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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일단 전선을 수습한다음 29 일 2 번대의 가등청정과 1번대장인 소서 행장이 충주성에 입성하여 서로 만나 한성 공략에 대한 논의를 벌렸다 .

소서행장이 먼저 입을 열어

"장군 , 수고 많았소 , 이제 조선에는 우리와 대적 할 장수가 없소 , 신립도 죽고 . 이일도 아마 죽었을 게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적의수도인 한성을 하루 속히 점령하여 조선 왕을 사로 잡아 항복을 받는것 밖에 남지 않았소 , 장군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하고 가등청정을 바라보고 의견을 묻는다.

 

가등청정은 미리 준비 하고 있었는지 작전 계획을 털어 놓는다

"1번대가 잘 싸워 줘서 그동안 승승 장구 하였습니다.

제생각으로 는 출발전 태정대신 께서도 말씀이 있었지만 , 조선의 서울인 한성부는 천혜의 요새로 북쪽에는 험한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 산성이 있습니다 ,

 

도성 남쪽에는 한강이 있어서 도강하는데 좀 애로는 있을것 같습니다. 장군 께선 우로인 여주를 경유 수심이 얕은 곳인 양근을 택하여남한강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진격해 들어 가십시요 ,

 

나는 좌로인 음성, 죽산, 양지를 거쳐 용인 방면으로 진출 뒤 딸아오는 부대와 합류 남대문쪽으로 향하겠습니다 "

"예, 좋습니다 , 하지만 조심 하십시오 , 죽주산성과 용인성, 남한산성등은 적이 그냥 내 주지 않을것입니다 , 특히 한강 도하가 좀 어려울것입니다 "

 

소서행장이 걱정 해준다 ,

"걱정 마십시요 , 이제 적장들이 다 죽었 는데 무슨 걱정 입니까? 적의 서울인 한성에서 만납시다"

조선의 서울 한성을 공격 작전은 왜장들 간에 합의가 되었다 .하지만 소서 행장은 가등청정이 조선의 관문이라 할수 있는 남대문으로 먼저 진격한다는데 대하여 내심 불쾌 하였다.

소서행장은 한성 의 관문을 먼저 당당하게 자기가 먼저  처들어가 점령을 과시 하려는 공명심 때문 이었다 .

 

그러나 한편 소서행장 으로서는 그동안 1번대가 전투를 수없이 먼저 선두를 달려 왔기 때문에 병사들이 많이 피로 해 있는점을 감안 동대문 방향으로만 일찍 들어 간다면 오히려 자기 에게 유리 하게 전개 될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이로서 일본군 9개대는 조선의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를 완전히 점령하고 각군을 요소에 분산 배치 되었다

 

그 배치상황을 보면

 

육군병력

 

1번대 소서행장(小西行長) 18,700명 충주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 22,800명 충주

3번대 흑전장정(黑田長正) 11,000명 황간

4번대 모리길성(毛利吉成) 14,000명 현풍

5번대 복도정칙(福島正則)25,100명 문경

6번대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15,700명 선산

7번대 모리휘원(毛利輝元)30,000명 성주

8번대 우희다수가(宇喜多手家)10,000명 부산진

9번대 우자수승(羽紫秀勝)11,500명 부산진

 

계 158,800명

 유군 지원 수군병력 12,000명

    

조정에는 매일 변보가 열 차례 이상 계속 들어 왔다 .

 

이일의 보고가 들어 온것도 4월27일 이었다 ,

서울의 인심이 술렁 거렸다 , 궁중 에서도 서행(西幸...임금이 난을 피하여 가는것 )할뜻을 비치기 시작 했다. 대신들은 임금이 서행하리라는것은 꿈에도생각 할수조차 없었다.

 

종친들도 혹시 종묘사직을 버리고 가는것이 나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였다 . 임금도 종친입에서 우려 목소리 라도 나올듯하면

"과인이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27일 밤늦게 까지 , 대신들은 퇴궐을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 으나 뾰죽한 수가 없었다 . 적을 막아 낼 장수가 뿐만 아니라 무기 준비도 없고 싸울 병사 들도 없다 .

 

어전 회의 결론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일단 이어 하는것이 옳다고 하는것으로 귀결되었다 ,영상 이산해가

" 이렇게만 있을수 없나이다

임금께서 이곳에 적이 들어온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시는 같은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않됩니다 ? 일단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셨다가 후일을 기함이 옳을까 합니다 "

 

임금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참이었다

왕은 서울 수비 대장을 우의정 이양원(李陽元)로 하고 이전(李餞)을 좌위대장으로,변언수(邊諺琇)를 우위대장 , 신각(申恪)을 중위 대장으로 삼았고 전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를 맡겼다

 

경기 감사 권징(權徵)에게 명하여 백성과 병사들을 징발 얕은 곳은 깊게 강을 파내어 왜군이 도강 못 하도록 준비 토록 하였다

 한성 수성대장 이양원 은 얼떨결에 수성대장은 되었으나 병조에서 뽑아온 군사는 4500명뿐이고 성을 조사 해보니 성위를 낮게 쌓아 몸을 숨겨 싸울만한 성가퀴가 3만곳뿐이고 활 가진자도 7200집으로 쏠줄도 모르는 오합지졸 들이었다. 그것도 장정들은 모두 도망가 찾기도 힘들었다.

    

4월28일 ,

왕은 어전 회의를 소집하였다 ,

대신들은 나라가 위급하니 만일에 대비 왕세자를 책정할것을 건의 하여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러 하였다 .그리고 백관들 에게는 모두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근무 하도록 지시 했다

 

4월29일 ,

저녁 믿고 있던 신립의 패보가 이일의 장계로 확 실 해지자 임금의 서행(西幸)결심은 더 확고화 되었다. 동상(東廂.....동쪽 집무실)에 나가 서행 하기로 대신들과 결의 했다 .

서행을 강력히 주장한것은 영의정 이산해 였다 .

" 우격(羽檄....급보)에 의하면 우리 조선군으로는 적과의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모든 조건이 싸울수 없는 상태 입니다. 우선 평양 까지 가셨다가 명나라의 도움을 요청 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

    

이 때 장령 권협(權俠)이 나선다

"않됩니다 . 도성을 버린다는것은 우선 종묘 사직을 버리는 것이며 백성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 결사적으로 한성을 지켜야 합니다 , 않됩니다 "

    

이를 지켜 보던 체찰사 유성룡이 타일렀 다

"권 장령의 충절은 이해 하나 만일에 하나 적장 앞에서 임금이 수모를 당하면 어쩔것인가?,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한 불부터 끄려면 서행(西幸) 밖에 없다고 대감들 께서 의견 일치를 보았으니 그리 알고 후일을 기하세"유성룡이 권협을 타이르고 난다음 말을 꺼낸다

 

"전하 께서는 떠나기 전에 왕자 들을 손수 각 도에 파견 하도록 하여 백성들 중에서 근왕병(勤王兵....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병사)를 모집토록 함이 좋을듯 하옵고 세자인 광해군만 임금님을 보호 하기 위여 동행 시킴이 가할것으로 사료 됩니다" 한다

 

 

선조는 유성룡의 의 말에 따라 하기로 하고 장남 임해군을 함경도로 김귀영, 윤탁연을 대동하여 떠나게 하고 , 셋째 순화군은 강원도로 황혁 과 이기가 대동하고, 군사모집을 호소차 양도(兩道)로 보냈다 .

 

원래 유성룡은 도 체찰사(體察使)로서 당연히 전선(戰線)을 누비고 다녀야 할 사람인데 전선에는 신립과 이일만 내 보내 놓고 자기는 전방에 직접 나가 본일이 없었다 .

 체찰사란 국가의 전란이 일어 났을때 임금을 대신하여 전선에 직접 나아가 군무(軍務)를 감독 해야 하는 직무 였다

그러나 그는 일선에는 전혀 한번도 나가지 않고 조정에 앉아서 각종 지시만 하고 있지않은가?

 

그러니 상주와 충주에서 이일(李溢) 같은 자가 올리는 서계(書啓....보고서)나 장계를 읽어보고 왕 에게 재 보고 하는것이 고작 이었다 ,

만일 일선에서 못된 장령 들이 글로 거짓 보고 해도 믿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

 

더구나 도체찰사는 대개 원수(元帥)도 겸직 토록 하는등 그 중요성은 전쟁에 있어서 왕의 명령과 똑 같은 직책 으로 그 중요성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 할만큼 중요한 직책 이었다.

체찰사 제도는 고려말 부터 조선에 걸쳐 임금 대신 군사를 통활 해 왔는데 조선에 와서는 주로 영상급 에서 임명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영상 출신 체찰사들은 병법도 잘모르면서 병법을 잘아는 장수들의 작전(作戰)에 까지 관여 하여 전략을 그르치게 하는등 종종 물의를 일으키는 폐단도 많았다

 

국왕이 일시적 몸을 피하기로 결심하자 ,왕은 도체찰사인 유성룡에게 지시한다  

 

"유 체찰사는 그동안 조정 일에 바빠 군무(軍務)에는 소흘히한감 없지 않으니 이번 한성 방어전 에서만은 한성에 남아 직접 앞장서서 적들이 서울시내 까지 못들어 오게 철저히 방어 해주시오 ,과인의 평양행은 도승지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과 같이 갈 것이니 과히 염려 말기 바라오"

 

 임금도 유성룡이 임금같이  궁궐 주위 에서만 맴도는것 보다도 도체찰사로서 .군복( 융복)을 입고 일선에 직접 싸우고 있는 순찰사들과 함꼐 생사를 같이 하기를 바랬 으나 그는 조정인 중앙 에 만 있으려 하고 일선에 나갈 생각은 전혀 않았다 

    

왕도 그동안 일선에 않 나가려는 그를 굳이 강요 하지는 않 았었다

 

임금은 사태가 급박 해지자  삼상(三相-여의정,좌의정,우의정)들 의 행동 도 심기 편치 않게 보기 시작 했다 ,

 임금이 유성룡 에게 왜적을 도성에 머물러 지키 라고 지시 하자 유성룡은 겁을 내면서 당황 하지 않을수 없었다 , 사실 유성룡은 참모 역활은 그대로 해왔지만 체찰사 명을 받고도 군사들을 지휘 할만한 기개도 없는 한낟 선비에 불과 했다.

    

그런 그,에게 패배 일로 위기에 빠진 조선 군의 체찰사로 직접 서울 방어전에 앞장서라는데 대해서는 차라리 전투에 죽으라는거와 다름없었다 , 나라를 위 해 죽는다는것은 좋으나 명분이 없는 한낟 패적지신 (敗積之臣)으로 낙인 찎혀 죽는 다는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유성룡의 인물됨을 모를리없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임금께 계청하였다

"전하 , 체찰사 유성룡 대감은 인물이 전형적인 문관에 불과 합니다 지금 까지 경상도 나 충청도로 동분 서주 해야 할 체찰사로서의 직책을 못하고 있는것은 .병법에는 능하지 못한 탓입니다 .

 집을 지을때 기둥과 석가래의 용도가 다르듯이 그분은 이번 한강 방어전에서 제외시키고 차라리 이양원 대감을 유도대장으로 명하여 수도 방어의 총책임을 지우는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왕도 도승지 말에 수긍 안되는바 아니나 군사 얘기만나오면 태평성대만을 주장해온 3정승들의 행동이 내심 괬심하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직접 경험 해보라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체찰사를 임명 했고 , 한성 수성대장을 임명 한것도 그런 임금의 속셈이 있었다

 

왕은 도승지 말대로 이양원에게 수성대장을 유도 대장으로 승진 시켜 수도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

 선조가 서행을 결정 하자 궁궐내 가 어수선 하였다 밤이 깊자 이일의 장계가 또올라왔다 ,

"금명간 , 적이 반드시 도성에 쳐들어 올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왕은 걱정되지않을수 없었다

 

 

4월30일은 서울 장안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젔다

새벽에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과 인마들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

 임금과 동궁은 융복(군복)을 갈아 입고 말을 나섰고 중전등은 덮게 있는 교자를 탔다.궁인들은 통곡을 하며 뒤를 딸았고 또 그뒤를 종친과 문무관을 합쳐 100여명이 그 뒤를 딸았다.

 

 

 

왕은 먼저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板)을 떼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임금 일행이 인화문을 나서 경복궁을 나와 서대문쪽으로 지나가고 있을때 많은 백성들의 곡성이 여기 저기서 터저 나왔다.

하늘도 안타까운지 비가 그치지 않고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그칠 줄 몰랐다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신하들을 이끌고 서울을 버리고 왜군을 피해 할수 없이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고 있는것이다.

비가 처량 하게 캄캄 한밤을 하염 없이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달이 없는 비오는 날의 밤은 한치의 앞도 내다 볼수 없었다. 오직 도승지 이항복만은 꺼질세라 비를 피해 촛불을 들고 가는 길을 인도 했다 ,

 

임금의 피난 행열이 돈의문을 나서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뒤 따랐다 .우의정 이양원은 유성룡이 체찰사직을 못함에 따라 서울 사수 의 방어 사령관으로 대신들중에는 홀로 한성에 남게 되었다 .

 

좌찬성 최황, 우찬성 정탁, 좌 참찬 최 흥원 , 이조 판서 이원익 , 호조 판서 한준, 병조 판서 김응남, 형조 판서 이증, 대사헌 이헌국, 도승지 이항복, 좌승지 이충원 , 우승지 이정향, 좌부승지 노직등 100여명이 임금의 뒤를 따라 호종(扈從....임금의 뒤를딸아 쫓아가며 모시는것)하였다.

 

 

임금이 사현(沙峴)에 이르러 말을 잠간 세우고 한성 쪽을 바라 보니 궁성쪽에 불 이났는지 하늘이 벌겋다 , 남산밑 대창 근방에는 불기둥이 솟는다 . 일부 백성들이 텅빈 왕궁에 뛰어 들어 도둑질하려는 자들의 행위가 분명하였다

왕이 묻는다

"웬 불이냐?"

도체찰사  유성룡이  대답한다

" 불이 난것이 아니고 원래  이곳에서 한성쪽을 보면 항상  훤하게 보입니다 ,도성에  백성들이  켜놓은 불 때문일것입니다."

 

" 적들이 한성 가까이  닥아오고 있는데 백성들은 어찌 되는고..차라리 죽으나 사나  궁궐에서 왜적들과 싸우다 죽을 것을 그랬구나 "

" 전하  임금은  그나라의 상징입니다 .전하가  적의 포로가 되는 날에는  우리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이  고구려 도성인  평양에서  당나라  까지   5000여리를  끌려 가면서  가진 고통을 당하고  당나라  소제 묘에가서 무릎을 꿇고 나오지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아닌 사죄 까지 했습니다

 

만일  일본군의 포로가 되신다면  당나라 군사 보다도 더 포학한  왜놈들이  전하를 그냥 두겠으며 임금이 없는  조선 백성들은 그냥 두겠습니까?  비록  몸을 피하시지만  피하지  않다가  적의포로가되는 것 보다  피하였다가  적을 물리 치는 것이  나라와 우리백성들을 지키는 현명한  생각이신 줄로 아룁니다"

 

왕과  유성룡이 이런말을 하고있을 때  좌찬성  최황이  끼어든다

 

"전하 저 불은  누군가가  궁궐에 지른 불일지도 모릅니다 .신이  어저께 밤에 거리에  누군가가 써붙인  대자보 글을 보았는데  불만이가득찬 글이었습니다 "
" 무슨 글이더냐?"
" 도망치려고 준비한 짚신은 궁궐에서 왜놈들을 막기 위한 도구라고 누가 믿을 것이며

 조정 신하라는 자들은 군사상 급한 격문이왔다갔 다 하는데도

  전하의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더냐? 

 아 , 이 나라가 이 지경이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군신 상하가 이나라 사직을 위하여  같이 죽기 살기로 도성을 지킬생각을 않고  무엇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위에서 임금을 호종하던 대신들은 최황의 충언에 모두 몸둘것을 모른다

 

이때 이조 판서로있다가  물러 난 기성부원군 유홍이 나선다

 

"좌찬성 ,자네  말조심 하게 .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 궁궐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자네 가족들은  지금 도성 안에 있는가 아니면 시골에있는가  대답 해 보게  지금 자네 가족들을  미리 피난 시켜 놓은 주제에  누가 누구를 보고  도성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고  허무 맹랑한 소리를 하나?"

".........."

 

사실 최황은 자기가족들을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보고가 있자마자  미리  시골에 자기 가족을 피난 시켜 놓은 것을 유홍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최황도 만만치않았다

" 송당 ,자네가 무엇인가?  그러면  좋다 .자네 가족은  도성안에 있나 없나  대답해 보게 "


" 내가족도  피난 내 보낸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자네는 서울 도성쪽에 불빛을  마치 우리 백성들이 불을 지른 것 같이   이상하게 해석하니 하는 말일세"

 

암금은  두사람이 말싸움을  가만히 듣더니

 

" 모두들  듣기 싫다 . 오죽하면  모두들 피난들 시켰겠나 .하지만  경들은  나쁜사람들이다 .내 가족만  중요하고  도성안의 많은 우리 백성들의 안전은  남의 일이드냐 . 과인의 지금 처지나 두사람 다 똑같다 ."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을 두고  선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논란 거리다 


 선조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는 1592년 4월 30일자 기록이 있다.

 이와 달리 처음 만든 선조실록(宣祖 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이 황급하게 궁궐을 비우는 마람에  궁궐 나인들의 실화로 불이 난것으로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선조 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은 인조~효종 때  기존 선조 실록을 수정하여 보완 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이며, 모두 42권 8책이다.

 

 

 이와 달리 선조실록(宣祖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만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라고 적혀 있었다 "

 

이기록을 보면 왜군이 들어 오기 전에는 궁궐이 잘 보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을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피난가기도 바쁜데 백성들이 제나라  궁궐에 들어가 불까지 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익 때문이다

 

 

당시 경복궁 화재 사건을  선조 실록에서는   단순히 화재가 있었다고 기재 되어있던 것을  당시 상황을 마치 자기 눈으로 본것이나 처럼 백성들을 도둑놈으로 몰아서  궁궐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내고 불까지  질렀다고 기록하고있다,

특히 대북파 영수인  홍여순을 거론하면서  홍여순이  병조 판서로있으면서 부정 축재를 했는데  백성들이 몰려가서  불까지 질렀다고  강조 하고있다

정말 그랬을 까?

