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오기전에 (33)-7년전쟁의 끝-

by 권영환 posted Jan 26, 2018 Views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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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 왕 선조

 7년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선조의 발버둥은 이제 끝났다 .

 

그는  7년 전쟁중  마음의 병을 얻었다 .

 인조 모양으로   풍신 수길에게 무릎을 꿇은 것도아니오  항복을 하고왜국에 끌려가서  왜 왕 앞에 끌려가서 눈물을 흘린 것도아닌데 왜 마음의 병을 얻었을 꺄?

 

선조는 태어 날때 부터 승하하기 까지  당쟁과 마음의 병으로  그리고 외침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때문에 그의 삶은  고단 하고 피폐하였다

 

차라리  그도  대군으로 남아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한 인간 으로서  조그만 행복을 느끼며 그 나름 대로  얼마나 즐거운 세상을  지냈을 까?

 운명의  하성군은  임금이라는 지존에 오른  후  한때 온갖 영화를 누려 보지만 그에게는 권력과 전쟁 그리고 모함으로 가득찬  조정에서 일생을 평탄하게 살지 못했다

 

 권력을  탐하여 형제를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에 약한 약자들만  수백명을 죽이고  온갖  패륜행위도  마다 하지 않으며 뻔뻔스럽게 웃고 다녔던 왕들에 비하면  선조의 일생은 너무나  허무 했고 마음 고생이 심했다

 

일부에서는  오늘의 잣대로 선조를 두고  나쁜 사람이니 어쩌니 하지만 어불 성설이다

그는 태어나서  7년 전쟁을  치르기 까지  국란 극복을 위해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 왔다

 

국난 극복의 훌륭한  임금을  오늘날  그를  잘못  이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 까?

 

그는  조선 왕국이라는 봉건주의  국가의 임금으로 발탁 되면서 부터  비극의 싹은 트기 시작했다

그는소위 서손(庶孫) 출신이라는   세계에  전무한 후무 조선이라는 곳에만 있는  법도(?)에 의해  처음부터 대신들로 부터 업신 여김을 받고 임금이 되긴 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적지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라를 먼저 생각 부터 하고 백성들을 생각 하는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임진왜란시 서울을 떠나 북행 할때도  서울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늘 걱정했다  

처음 선조가 피난 길을 떠났을 때 였다 

 임진강가에 도달하였을 때  주위에서는  적군이 아직  서울에 들어 오지 않았는데도  피난길에 오른것은  실책이라면서 피난 중에도 갑론 을박  대신들간에  언쟁이 벌어지었다

 

피난중에도 동서인간에  권력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각수반격인  영의정  이산해의 자리를 바꾸기는 했지만  피난중에 그렇게 자기들 끼리 피가 터지도록  싸움질만 할때 가 아니었다

 

동서인간에 당파 싸움은 싸움은 영의정 자리 하나만  바꾸면  끝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서인인  우부 승지 신섭이  서울에서  왕 일행은 궁궐에서  죽든지 살든지  해야자 왜 피난을 가느냐는 무모한 항의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면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게한 책임이 있는 좌의정  유성룡이  영의정 자리에서 오르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바람에  유성룡을 임명된지 하루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다 

 

유성룡의  후임으로 좌의정 최흥원이 영의정이 되자 서인들은  이구 동성으로  서인들의 좌장격인 강계로 귀양 가 있는 서인 정철을  다시 불러 들여서  영의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도  결국 정철의 귀양을  해제 시키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선조도  신섭등 서인등  들살에 이산해, 유성룡 등  유능한 인물들을  파직 시키기는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왕은  우부 승지 신섭을 부른다 

 

"경은  왜군이  가까이  한성 까지 접근 해 올지라도  도성을  끝까 지지키라고 했는데 경의 말은  하나 틀린데 가 없다 .그러나 임금인 내가  왜놈들에게 무조건 항복이라도 하라는 얘기인가?"


" 황공하오나 항복은 왜 하십니까 ? 유도대장 이양원과 도승지 김명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홍로 병조좌랑과 도  신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이번에 이산해와 유성룡의  말을 듣지 말고 전하옵게서   도성에서 왜적과 싸워야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고   이런 고생을 않으셔도 될것이라 했습니다"


 왕이 듣고 보니 신섭의 말이 당돌하다

왕은  피난길 오르기전  너무나 긴급히돌아가는 사태에 저수지물이 별안간 무너져 것잡을수 없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때는  우선 대피 했다가 물의  흐름이 약헤지면서 뚝을 막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

그래서 죽기아니면 살기로  도성에서  벋혀보려고  생각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왕은  신섭을 돌려 보네고 나서 나인에게   지묵을 가져오라 하더니 손수  교서를 손수 작성 한다.

