명부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또 이것은 중앙정부 와 지방으로 나누어 저 있다.

 

지방은 외직으로 종 2품으로 관찰사(감사)가 있다 .

그리고 외관직으로 종2품으로 병마 절도사가 있다 .

 

 

 

병마절도사는 문관인 감사가 겸직 하는곳이 많았다 ,

 

그리고 절제사는 정 3 품관으로 병마 절도사 밑에 딸려 있는 무관직이고 권율은 문관직 인 목사 가 정 3 품관 이었다. 무관직인 정3품관 도 절제사는 품계면 에서는 전라 감사의 밑 이었다 .

 

 

 

다만 조정 에서 무관인 도절제사를 권율에게 벼슬을 준것은 전라도 군을 강군으로 육성 하여 왜군을 막아 내기 위한 고육 지책일 뿐이었다.

 

 

 

따라서 문관 우위의 조선 관제 하에서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지방 경우에 겸직 하는경우에 무관 역활을 제대로 할수가 없었다 .

 

 

 

 

 

권율에 경우에는 유장제(儒將制)라하여 광주 목사겸 전라도 절제사를 겸직 하게 된것 뿐이다 .

 

그러므로 조선의 지방 관직은 평소에 특히 문관이 좌우 하고 실권은 무관 에게 별로 없었다 .

 

 

 

권율이 막상 전라도 전 군에 대한 기효신서에 의한 편제를 실시 하려고 마음을 굳히 었다가도 전라 감사인 이광이 반대할것이 뻔하여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

겁이 많은 이광이 응할리도 만무 였다. 영의정 최흥원도 조정에서 거론 한적이 있듯이 이광은 책임 질 만한 일은 피하고 꼭 위에다 물어 허가가 떨어진 다음에야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기효신서는 조선의 군 편제는 없는 제도로 이광이 왕에게 건의 할 능력도 없는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권율은 할수 없이 광주 목사 관할 내에 서만 기효신서 에 의만 군 편제 를 행 하여야 한다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권율은 우선 관할 구역과 인근 읍성 유생들을 상대로 격문을 띄워 유생자제들을 저극적으로 유사시 대비 해 군사 훈련에 참여 케 하는동시에 징집당한 군사들도 생업에 지장이 최대한 없는 범위 내에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그동안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 권율이 모집한 군사수가 1500 여명이 나되었다 .

권률은 경상도 옥천 황간등에 비밀 첩보원을 파견 하여 수시로 적의 동태를 감시 하고 있었다.

 

권율은 왜군이 조선 포로 들을 앞세워 전라 감사를 사칭 하며 곽재우 의병군과 조우하여 패주 한것도 잘 알고 있었다.

 

왜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은 모리 휘원(毛利煇元)과 같이 군사들을 성주, 선산 , 금산(지금의 金泉)에 병력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이 평양과 함경도 지방 공격을 멈추고 방향을 왜군 일부가 남쪽으로 나누어 되 돌린것은 이유가 있었다

 

즉 평양과 함경도 까지 전선이 길어지자 왜군이들이 당장 먹을 것과 군복및 무기와 탄약이 제 때에 조달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 하였기 때문이었다

 

 

 

왜군들이 먹을 군량미를 조달 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거쳐 간 곡창지대인 경기도 안성 , 여주 이천은 전쟁으로 농사를 짓지 못한 조선의 백성들이 끼니 조차 연명 할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조선 백성들로 부터 빼앗아 조달 하려는 당초 계뢱은 무산 된것이다 .

 

 

 

일본의 식량 조달 방법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기가 조선 침략 이후 재해가 심하게 발생 된것이다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실어오던 보급선 조차도 이순신 선단에 의하여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풍신 수길은 결국 군량미 조달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일본에서 실어 갈것이 아니라 조선내에서 조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풍신 수길의 지시에 소서행장은 정말 걱정이 태산 같았다

 

" 지금 쌀맛 좋다는 경기도 안성 여주 이천이나 황해도 재령 지역의 조선 농민들을 개미 새끼하나 보이지 않으니 군량미를 어디서 조달 한다는 말이오"

 

 

 

소조천 융경이 말한다

 

" 방법은 있습니다"

" 방법이라니?"

" 조선의 곡창 지대는 전라도 입니다 . 지금 까지는 조선의 한양과 평양만 점령하면 만사가 다 해결 될줄로만 알았지 전쟁이 이렇게 길어 질줄 몰랐던것이 실책 입니다 . 전라도에서 이문제를 해결할수 있습니다"

" 전라도는 아직 우리 일본군이 발그림자도 않은곳 아니오?"

 

 

" 장군 께서 저에게 군사을 주시면 전주부를 하루 아침에 점령하고 보고 하겠습니다 "

 

"..................."

며칠째 굶은 왜군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소서행장은 그말을 따를수 밖에 없었다

 

" 그런데 전라도는 전라 감사 이광이라는 자가 벋히고 있는 모양인데 일이 쉽겠소? "

" 걱정 마십시요 . 이광이라는 놈은 겁쟁이중에 상겁쟁이 이입니다 . 오히려 전라 절제사로 있는 권율이라는 자가 범상치 않은자입니다 .

 

 

 

하지만 듣기에 이광과 권율이 작전을 두고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 이 두놈들은 이간질 시켜 약화시킨 다음에 전주를 치겠습니다 "

" 허허 , 그자들을 어떻게 이간질을 시킨다는 말이요?"

" 걱정 마십시요 .해보겠습니다 . 조선놈들은 뭉치기도 잘 뭉치지만 모래알처럼 서로가 서로를 헐뜯기로 소문난 놈들닙니다 ."

 

 

이말에 소서행장이 웃는다

 

"소조천 장군, 용간이 그리 쉬운줄 아시요? 언제 간첩을 전주부에 들려 보내어 언제 전라도를 치겠다는 거요? 그런 방법은 우리가 처음 부산에 침공하기전에 공작을 해놓고 조선군을 이간 시키고 난다음에 할일이지 지금 그게 먹혀 들겠소? 그런 꿈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다른 안을 꺼내 보시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모리 휘원이 말한다

 

사령관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조선군은 전멸한 상태나 다름 없지만 전라도에만 일부 남아 있을 뿐입니다 . 그까짓 조선군 얼마 되지 않은 패잠병들을 상대로 용간을 하느니 간첩을 들여 보내니 하는것은 쓸데 없이 군사력을 약화 시킬 뿐입니다 .제생각으로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전주부를 일격에 공략 한다면 당장이라도 빼앗을수 있습니다 "

 

 

소서행장이 말한다

 

" 모리 장군의 말이 옳소 ,이곳 평양전선과 함경도 전선은 신경 쓰지 말고 군사를 줄것이니 당장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으로 출발 하시요 ."