수정실록을 쓴 인물들은 인조시대 사람이니 선조시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작자들이다 

마치 눈으로 본것처럼 거짓말을 쓰고있는 것이다 

셍각해보자 

당시 왜군들은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군 해 오는 동안 닥치는 대로  조선사 람들만 보면 무차별  학살을 했다  

200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착하기만 조선 백성들은 잔인 무도한 일본놈들의  칼날이 무서워  저항에 앞서 일단 몸을 피할수 밖에 없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재물에 욕심이 없기 마련이다

한성  백성들이 가족을 살리고 보아야지  언제 재물을 챙기겠다고  궁궐 까지  들어가  도둑질 했겠는가?

여기서  왜군이  점령한 직후의  한양의 모습을 기록한  소서행장의 부하 였던 오오제키(大關 定祐)의  눈으로 직접 본 체험담을 들어보자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이 성안에 모습을 보니 쥐새끼 한명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은 텅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서야  전각을 자세히보니 대궐은  구름위에 솟아있는 것 같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었으며  그 아름다운 모습은  소문대로 중국 진시황제가 있던  궁궐이  생각나게 하였다 .

문과 기둥은  그 육중한 모습과  처마와 처마의 이음매는 왕과 같은 호랑이의 기개를  닮아 보였다

왕좌를 보니  금빛찬란한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에 오르며 구름속에서  노래 하는 것 같았다

그많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단청을 했을 것이니  어찌 감탄이나오지 않으랴

방마다 문이 모두 문이 열린 채 궁문을  지키는자가 없는 것을 보니  참으로    처량맞게 보인다

그토록 용맹하던  소서행장도 왕좌의 위엄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소서행장의  눈을 잠간 훔쳐서 보았는데  정말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고니시가  빈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자리가  신성하고 고아한  자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떠 올랐는지 두눈에 눈물이 매치는 것 같이보였다

옆에 있던 유마, 오오무라 ,소,를  흘깃 보니그들의 눈에도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大關定祐...오제키의  조선 정벌기에서)

 

 

6.25 사변 때도  중앙청에 불을 지르고 도망 갔던 것은  서울 시민이 아니었고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에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갔던 사실만 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선조 수정 실록의  기록이다

 

석교(石橋)에 이르니 날이 새면서 멈쳤던 비가 다시 억수 같이 쏟아 진다,

왕이 입고 있는 군복이 또다시 내리는 비로 흠뻑 적셔들기 시작 했다

누구하나 임금의 비를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올 겨를이 없이 황망중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기 감사 권징이 자기가 입고 있던 군관용 우의를 벗어 임금에게 닥아가 왕을 덮어 드렸다.

벽제역에 도달 하니 , 비가 아까 보다 더 내려 친다,

    

날이 다시 저물기 시작 했다.

어가가 어느덧 임진강이 까워지었다

임금이 느닷  없이 묻는다

 

" 여기가 파주 아니냐?"

" 예 그렇사옵니다 "
병조 좌랑 이홍로가  대답한다

 

" 그러면 우계 성혼의 집이이곳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
임금이 성혼의 집을 찾자 이홍로가  파주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임금이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한다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성혼은 이때 율곡이이가 죽기전에는  그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이이의 천거로  벼슬길이 여러번 있었는데도  학문에 전념할 뜻으로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고로 의정부 좌찬성을 한때는 했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서인이지만  동서인의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난때 최영경과  정개청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동인들로 부터 두사람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낙향하여 파주에 머물고있었던 것이다

 

임금  선조가  그를 끔찍히 아낀 사람이었는데  임금이 이곳을 지난다는데도  나타나지않는 것이  섭섭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성혼이 그때 집에서 죄를 받고 있던 터라 감히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윗분의 부르심이없이 나가 뵙는 것이 오히려 불충이아닐가  하여 근신하고있었던 것이다

 

병조좌랑  이홍로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대가가  앞으로나갈수록  힘이들고 도망하는자가 속출하자 불평이 나오기시작했다

 

 

임진강에 도달하니 빗줄기가 더 굵어 지면서 강을 건늘 방법이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강물조차 눈에 들어 오지 않고 내리는 찬비가 뺨을 때린다

임진강이  임금의 행열을 가로막는다   

모두들 시커먼 강 물만 내려다 보고 있지 누가 나서서 임금이 건너갈 배를 대령할 사람이 없었다 ,

    

이항복이 행열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조그마한 정자옆에 목재가 널려 있는것을 발견 했다

"모두들 이 목재를 한개씩 집어 들고 강가에 쌓도록 하시오" .

대신들 할것 없이 모두 재목을 이항복이 시키는 대로 한곳에 모으게 한다음 다음 불을 붙이니 칠흑 같은 밤이 훤하게 밝아 지며 각자의 모습이 들어 나고 비에 젖은 군복이 열을 받아 김이 모락 모락 난다,

 

불빛은 강 양쪽을 환히 비추기 시작 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인근 동네를 수소문해서 배 여섯척과 어부 여섯명 을 찾아 데려 왔다 .

먼저 임금과 왕비 세자, 왕자, 중신들을 따로 태웠다.

 

불빛에 보니 임금의 용안에 눈물이 흘러 내린다,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배는 물살을 가르고 삐그덕 삐그덕 임진강 저쪽을 향하여 나갔다

나머지 다섯척도 닥치는대로 빨리 오르라 하니 서로 먼저 타려고 상하 구별 없이 아우성 이다 .

 

왜적 이 나라를 침공 하자 나라 의 체면 조차 무너지는 순간 이었다.

그래도 배에 탄사람은 다행이었다 ,

배가 부족해 반수 이상은 강을 건느지 못하고 발을 동동구를수 밖에 없었다.

강을 건느자 지금 까지 가마(轎)를타고 피난왔던 숙의(淑儀)이하 여인들도 가마를 실어 오지 않은 탓에 왕비만 빼고 말에 모두 올라 타고 쫓아가게 하였다

 

 5월1일  

 

동파관에 이르렀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 도성에  이미  왜적들이  입경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 평양 까지가려면  아직도 요원한데   임진강을 막을 병력이없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적들에게 잡히겠습니다 "


경기감사 권징이 아뢴다

" 보고에 의하면  적들이 전하를 체포하라는  풍신 수길의  특명이  내려젔다는 정보입니다 '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 오기전에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동안  적의 도강을 지연을 시키려면  병력이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오니  대가 (임금이탄가마)를  싫고 온 배가  아무래도  적의 수송선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사오니   아깝지만 배를 소각 시키고  사공들은  대피시킴이 옳을 가 하옵니다 "


" 안된다 . 과인과 시종 대간들을  이렇게 안전히  건네준  사공들의 귀한 배를  소각 시키다니 말이 되는가? "

" 전하  시간이 급하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옵소서"
" 안된다 . 그냥 이대로  빨리가자"
" 전하 . 도저히 불가 합니다 . "

경기감사의  간절한  다그침에  왕도  더이상 벋힐수 없었다

 

" 그러면  사공을 설득하여 잘 이해 시키도록 하고  전쟁이 끝나면 응분의 보상을 해주도록 약속하라 . 그리고   사공들이  혹시 적들에게는 적들이  들어오면  이용 당할 우려가 있으니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

" 전하  또 한가지있습니다 "
" 또 무엇인고?"


"  왜적들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학살한것으로 보아 임진강변의 민가가 적들이 들어오면  적에게 빼앗기는 동시에  전하의 어가를  배로 도선 하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모두 살해 당할 염려가있습니다  .들리는바에 위하면  왜적들은  민가에 무차별로 불을 지르고  여자들은 강간을 일삼는다합니다 "

 

 

"임진강  나루 백성들에게 모두 피하게 하고  민가는 백성들의 동의를 받아 소각시키되   백성들에게는  큰 재산이니  후일 임금이 책임지고  보상 할것이니  소각에 동참하도록  하게 하라" 

 

다시 날이 어두 웠는데 밤 10시가 되어도 임금에게 수라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

도승지가 내궁들 보고 먹을 것을 갖다 드리라 하나 준비 해 온것이 없어 밥을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

 

 

이때 마침 ,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음식을 준비 해와 비로서 허기진 배를 풀칠은 했다 ,

배를 충분히 채우지도 못하고 백관들은 근방 촌가에 흩어저 잠을 청하였다

 

선조는 잠이오지 않았다

도성을 잃어 버린것도  그랬지만 어가를  안전하게 옮겨준  사공들의  집과 배를  모두 소각시키라고 한 명령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임금일행은 동파관을 떠나 연안 적소(延安 謫所.....윤두수가 귀양가있던 장소)에 도착 하니 임금이 무슨 생각인지 서인으로서  죄를 짓고 연안에 은거 하고 있는 윤두수(尹斗壽)를 찾는다.

윤두수를 부른다는  어명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잔뜩 긴장 한다

윤두수는  서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성룡이긴장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윤두수가 임금에게 나오자

 "경을 특별히 방면 하여 오라 한것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여 경의 지모를 국가를 위하여 발휘케 함이니 과인의 뜻을 저바리지 마오 "

하고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씀 하고 왕이 친히 차고있던 청직낭 (靑織囊..푸른색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정(精)표로 별로 줄것이 없구먼 ......"

하면서 내준다

 

윤두수가 감격 하여 몸 둘바를 모르며 임금의 방을 나왔다

선조는 윤두수를 잘안다

윤두수는 명석한 머리와 추진력이 있다 ,

더구나 그는 중국어에 능하였고 학문을 많이한 준재였으며 시국관도 뚜렸했다

그런 그를 시기 하는것은 지금 조정의 실세 행세를 하고있는 동인(東人)출신의 이산해와 유성룡등 일파의 농간으로 아까운 준재를 썪히고 있었던 것이다,

 

또 임금은 이들 동인들 이 호종 하고 있는 대신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이 동파관에서 웬 젊은이가 지나감 으로

"거기 가는 선비는 누군고"

하고 물었다.

 

"신은 좌찬성 최황(崔滉)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입니다"

임금은

"오 , 그대가 , 공신(功臣)의 아들이구먼 , 자네는 마땅히 의(義)로서 나와 같이 할지니라,"

하면서 자색 혁대를 풀어 주시면서

 

"이것을 허리에 차고 항상 과인을 잊지 말라"

하고 그윽히 최유원의 얼굴을 처다 본다

"황공 하오이다 , 죽음으로서 전하를모시겠나이다"

하였다 .

 

왕은   앞서 좌찬성  최황의 가족들을 미리 대피 시켜 놓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괏심  하게 생각했었지만 임금자신도   사실상  피난하고있는 입장인지라  입을 다물고있다가  최황의 아들까지 나서서 임금을 호종하고있는 사실을  알고  최황에대한 오해를 그제서야  풀었다

 

왕은 외로웠다.

왕은 지금 까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대신들에 대하여 가만히 피난중에도 대신들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자기 파 사람들 끼리 끼리 행동하는것이 눈에 띄므로 이것을 바라 보는 왕은 못 마땅 하였다. 

특히 영상들은 이제는 노회(老獪)한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지금 전방에서는 젊은 조선의 장병들이 피를 흘려 왜적과 싸우고 있는데도 자기 한 목슴 부지 하려는 자들이 임금을 모신다는 핑게로 굳이 평양 까지 딸아나서는 저의를 알수 없었다.

 

 왕은 패기 있고 참신한 젊은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 더구나 왕은 피난중에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마음을 나눌 인물이 없었다 . 모두 노회한 화술로 왕의 의도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

 

 

 

대가(大駕)가 개성으로 향하기에 앞서 점심때가 되었다 , 임금께서 식사를해야 할텐데 도승지 이항복이 임시로 솟을걸어 놓고 식사 준비하는 장소로 가보니 식사를 만들 취사병이 보이지 않는다 .

 

 

병조 판서 김응남이 이리 저리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장단 부사 구효연(具孝淵)을 찾았으나 그도 보이지 않는다.조금후 이항복이 간신히 식사 준비를 해왔다, 왕과 왕비만 반찬을 약간 준비 되었고 동궁(세자)은 그나마 반찬도 없었다.

 

경기 감사 권징을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 보니 권징이 잠에 녹아 떨어저 있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깊은잠 에서 깨어 나지 않고 있었다. 200년의 조선 왕조 개국 이래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력앞에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윤리 조차 땅에 떨어 지는 순간이었다

 

 임금은 중추부사 이기(李旣)를 시켜 임진강가에 임금과 신하들이 타고온 배가 어찌 되었는가 물었다

"잘모르고 있아옵니다. 왜적이 이용 할까 봐 강남쪽으로 못가게는 해놓고 왔습니다""

한다.

 

"쯪쯪 , 영상들은 무얼 하는고 .....,즉시 군사 몇몇을 보내 타고 건너온 배를 모두 강속으로 침몰 시키도록 하고 임진강 남쪽 민가에 백성들은 일단 왜적 처들어 오면 모두 그들로 부터  희생  될 가능성이 있으니 잘 설득 하여 산속에 피신 하였다가 과인이 다시 적을 물리 치고 환도 할때 되돌아 오도록 하되  추후 난리가 끝나면   침몰시킨 배와  소각된 자옥들은 나라에서 보상 한다  했거늘....,

 

 다시한번  백성들레게  이해를 시키라 .  전쟁이 끝나면 민가를 나라에서 다시 지어 주곘다고 하되 불을 지르는  이유는   왜군들이 민가의 집을 헐어 뗏목으로 재활용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일러라 "

하고 지시 한다.

 

5월1일

 

, 왕은 동파관에서 대신들을 불러

" 어디로 가야 할꼬?"

하고 물었다

모두 엎드려 몸둘바를 모르고 말을 않고 있다 . 이때 도승지가 나서서 아뢴다

"우리 조선군 으로 서는 왜적을 막아낼 여력이 지금 없아 옵나이다,

 

신이 듣기 에는 지금 가등청정군이 한강 남쪽에서 도성으로 들어 오지를 못히고 도강 준비에 몰두 하고 있는바 , 이들은 북쪽 오랑캐와는 달라 섬나라 출신들로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도강은 시간 문제 입니다 ,

 

그리고 소서행장군은 여주 얕은곳을 이용 양평을 거처 이미 한성으로 진격해 들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 그나마 병력 배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파죽지세로 처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럼 , 유도 대장 김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고?"

임금이 다시 도승지 이항복에게 묻는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1000명은  한강에서 적의 도하를 막기위해 제천정(濟川亭...지금의 용산구 보광동)에 사령부를 차려 놓고 있는데 왜적의 조총탄이 빗발치듯이 정자위로 떨어저 군사들이 많이 도망치고 전의(戰意)를 잃고 어쩔줄 모르고 있다 하옵니다 "

"아, 어찌 하면 좋을 꼬? .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주위에서 반응이 없자

"왜들 말이없는가?"
하고 역정을 낸다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 처럼 말이  없다 "

" 우부승지  신섭"
"예. 경은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라 "

 

피난길에 바쁜데 돌아 가라니 기가 막힌다

자기귀를 의심하고  무엄하게 다시 묻는다

" 전하 , 어찌하라 하옵신지?"

" 한성으로 다시 돌아가란 말이다 "

 

" 도성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라 하옵신지?"

" 유도대장 이양원과  상의하여  왜적과 전투가 심해지면  백성들이 희생자가 속출 할것이니 안전하게 북한산이나  고양땅으로 피신하게 도성백성들과  군관들을  위유(慰諭)하라 "


우부승지  신섭은 겁이더럭났으나  왕명인지라

" 수행 하겠나이다"

하고  물러난다 

 

" 병좌좌랑  이홍로 "
부복 하고있던  이홍로가  소스라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감히 임금을 올려다본다

" 왜 놀라는가?"
" 황공하오나 왜적이 한강가에 벌써 도달했다 하옵는데..."

 

" 그러니까  백성들을  안전한곳으로  피난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오. 유도대장과  도원수가 한강선을 지키고 있는데 백성들을 위유하라는  내명령이  거북한가?"

"황송 하옵니다 "

 

병조좌랑은 병조판서 바로 밑에 참판, 참의  다음 벼슬이다

병조좌랑은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도성이나 대궐의 순라군이 자기편의 식별이나 비밀의 보장을 위하여 쓰던 암호나 신호인 군호를 관장하였으며  임금에게 드나드는 장졸들의 이름을 기록해서 승정원에 보고하는 일을 맡고있었다

왕은 대궐을 떠나  있는 마당에  병조 좌랑이 할일없이 동파관 주위를  맴돌지 말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유나 하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듣고만있던 도승지 이항복이 두사람이 왕의 방을 나가자 들어와  아뢴다

 

"잠시 의주(義州....지금의 신의주)로 가 계시 댜가  8로가  모두  적수중에 들어 간다면 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서 도움을 요청 하겠습니다 ."

이항복의 말이  끝나자 좌의정 유성룡이 말한다 

 

"  대가(임금의 가마)가  국경을 건느시겠다는얘기요?  아니면 도승지가  명나라로 찾아가서 명나라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요?  만일 전하가 이 나라를 벗어나는 날에는  조선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 좌상께서는  저의 뜻을 잘 이해 못하시는 군요 왜군이 물러 갈때 까지  명나라에 의지 하자는 얘기 입니다 " 

 

두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  말한다

 

" 과인도 명나라에  의지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은 하고 있었소  "

 

 윤두수가  아뢴다 

" 좌상  , 대가가 국경을 넘느냐  않느냐가  왜 나옵니까? 전하도  명나라에 의지 하신다고 했지... 국경을  넘는다고 했습니까?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나라를 버린다는 얘기인데 옛부터  나라를 버리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전하 ,

경기도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사와 말은 아직 정예하고 강하며 함경도의  함흥과  경성은 험하기로 소문난곳으로 믿을만 곳입니다 더욱이  왜적들은  전선이 길어지면서 보급로가 끊기어  사기가 저하 되어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이 고개나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

 

좌의정 윤두수의 말에 좌중이 조용 해지고 침묵이 흐른다 , 모두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평양도 지키기 어려운가?"

하고 임금이 묻는다.

"..............."

