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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관아 행궁은 임금과 조신들이 모여 논의 하기는 너무 비좁았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일반 전황에 대한소견을 말하고 있었다

    

" 지금 한성 남쪽에는 전라 감사 권율 에게 과인이 근왕 대장 으로써 한성 수복에 전념하라 고 지시해 놓고 있다.

계획 대로만 선전 할수 있다면야 한성 수복의 꿈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우리 육군이 왜군을 막지 못한다면 적들이 오히려남쪽으로 집중 공격하게될 우려가 있다.

 

8월 중에 명나라 이여송 제독이 요동에 도착하여 경략 송응창과 작전 회의 중이라는 전갈을 받았었다.

비변사에서는 명군이 오기 전에 북쪽을 방어 하고 있는 조선군의 대책등 시국 수습책을 마련하라  ."

 

바깥 날씨가 차가운 탓에 관아 대청에 모인 대신들도 속옷으로 스며드는 한기에 추위를 느끼었다.

 

좌의정 윤두수가 첫마디를을 꺼내었다

" 전하 , 명군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면 일국의 존망을 타인의 손에 송두리째 넘겨주는 한심한 결과를 주게 되는 노릇 이오니, 명나라 동정군이 올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오라, 우리가 먼저 적을 쳐서 대책을 세워야 할것이 아닐까 하나이다. "

 "경의 말이 옳다 그러면 비변사에서는 8도의 선전관을 급히 보내 순찰사와 각 장령 들에게 명나라 군의 지원이 조만간 있을 것이니 힘을 내어 싸우라고 전달 하라."

 

    우찬성 최황이 아뢰었다.

" 전하, 명나라 군대가 올때만 기다리라고만 해서는 안되옵고 , 우선 각군에게 군사를 더 모아 병력을 강화하고 질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지금 황해도 중화, 봉산, 황주등 평양 남쪽의 군사들을 철수하여 평안도 순안의 집중 방어 할 필요가 있나이다. "

 

"왜장 흑전 장정이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 하고 있는데, 그나마 세곳에서 조차 모두 물러나면 백성들이 어찌 하란  말이오 "

 

선조가 백성 들을 먼저 걱정 하였다 .

사간원 정언 (司諫院 正言) 황극중(黃克中)이 나섰다 .

 

"전하 그것은 백성 들이 더 중요 하므로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 우찬성 말씀은 무리가 있나이다.차후 도원수와 상의 처리 함이 가한것으로 사료 됩니다"

 

이문제는 이것으로 끝났다 .

 

왜군의 북상이  심유경의 협상으로 잠간 멈춘 탓이었다 .

 

예조 판서 윤근수가 명나라에 다녀 왔다

중국 명나라 동정군(東征軍)파견에 앞서 행재소 임금을 경호하기 위한 명나라 군 선발대 2000명을  조선 의주에 먼저 진주 하갰다는 것이었다  전방의 왜적이 시시 각각으로 진격해 들어 오고 있는데도 평양 방면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임금을 경비 한답시고  의주에서 어영부영 하겠다는 얘기다 

 유격장 갈봉하(葛逢夏)는 음식점인 의순관에 숙소를 마련하여 놓고 벌써부터  술로 세월을 보내고 꿈쩍도 않고 있었다

 

 

임금이 외교 수완이 있는 공조 판서 한응인을 부른다 

갈봉하가 임금을 만날 생각은 않고  술과 계집질로 세월 보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오라고 지시 했한것이다.

 

한응인이 의순관에 도착 하여 갈봉하를 만나자고 하였다

종사관이 갈봉하 에게 면접 여부를 묻기 위하여 방에 들어 갔을 때는 술이 덜 깨었는지 귀찮다는 태도로

" 누가 왔다고?"

"예 , 조선 공조판서 한응인이라는 대신 이라 하옵니다"

" 공조 판서라?"

"예"

"아니 내가 이나라 를 위하여 이렇게 와 있거늘 공조 판서나 만나라 ..... 내 바빠 못 만나겠다고 하라 "

한응인이 몇번을 만나려 시도 했으나 갈봉하는 만내 주지 않았다 .

 

 왕은 답답하였다 .영의정 최흥원을 불렀다

" 공조 판서 한응인을불러 갈봉하 에게 명군 파병일자를 좀 알아 오랬더니 문전 박대만 한다 하오 , 영상, 이것 답답해서 ....참"

" 전하 갈봉하가 전투 하러 오질 않고 전하를 경비 하러 온자입니다.그런자가 어떻게 명조의 일을 속속 드리 알겠습니까 ? "

" 그래도 명군의 관 한일은 그를 통해야 하지 않소?"

" 물론 그렇긴 하옵니다 , 저 자가 공판을 거절 한것은 전하나 신이 직접 찾지 않고 일개 공판을 보냈느냐 하는것 같습니다 . 제가 그를 찾아 보겠으니 걱정 마시 옵소서 "

 

" 아니오, 영상 , 영상이 지금 찾아가면 저 자가 사사 건건 과인 아니면 영상을 찾을것이오 , 버릇을 잘못 드릴 염려가 있습니다 . "

"그러 하오면 대책이 있기는 하옵니다 "

 " 말 해보시오"

", 명나라 군은 , 먼저 평양 전투 에서 왜군 에게 패 한것을 거울 삼아 섯뿔리 조선 전에 대들지 않고 신중을 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

듣기에는 이여송과 송응창의 회담중 먼저 조승훈의 실전은 조승훈의 지휘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무기 체제의 잘못이 더 크다고 인정하고 포살법(砲殺法)에 의한 전법을 구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

" 포살법이란 어떤것이오 ?"

"네 전하 포살법이란 중국 남방 의 전투 형식으로 포수가 중심이 되어 싸우는 전법입니다 .주로 화포에의한 전투형식으로 왜군같은 조총을 갖고 있는 부대를 치는데 아주 적격입니다 ."

"화포를 득수 부대 까지 있다면서 즉시 라도 조선으로 나올것이지 왜 시간을 끌고 주춤거리는 게요?"

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

"전하, 명군은 지금 왜구와 전투 경험이 많은 절강 , 복건성에 주둔하고 있는 남방군을 조선전에 투입 하려 하는것 같습니다 .

 

중국은 땅이 커서 남방에서 북 쪽으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아까 방법이라고 했는데 영상께서 한 말씀은 무엇이오?"

"네 전하 , 유격장 갈봉하가 공판의 면접을 거절하는것은 지기들에 대한 예우를 논하는듯 하오니 조선도 그에 상응 하는 인물을 내세워 대접 하는것이 어떨까 하나이다."

 "그래, 누구를 함이 옳겠소"

 

 "신의 생각 으로는 유성룡을 내어 세움이 어떨까 하나이다."

"그는 전란 초기에 체찰사 임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벼슬을 삭탈하지 않았습니까"

 

"하오나, 그는 한때 영상의 자리 까지 있다가 물러 난 인재로 그대로 두기 보다는 앞으로 명나라와의 빈번한 외교 관계를 생각 해서라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책임을 맡기는게 어떨까 하옵니다."

 

"유성룡공 이라고 대수가 있겠소?"

"아니옵니다. 서애도  전쟁 초기의 그가 아닙니다 . 전직 영의정이라는  명함이 있으므로 저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듣고 보니 영상의 말이옳소. 그런데 서애는  지금 어디 있소?"

"순찰사 이원익공과 함께 순안(順安) 지구 안주(安州)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를 불러 들여 명나라 장수 접대를 맡기도록 합시다."

 

 

임금은 11월8일 평안도 안주에 나가있던 전 영의정 유성룡을 불러 명나라 장수 접대를 맡기로 하였다.

 12월 8일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로 들어갔던 지중추 부사 (知中樞 府使)정곤수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왕은 그를 접견하여 명나라 동태를 직접 듣기로 하였다.

 

 

"명나라 사정은 어떤고?"

"네. 신이. 북경에 들어가 명 조정에 주문(奏文)을 바치고 조선을 도와 줄것을 병부에도 들어가 간청도 했나이다. 상서(尙書) 석성(石星)도 직접 만나 눈물로서 애소 한 결과 발병의 윤허를 받았나이다.

 

지금 송시랑(侍郞)과 심(沈遊擊)격이 서로 만나 조선 출병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송응창과 심유경(沈惟敬)은 어떤 인물인가?"

"송시랑은 원래가 중국 남부 절강성 (折江省)사람으로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서 왜군을 치도록 명령 받은 장수 입니다.

 

신이 만나본 송시랑은 군량(軍糧)이 준비되지 않았고 중국 남방군이 요동성으로 집결하는데 시간이 걸려 기다린 연후에 출병 시기를 결정 한다 하옵니다. 또 심유경은 석 상서(石 尙書)의 사람으로 만나본결과 왜군이 일단 화(和)를 청하면 화(和)를 할것이고 만일 이를 거부 하면 왜군을 칠 것이라 하옵니다. "

 

"명나라 조정은 왜군이 단순히 우리나라 만을 치고 말것으로 생각하고 있던가?"

하고 정곤수 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석 상서(石 尙書)가 조선에 출병할것을 황제에게 주청 하였는데 황제가 허락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래,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의심 하지 않던가?"

"처음과 달리 지금은 모든것을 이해 납득 한듯 하나이다."

 

 

"그래?, 이여송(李如松)은 어떤 인물인고?"

"훌륭한 명장이라 합니다."

임금은 그제서야 답답한것을 풀고 깊은 잠에 빠졌다.

왜군은 조선의 심장부인 한성(漢城)을 선선히 내 놓을 수가 없었다.

 

 

 

한성은 조선 8도를 지휘 할수 있는 천혜의 도성으로서 함경도와 평안도, 경상도,전라도를 통할수 있는 중앙에 위치한 중요한 곳으로 풍신수길은 조선 주둔 총 사령관을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에게 주둔케하여 풍신수길과 직접 연락하고 있었다.

 

 

우희다수가는 한성입성시 당초 거처를 궁궐로 정했었으나 궁궐이 이미 모두 불에타 쟂더미로 변해 할수 없이 종묘를 주둔군의 본부로 삼았다.

 

 

 

우히다수가는 요사이 꿈자리가 좋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꿈속에서 조선 장수가 나타나 자칭 신병(神兵)이라고 지칭하며 그의 목을 내리치려하므로 깨어 보니 꿈이었다.

 

 

 

또 울창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조선왕조의 선조들의 위패가 자기 목을 내리누르는 듯 하여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다 병졸들의 실수로 화약이 폭발하여 폭사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히다수가는

"이 종묘에는 신령(神靈)이 나를 괴롭혀 오래 거처 못하겠다. 당장 불을 질러버리도록 하라."

하고, 남별궁(南別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히다수가는 종묘를 불태우니 조금 불안한 심기가 가시는듯 하였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의 주둔 현황은 다음과 같았다.

 

 

우히다수가(宇喜多秀家)-남별궁(소공주동)

단후수(旦後守)-소공주동(소공동)

포후수(浦後守)-소공주동(소공동)

풍전 수가리(豊前守家利)-회현동 정사룡(鄭士龍)의 집

부천 기의수(富川紀伊守)-정릉동(현재 정동)

장선 기의수(長船紀伊守)-정릉동(현재 정동)

화방 조병위(花房助兵衛)-정릉동(현재 정동)

명석 소두수중(明石掃頭守重)-정릉동(현재 정동)

강원 병고수(江源兵庫守)-정릉동(현재 정동)

화방지 마개직지(花房志摩介職之)-정릉동(현재 정동)

부천 현번윤(富川玄番允)-미색동(美穡洞)(현재 롯데 호텔 주변)

석전 삼성(石田三成)-명례동(明禮洞)(현재 명동)

대곡 길계(大谷吉繼)-묵사동(墨寺洞)(현재 묵동)

증전 장성(曾田長盛)-주자동(현재 주자동)

전야장강(前野長康)-호현동(好賢洞)(현재 회현동)

가등 광테(加藤光泰)-장흥고동(長興庫洞)(현재 내자동)

 

 

풍신수길은 서울 점령 장기화가 필요하다고 느껴 우히다수가 에게 영을 내려 서울 도성민을 성내로 들어와 살도록 무마책을 썻다.

 

 

 

우히다수(宇喜多秀家)가는 방(傍)을 써붙였다.

"도성내 백성들은 들으시오. 복(僕)이 우리 전하의 명에 의하여 여러 조선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는 명을 받아 여러분들을 도탄에서 구하고자 하니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충실하시오. 절대 우리 일본군을 의심하지 마시오."

하고, 선무(宣撫) 공작을 펴기도 했다.

 

 

우히다수가는 여기에 끝나지 않고 조정이 도성을 버리고 북행길에 오른직후 한성이 텅텅 비자 왜군들은 경기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입성을 권고 하는 방을 써붙여 많은 백성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중에는 왜군에 붙어 그들의 향도 노릇 하는 자 까지 생겼다.

대신 왜군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자나 조선군과 내통 의심을 받는자가 있을 시에는 가차 없이 목을 쳐 죽이었다.

왜군들은 처음에는 조선 백성을 위하는척 하다가 점점 표변 하기 시작한것이다.