이리하여 소조천과 모리의 왜ㅔ군 부대는 역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일단 전라도 접경지역인 경상도 창원을 선택하였다

 

 

소조천은 남하하면서 서울에 입성하자 잠시 머물면서 심복인 부장 안국사 혜경(安국寺惠瓊)에게 경상도 창원을 거쳐 전라도 전주를 공격 해보라고 지시 하였다

 

조선군을 얏잡아 본것이다

 

 

 

안국사 혜경은 창원에서 남원을 거처 전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런데 차질이 생기었다

 

안국사는 부하들을 엄선하여 특공대를 만들고 전라 감사군대라며 조선 군복을 입혀 남운을 먼저 점령하려고 하다가 이를 미리 알고 있던 곽재우 의병군에게 혼이 난것이다

 

 

 

안국사는 일단 안전한 성주로 일단 후퇴하였다

 

 

 

소조천융경은 한성에서 안국사가 곽재우의병 에게 참패 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내었다

 

"아니 정규군도 아닌놈들에게 당하다니 병신같은 놈즐"

 

그는 손수 조선군을 치겠다고 즉시 충청도 청주로 내려 왔다.

 

 

 

그는 안국사를 불렀다

 

 

"부장은 어찌 하여 그렇게 경솔 한가 ?. 경상도와 전라도는 옛날부터 지리산이 중간에 있어 산이 험한 악산(嶽山)으로 소문나있네 .

그래서 옛부터 전라도 와 경상도 는 왕래가 거의 없는데 어찌하여 부장은 "전라 감사"를 사칭 하여 적을 속이려 하는가?.

 

 

 

더구나 포로는 경상도사람인 모양인데 곽재우 의병군이 속겠는가 ?.명예 회복을 위 해서라도 예정된 분지지계(分地之計) 방침대로 전라도 전주 감영을 점령하도록 하되 부장은 황간과 순양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을 거쳐 금산으로 진출 토록 하오,

 

 

나는 옥천 을 거쳐 금산으로 진격할것이니 그곳에서 일단 합류하여 대책을 세우도록 하오"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부(全州府)를 직접 칠것이니 그리 아오, "

 

 

 

소조천융경은 6번대 주력군을 옥천을 거쳐 금산에 일단 집결후 전주부를 치기로 하였다. 별군 안국사는 황간과 순양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를 거쳐 무주를 치고 금산에 집결 토록 하고 이곳에서 다시 진안을 거쳐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부로 들어가기로 한것이다.

 

 

소조천융경 주력군은 금산에 먼저 침투 금산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전주를 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금산은 북쪽으로 보문산 서쪽으로 대둔산 동쪽으로는 서대산, 남쪽으로는 적성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다

 

 

 

, 금산 군수 권종(權棕)은 옥천쪽에서 처들어 오는 적의 주력군을 막기 위하여 200 명의 병사를 동평에 산에 매복 시키고 있다가 전의 행군 대열이 계곡을 지나므로 일시에 화살을쏘으니 적은 일시에 흩어 지더니 다시 회복하여 서대산 방향으로 기어 오르기 시작 했다

 

. 권종은 병사들을 독려 하여 죽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응전 허였다.

 

 

 

비장이 권종에게 말한다

" 장군 , 적의 숫자가 워낚 많아 우리가 상대가 안됩니다 ,

 

뒤 서대산 줄기를 타고 일단 몸을 피하 셨다가 전주부로 가서 원군 요청을 해도 늦지않습니다,"

 

 

 

권종이 말한다

" 적은 주력 부대로 여기서 물리 치지 않으면 전주부 뿐만 아니라 광대한 호남을 적에게 내주게 되는것이오 . 우리가 더갈데가 어디 있소 나는 여기서 죽기로 싸우다 죽을 것이니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오 "

 

 

하고 완강히 적과 싸우다 적의 유탄에 맞아 쓸어젔다 .

 

 

 

벌떼 같이 몰려 올라온 적은 권종군 200명을 모두 찔러 죽이고 사살 하였다

 

 

 

일본군 주력이 이렇게 싸우는동안 안국사는 진격로를 일방적으로 바꾸어 전날 곽재우군의 패배한 분풀이를 할겸 경상도 지례, 거창을 거쳐 곽재우군의 출몰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고 전라도 무주로 진격하여 금산에 들어 섰다 . ]

 

 

 

물론 홍의 장군 곽재우는 구경도 못했다. 무주에서 금산에 들어가는도중 용포와 삼거리를 경계하였으나 군수 권종군이 동평에서 전멸 하는바람에 힘안들이고 금산으로 진입 할수 있었다.

 

 

 

금산에서 만난 소조천 융경이 말한다

"부장은 진안(鎭安)을 거쳐 웅치로 향하되 초종목표는 전주 성이니 잊지 마시오,나는 주력군으로 전주성을 단번에 함락 시키 겠소 "

 

 

왜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광주에 있는 권율에게 들어 왔다

 

 

 

.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 에게 적의 준동이 수상 하니 전라도 각지 수령들 에게 명하여 전주부로 집결해 줄것을 요청 하였다 .

 

 

이광은 이미 적이 자기 직명을 사칭하며 경상도 지방에서 횡행 하고 있다는 기분 나쁜 말을 듣고 있는터에 적이 이미 금산을 향하여 두방향으로 나누어 전주를 목표로 처들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터였다.

 

 

이광은 겁이 더럭 났다 . 이때 권율의 서간이 날아 든 것이다 .이광은 각고을 수령에게 전주 감영으로 집결 할것을 명하였다

 

 

 

권율은 그동안 훈련 해둔 정예병력 1500 명을 긴급히 편대를 갖추워 전주부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

 

전주 감영에는 각고을에서 올라온 병사들로 꽉찼다

 

 

김제 군수 정담(鄭湛), 해남 현감 변응정 (邊應井),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 박(黃撲), 종사관 이규수(李圭守)등이 각고 을 에서 모아온 군병들을 집결 시켜 놓고 있었다

 

 

 

권율군이 전주감영에 들어서자 감사 이광이 손수 말을 타고 나와 권율를 맞이 했다 .

이광은 각고을 수령들을 모이게 하였다 .

 

작전회의를 위해서 였다

 

 

 

. 이광은이 발언하였다

"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있소 .