암금의 말에 대답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임금의 어가가  동파관에서  다시 출발하여 개성으로 향하고있는데 주위에  호종하던 졸병들이 도망치거나  흩어저서  호위하는자들 조차  얼마 안되었다

 

이때, 서흥부사 남이가 병사  300명과 말60필을 가지고 왔으며 황해감사 조인득이 장막을 쳐 놓고 소현리에서  임금을 기다리고있었다 .

임금 일행은 그곳에서 잠간 머물고 판문점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판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풍덕군수 이수형이 대대적으로 음식을 마련해놓고 기다리고있는 바람에  호종하는  모든 문무관들이 배불리 음식을 먹을수있었다

풍덕군수가 군량미와 말먹이와 쌀 다섯석 까지 받치니  이를  호종하는 졸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개성에 도착하여 남문 밖 공서(公署)에  여장을 풀었다

 

5월2일  다음날이었다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라가 공서를 물린다  

"전하가 제신들을  불러  입시 하라하신다"

별안간 여기 저기서  병조 정량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나와 기웃거린다 

 

이때 헌납 이정신이  왕에게 입시하려고 나서자  한성 판윤 홍여순이  그의 옷을  뒤로 잡고말한다

"  이봐 자네  어딜 가려고 해? "

" 병조 정랑이  지금 소리 치는 소리 안들리나?


" 허허 , 도승지가 아니고 병조정랑이  어명을  하달 하는 것이 수상하이....."
" 그러니까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것 아니야?."

" 허허, 아까 좌의정과 우의정이 입시 했는데 영상  이산해의 잘잘못을 가리고있다네"

 

대간들이  황망중에 입시한다

 

왕에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개성부사의  방이었다  

영의정만 빼고  대신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사전에 미리 무슨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 그래 누가  먼저 말해 보라 "

임금의 목소리가 커진다

 

임금의 말이 끋나기가 무섭게 3사의 모든  관원들이  약속이나 한듯이입을 모아 얘기 한다

 

" 전하 ,영상 이산해는  전하께서 서울 왕궁을 떠날 때 한나라의 영상이라는 자가  임금께서  궁을 떠나시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빨리 피난 하시게 만든  아첨배입니다.

 전하가 서울에 계시게 하지 못하고 이토록 고생 시켜 드리는 것은 모두 이자의 농간 때문 입니다 청하 옵건대  왕법을 바로 세워 주소서"

왕이 노기 어린 소리로말을 받는다

"지금  피난들 가는 길에  왜들 이러는가? 영상 뿐만이니고 좌상과 좌 찬성 도 과인이  왜적에게 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유 때문에 몸을 잡시 피하라 한것인데  왜 유독히  영의정만 가지고들 그러는가?"

 

이에  사헌부 장령 황붕이 나선다

"전하 그당시로서는 영의정 말이옳습니다 ,그 당시 위 급함으로 보아 서 누가 도성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아니 할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랬다

임금에게  영상 이상해를  파면시키게 하려고  만든 좌석을  사헌부 장령 황붕이  깨뜨려버리자 .병조 정랑  구성이  황붕의옷자락을 밖으로 끌고 나와서 협박한다

 

"자네는  영상 이산해가  무엇을 잘 했다고  두둔하는가?  자네가 영상의 조카라고  해서 그러는가?"

황붕이 가만 있지 않는다

"그래  지금 어느때인데 병조 정랑이라는 자가  이따위 짓을 하는가? 임금이  왜놈들에게 잡혀서 왜국으로 끌려가면 이나라 백성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이나라를 지킨다는 말인가?"

 

"잔소리 말고 있어...네놈 같은놈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이꼴이야 여봐라  이자를 다시 입시못하게 하라"

병조 정랑 구성이 병졸에게 지시하자  황붕의 앞을 가고 막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병조 정랑과  그 동조자들은  왕에게  또 다그친다

" 전하 이때 까지  영상을  이산해 같은 자에게 맡겨 왔었기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이 아니옵나이까?  지금 까지  영상의 하는 짓을 대간에서  못 마땅해 하였으나  전하의 판단을 흐리게 한 이산해는 영상의 자리를 그만 두게 하여야 합니다."

" 경들은 내가 마치내 한몸 살기위해  도성을 버린 것 같이 생각하는데  종묘사직을 버리고 내가 오죽하면 몸을 임시로 파하여  후일을 기하고저 한것 뿐인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가? 정 그렇다면다시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갰다 "


이 광경을보고있던  유성룡이  관을 벗더니 엎드려부복  한다 .

"전하 신이 바라옵건대 이산해와 더불어 나라를 잘못 오도한 죄를 받고자 하나이다 "
한다.

 

좌찬성 최황도부복한다

" 전하 ,적이 들끓고있는  도성으로 돌아가신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신도  영의정 이산해와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옵니다만 신은 전하께 잠간  딴곳으로 피하시와 후일을 도모 코자  하였사온것이옵니다 "
왕이 노기어린 말로  최황에게 묻는다

" 그러면  경의  의견은  영의정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


" 신은  도성 근방으로 잠시 피하셨다가  북 3도  병력이 보충되는대로  왜적을 몰아내자는 말씀입니다 "

이말에 병조 판서  김응남이 아뢴다

" 말도 안되는 소리 . 지금 상황은 이나라 메마른 땅에 태풍이 불어와서 거대한 뚝이 붕괴되어  임시 피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거늘  전하께  모든것을 뒤집어 씌워 그 물길속을 뛰어 들라는 얘기인가? 신의생각으로는  평양까지  임시로 피하셨다가   북 3도 군사력으로 막지못한다면 명나라에  주청하여  원군과 같이  적을 몰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지금 대간들과  일부  신하들이  도성을  포기하자고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영상이  책임이 크다 하나  그자리에 있던  좌상이나 신의 책임이 크니  좌상과 신의 오국 지죄(誤國之罪)로  처벌 받겠습니다 " 

 

이에 왕이 소리가 높혀말한다

" 나라가  위급 한 이때도  내가 가만히 보니  동인서인 찾아 패당만 일삼는구나 .정 그렇다면  경들이 원하는  영의정만을 인시교대 하겠다 . "


대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전하  인사교대라니요 , 오국지죄로  단죄하시옵소서"

" 가만히보니 전쟁중이라  참고 있었는데  대간들 해도 너무 하는군 . 나는  그동안  경들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여  정치를 해 왔건만  지금 같이  왕이 왕 대우를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 차라리  임해나 광해에게  왕자리를 내 줄터이니 잘들 해보라"
왕의  심기가 극도로  악화되어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내 놓겠다는  말 까지나온다


이렇게되자  좌의정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진정 하시옵소서 나라가 위급한 이때  무슨 말씀이옵니까?  전하의  의견대로  인사교대로 마무리지옵소서"

".............."

임금의 자리 까지 내어놓겠다는 왕의결연한 말에  모두 함구 한다

 

왕이 그제서야 인사교대를 다음과같이 분부 한다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하고 좌의정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보한다 .우의정  최흥원을 좌의정으로 보하되 어영대장 윤두수를  우의정으로 보한다 "

 

 인사 발령후 임금은 골치아픈 머리를 쉬려고 개성 남대문을 올라 남쪽 도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는다

왕은 개성  남대문 근방에나와있던 노인들과 경비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 북 3도병력이  속속  도착하고있으니  개성 군민들은  안심하시가바랍니다 . "
하고  위유 한다

 

이때 한노인이묻는다

" 전하 ,듣자니  조정은 동서인으로   파당을 지어  싸움질만 하는 바람에  이지경이 되었다 하온데 이런 때일수록 능력있는 정철  정승이라도 불러들이셔서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 노인장  참고하겠습니다 "
노인이  더 할말이 있다는 듯이 왕에게 말을 꺼낸다

 

"한가지 더말씀 올릴것이있습니다 "
"말씀 해보시오"
" 세사람이목을 베십시요"
" 세사람이라니?"
" 이산해 , 김공량, 임해군입니다 "


" 무슨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오"

" 이산해는 영상으로서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죄요 , 김공량은  내유별좌(內儒別坐)로서 궁궐을  잘 지키라고

명을 받고서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죄요 , 임해군은  무뢰배들과 망나니짓을 하여 종실을  더럽힌 죄입니다 "
"참고하겠소  "

 

동인 , 서인 하면서 자기들 당파의  세력만을  키워온  대신들이괘심 하기는 했으나  인재가  인재다운자라고는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은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

 

조정을 동인들이 장악한 이래 벌어진 임진난이야 말로  왕에게는  큰 부담이아닐수 없었다 

왕은  서인인 윤두수를 다시발탁  우의정으로 삼았으나  아직도 조정은  동성인간의  반대를위한 반대로 얼룩저있었다 

 

왕은  노인의  말을 존중하여 강계에서 위리안치죄를 받고 은거중이던 정철을 불러들인다

 

서인의 대표격인 정절의  등장과함께 개성부에서 세로운 무당파 인재로 한대용, 한박, 조욱, 한수,임대창, 전세룡,장호신등을 불러들인다

무당파  개성 인재를  대거 등용한것은 동서인들의  당파성을  배제 하기 위한  선조의고육지책이었다

 

조정이 서인출신 정철을  조정에 불러들이자  금방  바람이 일기시작했다

 

즉  피난조정은  다음날 또 시끄러워진것이다

이때  서인인 우부승지 신섭이  서인의두목인 정철이살아 돌아오자 동인 두목인 유성룡에게  공격을 가한다

" 일국의  국상이  오국의 죄(誤國의 罪 -나라에대하여 잘못한죄)로 탄핵을 당했는데 좌상이라고  어찌하여 그 죄를 면할수가있겠습니까? "

하고 들고 일어 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간원, 사헌부 양사가 벌떼 같이  일어나 졸지에  이산해 영의정이  탄핵 되면서 좌의정으로 있다가  별안간 영의정이 된 유성룡을 다시 탄핵한다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이

"  이산해 영의정이 물러 나면 됐지..... 좌의정으로 얐다가  영의정이 된 분에게 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무엇이오?  조선왕국을  아주 식물 왕국으로 만들 속셈이오?"


하고 반박한다

역시 무당파인 부제학 홍린상이 거든다

" 이런 비상 시국에  유성룡 영상 같은 인물이 흔하지 않거늘  해도 너무들 하오. 더구나 임명된지 하루 밖에 안되었는데 ...."

 

임금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임금 노릇하기  힘들구나 ...지금 왜적이  코앞에닥아 왔는데 )

왕도  일본 특사로 다녀왔던  동인  김성일이  별일이 없을것이라는  왜국 사정을 보고받은 이래 동인에대한 불신이  마음속에 싻트고 있는 것만은  부인 할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파  개성 인재들을 대거  등용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통치않았다

 

 임금은 동인과 서인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더욱 솟구쳤다

동인들이나  서인들이 아무리  아전인수 격으로  서로 가 서로를  비방해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로 작정을 한것이다 

임금은  다시바꿔서 분부 하였으니 유성룔이  영의정으로 임명된지 하루만이었다  

 

영의정  유성룡  파직

좌의정  최흫훤  영의정

우의정  윤두수  좌의정

기성부원군 유홍 우의정

 

이렇게 내우 외환에 시달리는  왕에게  기쁜 소식이 들어왔으니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온것이다.

 

" 명나라 신종 황제께서   왜놈들에대한 소식을 물으시기에 왜군이  도성 가까이  까지 처들어왔다고말씀 드렸더니 신종 황제께서는  왜적에 대한 정보를  수시로파악하되  군관들로 하여금 적을 막기에는 편리하고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게 지세(地勢)가 험(險)한곳을 막도록  독려 하여  적을 막으라고만했습니다 "

" 증원군을 보내준다는 말은 없었던고?"


" 없었습니다 "

좌의정 윤두수가  아뢴다

" 전하 구차하게 명나라에  너무 굽실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남도는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중 전라도는 아직 건재 하오며 북도 는  병졸들이  용맹하고  한경도지방에는 험한  산악이 많아서  너무 걱정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일본군은 일단 전선을 수습한다음 29 일 2 번대의 가등청정과 1번대장인 소서 행장이 충주성에 입성하여 서로 만나 한성 공략에 대한 논의를 벌렸다 .

소서행장이 먼저 입을 열어

"장군 , 수고 많았소 , 이제 조선에는 우리와 대적 할 장수가 없소 , 신립도 죽고 . 이일도 아마 죽었을 게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적의수도인 한성을 하루 속히 점령하여 조선 왕을 사로 잡아 항복을 받는것 밖에 남지 않았소 , 장군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하고 가등청정을 바라보고 의견을 묻는다.

 

가등청정은 미리 준비 하고 있었는지 작전 계획을 털어 놓는다

"1번대가 잘 싸워 줘서 그동안 승승 장구 하였습니다.

제생각으로 는 출발전 태정대신 께서도 말씀이 있었지만 , 조선의 서울인 한성부는 천혜의 요새로 북쪽에는 험한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 산성이 있습니다 ,

 

도성 남쪽에는 한강이 있어서 도강하는데 좀 애로는 있을것 같습니다. 장군 께선 우로인 여주를 경유 수심이 얕은 곳인 양근을 택하여남한강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진격해 들어 가십시요 ,

 

나는 좌로인 음성, 죽산, 양지를 거쳐 용인 방면으로 진출 뒤 딸아오는 부대와 합류 남대문쪽으로 향하겠습니다 "

"예, 좋습니다 , 하지만 조심 하십시오 , 죽주산성과 용인성, 남한산성등은 적이 그냥 내 주지 않을것입니다 , 특히 한강 도하가 좀 어려울것입니다 "

 

소서행장이 걱정 해준다 ,

"걱정 마십시요 , 이제 적장들이 다 죽었 는데 무슨 걱정 입니까? 적의 서울인 한성에서 만납시다"

조선의 서울 한성을 공격 작전은 왜장들 간에 합의가 되었다 .하지만 소서 행장은 가등청정이 조선의 관문이라 할수 있는 남대문으로 먼저 진격한다는데 대하여 내심 불쾌 하였다.

소서행장은 한성 의 관문을 먼저 당당하게 자기가 먼저  처들어가 점령을 과시 하려는 공명심 때문 이었다 .

 

그러나 한편 소서행장 으로서는 그동안 1번대가 전투를 수없이 먼저 선두를 달려 왔기 때문에 병사들이 많이 피로 해 있는점을 감안 동대문 방향으로만 일찍 들어 간다면 오히려 자기 에게 유리 하게 전개 될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이로서 일본군 9개대는 조선의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를 완전히 점령하고 각군을 요소에 분산 배치 되었다

 

그 배치상황을 보면

 

육군병력

 

1번대 소서행장(小西行長) 18,700명 충주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 22,800명 충주

3번대 흑전장정(黑田長正) 11,000명 황간

4번대 모리길성(毛利吉成) 14,000명 현풍

5번대 복도정칙(福島正則)25,100명 문경

6번대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15,700명 선산

7번대 모리휘원(毛利輝元)30,000명 성주

8번대 우희다수가(宇喜多手家)10,000명 부산진

9번대 우자수승(羽紫秀勝)11,500명 부산진

 

계 158,800명

 유군 지원 수군병력 12,000명

    

조정에는 매일 변보가 열 차례 이상 계속 들어 왔다 .

 

이일의 보고가 들어 온것도 4월27일 이었다 ,

서울의 인심이 술렁 거렸다 , 궁중 에서도 서행(西幸...임금이 난을 피하여 가는것 )할뜻을 비치기 시작 했다. 대신들은 임금이 서행하리라는것은 꿈에도생각 할수조차 없었다.

 

종친들도 혹시 종묘사직을 버리고 가는것이 나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였다 . 임금도 종친입에서 우려 목소리 라도 나올듯하면

"과인이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27일 밤늦게 까지 , 대신들은 퇴궐을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 으나 뾰죽한 수가 없었다 . 적을 막아 낼 장수가 뿐만 아니라 무기 준비도 없고 싸울 병사 들도 없다 .

 

어전 회의 결론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일단 이어 하는것이 옳다고 하는것으로 귀결되었다 ,영상 이산해가

" 이렇게만 있을수 없나이다

임금께서 이곳에 적이 들어온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시는 같은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않됩니다 ? 일단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셨다가 후일을 기함이 옳을까 합니다 "

 

임금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참이었다

왕은 서울 수비 대장을 우의정 이양원(李陽元)로 하고 이전(李餞)을 좌위대장으로,변언수(邊諺琇)를 우위대장 , 신각(申恪)을 중위 대장으로 삼았고 전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를 맡겼다

 

경기 감사 권징(權徵)에게 명하여 백성과 병사들을 징발 얕은 곳은 깊게 강을 파내어 왜군이 도강 못 하도록 준비 토록 하였다

 한성 수성대장 이양원 은 얼떨결에 수성대장은 되었으나 병조에서 뽑아온 군사는 4500명뿐이고 성을 조사 해보니 성위를 낮게 쌓아 몸을 숨겨 싸울만한 성가퀴가 3만곳뿐이고 활 가진자도 7200집으로 쏠줄도 모르는 오합지졸 들이었다. 그것도 장정들은 모두 도망가 찾기도 힘들었다.

    

4월28일 ,

왕은 어전 회의를 소집하였다 ,

대신들은 나라가 위급하니 만일에 대비 왕세자를 책정할것을 건의 하여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러 하였다 .그리고 백관들 에게는 모두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근무 하도록 지시 했다

 

4월29일 ,

저녁 믿고 있던 신립의 패보가 이일의 장계로 확 실 해지자 임금의 서행(西幸)결심은 더 확고화 되었다. 동상(東廂.....동쪽 집무실)에 나가 서행 하기로 대신들과 결의 했다 .

서행을 강력히 주장한것은 영의정 이산해 였다 .