 

 

 

경기감사 심대(沈岱)가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서울 탈환전을 벌이다가 패하여 사살된 사건이 있었는데 한성 도성민들이 그의 시체를 끌어다

 

 

 

잘 묻어 주자 우히다수가는 명령을 내려 시체를 파내어 할관 참시(割棺斬屍)시하고 종로 네거리에 50여일 현수 (懸首)수하였는데 이 사건이후 왜군들은 도성민에게 노골적으로 태도를 바꾸어 속과 겉이 다른 태도로 돌변 도성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여송이 부총병 사대수를 불렀다.

"사총병(査 總兵), 왜군 총사령관 이름이 소서행장이 라고 했지?, 병력은 약 1만5천명이라고 들었는데 맞소?"

""예 , "

"그자를 사로 잡을수는 없을까?"

" 예 , 사로 잡을수 있습니다 . "

" 어떻게?"

 

 

" 최근까지 심 유격과 평양 교외에서 소서행장과 머리를 맞대고 회담 한적 있습니다 , 이번에도 이 제독께서 소서 행장과 회담을 하겠다고 하여 평화 분위기를 조성 한후 적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우리의 기병(奇兵)들을 침투 시켜 소서 행장이 있는 영채를 습격하여 사로 잡는것입니다"

 

 

"허 , 기발한 생각이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외교적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오? "

" 제독님 , 우리의 적은 누구 입니까 ,

 

북쪽 오랑캐도 아니고 조선군도 아닙니다 ,

 

 

 

우리의 적은 분명히 왜국입니다 . 지금 우리군은 외교하러 온것이 아닙니다. 이번 전쟁은 기필코 승리 하여야 합니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릴것 없습니다 .

외교 야 심유경 같은 사람이 해야지 저이들 이야 소서행장같은 왜장만 잡아 들이면 되지 않겠습까 . 이번 일은 저에게 일임하여 주시면 바로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

 

 

"알겠소 , 하지만 소서행장의 숙소 정보도 모를 뿐만 아니라 적들의 경비가 삼엄 할텐데 ....."

"제독님 , 걱정 마십시요 . 우리가 저들에게 소서 행장을 만나러 간다 하면 분명히 영접사가 5-6명이 올것입니다 ,

 

이들을 한놈도 빠지지 않고 사로 잡아 이들을 앞세워 , 깊은밤 우리의 유격병을 적진에 침투 시켜 소서행장 숙소를 급습 사로 잡아 돌아오면 됩니다"

 

 

"허, 어려운 일이오, 적들이 보통 삼엄하지 않을 터인데....."

"적들은 아마 우리가 화친 하자고 했으니 분명히 전쟁 분위기는 아니라 경비를 소흘히 할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사건을 도화선으로 제독께서는 평양 총공세를 취하도록 명령하셔야 합니다"

이여송과 사대수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사대수는 자기 진영에 들어오자 붓을들어 황제가 보내는 거짓 외교문서를 작성 하였다 .

"대 명국(大 明國) 은 일본 국왕에게 알리노라,

 

귀국은 아무런 이유 없이 조선을 침공한지 1년이 되도록 물러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짐의 나라르 치겠다는 말을 들었노라 ,

 

이는 용납 할수 없는 일로서 만일 끝까지 조선에서 물러 나지 않는다면 짐이 이를 결코 용납치 않겠노라 . 내 이총독을 이번에 특사로 보내니 평양근방에서 만나 좋은 결과를 이루기 바란다"

사대수는 이와같은 거짓문서를 만들어 소서행장에게 보냈다.

 

 

소서행장은 서신을 받아보고 순안의 사대수 진지로 휘하 장수중 비장(碑將) 죽내길병위(竹內吉兵衛)에게 군사 23명을 딸려 보내 영접 하도록 하였다.

사대수는 왜군영접사들이 도착되는 영채 주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이들을 맞이 하였다 .

 

 

사대수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 하여 주안상 까지 차리게 하고 술을 권하여 이들이 방심하게 하고 있었다 . 사대수는 슬그머니 화장실을 가는척 하고나가 신호를 하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왜장 영채와 군사들이 묵고 있는 영채를 동시에 급습 하였다.

 

 

 

명군은 왜장을 체포 하고 중국어 통역관 장대선(張大鐥)과 왜군 병사 23명중 18명을 사로 잡고 5 명을 놓쳤다 ,

 

 

사대수는 나머지 5명을 샅샅히 색출하라 하였으나 이들 5명은 용케도 도망을 처 평양성 까지 단숨에 도망가 소서행장에게 이사실을 보고 하였다 .

 

 

비밀히 소서행장을 잡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 사대수는 왜병 5명의 행방을 찾다가 더이상 찾을수 없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여송에게 급히 보고를 올렸다

 

 

"제독님 , 큰 차질이 생겼습다. 비밀히 소서행장 체포 하려던 계획이 당초 영접사 5-6명으로 생각 했는 데 왜병이 23명이나 딸아 오는 바람에 이들을 모두 체포 하려다 5명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

 

이놈들이 적진으로 필히 도망 갔을 것인즉 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

적장을 체포하려는 계획은 접어 두고 우선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습니다.

"이사람 , 그러니까 내 뭐라 했던가 .체포가 그리 쉬운줄 아는가?"

 

 

이여송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순안부로 향하였다.

명나라 병부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이 압록강을 건너왔으므로 임금이 직접 용만관(龍灣館)에 나가 이들을 접대 하였다 .

 

그들은 명나라 황제가 내린 현상금 명령을 선조에게 전달 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풍신수길 과 현소 를 잡거나 베는자는 은(銀) 1만량을 주고 봉백(封伯)하겠노라.

2)우희다수가 , 우시수승(羽柴秀勝), 소서행장, 종의지, 송포진신(松浦鎭信)등의 적장을 잡거나 베는자는 은(銀) 5천량을 주고 지휘사(指揮使)를 세습케 하노라.

하는 내용이었다.

 

명나라 황제가 생포하거나 베는 자는 후사 하겠다는 명령은 명나라 장수 들에게는 왜장을 사로 잡는 다는 것이 크나큰 영광으로 이번 순안 사건을 보아도 외교 관례 에도 없는 사대수의 엉뚱한 공명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의 하나로 볼수 있다 하겠다.

 

이여송은 순안현을 거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군 하였다.

 

 

소서 행장은 영접사로 보낸 왜군 장병들이 명군에게 잡혔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분개 하였다.

"명나라는 대국으로서 한나라의 외교관들을 그렇게 무참하게 기습 공격 하여 살상 할수 있는가? 이런하 배신자들과는 협상이란 있을수 없다.

 

 

 

두고보자. 내 압록강을 넘어 꼭 요동성으로 진군하리라."

하고 다짐을 하였다. 그는 평양성 만은 적에게 절대 내줄수 없다고 마음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주력군 1만여명에게 명나라 군이 도착하기 전에 조선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하여 성밖에 사슴뿔 모양의 장애물을 곳곳이 세워놓고 성안에는 조총을 쏠수 있는 시설들을 만들어 명나라 군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밖의 모란봉 위에는 약2000명을 잠복 시켰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나타나자 소서 행장은 평양성 높은 곳에 대장기를 높이 세우고 북을 치고 소라를 요란히 불며 꽹과리를 치고 야단이었다.

 

 

 

이여송은 우선 성 외곽에 있는 적을 먼저 치기로 하고 모란봉 방면의 왜군 부터 치기로 하였다.

왜군은 모란봉 고지위에 진을 치고 조총을 동원 마구 명군에게 쏘아대고 있었다.

명군은 모란봉쪽으로 행군하던 길을 되돌아 서쪽으로 후퇴했다.

 

 

왜군이 이것을 놓칠세라 명군의 뒤를 쫓아 고함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벌떼같이 아래로 쏟아져 내려와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승군의 뒤를 쫓았다.

 

 

왜군이 서울을 점령 한후 처음 에는 서울 도성 백성 들을 위하는 척하고 방 을 써 붙여 성내로 들어와 살게 하되 성문을 출입 하는 증명서를 만들어 이것을 가진 백성들만 출입 하게 하였다 .

 

 

 

백성들은 피난가 있던 산 속에서 장기적 으로 살수 없음을 느끼고 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라도 도성내로 들어와 살지 않으면 않되었다.

 

 

제법 작은 저자라도 생겨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하였다.

선조 26 년 1 월은 서울 도성민 들에게는 최악의 날이었다 .

 이제까지 회유 정책을 쓰던 왜군들의 태도가 달라진것이다 .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 당하고 서울로 쫓겨온 소서행장군은 평양성을 명군에게 빼앗긴 분풀이라도 할듯이 포학성을 들어냈다.

그들은 장차 조선 백성들이 명나라 군사들과 내통하여 왜군을 몰아낼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도성내 에 있는 남자들은 발견되는되로 연행하여 고문하거나 살해되었다 ,

 

 

남자들은 함부로 나가 돌아다니지 못하였다. 오직 여자들만 살려주어 돌아다니게 놔두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문밖출입이 꼭 필요 할때는 여장을 하고 다녔다

 

.

 

이때의 상황을 임진란 일기(任辰亂 日記)를 쓴 당시의 의병장 조정(趙靖)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

 

"충주 사람이 말하는데 서울에는 우리 조선 백성들이 남자란 남자는 모두 적병의 칼날에 맞아 죽고 부녀자인 경우에는 간혹 죽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명나라 군사가 대거 출동하여 나타날것이므로 남자들을 살려 두면 이들이 명군과 내응 할것이 두려워 그렇게 한것이라 한다.

 

그 충주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삼문 밖에는 시체가 산더미 처럼 쌓여 길을 통행할수 없다 하였다. "

라고 선조 26년 2월 14일자 임진왜란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 일기에는 그나마 살아남은 부녀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당한 참상을 기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한 노파가 내게 찾아와 업드려 절하거늘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니 자기는 유생(儒生)이었던 이보경(李輔卿)의 형수인데 왜적들의 만행으로 이를 피해 가다가 전가족이 물에 빠저 죽고 홀로 남아 길가에서 걸식 하고 다닌다 하였다 .

행색이 수척 하여 그 참혹 함이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길을 걷다 보면 노상에 쓰러저 있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고 죽은 어린애 시체를 많이 볼수 있었다 .라고 기재 하고 있다 .

 

 

 

백성 들은 왜군 들은 서울 도성민을 끌어 들일때는 언제고 포학 한짓을 하는 것은 언제인가 라고 반신 반의 하다가 이제는 완전이 왜군들을 인간 이하의 군사들로 보게 되었다 .

 

 

더구나 부녀자의 경우 왜군 들은 처음과는 달리 본색을 들어내어 부녀자 들에게 많은 봉변을 주었는데 대부분의 사대부 부녀인 경우에는 왜적의 폭력 앞에 죽음 으로서 항거 하다 희생 되었다.

 

 

그러한 항거 중에는 왜군의 폭행에 항거 하는 방법으로 왜군을 만나면 강이나 연못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산같은곳에서 왜군을 만나면 절벽에 투신 하기도 하였다

또 그녀들중에는 옥 손잡이 단도를 품속에 소지 하고 있다가 왜병을 찔러 죽이고 자결 하기도 하였다.

 

열녀전(烈女傳)에 보면 열녀가 임진란중에 집중 된것을 보아도 수많은 부녀자들이 왜적의 봉변 앞에 죽음 으로서 항거 할수 밖에 없었던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나라 장수 들은 조선군과 언어가 통 하지 않아 조선 의 조정과 대화 창구로서 주로 접반사(接伴使) 이빈(李賓)에 모든것을 의지 하였다 .

 

 

 

접반사라는 직책은 원래 는 임금을 모시며 외국사신을 접대하도록 된 임시직이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명나라 장수들과 이여송을 외국사신 이상으로 접대하는 직책을 이빈에게 임금이 내린 직책이었다 .

 

 

이여송은 후임자로 이빈을 추천하였다 .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 장수들중에는 이빈과는 보통 절친한 사이가 아니았는데 제독도 은근히 이빈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

 

서울에 있는 왜군 총사령관 우희다수가는 평양성에서 왜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개성에 있는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에게 철수 하라고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을 통해서 알렸다.

 

 

소조천융경은 죽어도 개성에서 죽겠노라며 철수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우희다는 이소식을 듣고 다시 젊은 장수 대곡길계(大谷吉繼)에게 개성에 있는 소조천에게 찾아가 설득 하도록 하였다.

 

 

 

고집을 부리며 큰소리치던 소조천은 할수 없이 일단 서울로 철수길로 올랐다.

 

 

그는 우희다 지시에 의하여 후퇴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돈의문(지금의 서대문) 까지 와서는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수하 장수 들에게 말한다

"분하다. 명군이 아무리 평양성 에서는 승리 했다한들 이 소조천 융경이 살아 있는한 개성만은 끝까지 지키려 했는데...."