 

듣자하니 이놈들이 내 관명을 사칭 하며 경상도 지방을 휩쓸고 다니다 가 의병 곽재우군에게 혼이 난 모양인데 이들의 최종 목표는 군량미 확보를 위한 고육 지책으로 전주부를 칠려고 오다가 그런다는것이오 , 적이 감히 이 곳 까지 침투 해 들어 오느냐 못하느냐는 제장들의 역량에 딸린 것이니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작전에 대한것은 도 절제사 권율 공이 지시 할것이니 지시대로 움직여 주기 바라오"

 

 

권율은 작전 지시를 앞두고 걱정거리가 생겼다 . 권율이 지접 인솔하고온 군사이 이외에는 사실상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었다.

 

 

각고을 수령들이 모아온 군사들은 훈련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농민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

 

 

 

금산에서 전주부를 치려면 이치 (梨峙)고개 밖에 없다 .

 

 

 

분명히 적은 적의 주력 부대를 투입할것이다 ,

 

그리고 또 한곳은 전주부 훨씬 남쪽인 웅치(熊峙)인데 이곳은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행군으로 적장이 왜군의 병력을 피곤 하게 하지 않을런지 모른다

 

 

 

권율은 적의 주력 부대가 분명히 고개 한곳만 넘으면 되는 이치로 넘어올 가는성이 제일 많을것으로 보고 자기 정예군을 직접 지휘 하여 막기로 작정 하였다.

 

 

 

그리고 침투 가능성이 희박한 웅치는 각고을 수령들이 모아온 병사들을 감사 이광이직접 지휘 해주길 바랬다 권율이 나섰다 .

"전주부를 적이 치려면 이치령과 웅치령 밖에 길이 없습니다 . 그런고로 금산에서 전주부에 처들어올 지름길은 이치이므로 적의 주력이 이치령을 넘어 전주로 직접 넘어 올것이 분명합니다

 

 

 

. 적이 선택을 할수 있는것은 두가지중에 하나로 적의 주력이 이치령을 넘어 집중 공격 하는 방법과 우리의 전투력를 분산 시키기 위하여 웅치로 일부를 돌려 침투 해 들어 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광은 사실 용인이나 광교산 에서 하도 놀라 왜군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의 생각은 적이 분명히 이치령을 집중적으로 넘을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 되었다 .

 

적이 처들어올가능성이 희박한 웅치를 맡는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하였다 ,

 

 

"권장군 내생각으로는 적이 주력군만으로 이치를 넘어 처들러 올것 같지는 않소 , "

 

 

"하지만 적은 필요 없이 군사들을 분산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 하긴 안국사라는 왜군 부장이 설욕을 위하여 별도 부대로 웅치를 넘을 가능 성은 있읍니다만....."

 

 

이때 권율에게 종사관이 밖에서 들어 오더니 귀속엣말로 말한다

 

 

수령들의 시선이 권율에게 집중되었다

 

 

권율이 발언한다

"방금 안국사 군이 진안으로 움직인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

 

이관이 묻는다

"왜장 소조천융경 주력 부대는 ....."

 

"아직 금산에 서 움직이고 있지 않은것을 보니 안국사군이 진안에 도착 하는 시기에 맞추어 웅치로 공격 하려는것 같습니다 "

 

 

이광은 그것 보라는 듯이 말 한다

"그것 보오 , 분명히 적들이 양동작전을 쓴다니까....."

 

 

 

권율은 시간이 촉박 하다고 생각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

 

나는 적의 주력 부대인 소조천 융경 부대를 이치에서 직접 지휘 하여 막도록 할것이니 감사 께서는 각수령을 직접지휘 웅치에서 막도록 하시지요"

 

 

하고 권율이 말하자 이광은 겁이 더럭 났다 .

 

 

 

안국사군은 곽재우 의병에게도 패한 약군이긴 하지만 그래도 용인전투에서 낙마를 하였던 망신을 부하 들에게 또 뵈워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광이 말한다

 

"그러지 말고 웅치는 김제군수 정담 장군이 직접 지휘 토록 하시오 전주부를 비워 둘수는 없는것 아니오 . 아무래도 적이 노리는 것은 전주 가 목표이니 내가 지키도록 하겠소 "

 

 

 

수령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적과의 대치 할 조선군 배치는 아래와 같이 결정 되었다 '

 

 

 

이치(梨峙) 지역

 

 

 

도절제사 권율

동복 현감 황진(黃進)

편비(編裨) 위 대기( 魏大奇)

편비 공시억(孔時億)

 

 

 

웅치(熊峙) 지역

 

 

 

김제군수 정담(鄭湛)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정담(鄭湛)군 은 전주를 떠나 신교 황운 을 거쳐 만덕산 계곡을 지나 곰티재 바로 밑 에 도착 했다.

 

 

 

안덕원(安德院)에 도착 했다 .

 

왜군 승려 출신 안국사 혜경(安國寺惠瓊)부장이 지휘하는 부대는 이미 진안(鎭安)을 지나 연장리 를 지나 신장리 까지 처들어 왔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

 

 

정담은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을 불러 놓고 작전 지시를 했다.

 

 

"이 공은 군사를 이끌고 산중턱 숲속에 복병으로 잠복토록 하시고 , 황공은 선봉군으로 진산쪽 고개 입구에 진을 치도록 하시오 .

 

나는 곰티재 고개 위에서 제 3 진지를 만들어 지키 도록 하겠소 .

 

배치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오"

 

 

 

조선군은 부산하게 정담의 명령대로 전투 준비를 완료 하고 고개 아래 계곡에 적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7월7일 날씨는 맑았으나 찌는듯한 여름 햇살이 곰티재를 내려 쪼이고 있었다

 

 

 

. 쥐죽은듯이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선봉부대장 황박은 적이 나타날데 대비해 길 양편 에서 적이 나타 날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외로 1000 여명의 왜군은 형형색색의 깃발을 들고 창검을 번쩍이며 나타나기 시작 했다 ,그야 말로 대군(大軍)이었다

 

 

 

황박이 명령을 내렸다 .

 

화살을 마구 적을 향하여 쏘아 댔다 .

 

적들도 놀라 조총응 쏘아 대며 황박군을 향하여 돌진 해 오기 시작 했다.

 

 

 

황박은 적과 대적 하다 말고 말머리를 돌려 고개 위로 도망쳤다 .

 

왜병은 사기 올라 왜군 장수 한명이 선봉부대를 이끌고 황박군의 뒤를 쫓아 고개위로 치닫는다. 왜군이 도망치는 조선군에 물불을 모르고 추격해 거의 고개 중턱에 다달 았을때 였다 .