" 우격(羽檄....급보)에 의하면 우리 조선군으로는 적과의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모든 조건이 싸울수 없는 상태 입니다. 우선 평양 까지 가셨다가 명나라의 도움을 요청 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

    

이 때 장령 권협(權俠)이 나선다

"않됩니다 . 도성을 버린다는것은 우선 종묘 사직을 버리는 것이며 백성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 결사적으로 한성을 지켜야 합니다 , 않됩니다 "

    

이를 지켜 보던 체찰사 유성룡이 타일렀 다

"권 장령의 충절은 이해 하나 만일에 하나 적장 앞에서 임금이 수모를 당하면 어쩔것인가?,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한 불부터 끄려면 서행(西幸) 밖에 없다고 대감들 께서 의견 일치를 보았으니 그리 알고 후일을 기하세"유성룡이 권협을 타이르고 난다음 말을 꺼낸다

 

"전하 께서는 떠나기 전에 왕자 들을 손수 각 도에 파견 하도록 하여 백성들 중에서 근왕병(勤王兵....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병사)를 모집토록 함이 좋을듯 하옵고 세자인 광해군만 임금님을 보호 하기 위여 동행 시킴이 가할것으로 사료 됩니다" 한다

 

 

선조는 유성룡의 의 말에 따라 하기로 하고 장남 임해군을 함경도로 김귀영, 윤탁연을 대동하여 떠나게 하고 , 셋째 순화군은 강원도로 황혁 과 이기가 대동하고, 군사모집을 호소차 양도(兩道)로 보냈다 .

 

원래 유성룡은 도 체찰사(體察使)로서 당연히 전선(戰線)을 누비고 다녀야 할 사람인데 전선에는 신립과 이일만 내 보내 놓고 자기는 전방에 직접 나가 본일이 없었다 .

 체찰사란 국가의 전란이 일어 났을때 임금을 대신하여 전선에 직접 나아가 군무(軍務)를 감독 해야 하는 직무 였다

그러나 그는 일선에는 전혀 한번도 나가지 않고 조정에 앉아서 각종 지시만 하고 있지않은가?

 

그러니 상주와 충주에서 이일(李溢) 같은 자가 올리는 서계(書啓....보고서)나 장계를 읽어보고 왕 에게 재 보고 하는것이 고작 이었다 ,

만일 일선에서 못된 장령 들이 글로 거짓 보고 해도 믿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

 

더구나 도체찰사는 대개 원수(元帥)도 겸직 토록 하는등 그 중요성은 전쟁에 있어서 왕의 명령과 똑 같은 직책 으로 그 중요성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 할만큼 중요한 직책 이었다.

체찰사 제도는 고려말 부터 조선에 걸쳐 임금 대신 군사를 통활 해 왔는데 조선에 와서는 주로 영상급 에서 임명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영상 출신 체찰사들은 병법도 잘모르면서 병법을 잘아는 장수들의 작전(作戰)에 까지 관여 하여 전략을 그르치게 하는등 종종 물의를 일으키는 폐단도 많았다

 

국왕이 일시적 몸을 피하기로 결심하자 ,왕은 도체찰사인 유성룡에게 지시한다  

 

"유 체찰사는 그동안 조정 일에 바빠 군무(軍務)에는 소흘히한감 없지 않으니 이번 한성 방어전 에서만은 한성에 남아 직접 앞장서서 적들이 서울시내 까지 못들어 오게 철저히 방어 해주시오 ,과인의 평양행은 도승지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과 같이 갈 것이니 과히 염려 말기 바라오"

 

 임금도 유성룡이 임금같이  궁궐 주위 에서만 맴도는것 보다도 도체찰사로서 .군복( 융복)을 입고 일선에 직접 싸우고 있는 순찰사들과 함꼐 생사를 같이 하기를 바랬 으나 그는 조정인 중앙 에 만 있으려 하고 일선에 나갈 생각은 전혀 않았다 

    

왕도 그동안 일선에 않 나가려는 그를 굳이 강요 하지는 않 았었다

 

임금은 사태가 급박 해지자  삼상(三相-여의정,좌의정,우의정)들 의 행동 도 심기 편치 않게 보기 시작 했다 ,

 임금이 유성룡 에게 왜적을 도성에 머물러 지키 라고 지시 하자 유성룡은 겁을 내면서 당황 하지 않을수 없었다 , 사실 유성룡은 참모 역활은 그대로 해왔지만 체찰사 명을 받고도 군사들을 지휘 할만한 기개도 없는 한낟 선비에 불과 했다.

    

그런 그,에게 패배 일로 위기에 빠진 조선 군의 체찰사로 직접 서울 방어전에 앞장서라는데 대해서는 차라리 전투에 죽으라는거와 다름없었다 , 나라를 위 해 죽는다는것은 좋으나 명분이 없는 한낟 패적지신 (敗積之臣)으로 낙인 찎혀 죽는 다는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유성룡의 인물됨을 모를리없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임금께 계청하였다

"전하 , 체찰사 유성룡 대감은 인물이 전형적인 문관에 불과 합니다 지금 까지 경상도 나 충청도로 동분 서주 해야 할 체찰사로서의 직책을 못하고 있는것은 .병법에는 능하지 못한 탓입니다 .

 집을 지을때 기둥과 석가래의 용도가 다르듯이 그분은 이번 한강 방어전에서 제외시키고 차라리 이양원 대감을 유도대장으로 명하여 수도 방어의 총책임을 지우는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왕도 도승지 말에 수긍 안되는바 아니나 군사 얘기만나오면 태평성대만을 주장해온 3정승들의 행동이 내심 괬심하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직접 경험 해보라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체찰사를 임명 했고 , 한성 수성대장을 임명 한것도 그런 임금의 속셈이 있었다

 

왕은 도승지 말대로 이양원에게 수성대장을 유도 대장으로 승진 시켜 수도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

 선조가 서행을 결정 하자 궁궐내 가 어수선 하였다 밤이 깊자 이일의 장계가 또올라왔다 ,

"금명간 , 적이 반드시 도성에 쳐들어 올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왕은 걱정되지않을수 없었다

 

 

4월30일은 서울 장안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젔다

새벽에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과 인마들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

 임금과 동궁은 융복(군복)을 갈아 입고 말을 나섰고 중전등은 덮게 있는 교자를 탔다.궁인들은 통곡을 하며 뒤를 딸았고 또 그뒤를 종친과 문무관을 합쳐 100여명이 그 뒤를 딸았다.

 

 

 

왕은 먼저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板)을 떼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임금 일행이 인화문을 나서 경복궁을 나와 서대문쪽으로 지나가고 있을때 많은 백성들의 곡성이 여기 저기서 터저 나왔다.

하늘도 안타까운지 비가 그치지 않고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그칠 줄 몰랐다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신하들을 이끌고 서울을 버리고 왜군을 피해 할수 없이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고 있는것이다.

비가 처량 하게 캄캄 한밤을 하염 없이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달이 없는 비오는 날의 밤은 한치의 앞도 내다 볼수 없었다. 오직 도승지 이항복만은 꺼질세라 비를 피해 촛불을 들고 가는 길을 인도 했다 ,

 

임금의 피난 행열이 돈의문을 나서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뒤 따랐다 .우의정 이양원은 유성룡이 체찰사직을 못함에 따라 서울 사수 의 방어 사령관으로 대신들중에는 홀로 한성에 남게 되었다 .

 

좌찬성 최황, 우찬성 정탁, 좌 참찬 최 흥원 , 이조 판서 이원익 , 호조 판서 한준, 병조 판서 김응남, 형조 판서 이증, 대사헌 이헌국, 도승지 이항복, 좌승지 이충원 , 우승지 이정향, 좌부승지 노직등 100여명이 임금의 뒤를 따라 호종(扈從....임금의 뒤를딸아 쫓아가며 모시는것)하였다.

 

 

임금이 사현(沙峴)에 이르러 말을 잠간 세우고 한성 쪽을 바라 보니 궁성쪽에 불 이났는지 하늘이 벌겋다 , 남산밑 대창 근방에는 불기둥이 솟는다 . 일부 백성들이 텅빈 왕궁에 뛰어 들어 도둑질하려는 자들의 행위가 분명하였다

왕이 묻는다

"웬 불이냐?"

도체찰사  유성룡이  대답한다

" 불이 난것이 아니고 원래  이곳에서 한성쪽을 보면 항상  훤하게 보입니다 ,도성에  백성들이  켜놓은 불 때문일것입니다."

 

" 적들이 한성 가까이  닥아오고 있는데 백성들은 어찌 되는고..차라리 죽으나 사나  궁궐에서 왜적들과 싸우다 죽을 것을 그랬구나 "

" 전하  임금은  그나라의 상징입니다 .전하가  적의 포로가 되는 날에는  우리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이  고구려 도성인  평양에서  당나라  까지   5000여리를  끌려 가면서  가진 고통을 당하고  당나라  소제 묘에가서 무릎을 꿇고 나오지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아닌 사죄 까지 했습니다

 

만일  일본군의 포로가 되신다면  당나라 군사 보다도 더 포학한  왜놈들이  전하를 그냥 두겠으며 임금이 없는  조선 백성들은 그냥 두겠습니까?  비록  몸을 피하시지만  피하지  않다가  적의포로가되는 것 보다  피하였다가  적을 물리 치는 것이  나라와 우리백성들을 지키는 현명한  생각이신 줄로 아룁니다"

 

왕과  유성룡이 이런말을 하고있을 때  좌찬성  최황이  끼어든다

 

"전하 저 불은  누군가가  궁궐에 지른 불일지도 모릅니다 .신이  어저께 밤에 거리에  누군가가 써붙인  대자보 글을 보았는데  불만이가득찬 글이었습니다 "
" 무슨 글이더냐?"
" 도망치려고 준비한 짚신은 궁궐에서 왜놈들을 막기 위한 도구라고 누가 믿을 것이며

 조정 신하라는 자들은 군사상 급한 격문이왔다갔 다 하는데도

  전하의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더냐? 

 아 , 이 나라가 이 지경이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군신 상하가 이나라 사직을 위하여  같이 죽기 살기로 도성을 지킬생각을 않고  무엇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위에서 임금을 호종하던 대신들은 최황의 충언에 모두 몸둘것을 모른다

 

이때 이조 판서로있다가  물러 난 기성부원군 유홍이 나선다

 

"좌찬성 ,자네  말조심 하게 .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 궁궐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자네 가족들은  지금 도성 안에 있는가 아니면 시골에있는가  대답 해 보게  지금 자네 가족들을  미리 피난 시켜 놓은 주제에  누가 누구를 보고  도성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고  허무 맹랑한 소리를 하나?"

".........."

 

사실 최황은 자기가족들을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보고가 있자마자  미리  시골에 자기 가족을 피난 시켜 놓은 것을 유홍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최황도 만만치않았다

" 송당 ,자네가 무엇인가?  그러면  좋다 .자네 가족은  도성안에 있나 없나  대답해 보게 "


" 내가족도  피난 내 보낸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자네는 서울 도성쪽에 불빛을  마치 우리 백성들이 불을 지른 것 같이   이상하게 해석하니 하는 말일세"

 

암금은  두사람이 말싸움을  가만히 듣더니

 

" 모두들  듣기 싫다 . 오죽하면  모두들 피난들 시켰겠나 .하지만  경들은  나쁜사람들이다 .내 가족만  중요하고  도성안의 많은 우리 백성들의 안전은  남의 일이드냐 . 과인의 지금 처지나 두사람 다 똑같다 ."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을 두고  선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논란 거리다 


 선조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는 1592년 4월 30일자 기록이 있다.

 이와 달리 처음 만든 선조실록(宣祖 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이 황급하게 궁궐을 비우는 마람에  궁궐 나인들의 실화로 불이 난것으로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선조 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은 인조~효종 때  기존 선조 실록을 수정하여 보완 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이며, 모두 42권 8책이다.

 

 

 이와 달리 선조실록(宣祖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만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라고 적혀 있었다 "

 

이기록을 보면 왜군이 들어 오기 전에는 궁궐이 잘 보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을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피난가기도 바쁜데 백성들이 제나라  궁궐에 들어가 불까지 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익 때문이다

 

 

당시 경복궁 화재 사건을  선조 실록에서는   단순히 화재가 있었다고 기재 되어있던 것을  당시 상황을 마치 자기 눈으로 본것이나 처럼 백성들을 도둑놈으로 몰아서  궁궐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내고 불까지  질렀다고 기록하고있다,

특히 대북파 영수인  홍여순을 거론하면서  홍여순이  병조 판서로있으면서 부정 축재를 했는데  백성들이 몰려가서  불까지 질렀다고  강조 하고있다

정말 그랬을 까?

수정실록을 쓴 인물들은 인조시대 사람이니 선조시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작자들이다 

마치 눈으로 본것처럼 거짓말을 쓰고있는 것이다 

셍각해보자 

당시 왜군들은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군 해 오는 동안 닥치는 대로  조선사 람들만 보면 무차별  학살을 했다  

200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착하기만 조선 백성들은 잔인 무도한 일본놈들의  칼날이 무서워  저항에 앞서 일단 몸을 피할수 밖에 없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재물에 욕심이 없기 마련이다

한성  백성들이 가족을 살리고 보아야지  언제 재물을 챙기겠다고  궁궐 까지  들어가  도둑질 했겠는가?

여기서  왜군이  점령한 직후의  한양의 모습을 기록한  소서행장의 부하 였던 오오제키(大關 定祐)의  눈으로 직접 본 체험담을 들어보자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이 성안에 모습을 보니 쥐새끼 한명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은 텅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서야  전각을 자세히보니 대궐은  구름위에 솟아있는 것 같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었으며  그 아름다운 모습은  소문대로 중국 진시황제가 있던  궁궐이  생각나게 하였다 .

문과 기둥은  그 육중한 모습과  처마와 처마의 이음매는 왕과 같은 호랑이의 기개를  닮아 보였다

왕좌를 보니  금빛찬란한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에 오르며 구름속에서  노래 하는 것 같았다

그많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단청을 했을 것이니  어찌 감탄이나오지 않으랴

방마다 문이 모두 문이 열린 채 궁문을  지키는자가 없는 것을 보니  참으로    처량맞게 보인다

그토록 용맹하던  소서행장도 왕좌의 위엄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소서행장의  눈을 잠간 훔쳐서 보았는데  정말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고니시가  빈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자리가  신성하고 고아한  자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떠 올랐는지 두눈에 눈물이 매치는 것 같이보였다

옆에 있던 유마, 오오무라 ,소,를  흘깃 보니그들의 눈에도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大關定祐...오제키의  조선 정벌기에서)

 

 

6.25 사변 때도  중앙청에 불을 지르고 도망 갔던 것은  서울 시민이 아니었고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에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갔던 사실만 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선조 수정 실록의  기록이다

 

석교(石橋)에 이르니 날이 새면서 멈쳤던 비가 다시 억수 같이 쏟아 진다,

왕이 입고 있는 군복이 또다시 내리는 비로 흠뻑 적셔들기 시작 했다

누구하나 임금의 비를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올 겨를이 없이 황망중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기 감사 권징이 자기가 입고 있던 군관용 우의를 벗어 임금에게 닥아가 왕을 덮어 드렸다.

벽제역에 도달 하니 , 비가 아까 보다 더 내려 친다,

    

날이 다시 저물기 시작 했다.

어가가 어느덧 임진강이 까워지었다

임금이 느닷  없이 묻는다

 

" 여기가 파주 아니냐?"

" 예 그렇사옵니다 "
병조 좌랑 이홍로가  대답한다

 

" 그러면 우계 성혼의 집이이곳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
임금이 성혼의 집을 찾자 이홍로가  파주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임금이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한다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성혼은 이때 율곡이이가 죽기전에는  그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이이의 천거로  벼슬길이 여러번 있었는데도  학문에 전념할 뜻으로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고로 의정부 좌찬성을 한때는 했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서인이지만  동서인의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난때 최영경과  정개청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동인들로 부터 두사람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낙향하여 파주에 머물고있었던 것이다

 

임금  선조가  그를 끔찍히 아낀 사람이었는데  임금이 이곳을 지난다는데도  나타나지않는 것이  섭섭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성혼이 그때 집에서 죄를 받고 있던 터라 감히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윗분의 부르심이없이 나가 뵙는 것이 오히려 불충이아닐가  하여 근신하고있었던 것이다

 

병조좌랑  이홍로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대가가  앞으로나갈수록  힘이들고 도망하는자가 속출하자 불평이 나오기시작했다

 

 

임진강에 도달하니 빗줄기가 더 굵어 지면서 강을 건늘 방법이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강물조차 눈에 들어 오지 않고 내리는 찬비가 뺨을 때린다

임진강이  임금의 행열을 가로막는다   

모두들 시커먼 강 물만 내려다 보고 있지 누가 나서서 임금이 건너갈 배를 대령할 사람이 없었다 ,

    

이항복이 행열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조그마한 정자옆에 목재가 널려 있는것을 발견 했다

"모두들 이 목재를 한개씩 집어 들고 강가에 쌓도록 하시오" .

대신들 할것 없이 모두 재목을 이항복이 시키는 대로 한곳에 모으게 한다음 다음 불을 붙이니 칠흑 같은 밤이 훤하게 밝아 지며 각자의 모습이 들어 나고 비에 젖은 군복이 열을 받아 김이 모락 모락 난다,

 

불빛은 강 양쪽을 환히 비추기 시작 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인근 동네를 수소문해서 배 여섯척과 어부 여섯명 을 찾아 데려 왔다 .

먼저 임금과 왕비 세자, 왕자, 중신들을 따로 태웠다.

 

불빛에 보니 임금의 용안에 눈물이 흘러 내린다,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배는 물살을 가르고 삐그덕 삐그덕 임진강 저쪽을 향하여 나갔다

나머지 다섯척도 닥치는대로 빨리 오르라 하니 서로 먼저 타려고 상하 구별 없이 아우성 이다 .

 

왜적 이 나라를 침공 하자 나라 의 체면 조차 무너지는 순간 이었다.

그래도 배에 탄사람은 다행이었다 ,

배가 부족해 반수 이상은 강을 건느지 못하고 발을 동동구를수 밖에 없었다.