 

 

하고 못내 개성 철수가 아까운듯 도성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소

 

조천은

"적들은 지금 평양전의 승리로 마음이 들떠 있어서 우리 일본군을 업신 여기고 마음 놓고 내려올 것인즉 지금이야 말로 적을 혼내 줄수 있는 때인것이다

 

.아무리 명군이 대군 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동안 파악 해놓은 파주, 고양, 벽제, 지형을 이용만 잘 한다면 적군을 능히 막아 낼수 있을 것인데...숫자만 많다고 강군이 아닌것을,,,,게다가 후퇴 하라 말라 하다니..."

소조천의 수염이 노여움에 젖어 푸르르 날리는듯 했다.

 

 

 

그는 우희다를 겨냥한 불만을 서슴치 않고 털어놓고 입성을 않고 있었다.

수하 장수들은 감히 그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에는 그동안 왜병이 5만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2번대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만 군사만 함경도에서 아직 철수를 못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철수하여 이미 서울에 입성한 소서행장과 황해도 봉산에서 철수한 대우길통(大宇吉統)은 소조천의 행동을 바라 보고 패전으로 인한 분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서울 탈환이 목전에 도달했다

 

권율은 독산성에서 공격과 수비 작전으로 조선군 사기가 향상되어 있던 차에 명군이 북에서 쳐내려온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서울 서쪽 방면에 진을 칠 것으로 결심하고 조방장 조경(趙敬)을 서울 방면으로 보내 적정 장소를 물색토록 지시했다.

 

 

조경은 갑사정병(甲士正兵) 3명을 대동하고 정찰에 들어 갔다.

조경이 보니 양촌 고을에 가까이 갈수록 넓은 평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조선군이 적병의 표적이 되지 않고 진격하기에 적합한 곳을 고르자니 조경의 눈은 적절 장소를 찾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한강이 한눈에 들어 왔다.

 

한강, 그 도도한 물결이 강인지 바다 인지 모르게 넓게 시야에 들어 왔다.

조경은 한강가에 우뚝 서 있는 작은 산을 향하여 나아 갔다 갔다. 산 정상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인근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성산(城山-지금의 궁산)이라 부른다 하였다.

 

조경은 품속에 있던 지도를 빼어 보고 자기가 있는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지도에는 궁산에서 서쪽으로 높은 산이 하나 보이는데, 개화산이라고 써 있었다.

 

 

강 건너에는 덕양산 이라고 쓰여 있었다. 또, 북동쪽에는 한성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조경은 감개가 무량하여 한참동안 정찰 활동이라는 것을 잊고 주위 경관을 감상 하고 있었다. 그는 이 한강의 모습이야 말로 중국의 동정호에 버금가는 절경 이라고 생각 하였다.

 

조경은 지도상에 표시 되어 있는대로 봉수대가 있는 개화산 으로 향하였다.

조경은 산에 오르자 이 장소야 말로 진을 치기에 최적의 장소로 생각 하게 되었다.

 

 

산정에 올라 보니 멀리 북쪽에 삼각산과 북한산이 한 눈에 보이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풍경과 바닷물이 들어와 섞여 흡사 바다와 같이 보였다.

또 서울을 둘러 싸고 있는 인왕산, 북악산, 남산을 비롯해 강건너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처 흘러들어오는 한강의 위용은 가히 수륙 양면 작전 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한가지 흠은 한강 남쪽 이라는 점이었다.

한성을 수복 하려면 일단 한강을 건너야 한다.

 

 

한강 남쪽에서 설혹 승리 한다 하더라도 일만여 군사가 도강 하는데 문제가 있다.

 

조경은 저녁 늦게 배를 타고 맞은 쪽에 있는 덕양산을 향하여 나아 갔다. 조경은 덕양산 정상에 올라 보았다.

남쪽은 한강에 임한 절벽이고 동쪽과 북쪽은 넓은 평야 이지만 그쪽도 절벽 이었다.

 

 

다만 서쪽만 구릉지로 골짜기가 많아 일만명의 군사 정도는 몸을 감추어 전투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저 있었다. 덕양산은 삼국 시대 이래 산성있던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는 평범한 산에 불과 했다.

 

여하튼 개화산에서 바라보던 각종 조건보다 더 우수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천혜의 요새 라고 생각 되었다 .

조경은 산에서 내려와 배를 되돌려 수원성으로 돌아왔다.

 

 

 

조경은 동헌에 들려 권율에게 소상히 보고 하였다.

다음날 권율은 손수 조경과 갑사정병 3 명을 대동하고 현지 답사에 나섰다.

배를 타고 건너가 덕양산 산정에 있는 산성을 둘러 본 권율이 말을 꺼냈다 

 

 

 

" 이 덕양산을 젊었던 시절 성의 연혁을 알아 보고 생각해 보았는데 이름이 걸작이야 . 행(幸)자는 다행스러울 행자인데 행주란 다행스러운 땅이라는 뜻이지 .이 산성으로 말하면 행주의 지명을 따서 행주 산성 이라는 이름 지었다고 기록 되어 있 더군

 이땅의 지형을 보니   병법상 오운진법(烏雲陣法)을 쓸 장소로다  "

 

 권율의 말에 조경이 묻는다

 

" 오운 진법이란 무엇이옵니까?"

"군사를 이끌고 적의 배후를 들어가 물을 사이에 두고 싸울때 쓰는 전술이오

이 행주 산성은 동쪽과 북쪽은 절벽이고 . 남쪽은 한강과 접한 천야만야 한 절벽이니 병법상 배수진의 효과도 많은 곳이라 생각되는군...또 한강을 이용하니 식수 문제 에서부터 군량미 수송 무기 수송 까지 아주 적합한 곳으로 생각 되고.....

또 삼각산, 인왕산, 남산이 한눈에 들어 오니, 얼마든지  적의동태를 관찰 할수도 있고.... 그러나....."

 

 

권율은 말을 멈추고 조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조경은 장군이 한참 행주 산성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를 갑자기 멈추고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에 의아하여.

"이 장소가 마음에 않드십니까?"

하고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 장소야 말로 제일 좋은 장소이긴 하지만 ..... 한성 더 가까이 들어가 보고 결정 합시다. "

조경은 권율이 한성 더 가까이 들어간다는 대하여는 의아했다

" 장군 어른 적에게 너무 근접하면 위험합니다 ""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지"

 

 

조경이 걱정하는 것은 서울 도성 안에는 평양과 황해도 개성등에서 철수한 왜군과 서울에 주둔 하고 있는 우희다의 군대까지 포함하여 5만여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함부로 접근 하기가 두려운 곳이였기 때문이었다.

 권율은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가 없는데도 굳이 한성 북 쪽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한강과 지류인 홍제천과 합쳐져 갈대 숲으로 되어있는 중초도(中草島-지금의 난지도)를 지나며 조경에게말한다

 

 

 

"조방장 이섬은 한강 하류에 있지만 중요한 곳이라는것을 알지요?" 갈대가 무성하여 수만마리의 철새가 즐겨 찾는 곳이지..

 내가 청년 시절 이곳에 자주 나와 보았는데 오리가 물에 떠있는 형상의 섬이라 하여 오리섬 이라 불렀소. 워낙 갈대가 많아 오리들이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거든...

 앞으로 내가 지금 가려고 하는 안산(鞍山)이 될지 행주 산성이 될지 모르지만 본진을 구축 할 때는 이곳을 잘 이용해야 될줄 아오."

 

 

권율은 중초도를 바라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조경은 그제서야 권율 순찰사가 돈의문(敦義門-지금의 서대문)밖에 있는 안산(鞍山)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안산 이라면 경복궁이 코앞에 있는 서울의 중심산이다

 

조경은 권율의 대담성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곳을 가려면 안현(鞍峴)을 거쳐 가야 한다.

이곳에는 분명히 왜군들이 지키고 있을 터인데 이런 위험한 곳을 서슴치 않고 가겠다는 권율의 말이 조경으로서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 방금 어디로 가신다고 했습니까?"

"안산(鞍山)으로 가 봅시다. 한성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서 진지 구축에 최적지 일거요."

"위험합니다. 적들이 안현(鞍峴)을 집중적으로 지키고 있을 터인데...."

 

 

"조방장도 참.... 내가 지금 안현(鞍峴)고개를 너머 가자는 것이오? 안산의 지리는 내가 빠삭하오 . 소릿길이 있으니 가 봅시다 .안산 꼭대기에 올라 한성을 조명하며 작전 계획을 하자는 얘기지..."

조경은 권율의 말을 듣고, 긴장된 순간 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니 적의 소굴에 들어가 한성을 조명 해 보자니 지금 그럴 때인가?

 

 

 그러나 권율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의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속담이 있다.

권율은 적을 치려면 한성부 가까이 접근하는 것 이외에는 대책이 없다고 생각 했던것이다 .

 

 

권율은 자기집 가까이 있는 인왕산과 안산을 문턱 드나들듯 올라 다녔던 사람 이었다.

 조경이 그것을 알턱이 없었다.

권율은 오래 전 부터 한성 수복의 거점을 안산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

 안산(鞍山)은 위치상으로 보아 북쪽으로는 끝없이 뻗어나간 북경로(지금의 의주로)가 있다.

 

또 인왕산과 안산 계곡 사이에 넓다랗게 펼쳐진 마을이 있는데 홍제원(弘濟院)이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이 뜰에서 한성을 코 앞에 두고 격전을 한바탕 벌여 볼 만한 것으로 권율은 생각 하고 있었다.

 

 

원래 권율의 집은 도성 서쪽 행촌동에 있다.

 

인왕산 넘어 경기 감영 주변 산 아래에는 애오개 고개가 있어 권율이 청년 시절 자주 들렀던 곳이다.

 

그가 한성부 가까이 접근 하는데도 자신하는 것은 이곳 사정에 너무 밝아 왜군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 하겠다는 계산 하 에서였다.

 

 

돈의문(지금의 서대문)밖은 북쪽으로 홍제원 남쪽으로 애오개(지금의 충정로 3,4가) 골짜기 에서도 일전(一戰)을 벌여 볼만한 것으로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금화산과 복주산을 동서로 끼고 깊숙이 자리잡은 능안골(북아현3동)은 조선군의 병참 기지로 아주 적격지로 생각 하고 있었다.

 

또, 사천(沙川-홍제천)를 따라 들어가면 여인이 치마를 두른것 같이 보인다 하여, 치마 바위라는 곳이 있는데, 상암곡(裳岩谷)에 이른다.

 

 

 

이곳에 조선군을 매복 시켰다가 창의문쪽을 자극 하여 적의 주력군을 유인 해 놓고 돈의문 쪽으로 조선 주력군을 투입한다는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권율은 조경에게 안산 정상에서 지시한다

"조 장군 내 계획은 대략 이러니 참고 하시오.

안산을 주 진지로 삼되 적들의 주력군이 주로 주둔해 있는 구리개 길과 진고개 길, 종로 육조거리를 치려면 사대문을 이용해 침공해야 하는데, 듣건대 적들이 제일 중요시 하는 곳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에 왜군을 집중 경비 한다는 말을 듣고 있소.적들은 우리 군이 노출되기 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조선군이 한강의 노들 나루나 흥인지문 밖에서 나타날것을 기대 할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안산을 주 진지로 삼고 인왕산을 중심으로 창의문과 돈의문을 집중 공략 경희궁과 경복궁 부터 점령해 들어가야 할 것이상책이라 할것이오 ."

하고, 한성 침공 계획을 대략 설명했다.

"하지만 적들이 우리군이 안산까지 행군하는 것을 그냥 두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군이 평야 지대를 택하지 않고 산지를 통해 신속히 이동 하고자 하는 것이오.

안산, 무악재, 인왕산이 우리의 거점이라고 생각 하면 되오."

 조경은 권율의 작전에는 동감 하지만 너무나 한성 가까이 접근하여 작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권율은 그날 저녁 늦게 한강을 건너 밤새워 수원성 동헌에 돌아왔다.

 동헌에는 양주에 나가있는 도체찰사 정철의 서한이 와 있었다.

 

 

내용은 권율이 계획 하고 있는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당초에는 평양을 점령한 명나라군이 서울을 향하여 대거 남하 중이므로 감히 왜군이 서울 도성 밖으로는 나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 했었으나 예상 밖으로 왜군들이 벽제관 까지 나와 명나라 대군을 대패하게 하여 평양으로 철수 중이라는 불길한 통보였다.

정철의 의견 으로는 적들이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 하여 마음이 들뜬 상태 이므로 명나라 군사들이 철수하는 마당에 서울 수복 계획은 보류하라는 내용 이었다.

 

 

 그러나, 권율의 의지는 체찰사 정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처음 마음 먹은대로 한성 수복 작전은 기어코 해야 겠다는 오히려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이튿날, 권율은 제장들을 불러 모았다.

"제장들은 들으라. 어제 내가 조방장과 함께 한성수복을 위한 현지 답사를 하였는데, 둘러본 두곳중 행주 산성과 안산이 모두 적합한 곳이다.

행주산성을 보니 동남북이 모두 절벽이고 남쪽은 한강으로 된 절벽이었으며 서쪽은 구릉지로서 군사들을 숨기기 좋은 곳이외다. 한가지 흠은 도성과 좀 멀다는 것이다.