 

 

매복장 이복남이 신호를 보내자 길 양편 숲속에서 빗발치듯 화살이 날아 들기 시작 하여 고개 중턱은 온통 왜군의 시체로 덮여 버리었다

 

 

황박군은 그제서야 뒤로 돌아서서 적에게 화살을 쏘아대니 왜군은 갈바를 모르고 보이지 않는 조선군 공격에 대항 한번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낸채 고개 아래로 도망가기 시작 했다.

 

 

 

오후5시에 시작된 전투는오후 9시가 되어서야 피아가 조용해젔다 .왜군들도 뜻하지 않은 참패에 놀란듯 진격 해 올 뜻이 없는지 적막이 흘렀다

 

 

 

정담은 산위 정담 진으로 이복남과 황박을 불렀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

 

적이 잠잠 한것을 보니 저들도 놀랬을 것입니다 , 저놈들이 오늘 밤 기습은 혼이 나서 야밤에는 습격은 못할것입니다 .

 

그런데 적의 병력이 너무 많아 앞으로 우리 가 전투에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적과 싸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

 

적이 스스로 철수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공격 해올 것이냐는 내일를 보아야 알것 같습니다 , 모두 제 자리에서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

 

 

이에 이복남이 나선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않습니다

 

, 지금 우리의 매복지가 적에게 노출 되어 있습니다 .

 

우리 부대 배치가 노출된 이상 부대 배치를 다시 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황장군 의병들은 선봉부대 로 적을 유인 하는 도중 적지 않은 병사가 조총에 맞아 희생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정장군 부대를 선봉부대로 대치 하는 것이 타당할줄 압니다. "

 

 

 

이말에 정담이 기분이 좋지 않은 은 얼굴로 말한다

"그건 이공이 잘 모르고 하는 말씀이오 ,

 

지금 이 삼경이 가까워 지고 있는데 적이 언제 야습이라도 해올지 모른 판국이오 .

 

우리가 지금이라도 부대 이동하는 기미를 적이 알면 혼란을 틈타 어떤 상황이 벌어 질지 모르고 설사 이동 배치가 되었다하더라도 각자 진지를 구축 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현 진지를 고수 하되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여 주시오 "

 

 

 

정담에게 이복남이 건의는 이것으로 끝나고 각 전투장소로 돌아 갔다 .

 

 

7월 8일

 

먼동이 틀 무렵 안국사 혜경 부대는 어제 희생 선봉부대를 제외한 전 부대를 동원 곰티 재를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 했다

 

.

 

왜군 병력이 조총을 마구 쏘아 대며 단숨에 황박군과 대 접전이 벌어 젔다 .

 

왜군들은 어제 복병들 에게 복수라도 할듯이 이복남군이 매복되었던 산속으로 잠입 하기 시작 했다.

 

 

 

황박군의 의병들은 왜군들을 닥치는대로 육박전으로 쳐 죽이었다 ,

 

왜군들도 전법을 바꾸어 1선이 무너지면 다음 전투원을 교대로 투입하여 대처 하는 등 고개 를 가득 메워 처들어 왔다 .

 

 

 

이복남군도 활을 쏠수 없는 산악전을 해야 했다 이복남과 황박군도 기진 맥진 하여 싸울 기력을 잃고 고개 위로 밀리기 시작 했다

.

고개위에서 백마 위에 올라 앉아 지휘 하고 있다가 황박군이 뒤 밀려 오르는것을 보자 화살를 가저 오라 하여 말을 타고 기어 오르는 왜장 한명을 활로 쏘아 말에서 떨어 젔다 .

 

고개 밑에 있던 이복남이 황급히 말을 타고 고개위로 치달았다

 

 

"장군 , 사태가 심각합니다. 적의 병력이 월등히 많고 우리는 지금 화살도 거의 다 되었습니다 . 일단 후퇴 했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싸우도록 하시죠"

 

 

 

이복남의 권고에 정담 흴란한다

"장군은 어찌 그러시오 , 아까도 말씀 드리지 않았소 .

 

지금 우리가 웅치를 막아 내지 못하면 적에게 전라도를 내주자는 말과 똑 같소,

 

나는 죽기로서 작정 한 사람 이오 ,

 

한놈의 적이라도 죽이고 적의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알아서 하시오"

 

 

 

이러 한 정담의 결연한 의지 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복남은 말머리를 전주쪽으로 돌려 안덕원을 향하여 내려 갈려고 하고 있다 .

 

 

 

" 이공 정말 도망 하시려는거요, 도망 하려면 화살이나 다 내 려 놓고 도망가시구려 "

 

 

이말을 듣고도 이복남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 밑 안덕원 쪽으로 뒤도 안 돌아 보고 말을 달리기 시작 했다 .

 

 

 

이 모양을 본 이복남 군이 그의 뒤를 따르자 정담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일 너이들중에 이복남 군을 따르는 자가 있다면 모두 참수 하리라"

하고 정담이 고함을 치나 전열이 흩어저 수습할길이 없었다 .

 

 

정담은 가지고 있던 화살을 모두 쏘고 화살이 다 하자 칼을 마구 휘두르며 대적 하다 조총에 맞아 장열 하게 사망 하고 말았다.

 

 

 

정담의 비장인 강운(姜運)과 박형길(朴亨吉)도 왜군 여러명 과 육박전 끝에 전사 하고 말았다 .

 

 

 

이 싸움은 조선과 일본전 개전이래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조선군의 완강한 전투 의지를 뵈워준 보기 드믄 전투였다 ,

 

 

 

이 싸움에서 전사한 정담 이야 말로 군인다운 장수였다고 왜장들도 무덤을 만들어 주고 떠났다고 전한다

 

 

 

이싸움에서 장열히 전사한 김제(金提) 군수 정담은 초계(草溪)사람으로 선조16년 무과에 급제 하여 야인 니탕개 무리들을 처부술때 공이 많았고 , 전쟁 초기 김제 군수로 있으면서 이광과 같이 공주 까지 북상 했다가 임금이 평양으로 몽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광이 철군 명령을 내리자 왜적과 싸움 한번 않고 철수령을 내린 데 대하여 제일 많이 분개 했던 사람이다

 

 

 

어쨌든 조선은 아까운 장수 한 사람을 잃었다.