강을 건느자 지금 까지 가마(轎)를타고 피난왔던 숙의(淑儀)이하 여인들도 가마를 실어 오지 않은 탓에 왕비만 빼고 말에 모두 올라 타고 쫓아가게 하였다

 

 5월1일  

 

동파관에 이르렀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 도성에  이미  왜적들이  입경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 평양 까지가려면  아직도 요원한데   임진강을 막을 병력이없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적들에게 잡히겠습니다 "


경기감사 권징이 아뢴다

" 보고에 의하면  적들이 전하를 체포하라는  풍신 수길의  특명이  내려젔다는 정보입니다 '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 오기전에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동안  적의 도강을 지연을 시키려면  병력이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오니  대가 (임금이탄가마)를  싫고 온 배가  아무래도  적의 수송선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사오니   아깝지만 배를 소각 시키고  사공들은  대피시킴이 옳을 가 하옵니다 "


" 안된다 . 과인과 시종 대간들을  이렇게 안전히  건네준  사공들의 귀한 배를  소각 시키다니 말이 되는가? "

" 전하  시간이 급하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옵소서"
" 안된다 . 그냥 이대로  빨리가자"
" 전하 . 도저히 불가 합니다 . "

경기감사의  간절한  다그침에  왕도  더이상 벋힐수 없었다

 

" 그러면  사공을 설득하여 잘 이해 시키도록 하고  전쟁이 끝나면 응분의 보상을 해주도록 약속하라 . 그리고   사공들이  혹시 적들에게는 적들이  들어오면  이용 당할 우려가 있으니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

" 전하  또 한가지있습니다 "
" 또 무엇인고?"


"  왜적들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학살한것으로 보아 임진강변의 민가가 적들이 들어오면  적에게 빼앗기는 동시에  전하의 어가를  배로 도선 하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모두 살해 당할 염려가있습니다  .들리는바에 위하면  왜적들은  민가에 무차별로 불을 지르고  여자들은 강간을 일삼는다합니다 "

 

 

"임진강  나루 백성들에게 모두 피하게 하고  민가는 백성들의 동의를 받아 소각시키되   백성들에게는  큰 재산이니  후일 임금이 책임지고  보상 할것이니  소각에 동참하도록  하게 하라" 

 

다시 날이 어두 웠는데 밤 10시가 되어도 임금에게 수라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

도승지가 내궁들 보고 먹을 것을 갖다 드리라 하나 준비 해 온것이 없어 밥을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

 

 

이때 마침 ,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음식을 준비 해와 비로서 허기진 배를 풀칠은 했다 ,

배를 충분히 채우지도 못하고 백관들은 근방 촌가에 흩어저 잠을 청하였다

 

선조는 잠이오지 않았다

도성을 잃어 버린것도  그랬지만 어가를  안전하게 옮겨준  사공들의  집과 배를  모두 소각시키라고 한 명령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임금일행은 동파관을 떠나 연안 적소(延安 謫所.....윤두수가 귀양가있던 장소)에 도착 하니 임금이 무슨 생각인지 서인으로서  죄를 짓고 연안에 은거 하고 있는 윤두수(尹斗壽)를 찾는다.

윤두수를 부른다는  어명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잔뜩 긴장 한다

윤두수는  서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성룡이긴장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윤두수가 임금에게 나오자

 "경을 특별히 방면 하여 오라 한것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여 경의 지모를 국가를 위하여 발휘케 함이니 과인의 뜻을 저바리지 마오 "

하고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씀 하고 왕이 친히 차고있던 청직낭 (靑織囊..푸른색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정(精)표로 별로 줄것이 없구먼 ......"

하면서 내준다

 

윤두수가 감격 하여 몸 둘바를 모르며 임금의 방을 나왔다

선조는 윤두수를 잘안다

윤두수는 명석한 머리와 추진력이 있다 ,

더구나 그는 중국어에 능하였고 학문을 많이한 준재였으며 시국관도 뚜렸했다

그런 그를 시기 하는것은 지금 조정의 실세 행세를 하고있는 동인(東人)출신의 이산해와 유성룡등 일파의 농간으로 아까운 준재를 썪히고 있었던 것이다,

 

또 임금은 이들 동인들 이 호종 하고 있는 대신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이 동파관에서 웬 젊은이가 지나감 으로

"거기 가는 선비는 누군고"

하고 물었다.

 

"신은 좌찬성 최황(崔滉)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입니다"

임금은

"오 , 그대가 , 공신(功臣)의 아들이구먼 , 자네는 마땅히 의(義)로서 나와 같이 할지니라,"

하면서 자색 혁대를 풀어 주시면서

 

"이것을 허리에 차고 항상 과인을 잊지 말라"

하고 그윽히 최유원의 얼굴을 처다 본다

"황공 하오이다 , 죽음으로서 전하를모시겠나이다"

하였다 .

 

왕은   앞서 좌찬성  최황의 가족들을 미리 대피 시켜 놓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괏심  하게 생각했었지만 임금자신도   사실상  피난하고있는 입장인지라  입을 다물고있다가  최황의 아들까지 나서서 임금을 호종하고있는 사실을  알고  최황에대한 오해를 그제서야  풀었다

 

왕은 외로웠다.

왕은 지금 까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대신들에 대하여 가만히 피난중에도 대신들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자기 파 사람들 끼리 끼리 행동하는것이 눈에 띄므로 이것을 바라 보는 왕은 못 마땅 하였다. 

특히 영상들은 이제는 노회(老獪)한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지금 전방에서는 젊은 조선의 장병들이 피를 흘려 왜적과 싸우고 있는데도 자기 한 목슴 부지 하려는 자들이 임금을 모신다는 핑게로 굳이 평양 까지 딸아나서는 저의를 알수 없었다.

 

 왕은 패기 있고 참신한 젊은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 더구나 왕은 피난중에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마음을 나눌 인물이 없었다 . 모두 노회한 화술로 왕의 의도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

 

 

 

대가(大駕)가 개성으로 향하기에 앞서 점심때가 되었다 , 임금께서 식사를해야 할텐데 도승지 이항복이 임시로 솟을걸어 놓고 식사 준비하는 장소로 가보니 식사를 만들 취사병이 보이지 않는다 .

 

 

병조 판서 김응남이 이리 저리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장단 부사 구효연(具孝淵)을 찾았으나 그도 보이지 않는다.조금후 이항복이 간신히 식사 준비를 해왔다, 왕과 왕비만 반찬을 약간 준비 되었고 동궁(세자)은 그나마 반찬도 없었다.

 

경기 감사 권징을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 보니 권징이 잠에 녹아 떨어저 있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깊은잠 에서 깨어 나지 않고 있었다. 200년의 조선 왕조 개국 이래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력앞에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윤리 조차 땅에 떨어 지는 순간이었다

 

 임금은 중추부사 이기(李旣)를 시켜 임진강가에 임금과 신하들이 타고온 배가 어찌 되었는가 물었다

"잘모르고 있아옵니다. 왜적이 이용 할까 봐 강남쪽으로 못가게는 해놓고 왔습니다""

한다.

 

"쯪쯪 , 영상들은 무얼 하는고 .....,즉시 군사 몇몇을 보내 타고 건너온 배를 모두 강속으로 침몰 시키도록 하고 임진강 남쪽 민가에 백성들은 일단 왜적 처들어 오면 모두 그들로 부터  희생  될 가능성이 있으니 잘 설득 하여 산속에 피신 하였다가 과인이 다시 적을 물리 치고 환도 할때 되돌아 오도록 하되  추후 난리가 끝나면   침몰시킨 배와  소각된 자옥들은 나라에서 보상 한다  했거늘....,

 

 다시한번  백성들레게  이해를 시키라 .  전쟁이 끝나면 민가를 나라에서 다시 지어 주곘다고 하되 불을 지르는  이유는   왜군들이 민가의 집을 헐어 뗏목으로 재활용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일러라 "

하고 지시 한다.

 

5월1일

 

, 왕은 동파관에서 대신들을 불러

" 어디로 가야 할꼬?"

하고 물었다

모두 엎드려 몸둘바를 모르고 말을 않고 있다 . 이때 도승지가 나서서 아뢴다

"우리 조선군 으로 서는 왜적을 막아낼 여력이 지금 없아 옵나이다,

 

신이 듣기 에는 지금 가등청정군이 한강 남쪽에서 도성으로 들어 오지를 못히고 도강 준비에 몰두 하고 있는바 , 이들은 북쪽 오랑캐와는 달라 섬나라 출신들로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도강은 시간 문제 입니다 ,

 

그리고 소서행장군은 여주 얕은곳을 이용 양평을 거처 이미 한성으로 진격해 들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 그나마 병력 배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파죽지세로 처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럼 , 유도 대장 김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고?"

임금이 다시 도승지 이항복에게 묻는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1000명은  한강에서 적의 도하를 막기위해 제천정(濟川亭...지금의 용산구 보광동)에 사령부를 차려 놓고 있는데 왜적의 조총탄이 빗발치듯이 정자위로 떨어저 군사들이 많이 도망치고 전의(戰意)를 잃고 어쩔줄 모르고 있다 하옵니다 "

"아, 어찌 하면 좋을 꼬? .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주위에서 반응이 없자

"왜들 말이없는가?"
하고 역정을 낸다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 처럼 말이  없다 "

" 우부승지  신섭"
"예. 경은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라 "

 

피난길에 바쁜데 돌아 가라니 기가 막힌다

자기귀를 의심하고  무엄하게 다시 묻는다

" 전하 , 어찌하라 하옵신지?"

" 한성으로 다시 돌아가란 말이다 "

 

" 도성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라 하옵신지?"

" 유도대장 이양원과  상의하여  왜적과 전투가 심해지면  백성들이 희생자가 속출 할것이니 안전하게 북한산이나  고양땅으로 피신하게 도성백성들과  군관들을  위유(慰諭)하라 "


우부승지  신섭은 겁이더럭났으나  왕명인지라

" 수행 하겠나이다"

하고  물러난다 

 

" 병좌좌랑  이홍로 "
부복 하고있던  이홍로가  소스라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감히 임금을 올려다본다

" 왜 놀라는가?"
" 황공하오나 왜적이 한강가에 벌써 도달했다 하옵는데..."

 

" 그러니까  백성들을  안전한곳으로  피난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오. 유도대장과  도원수가 한강선을 지키고 있는데 백성들을 위유하라는  내명령이  거북한가?"

"황송 하옵니다 "

 

병조좌랑은 병조판서 바로 밑에 참판, 참의  다음 벼슬이다

병조좌랑은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도성이나 대궐의 순라군이 자기편의 식별이나 비밀의 보장을 위하여 쓰던 암호나 신호인 군호를 관장하였으며  임금에게 드나드는 장졸들의 이름을 기록해서 승정원에 보고하는 일을 맡고있었다

왕은 대궐을 떠나  있는 마당에  병조 좌랑이 할일없이 동파관 주위를  맴돌지 말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유나 하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듣고만있던 도승지 이항복이 두사람이 왕의 방을 나가자 들어와  아뢴다

 

"잠시 의주(義州....지금의 신의주)로 가 계시 댜가  8로가  모두  적수중에 들어 간다면 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서 도움을 요청 하겠습니다 ."

이항복의 말이  끝나자 좌의정 유성룡이 말한다 

 

"  대가(임금의 가마)가  국경을 건느시겠다는얘기요?  아니면 도승지가  명나라로 찾아가서 명나라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요?  만일 전하가 이 나라를 벗어나는 날에는  조선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 좌상께서는  저의 뜻을 잘 이해 못하시는 군요 왜군이 물러 갈때 까지  명나라에 의지 하자는 얘기 입니다 " 

 

두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  말한다

 

" 과인도 명나라에  의지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은 하고 있었소  "

 

 윤두수가  아뢴다 

" 좌상  , 대가가 국경을 넘느냐  않느냐가  왜 나옵니까? 전하도  명나라에 의지 하신다고 했지... 국경을  넘는다고 했습니까?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나라를 버린다는 얘기인데 옛부터  나라를 버리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전하 ,

경기도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사와 말은 아직 정예하고 강하며 함경도의  함흥과  경성은 험하기로 소문난곳으로 믿을만 곳입니다 더욱이  왜적들은  전선이 길어지면서 보급로가 끊기어  사기가 저하 되어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이 고개나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

 

좌의정 윤두수의 말에 좌중이 조용 해지고 침묵이 흐른다 , 모두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평양도 지키기 어려운가?"

하고 임금이 묻는다.

"..............."

암금의 말에 대답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임금의 어가가  동파관에서  다시 출발하여 개성으로 향하고있는데 주위에  호종하던 졸병들이 도망치거나  흩어저서  호위하는자들 조차  얼마 안되었다

 

이때, 서흥부사 남이가 병사  300명과 말60필을 가지고 왔으며 황해감사 조인득이 장막을 쳐 놓고 소현리에서  임금을 기다리고있었다 .

임금 일행은 그곳에서 잠간 머물고 판문점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판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풍덕군수 이수형이 대대적으로 음식을 마련해놓고 기다리고있는 바람에  호종하는  모든 문무관들이 배불리 음식을 먹을수있었다

풍덕군수가 군량미와 말먹이와 쌀 다섯석 까지 받치니  이를  호종하는 졸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개성에 도착하여 남문 밖 공서(公署)에  여장을 풀었다

 

5월2일  다음날이었다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라가 공서를 물린다  

"전하가 제신들을  불러  입시 하라하신다"

별안간 여기 저기서  병조 정량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나와 기웃거린다 

 

이때 헌납 이정신이  왕에게 입시하려고 나서자  한성 판윤 홍여순이  그의 옷을  뒤로 잡고말한다

"  이봐 자네  어딜 가려고 해? "

" 병조 정랑이  지금 소리 치는 소리 안들리나?


" 허허 , 도승지가 아니고 병조정랑이  어명을  하달 하는 것이 수상하이....."
" 그러니까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것 아니야?."

" 허허, 아까 좌의정과 우의정이 입시 했는데 영상  이산해의 잘잘못을 가리고있다네"

 

대간들이  황망중에 입시한다

 

왕에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개성부사의  방이었다  

영의정만 빼고  대신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사전에 미리 무슨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 그래 누가  먼저 말해 보라 "

임금의 목소리가 커진다

 

임금의 말이 끋나기가 무섭게 3사의 모든  관원들이  약속이나 한듯이입을 모아 얘기 한다

 

" 전하 ,영상 이산해는  전하께서 서울 왕궁을 떠날 때 한나라의 영상이라는 자가  임금께서  궁을 떠나시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빨리 피난 하시게 만든  아첨배입니다.

 전하가 서울에 계시게 하지 못하고 이토록 고생 시켜 드리는 것은 모두 이자의 농간 때문 입니다 청하 옵건대  왕법을 바로 세워 주소서"

왕이 노기 어린 소리로말을 받는다

"지금  피난들 가는 길에  왜들 이러는가? 영상 뿐만이니고 좌상과 좌 찬성 도 과인이  왜적에게 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유 때문에 몸을 잡시 피하라 한것인데  왜 유독히  영의정만 가지고들 그러는가?"

 

이에  사헌부 장령 황붕이 나선다

"전하 그당시로서는 영의정 말이옳습니다 ,그 당시 위 급함으로 보아 서 누가 도성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아니 할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랬다

임금에게  영상 이상해를  파면시키게 하려고  만든 좌석을  사헌부 장령 황붕이  깨뜨려버리자 .병조 정랑  구성이  황붕의옷자락을 밖으로 끌고 나와서 협박한다

 

"자네는  영상 이산해가  무엇을 잘 했다고  두둔하는가?  자네가 영상의 조카라고  해서 그러는가?"

황붕이 가만 있지 않는다

"그래  지금 어느때인데 병조 정랑이라는 자가  이따위 짓을 하는가? 임금이  왜놈들에게 잡혀서 왜국으로 끌려가면 이나라 백성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이나라를 지킨다는 말인가?"

 

"잔소리 말고 있어...네놈 같은놈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이꼴이야 여봐라  이자를 다시 입시못하게 하라"

병조 정랑 구성이 병졸에게 지시하자  황붕의 앞을 가고 막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병조 정랑과  그 동조자들은  왕에게  또 다그친다

" 전하 이때 까지  영상을  이산해 같은 자에게 맡겨 왔었기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이 아니옵나이까?  지금 까지  영상의 하는 짓을 대간에서  못 마땅해 하였으나  전하의 판단을 흐리게 한 이산해는 영상의 자리를 그만 두게 하여야 합니다."

" 경들은 내가 마치내 한몸 살기위해  도성을 버린 것 같이 생각하는데  종묘사직을 버리고 내가 오죽하면 몸을 임시로 파하여  후일을 기하고저 한것 뿐인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가? 정 그렇다면다시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갰다 "


이 광경을보고있던  유성룡이  관을 벗더니 엎드려부복  한다 .

"전하 신이 바라옵건대 이산해와 더불어 나라를 잘못 오도한 죄를 받고자 하나이다 "
한다.

 

좌찬성 최황도부복한다

" 전하 ,적이 들끓고있는  도성으로 돌아가신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신도  영의정 이산해와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옵니다만 신은 전하께 잠간  딴곳으로 피하시와 후일을 도모 코자  하였사온것이옵니다 "
왕이 노기어린 말로  최황에게 묻는다

" 그러면  경의  의견은  영의정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


" 신은  도성 근방으로 잠시 피하셨다가  북 3도  병력이 보충되는대로  왜적을 몰아내자는 말씀입니다 "

이말에 병조 판서  김응남이 아뢴다

" 말도 안되는 소리 . 지금 상황은 이나라 메마른 땅에 태풍이 불어와서 거대한 뚝이 붕괴되어  임시 피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거늘  전하께  모든것을 뒤집어 씌워 그 물길속을 뛰어 들라는 얘기인가? 신의생각으로는  평양까지  임시로 피하셨다가   북 3도 군사력으로 막지못한다면 명나라에  주청하여  원군과 같이  적을 몰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지금 대간들과  일부  신하들이  도성을  포기하자고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영상이  책임이 크다 하나  그자리에 있던  좌상이나 신의 책임이 크니  좌상과 신의 오국 지죄(誤國之罪)로  처벌 받겠습니다 " 

 

이에 왕이 소리가 높혀말한다

" 나라가  위급 한 이때도  내가 가만히 보니  동인서인 찾아 패당만 일삼는구나 .정 그렇다면  경들이 원하는  영의정만을 인시교대 하겠다 . "


대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전하  인사교대라니요 , 오국지죄로  단죄하시옵소서"

" 가만히보니 전쟁중이라  참고 있었는데  대간들 해도 너무 하는군 . 나는  그동안  경들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여  정치를 해 왔건만  지금 같이  왕이 왕 대우를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 차라리  임해나 광해에게  왕자리를 내 줄터이니 잘들 해보라"
왕의  심기가 극도로  악화되어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내 놓겠다는  말 까지나온다


이렇게되자  좌의정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진정 하시옵소서 나라가 위급한 이때  무슨 말씀이옵니까?  전하의  의견대로  인사교대로 마무리지옵소서"

".............."

