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102)-甲申政變-

by 권영환 posted Apr 11, 2017 Views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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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온통 뒤숭숭 하였다 .
조희연, 유길준 , 장박, 우범선등 수배대상자들이 모두 일본공사의 주선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호위하에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 하였다 .
일본이 빼돌린 친일 각료가 어떻게 된줄도 모르고 정부는 그들을 찾으러고 노력하였으나 이미 그들은 일본의 비호 아래 도망친 후였다 .

일본공사가 발끈하였다 .
일본 공사 고무라는 일본군 수비대를 동원하여 러시아 공사관 앞에 1개중대를 보내어 고종과 러시아 공사관에 대하여 경복궁으로 돌아 갈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렸다 .
그러나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군은 꿈쩍도 않았다.
일본군은 러시아군과 는 대항 할수 없음을 알고 물러 났다 .
외무대신으로 발탁 된 이완용이 고종에게 일본에 대하여 유화책을 쓰라고 주청하였다 .

고종은 일본인들만 보면 이가 갈리었으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 이완용에게 일본공사를 무마하라고 지시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에게 고민 거리가 생기었다 .
각국 공사들이 임금을 만나려면 러시아 공사관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하는 외국 공사들이 고종에게 알현 할적 마다 속을 긁어 놓는 말을 봇물 처럼 쏟아 놓고 있기때문이었다.

한나라의 임금이 특정 국가의 공사관을 빌려 국정을 집행하고 있으니 이게 어디 독립국이냐 하는 것이었다 . 그렇지 않아도 청나라의 속국이니 일본의 허수아비이니 하면서 모욕을 받아 왔던 터이었다 .
그러한 압박은 이번의 사건을 주도한 법부대신 이범진에게 집중되었다 .
정동 구락부에도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
(독립국이 아니라.......)
고종은 그말이 마음에 사뭇쳤다 .

고종이생각해보니 그동안 아버지 대원군은 매일 같이 척양 척왜만 외쳤지 독립국가가 되도록 해 놓은 것이 없었다 .
오히려 결두전이니 원납전이니 하면서 세금공세를 백성들에게 취하여 국력만 취약하게만들어 외세가 안방 까지 들어오게 만든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법부대신 이범진도 견디다 못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

"전하 , 이제는 환궁하셔도 됩니다 . 조정의 일본 앞잡이들로 물러나고 폭도들도 잠잠 해지었습니다 .백성들도 머리 깎는것도 깎던 말던 백성들 자유 의사에 맡긴다고 하고 난후 세상이 평화로워 지었습니다 . 남의나라 공사관에 계신다는 것이 우선 체면도 말이아니옵고 외국공사들이 비웃고 있습니다 빨리 대궐로 돌아 가시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


" 일본놈들이 아관 문앞에 까지와서 농성하고 갔다는데 지금 돌아가도 괞찬겠나요?"
" 외무대신이 일본공사에게 무마하러 갔으니 결과를 보고 결정 하시옵소서"
" 그건그렇고 가평의 반도들이 잘 수습되었다고?"
" 그렇사옵니다 . 단발령을 철회하고 세금을 탕감 시킨다는 조칙이나간후 민심이 확 바뀌었습니다 "

" 진작 부터 머리 깎는 문제는 각자자유 의사에 맡겨야 될일을 가지고 강행하더니 결국은 .....쯧 쯧 ....."
고종은 지나간일리 끔찍 했던지 혀를 챈다 .
왕은 문득 최익현 생각이 났던지 이범진에게 묻는다 .
"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끝까지 벋히다가 하옥되었다는 최익현은 어찌 되었는고?"
이범진이 대답한다
" 머리 깎는것을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칙령을 내린후 석방하였습니다 "
" 지금쯤 포천에가있겠구먼 ...."
" 그렇습니다 "
" 아까운 사람이야"
"............."
이범진은 최익현을 잘안다 .

경복궁이나 지어 놓고 허세를 부리며 백성들로부터 세금 고혈을 빨아 나라 살림이 억망으로 만들어 놓은 대원군을 유일하게 질타했던 최익현이가 아니었던가 ?

집권시 무조건하고 척양 척왜나 부르 짖던  대원군 이하응이라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었다가 일본의 앞잡이로 변신한 대원군이 아니더냐? 나라를 팔아 먹는 다는것은 꼭 돈을 받고 팔아 먹는 것만이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 아니다.
이를 막기위하여 바른 상소를 올렸건만 오히려 귀양살이를 한것도 모자라 포천 시골구석에서 칩거하고 있는 최익현이 새로웠다 .


" 전하, 새로운 나라에는 새사람이 필요 합니다 . 앞으로 환궁하시면 새로 조각할때 최익현을 마음에 두었다가 쓰셔도 됩니다 "
" 이나라에는 그런인물이 필요해....."
고종이 방금 혼자말로 지꺼린 말속에는 최익현을 생각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를 입조 시킬경우 항상 걸리는 아버지 대원군의 눈초리였다 .
이대로 환궁해도 일본공사의 등을 업고 있는 어버지 대원군이 어찌나올지 모르기때문이었다 .
늙은 대원군은 아직도 일본공사와 접촉하며 친일내각을 그동안 조종하고 있었던것이다 .
정말 대원군은 골치아픈 존재였다


고종의나이가 45세, 왕세자나이 23세 , 왕세자빈 25세 왕대비 홍씨나이가 66세이다
대원군이 77세 부대부인 민씨가 78세 , 정사에관여할 나이가 아닌데도 아직도 정치에 훈수를 놓으려는 마음에는 예전과다름이 없으니 왕이왕다웁게소신있는 정치를 할수 없었다
러시아공사관에들어 온 후로 대원군과의연락은 완전히 두절되었으나 환궁할경우에 대원군과 일본놈들이두려워 도저히 환궁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것이다.


환궁 해서 또 앞서와같은 전철을 밟을 경우 이제는왕인 자기의목슴까지 보장 못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
아예 러시아공사관이 편하였다 .
그러나 대신들과 각국 공사들의 재촉이 괴로웠다 .아니그보다도 미국에 서 유학갔다 돌아온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의 주청은 더욱 마음을 괴롭혔다 .
"전하 , 대궐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 조선은 서양과 달라 엄연히 조선은 전하가 주인입니다 .주인이 가족을 돌보듯이 전하는 이땅과 이 백성들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


어서 경복궁으로 돌아가시어야 합니다 . 남의나라 공사관에 계시다는것이야 말로 수치스러운일이 이세상에 어디있사옵까?"
정동 러시아 공사관 파천한지도 한달이 넘었다 .
정부가 바랐던 민란도 어느정도 가라 앉았다 .
서울의 분위기는 대원군과 친일 세력에서 친로로 바뀌었다. 또 바뀐것이있었다 .
일본의로 망명한 전 내부대신이었던 유길준이 정부 예산중 일부를 독립 신문에 지원을 해준 조치로 그가 망명후에 사장이된 서재필이 새로 생긴 것이다

서재필은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 김성근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서광범등 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뒤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1884 년 12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 년 미국으로 망명, 1889 년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 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왕후가 죽자 귀국한것이다
정부 예산을 얻어 독립 신문을 발간하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