 

 

대신 왜군은 조선군이 이렇게 완강 하게 벋히는것을 보지 못한것으로 조선군의 저항이 날로 강해지니 앞일이 걱정 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은 오래간 만에 얻은 승리에 만족 하며 웅치령 정상 에서 전주 방향 을 내려다 보며 회심의 미소를 보내었다

 

 

그는 한때 일본천하를 통일시에는 풍신수길 태합 옆에서 훌륭한 참모 역활을 해 왔었으나 조선 전 에서는 장수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고 승리 해본 일이 없었다

 

. 며칠전 태합으로 부터 전주성을 공략 하여 군량미 부족을 메 꾸는 역활을 할것을 특별지시 받았 었다 ,

 

 

 

그런데 웅치에서 첫 승리를 따낸 것이다 .

 

왜장 안국사 혜경은 선봉부대가 전주성을 향하여 출발전 척후병으로 부터 조선군의 동태를 보고 받았다

 

안덕원으로 도망친 이복남군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것이었다.

 

왜군은 전주성 외곽에 위치한 완산성 까지 아무런 조선군의 저항 없이 진출할수 있었다.

 

전주성에 있던 전라감사 이광은 왜군이 이미 웅치를 넘어 전주성 외곽까지 진출했다는 말을 듣고 용인 전투와 광교산에서 당한 악몽이 되살아 나는듯하였다 ,

 

 

 

그렇지 않아도 도절제사 권율군이 거느리는 부대에 대하여는 할말이 없었지만 웅치령에 나간 정담군에 대해서만큼 우려 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권율이 작전회의 때 자기 보고 정담군의 직접 지휘 건의를 했을 때도 그를 받아 들이지 않고 전주성을 지키겠다고 한것은 적이 처음에는 금산에서 이치령을 딸아 오는 외길을 선택 할것으로 보았았다.

 

 

왜군은 이미 전주성 외곽에 진을 치고 주력군의 이치령 전승보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주력군과 함께 힘을 합쳐 일제히 전주성을 공략하기로 작정하고 진을 치기 시작 한것이다. .

 

 

전주 성내 있던 이정란 (李廷鸞.前典籍)이 이광에게 보고한다

"적이 전주 경내로 침입 할것 같습니다 . 만반의 방어 계획을 세워야 할것입니다 . 적의 주력군이 이치로 15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 오고있습니다

.웅치령에서 넘어온 왜군이 완산성 에서 주춤하고 있는것은 이치령에서 저의 군대가 승리 할 경우에 대비해 주력군을 기다리고 있다가 적의 주장의 지시를 받고 침공하려는 합니다 "

 

 

이광은 이 말을 듣고 군관들을 모으게 하였다

"군관들은 들으라 이치령을 넘어올 적의 주력군 1500 명과 안국사혜경군 1000 명이 합치면 2500여명의 대군과 싸우게 되면 일은 더커지게 될것이다 .

 

그러니 이곳에서 앉아서만 가까이 처들어 오는 적들만 처다 보고 있을수 없는것이니 나는 전주 성내 병사 절반을 이끌고 나가 성 밖에 진을 칠것이니 그대들은 이정란공과 힘을 합쳐 전주성을 지키라 ,성 내외에서 적에 대하여 협공을 한다면 바드시 성공 할것이니 이야 말로 묘책중에 묘책이 아니겠는가?"

 

즉각 시행하라 "

 

 

 

명령만 내리고 이광은 일부 군사들만 데리고 왜군 을 치기위한 진을 치기 커녕 성밖으로 어디론가 사라젔다

 

 

 

, 전주성을 지키는 최고 책임자가 사라진것이다 .

 

 

이정란은 우왕 좌왕 하는 군관들과 관리 백성 들을 진정 시키기 위하여 권율군이 반드시 이길 것이니 안심 하라고 확신을 심어 주고 조선군이 승리 하면 왜군들이 감히 전주성을 범하지 못할 것이니 그때 까지만 성 주변에 기치창검(旗幟槍劍)를 될수 있는대로 많이 세우고 군사들이 많은것처럼 위장 할것을 지시했다

 

 

권율이 출진 하던날 조정 에서는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 겸 나주 목사로 전보 발령 했다.

 

 

권율은 군사 들을 신속 하게 이치로 이동 시켜 이치령 과 대둔산 오대산등에 진을 치기 시작 했다.

 

진지 구축은 조직적 으로 잘 움직여 주었다 .

 

전라도 군은 그동안 용인과 광교산등에서 싸움다운 싸움도 못하고 패 하기만 하여 전체적으로 사기가 저하 되어 있었다.

 

 

권율은 이점에 대하여 이번 전투에서 새로운 사기 앙양 의 전기가 되기를 바랬다 .

 

 

 

권율은 어느정도 군사들이 정돈 되자 동복현감 황진과 위대기 , 공시억 과 장령을 불러 작전 지시를 했다.

 

"우리 정탐원이 금산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동태를 파악 하고 왔기에 개황을 전해 주는 동시에 하고 전투전에 우리군이 해야 할일을 지시 할테니 제장은 명심 하고 신속하게 실행해주기 바라오 .

 

 

적의 동향을 먼저 얘기 하자면 적장 소조천 융경(小早川隆景)이란자는 풍신수길이 장수들 중에서 제일로 신임 하는자 인데 나이가 60 세로 왜장들중에서는 제일 고령 이지만 지략이 있고 용맹 한자로 인정 받는 자칭 백전 노장으로 자처 하는 장수라 하오.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니니 각오를 해야 하오 .

 

 

 

또 이 자는 그동안 그의 군사를 경상도 성주, 선산, 금산(김천)에 분산 배치 해놓고 자기는 한성에 올라가 있었 는데 이번에 풍신수길로 부터 전라도를 점령하여 저 들이 필요한 군량미를 확 보 하는동시 조선 수군이 막강 하니 전라도 배후를 점령 하여 수군의 본거지인 좌우 수영을 육지에서 발본 색원 하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오

 

 

 

따라서 이들의 제일 목표가 전주 성을 점령하는것인 모양 인데 병력이 우리의 몇배가 넘는 대군으로 우리는 숫적 으로나 장비로는 열세 이지만 내가 지금 할 지시 내용 대로만 제장이 전투전에 완료만 해 준다면 반드시 승리는 우리것이 될것이오

아시겠소?"

 

 

 

권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장수들의 눈을 일일히 처다 며 다짐 한다

"예 , 알겠습니다 . 장군의 명이라면 불이라고 못 뛰어 들겠습니까?