임금의 자리 까지 내어놓겠다는 왕의결연한 말에  모두 함구 한다

 

왕이 그제서야 인사교대를 다음과같이 분부 한다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하고 좌의정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보한다 .우의정  최흥원을 좌의정으로 보하되 어영대장 윤두수를  우의정으로 보한다 "

 

 인사 발령후 임금은 골치아픈 머리를 쉬려고 개성 남대문을 올라 남쪽 도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는다

왕은 개성  남대문 근방에나와있던 노인들과 경비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 북 3도병력이  속속  도착하고있으니  개성 군민들은  안심하시가바랍니다 . "
하고  위유 한다

 

이때 한노인이묻는다

" 전하 ,듣자니  조정은 동서인으로   파당을 지어  싸움질만 하는 바람에  이지경이 되었다 하온데 이런 때일수록 능력있는 정철  정승이라도 불러들이셔서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 노인장  참고하겠습니다 "
노인이  더 할말이 있다는 듯이 왕에게 말을 꺼낸다

 

"한가지 더말씀 올릴것이있습니다 "
"말씀 해보시오"
" 세사람이목을 베십시요"
" 세사람이라니?"
" 이산해 , 김공량, 임해군입니다 "


" 무슨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오"

" 이산해는 영상으로서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죄요 , 김공량은  내유별좌(內儒別坐)로서 궁궐을  잘 지키라고

명을 받고서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죄요 , 임해군은  무뢰배들과 망나니짓을 하여 종실을  더럽힌 죄입니다 "
"참고하겠소  "

 

동인 , 서인 하면서 자기들 당파의  세력만을  키워온  대신들이괘심 하기는 했으나  인재가  인재다운자라고는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은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

 

조정을 동인들이 장악한 이래 벌어진 임진난이야 말로  왕에게는  큰 부담이아닐수 없었다 

왕은  서인인 윤두수를 다시발탁  우의정으로 삼았으나  아직도 조정은  동성인간의  반대를위한 반대로 얼룩저있었다 

 

왕은  노인의  말을 존중하여 강계에서 위리안치죄를 받고 은거중이던 정철을 불러들인다

 

서인의 대표격인 정절의  등장과함께 개성부에서 세로운 무당파 인재로 한대용, 한박, 조욱, 한수,임대창, 전세룡,장호신등을 불러들인다

무당파  개성 인재를  대거 등용한것은 동서인들의  당파성을  배제 하기 위한  선조의고육지책이었다

 

조정이 서인출신 정철을  조정에 불러들이자  금방  바람이 일기시작했다

 

즉  피난조정은  다음날 또 시끄러워진것이다

이때  서인인 우부승지 신섭이  서인의두목인 정철이살아 돌아오자 동인 두목인 유성룡에게  공격을 가한다

" 일국의  국상이  오국의 죄(誤國의 罪 -나라에대하여 잘못한죄)로 탄핵을 당했는데 좌상이라고  어찌하여 그 죄를 면할수가있겠습니까? "

하고 들고 일어 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간원, 사헌부 양사가 벌떼 같이  일어나 졸지에  이산해 영의정이  탄핵 되면서 좌의정으로 있다가  별안간 영의정이 된 유성룡을 다시 탄핵한다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이

"  이산해 영의정이 물러 나면 됐지..... 좌의정으로 얐다가  영의정이 된 분에게 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무엇이오?  조선왕국을  아주 식물 왕국으로 만들 속셈이오?"


하고 반박한다

역시 무당파인 부제학 홍린상이 거든다

" 이런 비상 시국에  유성룡 영상 같은 인물이 흔하지 않거늘  해도 너무들 하오. 더구나 임명된지 하루 밖에 안되었는데 ...."

 

임금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임금 노릇하기  힘들구나 ...지금 왜적이  코앞에닥아 왔는데 )

왕도  일본 특사로 다녀왔던  동인  김성일이  별일이 없을것이라는  왜국 사정을 보고받은 이래 동인에대한 불신이  마음속에 싻트고 있는 것만은  부인 할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파  개성 인재들을 대거  등용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통치않았다

 

 임금은 동인과 서인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더욱 솟구쳤다

동인들이나  서인들이 아무리  아전인수 격으로  서로 가 서로를  비방해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로 작정을 한것이다 

임금은  다시바꿔서 분부 하였으니 유성룔이  영의정으로 임명된지 하루만이었다  

 

영의정  유성룡  파직

좌의정  최흫훤  영의정

우의정  윤두수  좌의정

기성부원군 유홍 우의정

 

이렇게 내우 외환에 시달리는  왕에게  기쁜 소식이 들어왔으니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온것이다.

 

" 명나라 신종 황제께서   왜놈들에대한 소식을 물으시기에 왜군이  도성 가까이  까지 처들어왔다고말씀 드렸더니 신종 황제께서는  왜적에 대한 정보를  수시로파악하되  군관들로 하여금 적을 막기에는 편리하고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게 지세(地勢)가 험(險)한곳을 막도록  독려 하여  적을 막으라고만했습니다 "

" 증원군을 보내준다는 말은 없었던고?"


" 없었습니다 "

좌의정 윤두수가  아뢴다

" 전하 구차하게 명나라에  너무 굽실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남도는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중 전라도는 아직 건재 하오며 북도 는  병졸들이  용맹하고  한경도지방에는 험한  산악이 많아서  너무 걱정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일본군은 일단 전선을 수습한다음 29 일 2 번대의 가등청정과 1번대장인 소서 행장이 충주성에 입성하여 서로 만나 한성 공략에 대한 논의를 벌렸다 .

소서행장이 먼저 입을 열어

"장군 , 수고 많았소 , 이제 조선에는 우리와 대적 할 장수가 없소 , 신립도 죽고 . 이일도 아마 죽었을 게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일은 적의수도인 한성을 하루 속히 점령하여 조선 왕을 사로 잡아 항복을 받는것 밖에 남지 않았소 , 장군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하고 가등청정을 바라보고 의견을 묻는다.

 

가등청정은 미리 준비 하고 있었는지 작전 계획을 털어 놓는다

"1번대가 잘 싸워 줘서 그동안 승승 장구 하였습니다.

제생각으로 는 출발전 태정대신 께서도 말씀이 있었지만 , 조선의 서울인 한성부는 천혜의 요새로 북쪽에는 험한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 산성이 있습니다 ,

 

도성 남쪽에는 한강이 있어서 도강하는데 좀 애로는 있을것 같습니다. 장군 께선 우로인 여주를 경유 수심이 얕은 곳인 양근을 택하여남한강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진격해 들어 가십시요 ,

 

나는 좌로인 음성, 죽산, 양지를 거쳐 용인 방면으로 진출 뒤 딸아오는 부대와 합류 남대문쪽으로 향하겠습니다 "

"예, 좋습니다 , 하지만 조심 하십시오 , 죽주산성과 용인성, 남한산성등은 적이 그냥 내 주지 않을것입니다 , 특히 한강 도하가 좀 어려울것입니다 "

 

소서행장이 걱정 해준다 ,

"걱정 마십시요 , 이제 적장들이 다 죽었 는데 무슨 걱정 입니까? 적의 서울인 한성에서 만납시다"

조선의 서울 한성을 공격 작전은 왜장들 간에 합의가 되었다 .하지만 소서 행장은 가등청정이 조선의 관문이라 할수 있는 남대문으로 먼저 진격한다는데 대하여 내심 불쾌 하였다.

소서행장은 한성 의 관문을 먼저 당당하게 자기가 먼저  처들어가 점령을 과시 하려는 공명심 때문 이었다 .

 

그러나 한편 소서행장 으로서는 그동안 1번대가 전투를 수없이 먼저 선두를 달려 왔기 때문에 병사들이 많이 피로 해 있는점을 감안 동대문 방향으로만 일찍 들어 간다면 오히려 자기 에게 유리 하게 전개 될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이로서 일본군 9개대는 조선의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를 완전히 점령하고 각군을 요소에 분산 배치 되었다

 

그 배치상황을 보면

 

육군병력

 

1번대 소서행장(小西行長) 18,700명 충주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 22,800명 충주

3번대 흑전장정(黑田長正) 11,000명 황간

4번대 모리길성(毛利吉成) 14,000명 현풍

5번대 복도정칙(福島正則)25,100명 문경

6번대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15,700명 선산

7번대 모리휘원(毛利輝元)30,000명 성주

8번대 우희다수가(宇喜多手家)10,000명 부산진

9번대 우자수승(羽紫秀勝)11,500명 부산진

 

계 158,800명

 유군 지원 수군병력 12,000명

    

조정에는 매일 변보가 열 차례 이상 계속 들어 왔다 .

 

이일의 보고가 들어 온것도 4월27일 이었다 ,

서울의 인심이 술렁 거렸다 , 궁중 에서도 서행(西幸...임금이 난을 피하여 가는것 )할뜻을 비치기 시작 했다. 대신들은 임금이 서행하리라는것은 꿈에도생각 할수조차 없었다.

 

종친들도 혹시 종묘사직을 버리고 가는것이 나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였다 . 임금도 종친입에서 우려 목소리 라도 나올듯하면

"과인이 어디로 가겠는가?

 "하였다

27일 밤늦게 까지 , 대신들은 퇴궐을 못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 으나 뾰죽한 수가 없었다 . 적을 막아 낼 장수가 뿐만 아니라 무기 준비도 없고 싸울 병사 들도 없다 .

 

어전 회의 결론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일단 이어 하는것이 옳다고 하는것으로 귀결되었다 ,영상 이산해가

" 이렇게만 있을수 없나이다

임금께서 이곳에 적이 들어온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시는 같은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않됩니다 ? 일단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셨다가 후일을 기함이 옳을까 합니다 "

 

임금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있는 참이었다

왕은 서울 수비 대장을 우의정 이양원(李陽元)로 하고 이전(李餞)을 좌위대장으로,변언수(邊諺琇)를 우위대장 , 신각(申恪)을 중위 대장으로 삼았고 전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를 맡겼다

 

경기 감사 권징(權徵)에게 명하여 백성과 병사들을 징발 얕은 곳은 깊게 강을 파내어 왜군이 도강 못 하도록 준비 토록 하였다

 한성 수성대장 이양원 은 얼떨결에 수성대장은 되었으나 병조에서 뽑아온 군사는 4500명뿐이고 성을 조사 해보니 성위를 낮게 쌓아 몸을 숨겨 싸울만한 성가퀴가 3만곳뿐이고 활 가진자도 7200집으로 쏠줄도 모르는 오합지졸 들이었다. 그것도 장정들은 모두 도망가 찾기도 힘들었다.

    

4월28일 ,

왕은 어전 회의를 소집하였다 ,

대신들은 나라가 위급하니 만일에 대비 왕세자를 책정할것을 건의 하여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러 하였다 .그리고 백관들 에게는 모두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근무 하도록 지시 했다

 

4월29일 ,

저녁 믿고 있던 신립의 패보가 이일의 장계로 확 실 해지자 임금의 서행(西幸)결심은 더 확고화 되었다. 동상(東廂.....동쪽 집무실)에 나가 서행 하기로 대신들과 결의 했다 .

서행을 강력히 주장한것은 영의정 이산해 였다 .

" 우격(羽檄....급보)에 의하면 우리 조선군으로는 적과의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모든 조건이 싸울수 없는 상태 입니다. 우선 평양 까지 가셨다가 명나라의 도움을 요청 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

    

이 때 장령 권협(權俠)이 나선다

"않됩니다 . 도성을 버린다는것은 우선 종묘 사직을 버리는 것이며 백성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 결사적으로 한성을 지켜야 합니다 , 않됩니다 "

    

이를 지켜 보던 체찰사 유성룡이 타일렀 다

"권 장령의 충절은 이해 하나 만일에 하나 적장 앞에서 임금이 수모를 당하면 어쩔것인가?,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한 불부터 끄려면 서행(西幸) 밖에 없다고 대감들 께서 의견 일치를 보았으니 그리 알고 후일을 기하세"유성룡이 권협을 타이르고 난다음 말을 꺼낸다

 

"전하 께서는 떠나기 전에 왕자 들을 손수 각 도에 파견 하도록 하여 백성들 중에서 근왕병(勤王兵....임금에게 충성을 받치는 병사)를 모집토록 함이 좋을듯 하옵고 세자인 광해군만 임금님을 보호 하기 위여 동행 시킴이 가할것으로 사료 됩니다" 한다

 

 

선조는 유성룡의 의 말에 따라 하기로 하고 장남 임해군을 함경도로 김귀영, 윤탁연을 대동하여 떠나게 하고 , 셋째 순화군은 강원도로 황혁 과 이기가 대동하고, 군사모집을 호소차 양도(兩道)로 보냈다 .

 

원래 유성룡은 도 체찰사(體察使)로서 당연히 전선(戰線)을 누비고 다녀야 할 사람인데 전선에는 신립과 이일만 내 보내 놓고 자기는 전방에 직접 나가 본일이 없었다 .

 체찰사란 국가의 전란이 일어 났을때 임금을 대신하여 전선에 직접 나아가 군무(軍務)를 감독 해야 하는 직무 였다

그러나 그는 일선에는 전혀 한번도 나가지 않고 조정에 앉아서 각종 지시만 하고 있지않은가?

 

그러니 상주와 충주에서 이일(李溢) 같은 자가 올리는 서계(書啓....보고서)나 장계를 읽어보고 왕 에게 재 보고 하는것이 고작 이었다 ,

만일 일선에서 못된 장령 들이 글로 거짓 보고 해도 믿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

 

더구나 도체찰사는 대개 원수(元帥)도 겸직 토록 하는등 그 중요성은 전쟁에 있어서 왕의 명령과 똑 같은 직책 으로 그 중요성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 할만큼 중요한 직책 이었다.

체찰사 제도는 고려말 부터 조선에 걸쳐 임금 대신 군사를 통활 해 왔는데 조선에 와서는 주로 영상급 에서 임명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영상 출신 체찰사들은 병법도 잘모르면서 병법을 잘아는 장수들의 작전(作戰)에 까지 관여 하여 전략을 그르치게 하는등 종종 물의를 일으키는 폐단도 많았다

 

국왕이 일시적 몸을 피하기로 결심하자 ,왕은 도체찰사인 유성룡에게 지시한다  

 

"유 체찰사는 그동안 조정 일에 바빠 군무(軍務)에는 소흘히한감 없지 않으니 이번 한성 방어전 에서만은 한성에 남아 직접 앞장서서 적들이 서울시내 까지 못들어 오게 철저히 방어 해주시오 ,과인의 평양행은 도승지 이항복과 영의정( 이산해)과 같이 갈 것이니 과히 염려 말기 바라오"

 

 임금도 유성룡이 임금같이  궁궐 주위 에서만 맴도는것 보다도 도체찰사로서 .군복( 융복)을 입고 일선에 직접 싸우고 있는 순찰사들과 함꼐 생사를 같이 하기를 바랬 으나 그는 조정인 중앙 에 만 있으려 하고 일선에 나갈 생각은 전혀 않았다 

    

왕도 그동안 일선에 않 나가려는 그를 굳이 강요 하지는 않 았었다

 

임금은 사태가 급박 해지자  삼상(三相-여의정,좌의정,우의정)들 의 행동 도 심기 편치 않게 보기 시작 했다 ,

 임금이 유성룡 에게 왜적을 도성에 머물러 지키 라고 지시 하자 유성룡은 겁을 내면서 당황 하지 않을수 없었다 , 사실 유성룡은 참모 역활은 그대로 해왔지만 체찰사 명을 받고도 군사들을 지휘 할만한 기개도 없는 한낟 선비에 불과 했다.

    

그런 그,에게 패배 일로 위기에 빠진 조선 군의 체찰사로 직접 서울 방어전에 앞장서라는데 대해서는 차라리 전투에 죽으라는거와 다름없었다 , 나라를 위 해 죽는다는것은 좋으나 명분이 없는 한낟 패적지신 (敗積之臣)으로 낙인 찎혀 죽는 다는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유성룡의 인물됨을 모를리없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임금께 계청하였다

"전하 , 체찰사 유성룡 대감은 인물이 전형적인 문관에 불과 합니다 지금 까지 경상도 나 충청도로 동분 서주 해야 할 체찰사로서의 직책을 못하고 있는것은 .병법에는 능하지 못한 탓입니다 .

 집을 지을때 기둥과 석가래의 용도가 다르듯이 그분은 이번 한강 방어전에서 제외시키고 차라리 이양원 대감을 유도대장으로 명하여 수도 방어의 총책임을 지우는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왕도 도승지 말에 수긍 안되는바 아니나 군사 얘기만나오면 태평성대만을 주장해온 3정승들의 행동이 내심 괬심하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직접 경험 해보라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체찰사를 임명 했고 , 한성 수성대장을 임명 한것도 그런 임금의 속셈이 있었다

 

왕은 도승지 말대로 이양원에게 수성대장을 유도 대장으로 승진 시켜 수도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

 선조가 서행을 결정 하자 궁궐내 가 어수선 하였다 밤이 깊자 이일의 장계가 또올라왔다 ,

"금명간 , 적이 반드시 도성에 쳐들어 올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왕은 걱정되지않을수 없었다

 

 

4월30일은 서울 장안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젔다

새벽에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과 인마들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

 임금과 동궁은 융복(군복)을 갈아 입고 말을 나섰고 중전등은 덮게 있는 교자를 탔다.궁인들은 통곡을 하며 뒤를 딸았고 또 그뒤를 종친과 문무관을 합쳐 100여명이 그 뒤를 딸았다.

 

 

 

왕은 먼저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板)을 떼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임금 일행이 인화문을 나서 경복궁을 나와 서대문쪽으로 지나가고 있을때 많은 백성들의 곡성이 여기 저기서 터저 나왔다.

하늘도 안타까운지 비가 그치지 않고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그칠 줄 몰랐다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 신하들을 이끌고 서울을 버리고 왜군을 피해 할수 없이  북으로 정처 없이 떠나고 있는것이다.