도성을 치려면 도성 가까이 가서 작전 해야 성공할 것으로 생각 되는바, 한성부와는 지척지간에 있는 안산이 좋을듯 한데, 제장들의 의견을 말해보오."

 

 

전라 병사 선 거이가 말한다

 "적이 용인 , 양지, 죽산등 한성과 부산간 의 유일한 연락 보급로 를 아직도 확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죽산의 복도정칙(福島正則)은 우리의 배후를 치고도 남을 왜군중에는 맹장 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먼저 쳐 후환을 없앤 다음 한성 수복군을 투입 함이 좋을 듯합니다. "

 

 

 

이말에 권율이 답한다

"복도정칙(福島正則)이란 자가 왜군의 맹장 이라 하나 그는 죽산을 떠나지 못할 것이요 .

안성에 있는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장군이 그렇지 않아도 한성 수복전에 참전 할것을 제의 해 왔는데 내가 제의를 만류 했오.

이유는 안성군 죽산 을 견제 하고 있는 것은 홍계남 장군이 벋히고 있기 때문이요.

홍장군은 부친이 복도정칙군 에게 살해 당 하였기 때문에 그를 큰 원수로 알고 있오 .

그렇지 않아도 며칠전 안성군 양성에 있던 소모사 변이중 군이 죽산 에서 중국의 고대 전법인 "방관(房琯)의 우차지계(牛車之計)로서 소를 이용 죽주산성을 공격 하였다 하오.

 

 

이 우차(牛車)는 적탄에도 견딜수 있도록 덮개를 씨워 그 속에 군사들을 숨겨 황소가 끌게 하였는데 이것은 적진 가까이 쉽게 접근 하기 위함 이었는데 애석 하게도 적들이 쏜 불 화살에 맞아 불이 붙어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 안성에 있던 홍계남 장군이 급거 출동 하자 왜군들이 성안으로 도망 하게 하였다 하오 .

 

 

변소모사가 죽산성 공략에는 실패 했지만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새로운 전법에 놀랐 다는것이오 .

그런데 이번에 우리 작전에 참여 해달라는 변소모사의 서신을 받고 지금있는 양성에서 양천 방면으로 이동 우리의 후방을 엄호 하라고 조치 하였소 ,

 

 

아까 선장군이 말한 대로 병서에 보면 思慮之政, 謂思近慮遠也,夫人無遠慮,必有近憂,( 옳바른 사려란 먼저 주변 부터 생각 하고 동시에 멀리를 내다 보야야 한다 만일 먼곳을 내다 보지 못한다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 라는 말을 생각해보오

안산이냐? 행주산성 이냐 를 두고 한참 논란 끝에 행주산성 으로 결정이 난것이다.

 

 

 

권율은 선거이에게 지시한다

"선장군은 광교산에 주력군을 배치 하되 독산성 수비에도 만전을 기하여 주오 , 독산성은 중요한 지역으로 우리가 비어 있을것을 노려 적이 점령 하면 않되는 중요한 곳 이니 일부 병력 만 남게 하되 거짓 병사 를 만들어 성위 에다 곳곳이 세워 위장 토록 하시오 .

 

 

주력군은 금천으로 한성 쪽에서 공격할지 모를 왜군에 대비 만반에 준비를 하기 바라오

적의 주력군이 움직이는데 딸아 기동성 있게 엄호 해야 하고 적이 행주산성으로 집중 공격시에는 신속히 행주산성으로 지원할 준비를 해야 하오"

 하고 후방 엄호부대의 작전도 미리 지시 해두었다.

 

권율군이 행주산성 에 진을 치자 그주변에는 때아닌 전운이 감돌기 시작 했다

 

권율이 한성부 서쪽 20리 밖에 까지 진을 치고 한성을 노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우희다는 교만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권율이란자가 한성을 노려? 여기가 어디라고 ......?

옆에 있던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우히다를 충고 하듯이 낮은 소리로 말한다

"전라 감사 권율이란자는 임기 응변의 용병술이 능한 장수입니다 .

 

그놈은 계략이 때로는 호랑이가 날뛰는것 같고 때로는 용과같이 변화 무쌍한 장수로 함부로 대할수 없는자입니다 .

이 자가 이제는 우리가 있는 이곳 20 리 밖까지 닥아와 진을 치고 싸움을 걸어 오고 있는데 이놈들을 하루 빨리 싹쓸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 죽게 될지 몰라 벼개를 높이베고 잠들수 없게 됩니다 .

더구나 그놈은  장군이나 내가 이치령의 원수를 갚고 독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당장 처야 합니다 "

 

 

 

60세 노장 (老將)소조천 융경은 우희다의 혈기왕성한 발언에 다소 우려를 나타냈지만 청년 사령관 우희다가 큰소리 치는것이 마음에 들었다 .

 하지만 왜군들은 패전 일로를 걷고 있던 조선군이 아님을 조심 스럽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군은 7 종대로 나누어 행주산성 공략에 나섰다 .

 

 

 

조선군 2천300명이 지키고 있는 행주산성을 그들 말대로 싹쓸이 하기 위하여 왜군 3만 명이 동원 된것이다

적의 7 종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 1대 소서행장(小西行長)

제2 대 석전삼성(石田三成)

제3 대 흑전장정(黑田長政)

제4 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제5 대 길천광가(吉川廣家 )

제 6대 모리원강(毛利元康)

제7 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행주산성에 도착한 조선군은 진지 구축에 여념이 없었다 , 서둘러 목책을 설치 하고 참호를 파고 수비 태세를 갖추기 시작 했다 .

 

 

 

행주 산성은 동남 쪽으로는 임진강과 만나는 한강의 큰 물줄기와 서북쪽으로는 파주, 문산 을 바라 볼수 있고 서울도 한눈으로 내려다 볼수있는곳에 있었다

행주산성은 이름만 산성 이지 돌로 쌓은 산성이 아니다 .

 

 

 

한강 유역은 신라 가 삼국을 통일후 나당 전쟁때 까지는 남북 교통의 요지로 산성 서북쪽은 신라 시대 쌓았다는 토축 산성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토축 산성의 규모는 강기슭에 돌출된 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산정상을 에워싼 내성과 북쪽으로 펄처진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남쪽은 한강 기슭의 험한 절벽을 이용 할수 있고 동 ,북, 서쪽은 넓은 평야로 이루어저 있다 .

 

임진 왜란을 일으킨 왜군들은 신예무기인 조총으로 무장 되어 있고 비루(飛樓)라는 성에 기어 오르기 좋은 사다리 모양의 장비가 있었고 포루(砲樓)라는 군장비를 꼭 전쟁시마다 필수품으로 갖고 다니었다.

 

 

이러한 장비는 행주 산성같은 돌로 쌓지 않은 성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 지리를 잘 모르는 왜군들이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었다.

 

 

대개 성벽은 기 초를 다지기 위하여 작은 돌로 메꾼다음 성벽을 댓돌모양의 층계를 만들되 진흙으로 사이 사이를 메꾸는 방식이어서 비만 많이와도 묺어 지기 일수 였다 .

그런데도 조정은 축성에 동원 된 백성들이 생업에 지장이 있다 하여 축성을 게을리 한것이다.

조선은 200 여년동안 태평세월에 젖어 임진란같은 큰전쟁이 있으리라고는 꿈을 꾸어 본적도 없었다.

 

 

 

행주산성에 진군 한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 조방장(助防將)조경(趙儆)이 산세를 둘러 보고 있는 권율에게 닥아 왔다 . 조경이 말한다

"여기 계시는 군요, 방금 양주 땅에서 정 체찰사 (정철)께서 작전상 의론 할일이 있다면서 급히 방문 해달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권율은 왜군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왜군을 보고 있는데 체찰사가 자기를 보자는것이 역정이 났다

"왜적들이 언제 처들어 올지 모르는데 왜 오라 가라 하시는고..."

"체찰사 말씀 이니 한번 만나 보십시요. 갔다 오시는동안 설마 왜군이 처들어 오겠습니까? 처들러 오더라도 제가 있지 않습니까 ?"

 

 

"조방장은 잘 모르는 말이요,왜군은 그리 만만히 볼 대상이 아니오 . 적들이야 말로 간계(奸計)에 능하고 주변 형세(形勢)에 민첩한자 들이외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오, 내가 양주는 다녀 오리다."

 "다녀 오시는 동안 나무를 잘라 성책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상 불가능 할텐데...."

 

 

 

왜적이 구름처럼 진군 해오는데 무슨소리를 하려고 오라가라 하는지 모르지만 체찰사 가 야속 스러웠다

조경이다시 권한다

" 체찰사 어른이  삿도가  자기를 뵈러 오지 않는다고 화내십니다 "

"..............."

 

권율은 할수 없이 체찰사가있는 막사로 떠날 차비를 쳐리고 지시한다

"내가 다녀 올동안 나무를 베어 목책을 세우도록하오""

" 지금 이런 상태로는 왜적과 전투 할수 없습니다 . 산에 나무가 많으니 단시간내 해놓겠습니다."

"하지만 장병들을 너무 혹사 시키지는 마시오 .빨리 끝내고 충분히 휴식을 시키도록 하시오"

 

조경은 북서쪽 산지지역에 있는 토성위에 나무로 성책을 구축하기 시작 했다 ,

 

동북 쪽과 남쪽은 천야만야한 절벽이 있기 때문에 성책 구축이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체찰사 정철은 권율에게 권율의 행주산성 수비를 중지하라며 명군이 개성 조차도 포기 하고 평양으로 철수 할지모는데 조선군 단독으로 하는 작전은 삼가 해 달라는 의견 이었다.

 

 

 

왜군들도 그들 내부 사정으로 한성부 밖으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니 조선군 단독 으로는 행동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명나라 군이 철수 하면 조선 군도 빨리 수원으로 철수 하는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권율은 묵묵히 체찰사 정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권율이 입을 열었다

 

" 채찰사 어른 작전 지시는 제가 하겠습니다 . 상감 께서는 이미   보검 까지 저에게 내리시면서 저의 명을 따르지 않는자는 누구든지 목을 치라 했습니다 . 이 행주산성을 거점으로 한성을 수복하려는 저의 뜻을 막지 마십시요 .

 

정철은 권율의 오만 불손한 대답에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고 말한다

"장군 , 오판 하지 마시오 . 명나라군대가 평양으로 쫓겨가고 있는 이때 무슨 힘으로 한성을 수복 하겠다는 거요? "

정철은 권율에게 내렸다는 임금이 갖고 있던 칼을 차고 있는 권율에게 위압 감을 느끼고 차마 자기 목도 치겠느냐는 질문을 하려다 꾹 참았다

 

 

권율이 다시 행주 산성에 도착 해 보니 흙이 아닌 목책으로 된 성책이 훌륭하게 만들어 이중 산중으로 잘 설치 해놓았다 '

'허, 조장군 수고 많았소"

 

 

조경은 어깨가 으쓱한다

"단 이틀만에 이만한 성하나 생겼으니 대단치 않습니까?""

권율이 대략 성책을 둘러 보았다.

조경이 체찰사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권율에게 물었다,

 

 

"체찰사 께서 무슨 말씀이 있었습니까?"

"음 , 명군이 개성 에서도 철수 할지 모르니 조선군도 수원 방면으로 철수 준비 하라더군...그런데 서울에 나가 있는 우리 정탐원의 소식은 어찌 되었는고?"

 

 

권율은 체찰사를 무시하는듯한 태도에 조경도 놀래었다

 권율은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왜군 동태가 더 걱정 되었다.

 

조경이 큰소리 친다

"정탐원을 보내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 왜군들이 처들어 와 본댔자 저 산아래 논밭 뚝길을 따라 오는수 밖에 없습니다 . 평야지대 이지만 길이 농로밖에 없어 오려면 고생좀 할것입니다

 

 

적들은5만 대군이고 우리는 적들에 비해 1만군사 밖에 안되지만 우리는 연전 연승한 군대이고 왜군들은 그동안 여러번 패하여 사기가 떨어진 군대입니다 걱정 마십시요 "

권율은 조경의 큰소리에 엷은 미소로서 답한다

 

 

"조방장 , 내가 몇가지 집고 넘어갈 게 있는데 ...."

"말씀 하십시요"

"첫째 변 소모사(변이중)가 얘기 하던 그 화차(火車)는 모두 운반 해 놓았는가?"

"300 량을 모두 배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좋소 , 투석기로 사용할 수차석포(水車石砲)는?"

"모두 준비 완료 되었습니다"

 

 

"내가 추가로 지시 하겠는데 1만병사 전원에게 수건으로 만든 자루에 잿가루를 담아 모두 옆구리에 차고 있다가 적들과 육박전을 할때 쓰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

 

권율은 몸소 군사들이 있는 진지를 순회 하며 활과 화살을 살피고 화차의 총구를 살피었다 . 수차석포(水車石砲)에 쓰일 돌멩이도 산처럼 쌓아 놓도록 하였다

 

.또 가마솥을 여러 군데 놓아 화재시 쓸수 있도록 하였다 .