 

 "우부 승지 신섭과  병좌좌랑  이홍로는 즉시  한성으로 돌아가 유도대장 과  도승지를 만나  도성 백성들을 안전하게 피난 시키도록하라.   도성 백성들에게는  임금이 부덕하여  임시로  피하기는 했으나  곧  왜적을 몰아내고    한성을  다시 찾을 것이라고 위무 하도록하라 "

 

왕은 교서를 받은  신섭과  이홍로는  동인들이 괫 심하여  발언한것이 오히려  적들 앞의 풍전등화와 같은  서울로  가서  백성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키고 위문 하라는  전교에  당황하였다

"적들이언제  도성으로 밀고 들어올지 모른는데 ....."

 

그런데  왕의 전교를  받은  우부승지  신섭은 임금의 교서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동부 승지 이항복에게  묻는다

" 우부승지는 한성으로 출발 했는가?"
"전하 . 어제밤  음주를 했던 모양이라 몸이  불편하여  아직  출발  못하고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


"이런 이런 .... 왕은  피난중이라  밤잠을 못자고 있는데  신하라는 자가 .....도성 백성들의 안위가  한시가 급한데  술만  퍼먹고있다니 "
" 황공하옵니다 . 급히 전하겠습니다 "

 

도승지 이항복이 왕의 명령을 받고 밖에 나와  지시한다

"시간이 급하다 .우부승지와  병조 좌랑은  즉시  한양으로  출발하라고 하신다  "

 

이러한 소동이 있은후  우부승지가  서울로 향하였는데  파주까지 되 돌아 갔던   신섭이 급히 되돌아 왔다

서울이 이미 함락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영의정이 바뀌고  좌의정이 바뀐  바로 그날 일본군 1번부대는 은 이미 여주에서 한강을 건넜으며 2번 부대도 한강을  건느고있었기 때문이었다  .

 

요사이  선조를 비하하는 말 잔치와는 다르게 그는 즉위 초에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조선 왕국을 세운  혈통이라면서  태조 시대부터 13대명종 시대 까지 대대로  온갖 영화를 누리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던 귀족 들을  배척하고  새로운 선비들을 등용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쓴  개명한 임금이었다

 

대군 시절 부터 워낙  학문적 소양에 뛰어났던  그는 명종 대 까지 말만 무성했지 지지부진했던 유학(儒學)을 본괘도에 올려 조선이라는 나라를 빛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

 

그러나  그러한 그의노력에도 불구 하고 명종때 부터 싹트기 시작한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 청치가  훈구세력의 몰락과 함께 독버섯처럼  표면에 나오기 시작한것이다 . 현대 의학으로도  암을 치유하는데 쓰는 항암제는  독한  약의 부작용 때문에  치유 후에도 무척이나 고생들을 하는것 같이 이것을 극복하려는 선조의노력은   암을 제거하여는  항암제 역활을 하려니 정말 피나는  과정이었다 .

 

그는 그과정에서 조선 왕국의  정신적 지주를  순화시키기 위해 주자대전을 출간 하는 동시에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억울한  사연들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그러한  젊은 왕의행보는 거침이없었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자존심을 비하하는 명나라 법전의  종계변무라는  내용을  탁월한  외교력으로  해결을 한것이다

종계 변무(宗係辯誣)란  글자 그대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의 정통성을  비하하여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 말기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등 사왕(王)을 모두 시해하였다고  말도 안되는 조선 왕조의세셰(世係) 기록을 바로잡은 것이었다

 

이성계가 네명의 고려왕을 죽였다는 것도 거짓이지만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내용도 거짓이었는데  태종  세종, 세조등  많은 명군들이  그동안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 해왔었으나  이것을 시정해 보지 못했던것을   선조가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해 낸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이인임은 1374년 고려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와  대신 경복흥등의 주장을 꺾고 우왕()을 추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권을 잡자 친원정책()을 취하여 친명파()를 추방한 후, 지윤 ·임견미 ·염흥등같은  충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던 인물로서 명나라와 사이가좋지않았다 .

 

명나라는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임금이된 이성계 까지  싸잡아 정통성을 부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내용은 완전히 거짓이었다

 

선조의 이러한 노력에도불구 하고 나라를 바로 잡아 보려고  등용한 선비들은  고질적인 당파 싸움으로 일관했으니  선조의마음인들 얼마나 골치 아팠겠는가?