비가 처량 하게 캄캄 한밤을 하염 없이 주룩 주룩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달이 없는 비오는 날의 밤은 한치의 앞도 내다 볼수 없었다. 오직 도승지 이항복만은 꺼질세라 비를 피해 촛불을 들고 가는 길을 인도 했다 ,

 

임금의 피난 행열이 돈의문을 나서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뒤 따랐다 .우의정 이양원은 유성룡이 체찰사직을 못함에 따라 서울 사수 의 방어 사령관으로 대신들중에는 홀로 한성에 남게 되었다 .

 

좌찬성 최황, 우찬성 정탁, 좌 참찬 최 흥원 , 이조 판서 이원익 , 호조 판서 한준, 병조 판서 김응남, 형조 판서 이증, 대사헌 이헌국, 도승지 이항복, 좌승지 이충원 , 우승지 이정향, 좌부승지 노직등 100여명이 임금의 뒤를 따라 호종(扈從....임금의 뒤를딸아 쫓아가며 모시는것)하였다.

 

 

임금이 사현(沙峴)에 이르러 말을 잠간 세우고 한성 쪽을 바라 보니 궁성쪽에 불 이났는지 하늘이 벌겋다 , 남산밑 대창 근방에는 불기둥이 솟는다 . 일부 백성들이 텅빈 왕궁에 뛰어 들어 도둑질하려는 자들의 행위가 분명하였다

왕이 묻는다

"웬 불이냐?"

도체찰사  유성룡이  대답한다

" 불이 난것이 아니고 원래  이곳에서 한성쪽을 보면 항상  훤하게 보입니다 ,도성에  백성들이  켜놓은 불 때문일것입니다."

 

" 적들이 한성 가까이  닥아오고 있는데 백성들은 어찌 되는고..차라리 죽으나 사나  궁궐에서 왜적들과 싸우다 죽을 것을 그랬구나 "

" 전하  임금은  그나라의 상징입니다 .전하가  적의 포로가 되는 날에는  우리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이  고구려 도성인  평양에서  당나라  까지   5000여리를  끌려 가면서  가진 고통을 당하고  당나라  소제 묘에가서 무릎을 꿇고 나오지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아닌 사죄 까지 했습니다

 

만일  일본군의 포로가 되신다면  당나라 군사 보다도 더 포학한  왜놈들이  전하를 그냥 두겠으며 임금이 없는  조선 백성들은 그냥 두겠습니까?  비록  몸을 피하시지만  피하지  않다가  적의포로가되는 것 보다  피하였다가  적을 물리 치는 것이  나라와 우리백성들을 지키는 현명한  생각이신 줄로 아룁니다"

 

왕과  유성룡이 이런말을 하고있을 때  좌찬성  최황이  끼어든다

 

"전하 저 불은  누군가가  궁궐에 지른 불일지도 모릅니다 .신이  어저께 밤에 거리에  누군가가 써붙인  대자보 글을 보았는데  불만이가득찬 글이었습니다 "
" 무슨 글이더냐?"
" 도망치려고 준비한 짚신은 궁궐에서 왜놈들을 막기 위한 도구라고 누가 믿을 것이며

 조정 신하라는 자들은 군사상 급한 격문이왔다갔 다 하는데도

  전하의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더냐? 

 아 , 이 나라가 이 지경이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군신 상하가 이나라 사직을 위하여  같이 죽기 살기로 도성을 지킬생각을 않고  무엇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위에서 임금을 호종하던 대신들은 최황의 충언에 모두 몸둘것을 모른다

 

이때 이조 판서로있다가  물러 난 기성부원군 유홍이 나선다

 

"좌찬성 ,자네  말조심 하게 .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 궁궐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자네 가족들은  지금 도성 안에 있는가 아니면 시골에있는가  대답 해 보게  지금 자네 가족들을  미리 피난 시켜 놓은 주제에  누가 누구를 보고  도성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성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고  허무 맹랑한 소리를 하나?"

".........."

 

사실 최황은 자기가족들을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보고가 있자마자  미리  시골에 자기 가족을 피난 시켜 놓은 것을 유홍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최황도 만만치않았다

" 송당 ,자네가 무엇인가?  그러면  좋다 .자네 가족은  도성안에 있나 없나  대답해 보게 "


" 내가족도  피난 내 보낸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자네는 서울 도성쪽에 불빛을  마치 우리 백성들이 불을 지른 것 같이   이상하게 해석하니 하는 말일세"

 

암금은  두사람이 말싸움을  가만히 듣더니

 

" 모두들  듣기 싫다 . 오죽하면  모두들 피난들 시켰겠나 .하지만  경들은  나쁜사람들이다 .내 가족만  중요하고  도성안의 많은 우리 백성들의 안전은  남의 일이드냐 . 과인의 지금 처지나 두사람 다 똑같다 ." 

 

 

임진왜란과 경복궁 화재의 원인을 두고  선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논란 거리다 


 선조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에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는 1592년 4월 30일자 기록이 있다.

 이와 달리 처음 만든 선조실록(宣祖 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이 황급하게 궁궐을 비우는 마람에  궁궐 나인들의 실화로 불이 난것으로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선조 수정실록(宣祖 修正實錄)은 인조~효종 때  기존 선조 실록을 수정하여 보완 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이며, 모두 42권 8책이다.

 

 

 이와 달리 선조실록(宣祖實錄) 5월 3일자 기록에는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만 되어 있어,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다.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궐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중략)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라고 적혀 있었다 "

 

이기록을 보면 왜군이 들어 오기 전에는 궁궐이 잘 보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당시의 상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 볼 때 화재의 원인을 백성들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피난가기도 바쁜데 백성들이 제나라  궁궐에 들어가 불까지 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익 때문이다

 

 

당시 경복궁 화재 사건을  선조 실록에서는   단순히 화재가 있었다고 기재 되어있던 것을  당시 상황을 마치 자기 눈으로 본것이나 처럼 백성들을 도둑놈으로 몰아서  궁궐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내고 불까지  질렀다고 기록하고있다,

특히 대북파 영수인  홍여순을 거론하면서  홍여순이  병조 판서로있으면서 부정 축재를 했는데  백성들이 몰려가서  불까지 질렀다고  강조 하고있다

정말 그랬을 까?

수정실록을 쓴 인물들은 인조시대 사람이니 선조시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작자들이다 

마치 눈으로 본것처럼 거짓말을 쓰고있는 것이다 

셍각해보자 

당시 왜군들은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군 해 오는 동안 닥치는 대로  조선사 람들만 보면 무차별  학살을 했다  

200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착하기만 조선 백성들은 잔인 무도한 일본놈들의  칼날이 무서워  저항에 앞서 일단 몸을 피할수 밖에 없었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재물에 욕심이 없기 마련이다

한성  백성들이 가족을 살리고 보아야지  언제 재물을 챙기겠다고  궁궐 까지  들어가  도둑질 했겠는가?

여기서  왜군이  점령한 직후의  한양의 모습을 기록한  소서행장의 부하 였던 오오제키(大關 定祐)의  눈으로 직접 본 체험담을 들어보자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이 성안에 모습을 보니 쥐새끼 한명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은 텅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서야  전각을 자세히보니 대궐은  구름위에 솟아있는 것 같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있었으며  그 아름다운 모습은  소문대로 중국 진시황제가 있던  궁궐이  생각나게 하였다 .

문과 기둥은  그 육중한 모습과  처마와 처마의 이음매는 왕과 같은 호랑이의 기개를  닮아 보였다

왕좌를 보니  금빛찬란한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에 오르며 구름속에서  노래 하는 것 같았다

그많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단청을 했을 것이니  어찌 감탄이나오지 않으랴

방마다 문이 모두 문이 열린 채 궁문을  지키는자가 없는 것을 보니  참으로    처량맞게 보인다

그토록 용맹하던  소서행장도 왕좌의 위엄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소서행장의  눈을 잠간 훔쳐서 보았는데  정말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고니시가  빈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자리가  신성하고 고아한  자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떠 올랐는지 두눈에 눈물이 매치는 것 같이보였다

옆에 있던 유마, 오오무라 ,소,를  흘깃 보니그들의 눈에도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大關定祐...오제키의  조선 정벌기에서)

 

 

6.25 사변 때도  중앙청에 불을 지르고 도망 갔던 것은  서울 시민이 아니었고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에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갔던 사실만 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선조 수정 실록의  기록이다

 

석교(石橋)에 이르니 날이 새면서 멈쳤던 비가 다시 억수 같이 쏟아 진다,

왕이 입고 있는 군복이 또다시 내리는 비로 흠뻑 적셔들기 시작 했다

누구하나 임금의 비를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올 겨를이 없이 황망중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기 감사 권징이 자기가 입고 있던 군관용 우의를 벗어 임금에게 닥아가 왕을 덮어 드렸다.

벽제역에 도달 하니 , 비가 아까 보다 더 내려 친다,

    

날이 다시 저물기 시작 했다.

어가가 어느덧 임진강이 까워지었다

임금이 느닷  없이 묻는다

 

" 여기가 파주 아니냐?"

" 예 그렇사옵니다 "
병조 좌랑 이홍로가  대답한다

 

" 그러면 우계 성혼의 집이이곳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
임금이 성혼의 집을 찾자 이홍로가  파주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임금이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한다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성혼은 이때 율곡이이가 죽기전에는  그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이이의 천거로  벼슬길이 여러번 있었는데도  학문에 전념할 뜻으로 거절하다가  이이의 권고로 의정부 좌찬성을 한때는 했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서인이지만  동서인의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난때 최영경과  정개청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동인들로 부터 두사람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낙향하여 파주에 머물고있었던 것이다

 

임금  선조가  그를 끔찍히 아낀 사람이었는데  임금이 이곳을 지난다는데도  나타나지않는 것이  섭섭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성혼이 그때 집에서 죄를 받고 있던 터라 감히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윗분의 부르심이없이 나가 뵙는 것이 오히려 불충이아닐가  하여 근신하고있었던 것이다

 

병조좌랑  이홍로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대가가  앞으로나갈수록  힘이들고 도망하는자가 속출하자 불평이 나오기시작했다

 

 

임진강에 도달하니 빗줄기가 더 굵어 지면서 강을 건늘 방법이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강물조차 눈에 들어 오지 않고 내리는 찬비가 뺨을 때린다

임진강이  임금의 행열을 가로막는다   

모두들 시커먼 강 물만 내려다 보고 있지 누가 나서서 임금이 건너갈 배를 대령할 사람이 없었다 ,

    

이항복이 행열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조그마한 정자옆에 목재가 널려 있는것을 발견 했다

"모두들 이 목재를 한개씩 집어 들고 강가에 쌓도록 하시오" .

대신들 할것 없이 모두 재목을 이항복이 시키는 대로 한곳에 모으게 한다음 다음 불을 붙이니 칠흑 같은 밤이 훤하게 밝아 지며 각자의 모습이 들어 나고 비에 젖은 군복이 열을 받아 김이 모락 모락 난다,

 

불빛은 강 양쪽을 환히 비추기 시작 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인근 동네를 수소문해서 배 여섯척과 어부 여섯명 을 찾아 데려 왔다 .

먼저 임금과 왕비 세자, 왕자, 중신들을 따로 태웠다.

 

불빛에 보니 임금의 용안에 눈물이 흘러 내린다,

좌우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배는 물살을 가르고 삐그덕 삐그덕 임진강 저쪽을 향하여 나갔다

나머지 다섯척도 닥치는대로 빨리 오르라 하니 서로 먼저 타려고 상하 구별 없이 아우성 이다 .

 

왜적 이 나라를 침공 하자 나라 의 체면 조차 무너지는 순간 이었다.

그래도 배에 탄사람은 다행이었다 ,

배가 부족해 반수 이상은 강을 건느지 못하고 발을 동동구를수 밖에 없었다.

강을 건느자 지금 까지 가마(轎)를타고 피난왔던 숙의(淑儀)이하 여인들도 가마를 실어 오지 않은 탓에 왕비만 빼고 말에 모두 올라 타고 쫓아가게 하였다

 

 5월1일  

 

동파관에 이르렀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 도성에  이미  왜적들이  입경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 평양 까지가려면  아직도 요원한데   임진강을 막을 병력이없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적들에게 잡히겠습니다 "


경기감사 권징이 아뢴다

" 보고에 의하면  적들이 전하를 체포하라는  풍신 수길의  특명이  내려젔다는 정보입니다 ' 적들이  이곳으로 몰려 오기전에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동안  적의 도강을 지연을 시키려면  병력이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오니  대가 (임금이탄가마)를  싫고 온 배가  아무래도  적의 수송선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사오니   아깝지만 배를 소각 시키고  사공들은  대피시킴이 옳을 가 하옵니다 "


" 안된다 . 과인과 시종 대간들을  이렇게 안전히  건네준  사공들의 귀한 배를  소각 시키다니 말이 되는가? "

" 전하  시간이 급하옵니다 ,윤허를 내려 주옵소서"
" 안된다 . 그냥 이대로  빨리가자"
" 전하 . 도저히 불가 합니다 . "

경기감사의  간절한  다그침에  왕도  더이상 벋힐수 없었다

 

" 그러면  사공을 설득하여 잘 이해 시키도록 하고  전쟁이 끝나면 응분의 보상을 해주도록 약속하라 . 그리고   사공들이  혹시 적들에게는 적들이  들어오면  이용 당할 우려가 있으니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

" 전하  또 한가지있습니다 "
" 또 무엇인고?"


"  왜적들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우리 백성들을 학살한것으로 보아 임진강변의 민가가 적들이 들어오면  적에게 빼앗기는 동시에  전하의 어가를  배로 도선 하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모두 살해 당할 염려가있습니다  .들리는바에 위하면  왜적들은  민가에 무차별로 불을 지르고  여자들은 강간을 일삼는다합니다 "

 

 

"임진강  나루 백성들에게 모두 피하게 하고  민가는 백성들의 동의를 받아 소각시키되   백성들에게는  큰 재산이니  후일 임금이 책임지고  보상 할것이니  소각에 동참하도록  하게 하라" 

 

다시 날이 어두 웠는데 밤 10시가 되어도 임금에게 수라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

도승지가 내궁들 보고 먹을 것을 갖다 드리라 하나 준비 해 온것이 없어 밥을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

 

 

이때 마침 ,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음식을 준비 해와 비로서 허기진 배를 풀칠은 했다 ,

배를 충분히 채우지도 못하고 백관들은 근방 촌가에 흩어저 잠을 청하였다

 

선조는 잠이오지 않았다

도성을 잃어 버린것도  그랬지만 어가를  안전하게 옮겨준  사공들의  집과 배를  모두 소각시키라고 한 명령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임금일행은 동파관을 떠나 연안 적소(延安 謫所.....윤두수가 귀양가있던 장소)에 도착 하니 임금이 무슨 생각인지 서인으로서  죄를 짓고 연안에 은거 하고 있는 윤두수(尹斗壽)를 찾는다.

윤두수를 부른다는  어명에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잔뜩 긴장 한다

윤두수는  서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성룡이긴장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윤두수가 임금에게 나오자

 "경을 특별히 방면 하여 오라 한것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여 경의 지모를 국가를 위하여 발휘케 함이니 과인의 뜻을 저바리지 마오 "

하고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씀 하고 왕이 친히 차고있던 청직낭 (靑織囊..푸른색 주머니)를 풀어 주면서

"정(精)표로 별로 줄것이 없구먼 ......"

하면서 내준다

 

윤두수가 감격 하여 몸 둘바를 모르며 임금의 방을 나왔다

선조는 윤두수를 잘안다

윤두수는 명석한 머리와 추진력이 있다 ,

더구나 그는 중국어에 능하였고 학문을 많이한 준재였으며 시국관도 뚜렸했다

그런 그를 시기 하는것은 지금 조정의 실세 행세를 하고있는 동인(東人)출신의 이산해와 유성룡등 일파의 농간으로 아까운 준재를 썪히고 있었던 것이다,

 

또 임금은 이들 동인들 이 호종 하고 있는 대신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이 동파관에서 웬 젊은이가 지나감 으로

"거기 가는 선비는 누군고"

하고 물었다.

 

"신은 좌찬성 최황(崔滉)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입니다"

임금은

"오 , 그대가 , 공신(功臣)의 아들이구먼 , 자네는 마땅히 의(義)로서 나와 같이 할지니라,"

하면서 자색 혁대를 풀어 주시면서

 

"이것을 허리에 차고 항상 과인을 잊지 말라"

하고 그윽히 최유원의 얼굴을 처다 본다

"황공 하오이다 , 죽음으로서 전하를모시겠나이다"

하였다 .

 

왕은   앞서 좌찬성  최황의 가족들을 미리 대피 시켜 놓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내심 괏심  하게 생각했었지만 임금자신도   사실상  피난하고있는 입장인지라  입을 다물고있다가  최황의 아들까지 나서서 임금을 호종하고있는 사실을  알고  최황에대한 오해를 그제서야  풀었다

 

왕은 외로웠다.

왕은 지금 까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대신들에 대하여 가만히 피난중에도 대신들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아직도 자기 파 사람들 끼리 끼리 행동하는것이 눈에 띄므로 이것을 바라 보는 왕은 못 마땅 하였다. 

특히 영상들은 이제는 노회(老獪)한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지금 전방에서는 젊은 조선의 장병들이 피를 흘려 왜적과 싸우고 있는데도 자기 한 목슴 부지 하려는 자들이 임금을 모신다는 핑게로 굳이 평양 까지 딸아나서는 저의를 알수 없었다.

 

 왕은 패기 있고 참신한 젊은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 더구나 왕은 피난중에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고 마음을 나눌 인물이 없었다 . 모두 노회한 화술로 왕의 의도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

 

 

 

대가(大駕)가 개성으로 향하기에 앞서 점심때가 되었다 , 임금께서 식사를해야 할텐데 도승지 이항복이 임시로 솟을걸어 놓고 식사 준비하는 장소로 가보니 식사를 만들 취사병이 보이지 않는다 .

 

 

병조 판서 김응남이 이리 저리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장단 부사 구효연(具孝淵)을 찾았으나 그도 보이지 않는다.조금후 이항복이 간신히 식사 준비를 해왔다, 왕과 왕비만 반찬을 약간 준비 되었고 동궁(세자)은 그나마 반찬도 없었다.