 

 

 

조경이 정탐병 한명을 데리고 권율 막사에 들어 왔다 .

"그래 수고 했네 , 한성 사정은 어떻던가?"

"소인이 적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종로와 진고개 지역을 주로 돌아 보았는데 적들이 전투 용구를 챙기고 야단들입니다 . 듣기에는 벽제관 전투 때 모양으로 이번에도 조선군을 치겠다고 준비 하고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그래? 그래 서울 도성안 인심은 어떻든고?"

"궁궐이 모두 불에타서 모두가 황페화 되어 있습니다"

"음 , 알겠다 계속 정탐 하라"

 

 

왜군사령관 우끼다 히데끼는 출전에 앞서 7 개의 부대로 나누어 나가기로 했다 . 별안간 서울 장안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총 , 활 , 창, 검,등이 지급되고 각종 울긋 불긋한 깃대가 부대 마다 나누어 주었다.

왜군 들이 조선군이 주둔 하고 있는 행주 산성을 직접 공격 하기 위한 준비가 무르익어 갔다.

 

 

 

한편 행주산성 에서는 소모사 변이중이 화차(火車)라 고 부르는 무기를 만들어 바친 것이 있었는데 이 화차에 총구멍이 40개가 달려 있어 일제히 사격 할수 있는 새로운 무기였다. 또 수차석 포(水車石砲)라는것은 일종의 돌을 던지는 투석기로 수차(水車)와 같이 연발로 돌아 가면서 돌이 날라 가며 쏘게 되어 있는 무기였다

태평 성대에 젖어 무기라고는 활, 창 , 칼이 전부인 조선군 으로서는 실로 대단한 무기가 등장 한것이다 .

 

선조 26년 2월 12일새벽이었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산정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적이 나타났다"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초병이 권율장군 막사로 뛰어 내려와 보고 했다 .권율이 산정상으로 급거 올라가 정상초소에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니 아직 먼동이는 트지도 않았는데 일단의 수많은 행열이 이쪽을 향하여 진군 해오고 있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불러 병사 들에게 교대로 식사를 빨리 맞추고 경계에 들어 가라고 지시 했다 .

적의 위세가 닥아 올수록 대단 했다 .

"적들이 30보 앞까지 접근 하기전에 내 신호 없이는 사격 하지말아라"

하고 명령하였다

 

 

 

적의 행열은 끝이 안보일수 없을 정도로 길어서 숫자 조차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

"적을 공격 하라는 신호는 내가 북을 쳐 알릴 터이니 절대 동요 하지 말라"

 

 

 

성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적막이 깃들었다 . 병사들의 기침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새벽 이었다.

적들의 선봉대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고 날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 했다.

 

적들의 행색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 병사들 마다 등에다 홍백기 를 꽃고 이상한 괴물 모양으로 꾸미어 앞에 나타났다 , 상대방에게 겁을 주기위한 계략이었다 .

 

 

조선군은 바로 직전 수원 독산성 전투때 이미 이들의 기괴한 모습을 보아 왔으므로 두려울게 없었다 .그만 큼 전쟁초기에 쫓기기만 하던 조선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치령 전투, 독산성 전투등 한번도 저본적이 없는 권율군으로, 사기가 중천 되어 있는 상승 부대였다.

 

 

 

맨앞에 울긋 불긋한 양산을 받쳐 들고 그밑에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왜장이 뚜렸하게 나타나기 시작 하였는데 이자가 바로 평양성 까지 처들어갔다가 후퇴하여 서울에 와 있던 소서행장 (小西行長)이었다 .그는 평양까지 처 올라가고 있을 때 수많은 조선 육군과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자였다 ,

 

 

평양전에서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밀약으로 안심하고 대동강 어름위를 건너서 후퇴 한것이 흠이 있기는 했지만 역시 그는 일본군으로서는 역전의 용사로 손 꼽았다 . 그는 벽제관에서 명나라군과의 전투 때도 참여 하지 않고 군사들을 휴식을 시키는등 자기 장병관리 에도 철저한 자이었다.

 

 

 

그러한 그가 이번 전투에서는 무명(武名)을 다시날려 보려고 선봉대 앞장을 선것이다.소서행장 제 1대는 일제히 산성을 향하여 돌진하기 시작 했다.

성채가까이 올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자 왜군은 거침없이 산으로 기어 올랐다.

 

 

 

이때였다 , 덕양산 산정에 금빛도 찬란한 갑옷과 투구를 쓴 권율이 백마위에 올라 앉아 왜장 소서행장을 굽어보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둥둥둥"

북소리가 세번 울리기 바쁘게 화차, 수차석포, 진천뢰(震天雷)에서 화살, 돌,화약탄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무서운 위력이었다 .

 

 

화살과 돌멩이가 그 기고 만장하던 소서행장의 말에 얻어맞자 말이 주인의 말을 듣지안고 뛰어 오를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질번 했다 .

 

왜군의 주무기인 조총이 불을 뿜었지만 숲속과 성채 뒤에 숨어 있는 조선군의 위치를 몰라 총탄은 왜장들의 독려에 이기지 못해 아무곳에다 대고 공포만 쏘고 있었다.

적의 선봉대가 궤멸될 위기에 봉착했다. 인마가 흩어지고 적들이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쓸어젔다 .

 

 

 

 

 

이에 사대수는 편비장을 데리고 행주산성의 현장을 방문 해보기로 하였다.

이때 권율은 전투 후의 진영을 정리 하고 있었다.

 

 

사대수가 파주를 거처 고향 능곡에 이르러 조선 진영을 멀리서 바라보니 행주산성 안은 기치가 선명히 빛나고 창검이 질서 정연 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군사들의 움직임이 일사불란 하였다.

 

 

사대수는 지금까지 조선에 들어온 이후 이렇게 질서 정연한 조선군을 본일이 없다.

사대수는 권율이 있는 막사로 향하는 도중 이러한 군기의 엄정함을 보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사대수 옆에있던 편비장이 군기의 엄정함을 보고 여러곳을 두리번 거리며 호기심 있게 살피었다.

 

 

권율과 사대수는 서로 인사를 나눈뒤 전투 현장을 일일이 둘러 보았다. 적들이 버리고 간 무기가 산같이 쌓여있고 태우고 가고 난후에 냄새가 그대로 나고 있었다. 사대수가 주위를 둘러보고

"장군,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신종(神宗) 황제께 보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장군,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하고 권율을 쳐다보았다.

 

 

"무슨 청이오니까?"

"지금 적들이 벽제관 싸움이후 또다시 북진할 뜻이 있는듯 하옵니다. 지금 저와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 장군과 임진강가에서 왜군과 대치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장군의 도움이 없이는 왜적을 막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장군께서 임진강 남쪽 파주 방면으로 진출 하시어 파주산성에 있는 도원수와 함께 진을 쳐 왜적과 대적해 주신다면 적들도 명나라 군을 함부로 넘보지 못할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수습되는데고 파주로 나가겠습니다."

 

 

권율의 시원스런 대답에 너무나도 고마워 사대수는 어쩔줄 몰랐다. 사실 부총병 사대수는 적의 공격이 두려웠던것이다.

 

 

같이 있던 도체찰사 유성룡도 후방으로 피하도록 해 놓았고 그의 휘하 병사들중 용맹이 있는자만 100 명을 골라 임징강 여러곳에 분산경계하고 있는 참이었다.

 

 

권율이 만일 다른 핑계들을 대고 사대수의 청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왜군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던 참에 권율같은 장군을 만났다는 것은 목마른 곳에 우물을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대수는 권율의 막사를 나와 임진강가를 돌아가는 길에 편비장(編裨將)에게

"과연, 권감사는 여늬 조선군 장수보다 다른 뛰어난 데가 있다. 참으로 조선에도 이러한 진정한 장수가 있는줄 몰랐어."

하고 감탄 조로 말하자 편비장이

"그러 하옵니다. 그분은 아홉가지 덕목을 모두 갖춘 훌륭한 장수로 보입니다."

"아홉가지 덕목이라니?"

"제가 보기에는 행주산성내 군사들의 움직임을 보니 예의가 바르고 활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확인해 보려고 병영을 돌아 보았는데, 장수들이 병사들이 춥고 배고픔을 모르도록 살피는 평소의 인(仁德)이 그하나로 보입니다.

 

 

"흠, 인장(仁將)이라는 얘기로군."

 

 

편비장이 말을 이었다.

"그 다음은 이번 행주산성 주변을 돌아보니 결사항전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그것은 목전의 어려움을 피하여 무사안일을 도모하지않고 정의를 위하여는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음, 그것은 의장(義將) 이렸다."

 

 

"셋째는 권장군은 이치,독산 행주산성 공적이 출중한데도 공적을 전혀 내세우지 않으며 겸손하면서도 현명하며 강직한 면이 엿보이 나이다."

"음,그것은 예(禮)가 바른 사람이란 말이지."

"넷째는 제가 보기에는 앞서 세 전투 모두 적들이 예상치 않은 일이 여러번 있었는데도 그들의 눈을 속여 다양한 대응을 함으로써 전화위복을 만드는 지혜가 출중한 장수로 보입니다."

"음 그것은 지장(智將)이란 말이렸다"

 

 

사대수는 편비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임진강 본진으로 향하였다 . 사대수는 편비장의 권율 인물평이 재미 있다는듯이

"다셧째 평좀 계속 해보게 "

"다섯째는 권감사가 상벌을 분명히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전투에 임하여 진격하는자에게는 후한상을 주었지만 비겁하게 물러 나는자에게는 엄벌하였다 합니다 .

 

이치령에서의 전투를 보아도당시 비겁하게 도망 하려는 병사에게는 전투 독려 중에도 병사들이 쓰고 있는 벙거지 군모의 모자끝을 칼로 베어 놓았다가 전투가 끝난후 모자끝이 잘린 병사들을 따로 모아 벌을 주었다 합니다. 이는 적시에 상과 벌을 주어 공평성을 기한것이라 합니다"

 

 

"음 그것은 신장(信將)이라 할수 있지"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는 파주를 거처 임진강이 보이는데 까지 말을 타고 가면서도 편비장에게 얘기를 계속시키었다 .

 

 

"비장은 많이도 관찰하였구먼 ,그래 여섯번째 얘기나 더 해 보게"

사대수는 편비장과의 대화 내용을 듣고 마음에 닿는것이 많다고 생각 했다 .

 

 

 

"여섯째는 권장군의 얘기를 부하장수 들에게 들은바에 의하면 전투를 할때면 행동이 어찌나 민첩한지 모르고 그 행동을보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듯한 기개가 보인다는것입니다.

 

 

백마위에 황금빛 갑옷을 입고 지휘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군사들은 그 기개에 저절로 제압당한다는것입니다. 이번 행주산성 전투 때도 승군이 후퇴 할 기미가 보이자 상방검을 빼어 들고 직접 적군 속에 서 적의 목을 베었다 합니다 ."

 

 

"그것을 보장(步將)의 자격이 있다 하는 걸세"

 

"일곱째는 예하 장수 들이 말하는데 권장군은 전투에 임하여 말을 달려 고산 준령도 마다않고 진격 할때가 때만 오면 선봉에서 지휘에 임하고 후퇴시에는 병사들이 무사히 후퇴 하는것을 확인 하기 위하여 맨 나중까지 남아 적이 얼씬 못하게 하고 후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그것이 이른바 기장(騎將)의 자격이 있다는것일세"

 

"장군은 일단 전투 상황이 되면 죽을 각오로 나서기 때문에 후퇴란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합니다 . 그러기 때문에 어떤 강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 그렇다고 적들이 아무리 적더라도 적들을 업수히 여기지 않아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합니다."

 

 

"그것을 맹장(猛將)이라는 것이오"

 

여기 까지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듣던 사대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내용이 꼭 자신의 치부를 들어 내는 것같아서 자신이 무능한 장수로 보일까 생각 되기 때문이었다.

 

사대수는 권율에대한 존경심에서 경외(敬畏)스러웁기 까지 하였다.

 

 

"편비장, 행주산성 방문하기를 잘했소. 과연 우리 군사들이 권율군 만큼이나 싸워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명나라군이 명나라 각처에서 모여 급조된 군대로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고 있는 자신이 좀 개탄스러웠다. 편비장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파주를 지나 임진강 가까이 도달했다.

 

 

 

"아까 아홉가지라 했는데 맨나중에것은....."

사대수는 편버장의 권율론에 재미가 있다는 듯이 더 물었다.

"총병님, 역시 권감사는 총병님을 잘 알아 보는듯 합니다."

"무엇을 알아 보았다고."

 

 

"그는 여러 명나라 총병님들 중에서도 믿을수 있는 장수 이기 때문에 이여송 제독께서 최전선에 내보내신것이 아니옵니까?"

"그렇지"

"그것 입니다. 권감사는 병법에 밝고 현명하신 총병님 같은 분께 허심탄해 하게 가르침을 청하시지 않았습니까?"

"허-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대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자기를 알아주는 권율 이었다니....

"제가 보기에는 권 감사는 총병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 할줄도 알고 자기 부하들에게는 관용 하면서도 용명강직 할뿐만 아니라 지략도 풍부한 사람으로 가히 높은 재능을 가진 장수 입니다.