 

역사책에서는 사림(士林)이라고불리우는  동서인들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목슴을 걸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젊은 왕으로서는 정말 극복하기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다가  1583년 ,1587년, 두번에 걸쳐  북쪽의오랑캐들이 조선을  침략했다

 

 

물론  이일, 신립, 이순신 같은 명장들을  임명하여 급한대로  불은 껐지만  14대에 걸쳐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 왕들의안이한대처로 말미아마 일어난 임진란 같은 거대한  난리를 가지고  막아내는  책임을 선조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것은 가혹하지 않을 수 없다고하겠다

 

전쟁은 끝났다

조건 8도가 왜적에게  짓밟혀 왜군의 약탈과  살륙으로  나라는 온통 쑥대 밭이 되었다 

 

인구는 줄어들었고 농촌은  황페화 되어  민심이 흉흉하였다. 양반만 사람이고 일반 천민들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회가 전쟁을 겪으면서  신분제도가  바뀌었는데  천민이 양민으로 바뀌는 가하면  전쟁 전까지  차별 받던  서자들도  이제는 관직을 받을수있는 사회가 되었다

 

선조는  뒤늦게나마 국방의중요성을 인식하고 한성에  훈련도감을 두고 지방에 속오군과 초관을 두었다  

속오군이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書)라는 책에서 나오는 기법으로 종래의 국지전과는 달리  임진 왜란  같이 전면전·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됨에 따라  조총()이라는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이 등장한 전쟁이기 때문에  포수()를 양성하는 동시에  전국에 걸친 군사조직을 재건한것을 말한다 

물론  속오군의  대다수는  양인과  천민으로 편성한 군대.였다 

 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게 하고 나라에 일이 있거나 훈련할 때에 소집하였다.

 

이어 왜란중 잘 써먹은 비격 진천뢰라는 대포와 화차  조총을 연구 하는 기관도만들었다

 

정치면을 보면 임진 왜란중에는 유성룡의 동인들이 조정을 좌우 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같은 동인인 정인홍과 유성룡간에 권력 다툼이일어난다

역사에서는  정인홍 패를  북인이라고 부르고  유성룡패를 남인이라 부른다

이러한 분당은 세자책봉 문제에서 더 두들어진다

 

선조는  일찌기 의인왕후 중전 박씨를 맞이 했었으나 소생이 없자 후궁으로 공빈 김씨를 맞이하여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는데 그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을 때 후유증으로  죽고만다 .

선조는  다른 임금들도 늘 그랬듯이 세번째 후궁을 맞이했으니 인빈 김씨였다 , 인빈김씨는 선조와 금슬이 좋은 탓인지 소생이많아 의안군 ,신성군,정원군, 의창군과 5명의 옹주를 줄줄이낳았다

 

네번째 후궁은 순빈 김씨는 순화군을  하나 낳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왕후인 중전  박씨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첫째 후궁인  공빈 김씨는  이미 죽었으니 문제가 없고  ,두번째 후궁인 인빈 김씨가 죽은 왕비의 대통을 이어 왕비가  될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으나  엉뚱하게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왕궁  밖에서  새왕비를 맞어  들이도록주선 한것이다

 

이 새 왕비가 인목왕비  김씨다 .

닭쫓던  개 모양으로  후궁들은  실망했으나 어미가 없는  임해군과 광해군은  인빈 김씨가  선조의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처 선조의  대를이을  세자자리를 빼앗길가 전전긍긍하고있는 터였다 .

 

물론 전쟁중  얼떨결에 책봉된 광해군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더 큰 문제가 생긴다 

  새로 중전이된 어린  왕비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영창 대군이었다 .

 

영의벙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세자 책봉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헀다

원래 세자는  임진왜란이 일어 나던 해  피난길에서 임시로 광해군을   책봉 했었다

 

만일에 왜적에게 잡혀서 선조가  죽는둥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대비 해서 부랴 부랴  세자 책봉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 끝난 지금 또다시  광해군으로  되어있던 세자책봉의 적통 여부를 가지고  동인들간에 격론이벌어지고있었다

적통성을 따지자면  광해군은  후궁인 공빈 김씨의 아들이니  서자로서  세자 자격이 없는 셈이다 .

 

 따라서  정식  왕비가된 인목왕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적통임은 어느 누구도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은  광해군의  세자 자리를 빼앗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선조는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  했다

정인홍과 , 이이첨은  광해군을 고집하다가  귀양살이만 하게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