 

경기 감사 권징을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 보니 권징이 잠에 녹아 떨어저 있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깊은잠 에서 깨어 나지 않고 있었다. 200년의 조선 왕조 개국 이래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력앞에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윤리 조차 땅에 떨어 지는 순간이었다

 

 임금은 중추부사 이기(李旣)를 시켜 임진강가에 임금과 신하들이 타고온 배가 어찌 되었는가 물었다

"잘모르고 있아옵니다. 왜적이 이용 할까 봐 강남쪽으로 못가게는 해놓고 왔습니다""

한다.

 

"쯪쯪 , 영상들은 무얼 하는고 .....,즉시 군사 몇몇을 보내 타고 건너온 배를 모두 강속으로 침몰 시키도록 하고 임진강 남쪽 민가에 백성들은 일단 왜적 처들어 오면 모두 그들로 부터  희생  될 가능성이 있으니 잘 설득 하여 산속에 피신 하였다가 과인이 다시 적을 물리 치고 환도 할때 되돌아 오도록 하되  추후 난리가 끝나면   침몰시킨 배와  소각된 자옥들은 나라에서 보상 한다  했거늘....,

 

 다시한번  백성들레게  이해를 시키라 .  전쟁이 끝나면 민가를 나라에서 다시 지어 주곘다고 하되 불을 지르는  이유는   왜군들이 민가의 집을 헐어 뗏목으로 재활용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일러라 "

하고 지시 한다.

 

5월1일

 

, 왕은 동파관에서 대신들을 불러

" 어디로 가야 할꼬?"

하고 물었다

모두 엎드려 몸둘바를 모르고 말을 않고 있다 . 이때 도승지가 나서서 아뢴다

"우리 조선군 으로 서는 왜적을 막아낼 여력이 지금 없아 옵나이다,

 

신이 듣기 에는 지금 가등청정군이 한강 남쪽에서 도성으로 들어 오지를 못히고 도강 준비에 몰두 하고 있는바 , 이들은 북쪽 오랑캐와는 달라 섬나라 출신들로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도강은 시간 문제 입니다 ,

 

그리고 소서행장군은 여주 얕은곳을 이용 양평을 거처 이미 한성으로 진격해 들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 그나마 병력 배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파죽지세로 처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럼 , 유도 대장 김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고?"

임금이 다시 도승지 이항복에게 묻는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1000명은  한강에서 적의 도하를 막기위해 제천정(濟川亭...지금의 용산구 보광동)에 사령부를 차려 놓고 있는데 왜적의 조총탄이 빗발치듯이 정자위로 떨어저 군사들이 많이 도망치고 전의(戰意)를 잃고 어쩔줄 모르고 있다 하옵니다 "

"아, 어찌 하면 좋을 꼬? .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주위에서 반응이 없자

"왜들 말이없는가?"
하고 역정을 낸다

"............."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 처럼 말이  없다 "

" 우부승지  신섭"
"예. 경은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라 "

 

피난길에 바쁜데 돌아 가라니 기가 막힌다

자기귀를 의심하고  무엄하게 다시 묻는다

" 전하 , 어찌하라 하옵신지?"

" 한성으로 다시 돌아가란 말이다 "

 

" 도성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라 하옵신지?"

" 유도대장 이양원과  상의하여  왜적과 전투가 심해지면  백성들이 희생자가 속출 할것이니 안전하게 북한산이나  고양땅으로 피신하게 도성백성들과  군관들을  위유(慰諭)하라 "


우부승지  신섭은 겁이더럭났으나  왕명인지라

" 수행 하겠나이다"

하고  물러난다 

 

" 병좌좌랑  이홍로 "
부복 하고있던  이홍로가  소스라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감히 임금을 올려다본다

" 왜 놀라는가?"
" 황공하오나 왜적이 한강가에 벌써 도달했다 하옵는데..."

 

" 그러니까  백성들을  안전한곳으로  피난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오. 유도대장과  도원수가 한강선을 지키고 있는데 백성들을 위유하라는  내명령이  거북한가?"

"황송 하옵니다 "

 

병조좌랑은 병조판서 바로 밑에 참판, 참의  다음 벼슬이다

병조좌랑은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도성이나 대궐의 순라군이 자기편의 식별이나 비밀의 보장을 위하여 쓰던 암호나 신호인 군호를 관장하였으며  임금에게 드나드는 장졸들의 이름을 기록해서 승정원에 보고하는 일을 맡고있었다

왕은 대궐을 떠나  있는 마당에  병조 좌랑이 할일없이 동파관 주위를  맴돌지 말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유나 하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듣고만있던 도승지 이항복이 두사람이 왕의 방을 나가자 들어와  아뢴다

 

"잠시 의주(義州....지금의 신의주)로 가 계시 댜가  8로가  모두  적수중에 들어 간다면 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서 도움을 요청 하겠습니다 ."

이항복의 말이  끝나자 좌의정 유성룡이 말한다 

 

"  대가(임금의 가마)가  국경을 건느시겠다는얘기요?  아니면 도승지가  명나라로 찾아가서 명나라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요?  만일 전하가 이 나라를 벗어나는 날에는  조선은 이미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 좌상께서는  저의 뜻을 잘 이해 못하시는 군요 왜군이 물러 갈때 까지  명나라에 의지 하자는 얘기 입니다 " 

 

두사람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  말한다

 

" 과인도 명나라에  의지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은 하고 있었소  "

 

 윤두수가  아뢴다 

" 좌상  , 대가가 국경을 넘느냐  않느냐가  왜 나옵니까? 전하도  명나라에 의지 하신다고 했지... 국경을  넘는다고 했습니까?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나라를 버린다는 얘기인데 옛부터  나라를 버리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전하 ,

경기도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군사와 말은 아직 정예하고 강하며 함경도의  함흥과  경성은 험하기로 소문난곳으로 믿을만 곳입니다 더욱이  왜적들은  전선이 길어지면서 보급로가 끊기어  사기가 저하 되어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이 고개나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

 

좌의정 윤두수의 말에 좌중이 조용 해지고 침묵이 흐른다 , 모두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평양도 지키기 어려운가?"

하고 임금이 묻는다.

"..............."

암금의 말에 대답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임금의 어가가  동파관에서  다시 출발하여 개성으로 향하고있는데 주위에  호종하던 졸병들이 도망치거나  흩어저서  호위하는자들 조차  얼마 안되었다

 

이때, 서흥부사 남이가 병사  300명과 말60필을 가지고 왔으며 황해감사 조인득이 장막을 쳐 놓고 소현리에서  임금을 기다리고있었다 .

임금 일행은 그곳에서 잠간 머물고 판문점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판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풍덕군수 이수형이 대대적으로 음식을 마련해놓고 기다리고있는 바람에  호종하는  모든 문무관들이 배불리 음식을 먹을수있었다

풍덕군수가 군량미와 말먹이와 쌀 다섯석 까지 받치니  이를  호종하는 졸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에 개성에 도착하여 남문 밖 공서(公署)에  여장을 풀었다

 

5월2일  다음날이었다

 

병조 정랑 구성(具宬)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라가 공서를 물린다  

"전하가 제신들을  불러  입시 하라하신다"

별안간 여기 저기서  병조 정량이  외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나와 기웃거린다 

 

이때 헌납 이정신이  왕에게 입시하려고 나서자  한성 판윤 홍여순이  그의 옷을  뒤로 잡고말한다

"  이봐 자네  어딜 가려고 해? "

" 병조 정랑이  지금 소리 치는 소리 안들리나?


" 허허 , 도승지가 아니고 병조정랑이  어명을  하달 하는 것이 수상하이....."
" 그러니까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것 아니야?."

" 허허, 아까 좌의정과 우의정이 입시 했는데 영상  이산해의 잘잘못을 가리고있다네"

 

대간들이  황망중에 입시한다

 

왕에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개성부사의  방이었다  

영의정만 빼고  대신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사전에 미리 무슨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 그래 누가  먼저 말해 보라 "

임금의 목소리가 커진다

 

임금의 말이 끋나기가 무섭게 3사의 모든  관원들이  약속이나 한듯이입을 모아 얘기 한다

 

" 전하 ,영상 이산해는  전하께서 서울 왕궁을 떠날 때 한나라의 영상이라는 자가  임금께서  궁을 떠나시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빨리 피난 하시게 만든  아첨배입니다.

 전하가 서울에 계시게 하지 못하고 이토록 고생 시켜 드리는 것은 모두 이자의 농간 때문 입니다 청하 옵건대  왕법을 바로 세워 주소서"

왕이 노기 어린 소리로말을 받는다

"지금  피난들 가는 길에  왜들 이러는가? 영상 뿐만이니고 좌상과 좌 찬성 도 과인이  왜적에게 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유 때문에 몸을 잡시 피하라 한것인데  왜 유독히  영의정만 가지고들 그러는가?"

 

이에  사헌부 장령 황붕이 나선다

"전하 그당시로서는 영의정 말이옳습니다 ,그 당시 위 급함으로 보아 서 누가 도성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아니 할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랬다

임금에게  영상 이상해를  파면시키게 하려고  만든 좌석을  사헌부 장령 황붕이  깨뜨려버리자 .병조 정랑  구성이  황붕의옷자락을 밖으로 끌고 나와서 협박한다

 

"자네는  영상 이산해가  무엇을 잘 했다고  두둔하는가?  자네가 영상의 조카라고  해서 그러는가?"

황붕이 가만 있지 않는다

"그래  지금 어느때인데 병조 정랑이라는 자가  이따위 짓을 하는가? 임금이  왜놈들에게 잡혀서 왜국으로 끌려가면 이나라 백성들은 누구를 의지하여 이나라를 지킨다는 말인가?"

 

"잔소리 말고 있어...네놈 같은놈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이꼴이야 여봐라  이자를 다시 입시못하게 하라"

병조 정랑 구성이 병졸에게 지시하자  황붕의 앞을 가고 막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병조 정랑과  그 동조자들은  왕에게  또 다그친다

" 전하 이때 까지  영상을  이산해 같은 자에게 맡겨 왔었기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 된 것이 아니옵나이까?  지금 까지  영상의 하는 짓을 대간에서  못 마땅해 하였으나  전하의 판단을 흐리게 한 이산해는 영상의 자리를 그만 두게 하여야 합니다."

" 경들은 내가 마치내 한몸 살기위해  도성을 버린 것 같이 생각하는데  종묘사직을 버리고 내가 오죽하면 몸을 임시로 파하여  후일을 기하고저 한것 뿐인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가? 정 그렇다면다시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갰다 "


이 광경을보고있던  유성룡이  관을 벗더니 엎드려부복  한다 .

"전하 신이 바라옵건대 이산해와 더불어 나라를 잘못 오도한 죄를 받고자 하나이다 "
한다.

 

좌찬성 최황도부복한다

" 전하 ,적이 들끓고있는  도성으로 돌아가신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신도  영의정 이산해와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옵니다만 신은 전하께 잠간  딴곳으로 피하시와 후일을 도모 코자  하였사온것이옵니다 "
왕이 노기어린 말로  최황에게 묻는다

" 그러면  경의  의견은  영의정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


" 신은  도성 근방으로 잠시 피하셨다가  북 3도  병력이 보충되는대로  왜적을 몰아내자는 말씀입니다 "

이말에 병조 판서  김응남이 아뢴다

" 말도 안되는 소리 . 지금 상황은 이나라 메마른 땅에 태풍이 불어와서 거대한 뚝이 붕괴되어  임시 피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거늘  전하께  모든것을 뒤집어 씌워 그 물길속을 뛰어 들라는 얘기인가? 신의생각으로는  평양까지  임시로 피하셨다가   북 3도 군사력으로 막지못한다면 명나라에  주청하여  원군과 같이  적을 몰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지금 대간들과  일부  신하들이  도성을  포기하자고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영상이  책임이 크다 하나  그자리에 있던  좌상이나 신의 책임이 크니  좌상과 신의 오국 지죄(誤國之罪)로  처벌 받겠습니다 " 

 

이에 왕이 소리가 높혀말한다

" 나라가  위급 한 이때도  내가 가만히 보니  동인서인 찾아 패당만 일삼는구나 .정 그렇다면  경들이 원하는  영의정만을 인시교대 하겠다 . "


대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전하  인사교대라니요 , 오국지죄로  단죄하시옵소서"

" 가만히보니 전쟁중이라  참고 있었는데  대간들 해도 너무 하는군 . 나는  그동안  경들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여  정치를 해 왔건만  지금 같이  왕이 왕 대우를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 차라리  임해나 광해에게  왕자리를 내 줄터이니 잘들 해보라"
왕의  심기가 극도로  악화되어  세자에게 왕의 자리를  내 놓겠다는  말 까지나온다


이렇게되자  좌의정 유성룡이 아뢴다

" 전하 진정 하시옵소서 나라가 위급한 이때  무슨 말씀이옵니까?  전하의  의견대로  인사교대로 마무리지옵소서"

".............."

임금의 자리 까지 내어놓겠다는 왕의결연한 말에  모두 함구 한다

 

왕이 그제서야 인사교대를 다음과같이 분부 한다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하고 좌의정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보한다 .우의정  최흥원을 좌의정으로 보하되 어영대장 윤두수를  우의정으로 보한다 "

 

 인사 발령후 임금은 골치아픈 머리를 쉬려고 개성 남대문을 올라 남쪽 도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는다

왕은 개성  남대문 근방에나와있던 노인들과 경비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 북 3도병력이  속속  도착하고있으니  개성 군민들은  안심하시가바랍니다 . "
하고  위유 한다

 

이때 한노인이묻는다

" 전하 ,듣자니  조정은 동서인으로   파당을 지어  싸움질만 하는 바람에  이지경이 되었다 하온데 이런 때일수록 능력있는 정철  정승이라도 불러들이셔서  나라를 지키는데  일조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 노인장  참고하겠습니다 "
노인이  더 할말이 있다는 듯이 왕에게 말을 꺼낸다

 

"한가지 더말씀 올릴것이있습니다 "
"말씀 해보시오"
" 세사람이목을 베십시요"
" 세사람이라니?"
" 이산해 , 김공량, 임해군입니다 "


" 무슨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오"

" 이산해는 영상으로서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죄요 , 김공량은  내유별좌(內儒別坐)로서 궁궐을  잘 지키라고

명을 받고서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죄요 , 임해군은  무뢰배들과 망나니짓을 하여 종실을  더럽힌 죄입니다 "
"참고하겠소  "

 

동인 , 서인 하면서 자기들 당파의  세력만을  키워온  대신들이괘심 하기는 했으나  인재가  인재다운자라고는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은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

 

조정을 동인들이 장악한 이래 벌어진 임진난이야 말로  왕에게는  큰 부담이아닐수 없었다 

왕은  서인인 윤두수를 다시발탁  우의정으로 삼았으나  아직도 조정은  동성인간의  반대를위한 반대로 얼룩저있었다 

 

왕은  노인의  말을 존중하여 강계에서 위리안치죄를 받고 은거중이던 정철을 불러들인다

 

서인의 대표격인 정절의  등장과함께 개성부에서 세로운 무당파 인재로 한대용, 한박, 조욱, 한수,임대창, 전세룡,장호신등을 불러들인다

무당파  개성 인재를  대거 등용한것은 동서인들의  당파성을  배제 하기 위한  선조의고육지책이었다

 

조정이 서인출신 정철을  조정에 불러들이자  금방  바람이 일기시작했다

 

즉  피난조정은  다음날 또 시끄러워진것이다

이때  서인인 우부승지 신섭이  서인의두목인 정철이살아 돌아오자 동인 두목인 유성룡에게  공격을 가한다

" 일국의  국상이  오국의 죄(誤國의 罪 -나라에대하여 잘못한죄)로 탄핵을 당했는데 좌상이라고  어찌하여 그 죄를 면할수가있겠습니까? "

하고 들고 일어 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간원, 사헌부 양사가 벌떼 같이  일어나 졸지에  이산해 영의정이  탄핵 되면서 좌의정으로 있다가  별안간 영의정이 된 유성룡을 다시 탄핵한다

 

무당파인 도승지 이항복이

"  이산해 영의정이 물러 나면 됐지..... 좌의정으로 얐다가  영의정이 된 분에게 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무엇이오?  조선왕국을  아주 식물 왕국으로 만들 속셈이오?"


하고 반박한다

역시 무당파인 부제학 홍린상이 거든다

" 이런 비상 시국에  유성룡 영상 같은 인물이 흔하지 않거늘  해도 너무들 하오. 더구나 임명된지 하루 밖에 안되었는데 ...."

 

임금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임금 노릇하기  힘들구나 ...지금 왜적이  코앞에닥아 왔는데 )

왕도  일본 특사로 다녀왔던  동인  김성일이  별일이 없을것이라는  왜국 사정을 보고받은 이래 동인에대한 불신이  마음속에 싻트고 있는 것만은  부인 할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파  개성 인재들을 대거  등용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통치않았다

 

 임금은 동인과 서인들을 불신하는 마음이 더욱 솟구쳤다

동인들이나  서인들이 아무리  아전인수 격으로  서로 가 서로를  비방해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로 작정을 한것이다 

임금은  다시바꿔서 분부 하였으니 유성룔이  영의정으로 임명된지 하루만이었다  

 

영의정  유성룡  파직

좌의정  최흫훤  영의정

우의정  윤두수  좌의정

기성부원군 유홍 우의정

 

이렇게 내우 외환에 시달리는  왕에게  기쁜 소식이 들어왔으니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온것이다.

 

" 명나라 신종 황제께서   왜놈들에대한 소식을 물으시기에 왜군이  도성 가까이  까지 처들어왔다고말씀 드렸더니 신종 황제께서는  왜적에 대한 정보를  수시로파악하되  군관들로 하여금 적을 막기에는 편리하고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게 지세(地勢)가 험(險)한곳을 막도록  독려 하여  적을 막으라고만했습니다 "

" 증원군을 보내준다는 말은 없었던고?"


" 없었습니다 "

좌의정 윤두수가  아뢴다

" 전하 구차하게 명나라에  너무 굽실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남도는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중 전라도는 아직 건재 하오며 북도 는  병졸들이  용맹하고  한경도지방에는 험한  산악이 많아서  너무 걱정않으셔도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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