 

 

 

" 한장수가 대답하자 권율이 지시한다

"적이 지금 금산 에서 진산으로 행군중에 있다고 하는데 추세로 보면 내일경은 필히 진산에 머물 다가 이치령 아래로 집결 할것이오. 그러므로 오늘내로 할일을 지시 할터이니 제 장들은 차질이 있어는 않되오 ."

 

 

 

권율은 잠시 말을 멈추 었다 가 장수 들을 막사 밖아래 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대둔산 줄기 중에서 이치령을 한눈 으로 내려다 볼수 있는 대장 막사는 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 왔다.

 

 

 

" 저쪽에 보이는 대둔산록과 오대산록은 나무가 울창 하므로 이곳에 서 이치령을사이에 두고 적과 전면전을 할 것인바 유의 할것은 우리가 지금 싸우려는전술은 매복전이 아니라 전면전 이라는것을 명심 하되 산악전을 하고자 하는것이니 그리 알기 바라오 .

 

 

 

제장들은 이회의가 끝나면 즉시 산 아래쪽서 부터 산 중턱까지 목책(木柵)을 치도록 하시오 , 또 말의 진로를 막는 거마(拒馬)시설은 고개 중턱에 집중적으로 설치 하고, 산간의 나무와 나무사이는 나무를 가로 질러 채(寨)를 치도록하고 , 산간 오솔길에는 철질여, 를 놓고

 

 

수마석(水磨石)은 계곡에서 부지런히 모아 곳곳에 준비 하시오 .

 

위의 일을 않는 병사 들은 적이 빠지기 쉬운 장소에 함정을 파도록 하고 적이 들어 올 가능성이 많은 곳은 녹채책 (鹿寨柵)을 설치 하도록 지시 하니 만전을 기하시오 ,이상 준비 사항을 지시 하니 제장들은 차질 없도록 하오 , "

 

 

권율은 말을 계속했다.

"시간이 없으니 각 장령은 지시 사항을 시속히 시행 토록 하오 단 공시억 비장은 군사 70 명을 줄것이니 전군이 작업을 하는동안 적의 척후나 정탐원이 나타 날것에 대비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되 만일 발견 되면 한 놈이라도 돌아 가지 못 하도록 목을 베어 버리도록 해야 하오"하고 곧 작업에 들어갔다.

 

 

 

이치령은 다른 군 에서 볼수 없던 방수시설(防守施設)이라는 것을 구축 작업 하느라고 떠들석 했다 , 말뚝을 박아 울타리 를 만드는가 하면 적의 전마(戰馬)가 오다가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잘른 나무를 걸쳐 놓는 병사, 사슴 뿔 모양의 나무 끄틀을 정면으로 나오게 하여 부디 치면 중상이 되게 하는것 을 만드는 병사 , 땅 의 함정을 파느라고 구슬 땀을 흘리는 병사 . 오솔 길에 철제 , 목제 모양의 덫을 놓는 병사 .계곡 에서는 모가 않나고 반질 반질한 돌맹이를 수집해 산정상으로 끌어 올렸다.

 

 

 

병사들이 만들어 놓는 시설은 예정대로 차질 없이 착 착 진행 되었다

 

 

 

권율은 병사들 작업 현장을 돌며 작업 상황을 일일히 점검 한후 산정상으로 올라 갔다 , 적의 눈을 현란케 하여 적의 사기를 압도할 오색기 (五色旗)를 준비 하여 자신이 지휘할 지휘대에는 비장 위대기에게 명하여 오색기(五色旗)를 꽂으라 했다 .

 

 

남방을 지키는 신령의기(旗)인 주작기(朱雀旗), 동방을 지켜주는 태세신(太歲神)이라 할수있는용 모양의 청룡기(靑龍旗), 서쪽을 막아주는 태백신(太白神)인 백호기(白虎旗) , 북쪽을지켜주는 태음신(太陰神)인 거북이 그려진 현무기 (玄武旗),그리고 뱀이 그려진 등사기 (騰蛇旗)등이 산 정상 에서 펄럭거렸다 , 병졸들은 오색기를 보자 사기가 중천 했다

 

 

 

권율은 소리 로서 적을 압도 하고 조선군 사기를 북 돋기 위해 권율 지휘 본부 옆에 북소리 내는 금고수(金鼓手), 철 뚜껑 모양을 서로 처 소리를 내는 제금수, 징소리를 내는 정수(鉦手), 나발 소리 내는 (大平手)를 배치 했다

 

 

 

준비는 진시(辰時..8시) 에 시작하여 무시(戊時...오후7시)에 모두 끝났다 장병들은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고 요소 요소에 설치 하고 나무와 풀로 위장하여 놓았다 . 귀신이라도 속아 넘어 가지 않으면 않되게끔 위장이 완전히 이루어 젔다 ,

 

 

 

다음날 날이 밝았다.

권율은 전장병을 새벽 일찍 식사를 마치게 하고 이치령 아래 로 집합을 시켰다 ,

아직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

 

 

 

권율은 전장병에게 간단한 연설을 했다

" 장병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 한다 . 이제 우리는 어제 만들어 놓은 방수 시설(防守施設) 과 함께 우리의 부모 처자가 살고 있는 우리 고향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

 

.평소 훈련 한대로 최선을 다하여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한 왜군을 몰아 내어야 한다 .

 

그동안 우리 동족이 왜군들에게 많은 피를 흘렸다 .

 

이제 원수를 갚을 때는 왔다 .

 

장병 들은 각오가 돼 있는가"

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 권장군 말씀이 옳습니다 "

 

함성소리가 계곡 을 뒤흔들었다 .

 

 

전란 이후 조선군이나 왜군에게서 볼수 없는 권율만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한 출진 방법이었다 ,

 

 

출진식이 끝나고 사기 왕성한 조선군이 자기 자리로 모두 배치 완료 되었다 .

 

 

 

적은 기시(己時...10시)가 되자 왜군이 이치령을 향하여 진군해오고 있었다.

왜군은 이치령 꼭대기에 꽂친 조선군 오색 깃발을 보자 이치령이 이미 조선군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고 이치령 동쪽 골짜기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

 

 

왜장은 울긋 불긋 한 갑옷과 여러가지 투구를 쓰고 창과 검을 번득이며 말에 올라타서 들고온 깃발이 온계곡을 뒤덮고 있었다.

 

 

왜군들은 조선군의 기세를 꺾기 위한 작전으로 북과 뿔 제금 , 철 제금을 뚜들겨 대고 소라 나발을 불어 대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 했다.

조용 하던 계곡이 왜군들이 북 두들기고 소라 부는 소리와 인마의 함성소리로 먼저 산 짐승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먼저 났다.