 

 

"그런 사람을 대장(大將)감 이라 하는 것이라네.... 대장, 대장이라하면 아무나 대장인가? 허허....."

 

어느새 그들은 임진강가에 도달했다. 임진강가에는 사대수가 타고 갈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의 마무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파주산성으로 전군을 이동하기로 하였다.

 

 

파주산성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濱)이 권율을 맞아 주었다. 김명원은 명나라군이 철수할지 모르는 상황하에서 권율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하고 파주로 진군해 오자 천군만마를 맞은듯, 하늘을 날을듯 매우 기뻣다.

 

 

 

도원수 김명원은 대사헌 김만균의 아들 이었다. 중종 29년에 출생하여 명종때 급제 하였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그는 임진란 초기에 준비 않된 조선군 사령관으로서 한성과 한강을 지키다 왜군에게 패하였을 뿐 아니라 임진강 전투 때도 패한 불우한 군인 이었다.

 

 

 

선조는 그를 장군이라기 보다 차라리 재상감이라고 하였다. 선조가 보기에는 대장감이 아니고 문관 재목으로 밖에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그래도 장수감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궁여지책으로 그를 내세우지 않을수 없는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

 

 

파주에 진주한 권율은 한성수복의 작전계획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 조방장, 정희현등과 함께 해유령(蟹愉嶺)을 막게 하고 의병장 박유인, 윤선옥, 이산휘에게 창릉(昌陵)과 경릉(敬陵)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왜군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는 적들이 많을 때는 나가 싸우지 않고 적들이 적을 때만을 적을 쳐서 그들이 피로 하게 만들었다.

 

 

또 창의사 김천일과 경기수사 이빈, 충청수사 정걸에게 강화에서 출발 하고 한강을 수시로 위협 항해토록 하여 왜군들이 한강 남북을 넘나들지 못하도록 조치 하였다.

 

 

 

한편 왜군은 권율군이 파주산성으로 이동했다는 말을듣고 행주대패의 치욕을 풀기위해 광탄으로 진출 하였으나 권율군 근방에도 가지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 왔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명조정에서 행주대첩에 대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 하였다. 명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하고 의기소침하고 있는터에 조선군의 승리 보고가 들어오자

"조선군이 일본대군을 대패 시켰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하고 보고 하러 조정에 들어오는 경략에게 우선 먼저 물었다.

 

 

 

송응창은 황제가 이토록 관심을 갖는데 매우 놀라며

 

"폐하, 왜적들이 조선왕국을 침략하자 그동안 온나라가 공포에 떨고 있어도 누구하나 제나라 지킬자가 없었고 또 대란을 막고 이를 회복하려는 자도 없어서 참으로 조선 왕국에는 인물도 없나 하고 생각 하였나이다. 그런데,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만이 외롭게 성을 사수 하며 한성수복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이번 대첩에서 승리 하였나이다."

 

 

하고 송응창이 아뢰었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과연 그러한 인물 이었던고....듣고 보니 전라도 감사야 말로 조선왕국이 국정이 문란할때는 훌륭한 신하 감이고 쓰러져 가는 왕국을 일으킬때의 명장이로다. 송경략은 백금 50 냥을 그에게 내려 명나라 장수 들에게도 충용(忠勇)의 본보기가 되도록 힘쓰도록 하게 하라."

하고 어명을 내렸다.

 

 

 

명나라 황제 신종은 아래와 같이 성지(聖指)를 친필로 직접써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통하여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이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전라감사를 통하여 보았나니 이로서 왜적을 섬멸하여 조선의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떨쳐 일어 났다는바 짐이 이를 치하 하고 오래 기리고자 하노라."

 

 

 

석성은 명나라의 관원을 보내 조선에 나와 있는 명나라 장수들 보는 앞에서 시상하니, 이후, 명나라 장수들은 권율 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 명성을 알아보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여송은 행주대첩 소식을 황해도 평산 땅 보산역 에서 들었다. 그는 한성 수복을 손쉽게 해 치우려다 상상 외로 벽제관에서 왜적 에게 패한후 평양 으로 후퇴 하기로 하고 떠났던 것인데 듣자 하니 조선군 단독으로 왜군 3 만명을 단 1만여 군사로 대승을 거두었다 는데 크게 놀랐다.

 

 

 

그는 같이 동행 하던 동생 이자 중협 대장(中協大將)인 이여백 에게

 

"조선과 같이 군사상 큰 일을 겪고 있는 나라 에서 큰공 하나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평양 으로 돌아 가다 당 한것은 너 때문이야..."

하고 꾸짖자 이여백은 몸 둘바를 어쩔줄 몰라 했다 .

 

 

 

그 이유는 벽제관 싸움 이후 서울 수복을 하느냐 않느냐 진퇴 양란에 빠졌을때 적극적으로 반대 하고 후퇴 하기로 주장한 사람이 이여백 이었기 때문 이었다.

이여백은

" 미안 해요 형님 . 사실 이번 조선전 에서 두번이나 형님이 죽을 뻔한 위기를 보고 저렇게 돌아 가시면 어쩌나 해서 강력히 주장 한것 뿐입니다 . "

동생이 자기 한몸을 걱정 하여 한 주장 이라니 할말이 없었다.

 

사실 이여송은 평양에 도착 하면 몸이 아파서 이번 조선전에서는 싸울수 없으니 다를 장수로 교대 해줄것을 명 조정에 서계를로 올릴 참이었다 .

행주 대첩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후퇴 하던 명군이 다시 개성으로 되 돌린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오 , 권 장군의 충로(忠勞)가 많도다. 공은 전투에 임하여 용기도 훌륭 하지만 듣자 하니 그의 계략은 감히 어느 장수가 따를 자가 없다고 들었다.

명나라 황제 신종께서도 과인에게 그에 대하여 칭송하는 말을 전해 왔거늘 세상에 명성이 명나라 뿐만 아니라 왜적들도 권율이라면 그 위엄이 떨쳐 겁을 낸다고 하는구나 "

 

 

하며 선조가 조정 회의에서 감탄 조로 격찬을 연발 하자 그렇게도 남의 공을 잘 헐뜯던 조정 대신들도 이번 일만큼은 쥐죽은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이들이 침묵을 지킬수 밖에 없는 것은 그동안 수많은 전투를 마지 하여 변변히 싸울적마다 공다운 공을 세운 장수가 육장(陸將)중에서는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

 

 

수장(水將)인 이순신이 있기는 하나 현실적 으로 백성들이 발딛고 살아야 할 땅을 한치 라도 더 지켜주는 장수가 당장 필요 했기 때문 이었다 .

 

 

 

아무튼 , 행주 산성 전투는 수원 에서의 독산성 전투와는 달리 적들의 전투력이 총 집결한 정예 대군들 이었다는 점과 벽제관 전투 에서의 승리 의 연속선에 있었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일본군을 명나라의 도움이 없이도 쳐부시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지만 더큰 의미는 조선군의 사기가 백배 하게 되었 다는것과 명나라군이 후퇴를 전진 으로 바꾸게 한 원동력을 불러 넣어 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할것이다.

 

 

 

특히 이 전투 에서 적을 눈 앞에 두고 백병전과 다름 없는 전투를 치룬 권율은 다른 장수와 비할데 없는 담대 함과 지략을 소유한 장수로 당시 로서는 보통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다.

 

 

 

어쨋든 왜군은 한성 점령을 기정 사실화 하려는데 있어서 권율군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 로서 가시를 뽑으려다 오히려 화상을 당해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왜군들은 불안 해지기 시작 했다

 

 

그동안 왜군은 조선군을 보통 얕 잡아 본것이 아니었다. 이번전투 에서의 그들의 인해 전술이 먹혀 들지 않자 더욱 더 불안 하였다 .

 

행주산성 에서의 왜군이 패한 원인을 굳이 거론 한다면 그 첫째가 조선군을 너무 얕잡아 보았 다는것 , 두번째가 행주 산성이라는 특수 지형을 파악 못한 탓 이었다 .

 

 

행주 산성은 행주산성 주변의 벌판과 산, 남쪽의 한강 등을 적절히 작전에 응용 할줄 알았 어야 했다,

그러나 권율은 행주산성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한낱 처사(處士)로 시국을 개탄하며 소일 하던 시절 난지도 갈대밭과 덕양산 주변을 눈여겨 보아 왔었을 뿐만 아니라 왜적과 전투 직전 에도 충분한 사전 답사를 했었다.

 

 

 

어쨌든 권율은 왜군들의 약점과 조선군의 장점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사전에 다 파악하고 전투에 임 하였으니 승리의 반은 예고 된것이나 다름 없다 할것이다.

 

 

나머지 반은 조선군의 전의 (戰意)와 근접전 에서의 집중 공격력, 방어 시설인 목책의 준비, 새로운 화력, 부녀자들까지 자진 참전한 단결력, 이런 모든 여건을 적절히 구상하여 싸울수 있는 권율의 지략 이 합처 훌륭한 승리를 이룬것이다

 

 

 

행주산성의 승리의 또하나의 강점은 조선의 허리를 가로 지르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한목을 한것을 빼어 놓을수 없다 덕양산옆 한강은 만조와 간조를 적절히 사용 힘을 덜들이고 배를 움직여 군수 물자와 군량미를 적절히 보급해준 소리 없는 젖줄이었다 .

 

 

 

권율은 이 강의 푸른 물줄기를 내려다 보면서 죽기로 싸울것을 맹세 하고 병법상에 배수진을 생각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소서행장은 중현소(玄蘇)를 보내 강화를 꾀하였었다.

 

 

 

조선에서도 대사헌 이덕형을 보내 왜적들과 대동강 배 위에서 만났으나 화의(和議)를 이루지 못하였다.

 

소서행장은 이렇게 화의를 하려고 애를쓰기도 했지만 명나라 유격장 신유겸과의 교섭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당황하고 있었다.

 

 

 

소서행장이 우히다에게 심유겸과의 회담을 주제로 노장 소조천 융경(小早川 隆景)등 이문제에 대하여 몇명의 왜군장수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다.

 

 

가등청정과 과도직무(鍋島直茂)가 나서서

"심유경이라는 자가 40만명을 조선전에 투입한다고 하였다는데그래 보아야 명나라 각지에서 모집된 오합지졸에 불과 할 뿐인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

또 조선왕자 두명은 어떻게 사로잡은 자들인데 순순히 돌려준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한성을 명나라에 내주면 우리는 다시 이 조선의 왕도를 점령할 기회가 쉽지 않을 것이오."

 

 

하며 적극 반대 하였다.

 

 

 

회담은 이들의 반대로 진전없이 시간만 끌고 오히려 왜군의 왕도 점령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있었다. 4월19일 이여송의 대군이 다시 동파에 이르고 사대수는 그의 군사를 이끌고 파주 쪽으로 이동 하였다.

 

 

사대수나 이여송은 유격장 심유겸의 협상 소식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군사들을 동원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체찰사 유성룡이 몸이 달았다.

이여송의 명나라군이 다시 개성까지 돌아온것은 좋으나 도대체 무력을 사용한 서울 점령은 꿈에도 생각조차도 않고 있는듯 하였다.

 

 

유성룡은 이여송을 찾아갔다.

 

 

"이 제독, 왜적이 지금 도성에서 꿈쩍않고 있는데 노야(老爺)께서는 이러고만 계시겠습니까?"

하면서, 왜군에 대한 총공격을 요청하자 이여송은 화를 벌컥 내며

"공격부터 하라니요. 귀국의 대신들이나 장수들은 지금 왕자 두명이 포로로 잡혀 있어 심유격이 왕자 두명을 무사히 목숨을 건져 되돌아 오게 하려고 협상하고 있는것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총 공격은 이 두왕자가 돌아온 후에도 해서 늦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를 잠시 기다리지도 않고 성급히 먼저 싸우기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매우 불쾌 합니다."

 

 

하고 유성룡을 크게 나무랬다.

 

 

 

이여송은 심유겸이 소서행장과의 협상으로 왜군이 서울에서 자진 퇴각하면 싸우지 않고 서울로 무혈입성 하겠다는 속셈 이었다. 두왕자를 거론하여 유성룡의 요청을 묵살하기 위한 술책 이었던 것이다.

 

체찰사 유성룡은 권율이 있는 임진진으로 찾아가 명군이 전혀 움직을 기세가 없다고 하며 탄식을 했다.

 

 

이자리에서 권율은

"당초부터 왜세의 의한 한성수복을 하겠다는 생각은 헛된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적을 압박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명나라와 왜국과의 협상은 저희들과의 협상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협상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어찌 이나라를 도탄에 빠진 도적들과 협상을 벌린다는 말씀입니까?"

 

 

결의에 찬 권율의 말에 유성룡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권율은 유성룡에게

"체찰사 께서는 심유격과 이제독의 왜국간의 협상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지금 왜적이나 명나라는 화친(和親) 회담이 서로간에 잘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고가는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때는 이때 입니다. 왜적이나 명나라가 싸울의지가 서로 태만해져 있을 것이므로 이틈을 이용 우리군이 진격 하는것은 최상의 방법입니다 . 우리땅은 우리가 수복 해야지. 어느 누가 해준다는 말씀입니까?