 

 

조선군 진영은 이치(梨峙) 정상에 권율이 붉은색 군복에 금빛나는 갑옷을 입고 검은색 투구를 쓰고 백마 위에 올라 앉아 적의 행동을 굽어 보고 있었다 .산림속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조선군은 권율장군의 그 늠름한 모습에 모두 자신감을 갖고 산 아래 적들을 금방이라도 집어 삼길듯한 태도로 장군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권율 옆에는 주작(朱雀), 청룡(靑龍), 백호(白虎), 등사(騰蛇), 현무(玄武) 오색기(五色旗)가 펄럭 였다.

계곡아래로부터 자욱하게 불꽃 연기를 피워놓아 조선군 주변이 선명하게 왜군 시야가 들어 오지 않았다.

왜군이 나발소리와 북소리가 나자 권율의 옆에 배치된 조선군이 일제히 북(金鼓), 징(鉦), 제금, 나발(大平簫),날나리 , 를 일제히 불어대니 조선군의 소리에 압도 되어 왜군의 북소리와 소라 나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정상에 있던 권율이 불 화살 한개를 높이 공중으로 쏘아 올리자 이에 호응 하여 약속 이나 한듯이 조선군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왜군들은 이 압도된 분위기에 저윽이 놀랐다.

 

 

지금 까지 조선군이 이렇게 일사 불란 하게 움직이는 군사들을 본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

 

왜군 앞의 조선군은 분명히 있으되 산속에 모두 배치 되어 함성 소리만 요란 했지 조선군의 얼굴이 보이지를 않았다 .

 

방금 조선군의 함성 소리를 들으니 조선군 숫자는 파악 할수 없지만 적지 않은 병력이 숲속에서 ,그것도 정면 대결 태세를 갖추고 있는것이 분명 했다 .왜군이 먼저 조선군 진지에 화살을 퍼부었다 .

 

 

이들이 조총을 쏘지 않는것은 꼭 상대가 눈앞에 나타날 목표가 나타 날때만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은 조선의 도로 사정이 나쁘므로 무거운 철 총탄 수송이 그리 쉽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정적인 때 아니면 화살을 주로 사용했다 .

 

 

빗나간 화살이 여기 저기 조선 진영에 날아들었다 조선군은 권율의 두번째 불화살과 맞추어 일제히 대항 화살을 일본군진지로 날리었다.

 

 

왜군들은 이치령위로 돌격 해들어 오기 시작 했다 .

 

 

용감한 왜장 한명이 앞장 서서 말을 타고 그 뒤로 왜군들이 새까맣게 몰려 올라오기 시작 했다. 왜장은 멋도 모르고 돌격 해오다 거마(拒馬....말의 앞을 막는 방해물)에 걸려 말이 넘어지자 왜장이 말 위에서 거꿀어 떨어 젔다. 조선병의 함성이 일제히 터지고 왜장 얼굴에 조선군 화살을 퍼부었다 ,화가 난 왜군은 숲속에 있는 조선군에게 육박전으로 달려 들기 시작 했다 .

 

 

동복 현감 황진(黃進)은 적이 벼랑위를 기어 오르는 적 을 보자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겨 활로 적을 쏘아 맞추니 적들은 목책에 걸리고 함정에 빠저 기어 나오다가 화살에 맞아 즉사 하고 만다.

 

 

왜군의 주인 잃은 전마(戰馬)가 조선군 진지로 뛰어 들어 오다가 거마에 걸려 나 둥그러지며 내지르는 소리와 비명소리 가 천지를 뒤 흔든다 . 왜군들 선발대가 쓸어지자 후속 부대가 기어 오르기 시작 했다 .

 

 

위대기는 일부 조선군을 인솔하고 적 후방 진지를 교란 시키고 , 공시억은 전면에 나서 조선군 을 직접 진두 지휘 하였다 . 싸움은 순전히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만 싸우는 임간 (林間)전이었다 . 적군 선봉이 무너지면 다음 부대가 진격 해 들어 왔다 .

 

 

 

숲과 숲속에 설치한 방수 시설(防守施設)을 예견 못한 왜군은 올라 오는대로 사살 되어 도저히 한치라도 전진 하기가 힘들고 시체만 쌓여 갔다..

황진의 화살은 정확 하여 화살 한개라도 실수가 없었다 , 그의 앞에 나타나는 적들이 계속 쓸어지자 적들이 황진 에게 조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기 시작 했다

 

 

황진은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화살을 쏘고 있을때 푸른 장식 으로 차린 제2진 왜장이 고개를 딸아 올라 오며 왜군을 질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명중 시켜 말 에서 떨어저 죽이자 이를 본 왜병 조총수 한명이 죽기를 마다 않고 조총을 들고 황진 에게 닥아와 조총 세발을 쏘자 급기야 황진이 그자리에 쓸어지고 말았다 이를 본 편장 (偏將)위대기(魏大奇)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나가 단칼에 그 조총수의 목을처 죽이었다.

 

 

왜군은 황진이 쓸어지자 사기를 얻어 시체를 밟고 권율진중 가까이까지 육박 해 들어 오기 시작 했다. 조선군 진영이 흔들렸다 , 황진이 쓸어지자 병사들의 마음이 동요 된 것이다 ,

 

병사 한명이 고함을 치었다

' 적이 황진 장군이 돌아가셨다 . 권장군도 말에서 떨어 지셨다"

 

 

하고 고함을 치고 도망치다 권율 옆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를 본 권율이 크게 북 을 치고 화살을 집중하여 황진이 쓸어진 쪽을 엄호 하게 하고 직접 황진을 업어 올리라 하였다.

 

동시에 권율의 칼이 소리 치던 병사의 목이 후려 치는가 했더니 병사가 쓰고 있던 모자 끝에 달린 장식물을 끊어 놓으며

"네 이놈 , 권율이 살아 있다 , 네가 감히 어디로 도망 하려고 하느냐 . 당장 네자리로 가지 못 할까?"

 

 

도망 치려던 병사가 목이 달아나는 줄로 알고 있다가 놀라 제자리로 황망히 복귀 했다

 

 

 

. 다른 병사들도 감히 도망할 생각은 아예 생각 조차 할수 없음을 알고 제자리에서 전력을 더하였다 ,조선군 진영이 다시 강하게 나오자 적은 주춤하다가 다시 새로운 군사들을 올려 돌진 해왔다 ,

 

조선군은 적을 녹채(鹿寨...사슴 뿔모양의 울타리 )지역과 쇠덫지역으로 유도 하여 적의 몸이 찍혀 우 왕 좌왕 하는 사이에 집중 화살을 퍼부어 모두 도망가고 죽고 하였다.