한가지 체찰사께 부탁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권율이 말을 중단하면서 유성룡을 바라 보았다.

"무슨 부탁 입니까?"

"이정형경기 감사와 김명원 도원수에게 저와의 작전이 원활히 되도록 적극 주선하여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고 다시한번 결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

 

 

 

유성룡은 이여송을 의식하며

"그러나, 이제독이 화라도 내면 어찌 하시겠소?"

 

 

"체찰사님, 뭐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원래 전쟁이란 한쪽에서 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화의를 하는것 입니다. 다만 이번 작전에서 '出軍行師는 將在自專'이라(군사를 활성화 하려면 장수에게 재량권을 주라)라 했습니다.

 

 

 

이말은 장수가 하는 일에 조정에서 너무 간섭을 하면 군대의 질서가 문란해지고 약한 군대로 변하게 되어 승산을 기약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성수복 작전 만큼은 명나라 군이 협상을 하든 전투를 하든 놔두되 조선군 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조선군의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 하여야 명나라도 싸우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부터가 나약 해서야 그들이 자기 나라가 아닌데 열심히 싸워 주겠습니까?"

유성룡은 이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장수들의 작전권 까지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나 느끼 었다.

 

 

 

권율군은 좌우 중앙 군으로 나누어 파주를 떠나 좌군은 창능방면으로 하여서 돈의문 쪽으로, 우군은 창의문 쪽으로 중앙군은 불광리를 거쳐 돈의문 쪽으로 진군을 개시 하였다.

 

 

조선군은 왜적들이 명나라와 협상 분위기에 젖어있어 태만한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권율은 서울 동북부 방향에 주둔하고 있는 순변사 이빈 경기 방어사 고언백에게 동북부에서 흥인지문 방향으로 서울을 압박하여 들어오도록 협조 공문을 보냈다.

권율은 중앙군을 인솔하고 돈의문을 목표로 서서히 행군하기 시작 하였다.

 

 

조선 200년에 수도 한성이 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무혈점령 당한지 11개월 만에 한성 수복의 꿈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권율군은 지축리 까지 진출하였다.

 

 

왜군진영에서는 권율군이 한성으로 근접하고 있다는 첩보를 그제서야 듣고 서둘러 모리길성의 2만 병력을 불광리 쪽으로 진출시켰다 .

 

 

권율은 북한산성 주변에 세게의진지를 구축하고 모리길성 부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모리는 북한산상의 입구까지 진출학고 더이상 나가지않고 주변의 요새를 구축하고 권율군의 동태만 주시하고 있었다.

 

 

모리는 조선군 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을 불러 3개의 진지를포기하고 철수할것을 명하였다.

모리가 조선군 철수 소식을 듣자

"군율의 숨은계략이 분명하다 힘부로 나가지말라."

 

 

하고 진군을 생각을하고 있자 왜군부장이 모리 에게

"권율군이 분명히 명나라와 우리가 협상 분위기에 젖어 있는줄로 알고 이곳까지 우리가 나올줄까지는 예상 못하고 진군하여 오다가 너무 급히온탓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후퇴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장군님 지금이 적을 치는데 적격입니다 나아가 치도록 하시지요"

 

 

하고 말하자 모리는

"적장 권율은 지략이 출중한 장수라는것은 알고 있지 않은가?

함부로 나가서는 않되네 조선군은 파주벌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군량미나 군수품부족 때문은 아닌것같네 , 아무래도 적군의 계략인것 같네 "

 

 

모리는 척후병을 풀어 척후병을 풀어 아무런 반응없이 3일 동안을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고만 있었다.

 

왜군진영에 조선군이 지축리에서 30 리밖에 있는 장흥리로 이동해 진을 쳐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권율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필히 조선군 내부에 작전상의 차질이 생긴것이 분명합니다.속히 공격하는것이 옳을 듯합니다"

부장이 나가 치자는 말에 모리는 권율의 위계가 아닌가 하고 나가기를 꺼리고 있었다.

.

권율이 제장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

"적들이 이지역의 지형을 잘 모르고 깊히 들어 오고 있소 . 제장들은 적들이 계속 이 계곡으로 들어 오면 우리가 적의 뒤를 치고 자 하는 데 이를 위하여 서는 지략과 용감성이 있는 장수가 필요 하오. 희망자는 먼저 지망하시오"

 

 

 

말이 떨어지기에 바쁘게 처영이 자기가 나가 겠다고 나섰다 .

 

 

권율은 처영을 선봉대장으로 삼고 부장으로 고산현감 신경희가 지원토록 하였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등에게 임무를 부여 하고 처영과 신경희를 불렀다.그는 작전 개요를 두사람에 알리고

"두 장군들게서는 거짓 적을 치는척하다 적들이 더깊숙히 들어 오도록 유도 하시오, 이때 우리 조선군의 집중 화살을 쏘고 공격할것이니 명심하시오 ."

 

 

 

처영과 신경희 군의 선봉대가 적들앞에 나타나 순식간에 적들이 총쏠 틈도 없이 돌격해 들어가 적들의 수급을 베기 시작 했다.

 

 

왜군 부장이 이이끄는 적 선봉대가 말을 달려 조선군과 육박전이 벌였다.

조선군이 예정대로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왜군 부장은 서둘러 조선군의 뒤를 쫓았다.왜군들이 정신없이 추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권율은 산위 높은곳에서 북을 울리며 대장기를 흔들어 댔다

 

 

순간 사방에서 적들을 향하여 화살이 빗발치듯이 쏟아지고 좁은 계곡에 들어 와 있는 적들에게 바윗 돌을 굴러 떨어뜨리자 화살에 맞아 시체가 쌓이고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

 

 

왜군들이 당황하여 주춤하고 있자 왜군뒤쪽에서 함성이 울리며 매복군이 일시에 적진으로 뛰어 들었다.

조선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율은 조경에게

"조장군은 처영군을 구원할게 아니라 모리길성의 본영을 급습하라."고 지시 했다.

 

 

조경 정예군이 적 본영을 습격하자 모리길성은 전투를 중지 시키고 본영쪽으로 병력을 돌렸다 .

처영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었다 .

 

 

모리는 사태가 긴박하자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본영을 포기 하고 지축의 본진으로 되돌아 갔다 .

병력과 장비를 점검하니 엄청난 손실이 있었다.

 

 

모리는 부하장수들에게

"병법도 모르고 혈기만 내세운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앞으로 또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단칼에 베리라"

모리는 패전 화 풀이라도 할듯이 칼을 빼어 들고 흥분되어 있었다.왜군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왜군들은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돈의문쪽으로 물러 나기 시작 했다.

 

 

권율군의 양동작전 의 승리였다

 

 

 

권율은 적들의 뒤를 쫓아 불광리를 거처 도성이 보이는 안산쪽으로 향하였다.

 

적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 가서 밖을 내다 보지 않고 있었다.

바야흐로 서울 수복의 꿈이 이루어질 문턱에 와 있는것이었다 .이제는 서울 수복은 시간 문제 라고 생각 되었다 .

 

 

 

왜군진영에서는 모리길성의 참패 소식과 신출 귀몰하는 권율의 계략에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모리의 참패로 지금 까지 기고 만장 하던 성격이 일시에 무너지는듯하였다.

 

우희다는 권율군이 안산에 까지 와 있을 뿐만아니라 동북쪽에는 또다른 조선군이 협공 하려 하고 있다는 데 불안감을 감출수 없었다 .

 

 

 

권율군은 창의문과 돈의 문을 부수고 성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적의 패잔병이 조총을 쏘아대며 한강을 건느기 시작 했다

 

 

선조 26년

 

 

4월26일 조선군은 이른 새벽 공기를 뚫고 한성 도성내로 진군 해 들어갔다.

왜군은 밤새워 도성을 빠저 나가 한강진과 노량진 사이에 부교를 놓아 도망가고 왜군들의 뒤를 엄호하는 부대가 조총을 쏘며 조선군 추격을 따돌리며 도망하기에 바빴다.

 

 

권율은 왜군이 도강할것을 이미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적의 수가 월등히 우세한 상황하에서는 최후까지 후퇴하는 적과 한성 수복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 수행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모자 랐다 .

 

동부의 고언백은 노원 벌에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입성하게 되어 있으나 웬 일인지 꿈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적정을 옳바로 파악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더구나 명(明)군은 파주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권율은 꿈에도 잊지 않던 서울을 자기 손으로 수복한 승리감에 도취될 시간이 없었다 .

 

도망 치는 왜군을 그냥 둘수는 없었다

 

 

 

"빨리 숭례문 (崇禮門)밖으로 이동하되 한강진에 공격력을 집중하여 적들이 만들어 놓은 부교를 접수 하도록 하고 적들이 노량진으로 이전 철수전에 뒤를 추격하도록 하라 "

권율은 적들이 만들어 놓은 부교를 철거 하기전에 기선을 잡기위한 명령을 내렸다.

 

 

한강진에 급거 도착한 권율은 왜군 마지막 부대 끝에 다 대고 화전(火箭)을 쏘라 명하였다. 왜군들이 노량진 쪽의 부교를 끊어 놓았다 .더이상 추격을 못하게 하기 위한 왜군들의 궁여 지책이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에게 급히 한강진 주변의 민가에 있는 배를 동원 적들이 끊고간 부교를 연결하라 지시 하였다 .

 

 

이때였다 .돈의문방향에서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일단의 기마군 이 조선군을 향하여 달려 오고 있었다.

"저게 어느 군대 인고?"

 

 

권율이 묻자 조경이

"대장기를 가진 기수(旗手)가 뒤를 딸아오는것을 보니 명나라장수인듯 싶습니다"

"도성(都城)진군때는 나타나지도 않던 자들이 뒤늦게 무슨 일이지?"

"........"

 

 

가치이 닥아오는 명나라장수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들이 도착 했다 .

 

 

"대명 유격장 (大明 游擊將)"

깃발이 눈에 들어 오고 명나라 장수 인듯한자가 오만 한자가 권율 앞에 나타났다.

"대명 유격장 척금(戚金) 장군이오 "

부장(副將)인듯한자가 장수를 소개 한다 .

 

 

"장군 ,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요?"

척금이란 자가 미처 인사도 나누기전에 권율에게 말을 던졌다 .

"무엇을 하고 있다니요? 보시면 알게 아니오?"

권율의 표명이 좋지 않았다 .

 

 

"......."

분위기가 좋지 않자 조경이

"적들의 패색이 짙은 여세를 이용하여 적들을 섬멸하고자 도강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장군 막사 안으로 들어 가셔서 말씀 나누시죠 "

하고 분위기를 늦추었다 .

 

 

척금은 지금까지 조선 장수들 여럿을 상대 했지만 권율의 쏘아 보는 눈초리가 소문대로 예사 조선 장수가 아님을 직감 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

 

 

막사에 앉은 척금이 권율의 얼굴을 정면으로는 바라 보지 못하

고 아까와는 딴판으로 누그러뜨린말투로

"장군 . 아까는 제가 좀 무례 하였나 봅니다 . 이제독께서 너무나 황급히 저에게 장군의 왜군 추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전달 하려다 그만 ..."

 

 

하고 얼버무리자 권율은

" 이제독이 조선군이 왜군의 퇴로 공격을 급히 막으라는 명령이 있었나본데 내 나라 땅을 병화에 시달리게 하여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도탄에빠지게 한 왜군을 이땅에서 순순히 돌려 보낼순 없소이다.

 

더구나 이여송 제독께서는 조선전에서 죽을 고비를 몇번인가 넘겼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그런 포악 무도한 왜군을 그냥 돌려 보낼수는 없습니다"

 

 

하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

척금이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다시

"장군 ,사실 이제독께서는 지금 개성에 계신데 대명군의 지원도 없이 권장군 께서 단독으로 도성 공격을 한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무척 걱정을 하셨습니다 .

 

그런데 장군께서 무사히 도성을 탈환 했다는 말씀을 듣고 친서까지 써주시며 당부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고 서찰을 내 놓았다

서찰 내용을 읽던 권율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서찰 내용은 왜군을 더이상 추격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권율은

"장군, 내나라는 내가 지키겠으니 유격께서는 그냥 돌아가시어 이 제독에게 전해 주시오 , 이 율(慄)은 이몸이 적들과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왜적들 한놈이라도 살려 돌려 보낼수 없다고..."

권율의 표정이 비장한 각오까지 엿보였다 .

 

 

결의에 찬 권율의 표정에 척금은 더욱 당황하였다 .이여송이라면 조선의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척금은 다시한번 권율에게 당부 했다

 

.

"장군 , 더이상 진군 하시면 않됩니다 이제독께서 신신 당부 말씀이있었습니다"

하고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목소리가 커지었다 .

권율이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나더니 처금의 말은 더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막사문쪽으로 나가려 하자 척금이 벌떡일어나 앞을 가로 막았다.

 

 

권율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오른손이 어느새 환도 손잡이로 가 있었다 . 금방이라도 척금을 칼을 뽑아 내려 칠듯한 자세 였다 .

 

 

척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까지 옆에만 있던 조방장 조경이 권율에 가 있는 칼 손잡이를 잡고 만류 했다 '

"고정하십시요 , 척유격이 제독의 엄명때문에 그런것 같으니 ...."

하자 권율은 자세를 바로잡고 척금은 처다 보지 않은 채로 조경에게

"조방장은 부교 가 완성 되는 대로 전군을 노량진으로 이동시키시오"

하고 명령한다.

 

 

 

이때 막사 밖에서 방금 임금의 명령을 받고 있는 유성룡 체찰사로 부터의 서찰이 왔다는 전갈이 왔다

권율이 읽어 보니 내용은 적들 을 추격하는것은 동감이나 이여송 제독의 지시이니 공격을 잠시 보류하라는 내용이었다

 

 

권율은 서찰 내용을 다시 한번더 확인하고 서찰 내용을 조경에게 내주며

"음 쫓겨 가는 왜군을 공격 못하게 하다니......"

권율은 전군의 부교 가설을 중지시키고 모두 도성내로 돌아가도록 지시 했다

 

 

권율은 분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으나 체찰사의 요청을 물리칠수까지는 없었다 , 체찰사는 임금이 내보낸 문관으로 작전에 깊이 개입할수 있는 영향력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숭례문을 들어서는 권율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조선의 200년 수도가 하루아침에 적의 수중에 들어간지 꼭 10일 만에 수복된 것이었다. 권율은 우선 불에타고 주춧돌만 둘러보고 용산창에 들러 왜군들이 남겨놓고 간 양곡을 둘러 봤다

 

.

창고안이 텅텅 비어 있었다.

 

 

왜군들이 그동안 죽만 먹고 버티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권율은 다시 한강진에 이르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부교가설은 계속하라고 지시 했다.

 

 

그는 다시 종묘 주변에 둘러 보고 왜군들이 저지르고 간 만행에 울분을 느꼇다. 200년 사직이 모두 불을질러 페허가 되어 있었다.

(임금께서 이것을 보시면 얼마나 애통하실꼬?)

 

 

그는 왜군시체와 왜군들이 조선 백성을 학살한 시체를 처영승려군을 동원 처치 하도록 하고 왜장이 거처 했던 장소에 임시 거소를 마련했다.

 

전라병사 선거이가 그에게 찾아왔다.

 

 

"서울은 이제 경기감사와 명나라군이 진주 할 것입니다. 적이 지금 물러가고 있으나 영호남 지방에서 다시 북침을 할지 모릅니다. 이들이 우리조선군이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것을 알게된 이상 호남 방면으로 진군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에 권율은

"명나라군과 경기 감사 군이 아마 들어와 서울 치안을 맡을 것이니 우리는 임지인 전주로 떠날때가 돌아 온것 같습니다. 출발 하도록 합시다."

얘기 나누는 중에 누가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게 누군고?"

권율이 문쪽을 바라보니 체찰사 유성룡이 들어 오고 있었다. 그는 유성룡을 반갑게 맞이 하였다.

 

"권 장군, 장군이야 말로 조선의 보물 이외다. 명군이 우물쭈물하고 핑계대며 나아가지 않아 애를 태웠는데 장군께서 이루어 내셨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의 소임을 다한것 뿐이온데....."

유성룡이 권율의 손을 부여잡고 감격해 어쩔줄 몰라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얼마만에 이루어진 한성수복 이었던가?...... 두사람 모두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고향땅이 아니었던가?"

 

 

"저는 이제 한성수복의 대업이 이루어진 이상 저의 임지로 떠나 겠습니다. 아까 용산창에 드러보니 적들이 그동안 굶주리고 있는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곡창지대인 호남이 비어있는것을 적들이 알게되면 그쪽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허, 알고 있습니다. 이제 임금께서 환도 하시고 나서 임지로 떠나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임금께서 돌아오신뒤에 떠나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에 권율은 어가가 의주에서 한성으로 도달 하려면 하루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권율은 유성룡의 말을 따를수 없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권율에게는 편안히 서울에서만 머무를수는 없었다. 왜적을 몰아내기 까지는.....

선조가 환도 하시면 행주 산성의 승리를 치하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치하나 받자고 한성에 눌러 있을수만 없는 노릇 이었다.

 

 

"대감, 소장는 임지로 떠나 겠습니다. 조금전 말씀 드렸지만 용산창에서 보았듯이 굶주린 왜군이 호남을 그냥 두고 갈리가 없습니다."

"......"

유성룡은 권율의 말에 할말이 없었다.

 

 

 

"권장군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좀 어리석었습니다.

 

유성룡은 권율의 충직성에 감복하여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권율은 자기가 살던 행촌동 집을 돌아볼 새도없이 다시 부교를 건너 한강을 도강 하기 시작했다.

 

이여송이 득의만면 하여 한성수복의 일등공신인양 개성을 떠나 돈의문을 들어선 때는 권율군이 모두 한강을 건는 다음 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척금이 이여송을 맞이 하였다.

 

 

"그래, 권율장군의 명령 대로 왜군이 무사히 철수 하도록 놓아 두었던고? "

 

 

이말에 척금은 권율의 당시 살벌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고 할수는 없었다.

"예, 왜군이 완전하게 철수 하도록 조치 하였습니다. "

하고 척군이 대답한다

 

 

"무슨 다른 일은 없었는가?"

"예, 별로"

"그러면 권율군은 지금 어디 있는고?"

"호남으로 내려 갔습니다. 적들이 몹시 굶주려서 곡창지대인 호남 지방을 공격 할까 해서 입니다. "

"오, 훌륭한 장수로다 내 조선의 장수나 관리들을 여러번 접해 보았지만 전라감사 권율만큼 의분심을 가진 장수들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참다운 군인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본과의 강화 회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않되네."

하고 척금에게 다짐을 하였다. 이여송은 서울도성이 모두 불에타 페허가 된것을 보고 전쟁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었다. 이여송이 묵을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내가 묵을 숙소가 없다는 말이냐?"

하고 부장에게 묻자

"있기는 하옵니다만 우히다가 거처하던 소공주댁이 있기는 합니다."

"무슨 소리야. 왜장이 있었던 곳이면 아주 좋겠지."

 

 

이여송은 우히다가 거주하던 방을 접수 하였다.

4월26일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이여송의 보고를 받아보니 왜군이 한성을 떠나 고서도 왕자 2명을 송환치 않을것이라고 보고가 들어 왔다. 송응창은 손수 이여송에게 격서를 발송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그 동안 한성수복을 한 노고에 치하한다 . 듣자하니 왜군이 한성을 떠나면서 두 왕자를 인질로 잡아 아직도 송환 않고 있다니 매우 괘씸한일이다 .

 

 

귀관과 장세작 부총병은 계속 적을 추격하여 압박을 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장부총병이, 직접왜군사령관인 우희다나 소서 행장을 효유하여 왕자들을 돌려보내도록 유도 하라.또 조선 당국에 대하여는 경상 전라 순찰사들에게 명하여 왜군이 철수 하고 있는 경상도 지방에 집중 공격하라"

 

 

 

이여송은 급히 명령을 내려 부하장병들에게 하루에 3.40리씩 일본군뒤를 추격하였다.

상주 까지 내려 갔으나 적들은 이미 이들보다 수십리 앞서 내려가 왜병들을 찾아 볼수 없을 정도 였다 .

 

 

 

 

권율군이 전주 본영을 향해 온양을 거처 함열에 이르렀을때 조정에서 전주(全州) 행을 중지 하고 경상도 함안 (咸安)방면으로 적을 치라는 어명을 받았다.

 

 

조방장 조경이 말한다

"듣자니 명나라 군의 간섭이 보통이 아닌모양입니다. 사대수 부총병이 이여송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왜군을 추격하는 조선군의 행렬을 가로 막고 책임자인 고언백 방어사를 불러 야단을 치는 바람에 방어사는 거짓말로 군사를 정돈하고 훈련중이라고 했다 하옵니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으니 결국 마땅한 댓가를 치르게 된것이지....."

 

 

권율은 경상도 함안으로 출발 하였다.

"장군께 걱정끼칠 말씀을 꼭 한마디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 무엇이오?"

"군량미가 떨어져 굶는 군사가 많이 생겼는데 큰일 입니다."

"그런것을 왜 지금 급히 보고 하시오?, 즉시 조정에 보고 하고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왜군들의 철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6일 한강도강, 12일 상주 철수, 13일 선산철수, 15일 대구 철수

이여송 군은 철수 하는 왜군과 전투다운 전투없이 왜군의 철수 일정에 맞추어 전투없이 진군을 거듭 하였다.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전투였다.

 

 

이여송은 새재(鳥嶺)을 넘어 문경현에까지 내려 가서 왜군의 철수 상황을 알아보고 대구에다 총 사령부를 설치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왜군과는 직접 전투는 삼가라고 지시했다.

 

 

이여송은 왜군들이 군사들을 돌이켜 전투라도 벌일까 두려워한 나머지 일단 추격은 멈추고 영.호남 지방에 분산 배치 하였다. 그들의 배치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명군 총 사령부는 대

 

 

 

구에 두어 이여송이 지휘하고 유정과 함께 복건(福建), 서촉(西蜀), 남만(南蠻), 출신 병사들을 배치 하였다.

거창(居昌) 지구에는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참장(參將)이녕(李寧)과 유격장갈봉하(葛逢夏)와 같이 요광(遼廣)출신 병사들을 ,부총병 오유충(吳維忠)은 중국 남쪽 병사들을 거느리고 선산에 (善山)에 주둔하고 ,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는 남원과 전주에 주둔토록 하였다 .

 

 

 

권율군은 함안(咸安)까지 진출 하여 왜군들의 동태를 주시 하고 있었다 .

 

이여송은 중국각지에서 모집된 군사들로 일사불란한 전투를 벌린다는데 대하여 자신이 없었다. 이렇다할 전과 없이 시간만 끌고 있었다. 그는 왜군들이 더이상 대항하지 않고 일본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군들도 명나라 군들의 추격전 없이 대치 상태서 관망 하고 있었다. 이여송으로 부터 조선군 진격을 중지 하여 달라는 공문이 계속 전달 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각 예하 부대에 전진을 중지 시켰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왜군이 신유겸과 회담시 왜군이 철수한다면 명군도 철수 하겠다고 하였으므로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 할 것으로만 믿고 있었다.

 

 

선조는 한성으로의 환도에 앞서 영호남 지방에서 전투다운 전투가 없자 답답한 나머지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를 접반사(接伴使)로 송응창에게 보내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 줄것을 요청 하였다. 이에 송응창은

"왜군이 물러가기로 약속한 이상 앞으로 더이상 명나라군이 조선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이 바다를 건너기는 어려우나 우리는 압록강만 넘으면 당장이라도 넘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정군(東征軍) 3만명만 남기고 철수해야 겠습니다. 지금 영.호남에 배치된 명나라군의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고 있는 상태 입니다."

 

하고 왜군을 추격할 생각은 않고 철수에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윤근수가 아뢴다

"군량미는 조선 조정에서 애를 쓰고 있사오니 철수 만큼은 보류하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아니오, 몇일전에는 이성중(李誠中) 호조판서께서 영남지방까지 내려 오셔서 군량미조달에 힘쓰시다가 돌아가신적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조선내에서 군량미 조달은 보통 힘든게 아닙니다. 각읍성의 백성들이 산속으로 모두 피난가고 읍성 농촌 부락 할것 없이 모두 비어 있어요 . 모두 피난을가 아무도 없으니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그러니 쌀조달이 어려운것은 당연 하지요"

".........."

송응창(宋應昌)의 말에 윤근수도 할말이 없었다.

사실 조선군은 명군보다도 더 군량미 조달에 더 애를 먹고 있었다.

행주산성 승리로 그토록 사기 왕성 하던 권율군도 함안지방에서 군량미가 떨어저 감나무 에서 덜익은 푸른감을 따먹고 있다는 보고 까지 듣고 있는 참이었다.

 

 

(이 사실은 난중잡록(亂中雜錄), 춘파당명록(春坡堂明錄), 징비록(懲毖錄), 에도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윤근수는 의주로 돌아와 임금께 보고 하였다.

 

 

송응창은 벽제관 패배 이후 조선군으로 부터 행주산성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을 협상의 자리에 앉히고 권율군이 왜군추격을 금지 시킨바 있었다. 그러나 왜군은 철수는 커녕 영남에서 물러날 생각은 않고 최근 진주(晉洲)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송응창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에게

"왜적 들이 왕경(王京...서울)을 버리고 도망 했으므로 우리가 치안을 확보 하고 보니 이제 한성도 차차 옛모습을 찾게 될것 같습니다. 또한 조선 왕께서도 이제 왕경으로 돌아가서 한성을 다스리게 되면 조선군 만으로도 한성을 능히 지킬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군대를 더이상 조선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

하고 치계(馳啓)를 올렸다. (6)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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