 

 

적은 계속 올라 왔으나 진척이 없이 희생이 너무 나자 공격이 약해젔다

 

 

적은 신시(申時...오후 4시)가 가까워 지자 조선군도 화살 쏘는 횟수가 완만 해젔다. 왜군은 이에 최후 돌격대를 편성 조선진 깊숙히 까지 육탄으로 뛰어 들기 시작 했다

권율이 이에 크게 노하여 대검을 빼어들고 단칼로 적장 한명을 처 죽이고 옆에 있던 조총수 두명을 단칼에 처 죽이었다.

 

 

권율은 적들의 칼날을 헤치고 다니며 독전 하니 이를 본 군사들이 한 사람도 흩어 짐이 없이 조선군 들이 용기를 얻어 1인이 왜군 수명씩을 쳐 죽이니 고함소리가 지척을 울리고 화살과 돌이 적들에 날아 드니 적은 패색이 짙어 지고 도망하는 왜군이 생기기 시작 했다.

 

 

왜군은 칼과 창, 조총을 집어 던지고 도망 하기에 바빴다.

왜군들은 갑옷 마저 집어 던지고 도망치고 적 중상자 들은 죽음이 가차웠 음을 의식 한듯 두손을 합장 하고 염불 하는자도 있었다 조선군진중의 고함 소리와 북, 징소리가 더 세차지기 시작 했다 .

 

 

적의 깃발이 급작히 진산 진지에서 금산 방향으로 움직였다

 

왜군은 부상자와 죽은 시체를 버려 둔채로 올라 오던 길로 되 돌아 도망 가기 시작했다 .

조선군이 그냥 둘리 없었다 .

조선군이 왜군을 추격 하자 왜병 들은 많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버리고 도망 치기에 바빴다

 

권율은 징을 치게 하여 조선군이 더 이상 추격 못 하게 하였다 .

 

 

왜군의 저항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전 정담군이 지키고 있던 웅치령을 넘은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 이었다 .

 

적의 주력군이 무너젔는데 하찮게 생각하던 안국사 혜경군이 전주성 외곽을 포위 하고 있다는데 대하여 권율은 어이가 없었다 .

 

 

 

권율은 군사를 모두 수습한 다음 전주성을 에워 싸고 있는 왜적을 전주성 외곽으로 부터 몰아 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

 

적이 버리고 간 전리품과 고개 길과 숲속에 쓸어저 죽은 시체들로 부터 흘러 나온 피가 흘러 풀과 바위가 핏빛으로 낭자 하고 골짜기와 산야 에는 피 비린내가 가득찼다 .

 

 

이치 고개가 조용 해젔다 .

 

새벽 묘시(卯時..오전6시)에 시작한 전투는 술시(戌時..오후8시)가 되어서야 멈춘 것이다

 

왜군 주력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금산성(錦山城) 안으로 돌아갔다.

 

한편 완산성에서 전주성 포위 작전을 하고 있던 안국사혜경은 소조천융경의 본대가 도착될 때를 학수 고대 하고 있었다.

 

 

 

" 부장님, 우리 부대 만이라도 전주성을 공격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고 왜장 부하 장수가 안국사혜경에게 건의 했다.

 

" 전주성을 공격 하려면 우선 전주성내의 적병수가 얼마가 되는지 모르므로 함부로 공격 하기 곤란하오 . 설사 본대가 오기전 공격을 한다고 가정 하더라도 성공 하면 다행 이겠지만 패하는 경우에는 소조천 융경 장군 에게 무슨 낯으로 대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

 

 

본대장 께서는 역전의 명장이 라는 것이 천하가 다 아는것 아니오 ? 필히 이치령 조선군을 격파하고 도착 될것이오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하고 안국사융경이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광이 도망간 전주성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었다. 전주성을 지키는 장수는 아무도 없고 오직 성균관 전적(典籍 종8품)으로 있다가 왜군이 한성을 점령 하자 전주로 내려온 이정사가 몇몇 군관들 과 같이 전주성을 지키라는 임무를 이광으로 부터 권한을 부여 받았다.

 

관리 들중 일부와 백성들은 전라 감사를 원망 하며 왜군이 언제 경내로 처들어 올것 인가에 대하여 망연 자실 하고 있었다.

 

이정사는 관리들과 백성을 달랜다

"감사가 성 밖으로 사라 젔다 하여 두려워 할필요는 없다. 우리는 결사의 각오로 이성을 지키지 않으면 않된다 .

비록 정담군이 웅치에서 패했지만 이치에 주둔하고 있는 권율 절제사 군부대는 예사 군사들과 다르니 틀림없이 이치령 의 승전보를 가저 올것이다. 권 절제사 군이 저놈들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흩으리지 마시오 "

 

 

왜군은 부상자와 죽은 시체를 버려 둔채로 올라 오던 길로 되 돌아 도망 가기 시작했다 .

 

 

조선군이 그냥 둘리 없었다 .

조선군이 왜군을 추격 하자 왜병 들은 많은 군수 물자와 무기를 버리고 도망 치기에 바빴다

 

권율은 징을 치게 하여 조선군이 더 이상 추격 못 하게 하였다 .

 

.

이치 고개가 조용 해젔다 .

 

새벽 묘시(卯時..오전6시)에 시작한 전투는 술시(戌時..오후8시)가 되어서야 멈춘 것이다

 

왜군 주력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금산성(錦山城) 안으로 돌아갔다.

 

 

 

한편 완산성에서 전주성 포위 작전을 하고 있던 안국사혜경은 소조천융경의 본대가 도착될 때를 학수 고대 하고 있었다.

 

" 부장님, 우리 부대 만이라도 전주성을 공격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고 왜장 부하 장수가 안국사혜경에게 건의 했다.

 

" 전주성을 공격 하려면 우선 전주성내의 적병수가 얼마가 되는지 모르므로 함부로 공격 하기 곤란하오 . 설사 본대가 오기전 공격을 한다고 가정 하더라도 성공 하면 다행 이겠지만 패하는 경우에는 소조천 융경 장군 에게 무슨 낯으로 대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

 

 

본대장 께서는 역전의 명장이 라는 것이 천하가 다 아는것 아니오 ? 필히 이치령 조선군을 격파하고 도착 될것이오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하고 안국사융경이 선뜻 응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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