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블로그

블로그

조회 수 71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IMG_0043(640x480)(640x480).jpg

 

 

풍신수길은 처음부터 바다에서의 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

그래서 부산진 상륙때도 기습작전으로 곳곳에서 상륙 육지 거점을 먼저 확보 했던것이다. 육지의 거점을 유지 하려면 나름대로 성을 쌓아야 했다.

 

왜군들은 타고온 배는 모두 비워놓고 육지로 올라와 성을 쌓았는데 그들의 축성방법은 기능별로 적을 공격하기 위한 향성(向城)., 주장(主將)이 오래 머물게 될때 쌓게 되는 본성이라 할수있는 진성(鎭城) 향성(向城)과 진성(鎭城)거리가 1시간 거리에 두는 연락과 병참용 성인 계성(繫城)을 곳곳이 쌓았다.

 

그런 다음 교대로 육군 수군 구별 없이 조선 깊숙히 진군 해 들어 갔던것이다.

 임진란중 일본군의 거점이라 할수 있는 왜성 축성 실태는 다음과 같다.

 

 

서생포성(西生浦..울산군 서생면),

임랑포성(林浪浦..동래구 기장면),동래성(東來),

부산진성(釜山鎭),

부산진 지성(釜山鎭 支城)자성대 ,

감통포성(甘筒浦..동래구 구포면),

김해성(金海), 가덕성(加德城..창원군 가덕도),

안골포성(安骨浦,,,창원군 웅동면), 

웅천성(熊川城..창원군 웅천면),

감포산성(甘浦山城..창원군 감포),

영등포성(永登浦..통영군 거제),

송진포성(松眞浦..통영군 거제),

당도성(唐島..통영군거제)

 

위 18개성은 일본군의 안방이나 다름 없었다 ,

 

 

 

조선침략의 거점이요 조선 침략 실패시 저의나라로 도망갈 도선장이기도 했다.

그들이 정박 시켜 놓은 배는 거의가 비워 있다 시피 했다 

 

모두 성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

왜군들의 수많은 배가 조선 수군의 습격으로 부터 많은 선박을 잃고도 끗떡 없었던것은 왜군 들의 성을 조선수군이 정박 시켜 놓은 배만 불 태웠을 뿐이지 그들이 웅거 하고 있는 성을 적극적으로 처들어가 적을 뿌리 뽑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협판안치(協板安治)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제독으로 육군과는 관련이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걸맞지않게  수장(水將)으로써   용인과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이광의 조선 육군을 처부순 장수 였다.

 

일본 수군은 대마도 에서 조선 포구 까지만 일본 육군부대를 상륙 시켜 놓고 독자적 으로 작전을 해 조선의 육지 깊숙히 까지 전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육전에 참전 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한 전라도 지방 우회 공격 계획은 처음 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풍신수길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군과 안국사 혜경(安國寺惠瓊)군으로 하여금 이치와 웅치를 통해 곡창지인 전라도 점령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 었다.

그러나  조선 관군군 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고 좌절되자 마음이 보통 상한것이 아니었다. 전선이 길어지고 군사를 먹여 살려야 할 현지 조달처로 전라 도를 지목 했는데 실패 하고 만것이다.

 

 

 

풍신수길은 당초 임진 조선 전에 대비 하기 위하여 위체미법(爲替米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는 각 지방 제후들로 부터 쌀을 공출 받아 일정한곳에 두면 경도(京都)나 대판(大阪)에서 같은 양의 쌀을 대체하여 받음으로써 수송비를 절약 하였다.

또 그는 군량미 확보를 위해 박다(博多)와 명호옥(名護屋)에 표준가격제 라는것을 정해 쌀을 사 들였는데 그는 군량미를 사 들일때 표준 가격 보다 더주고 비싸게 사들임으로서 농민들의 쌀이 두도시 시장으로 쌀이 집중 하도록 만들어 쌀의 집중을 쉽게 했던것이다.

 

 

 

친략 초기에는 이렇게 모아온 쌀을 군량미로 조달 하였으나 일본에서 조선 까지 쌀을 운반이 보통 어려운것이 아니었다.

풍신수길은 이런점을 감안 침략지내 조선군이 저축 하고 있다는 창고를 뒤지게 하여 군량미 를 확보 하라고 지시 했다

 그는 그이 충직한 승려 출신 안국사혜경 에게 군량미 조달을 위한 전라도 지방 공격을 지시 했다가 치질이 생긴것이다.

 

풍신수길은 소서행장의 군량미 부족호소를 듣고 안국사 혜경에게 전라도 공격 실패 에대한 군량미 조달 대책 에 대하여 묻는 서신을 보냈다

안국사혜경은 풍신 수길 에게 답장을 보내는 편지를 썼다.

 

 

"태합각하, 걱정 마옵소서 , 전라도를 점령 하지 않었더라도 조선각지에 주둔 하고 있는 우리 군에게는 조선군이 버리고 간 백미 만해도 4,5천석식 비축되어 있고 잡곡은 그 양을 헤아릴수 없이 많습니다.

듣자니 , 6월15일 소서행장군이 평양에 입성 하여 양곡창고를 열어보니 도망간 조선군의 10만여석의 쌀이 비축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흑전장정(黑田長政)군은 황해도 각지방의 쌀을 모아보니 2만여석이나 되었다 합니다.

전라도를 점령 못 하였다 하여 군량미 조달에 당장은 영향을 미치지 못 할것입니다.

 

 

 

전라도 지방 점령도 중요 하지만 우선 보급 물자를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안전하게 운반하는것이 우선 중요 합니다.

 요사이 조선의 산적(山賊)들이 (義兵-의병을 지칭하는듯)수시로 출몰 하여 보급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 경비 부대는 이들 산적들을 색출 얼씬도 못하게 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그래도 군량미 문제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최후 수단으로 조선 백성들이 감추어 놓은 양곡을 강제 징발 하면 됩니다"

 안국사 혜경은 이치전투에서 권율군에게 패한사실을 음폐하기 위하여 소서행장군이 평양에 입성 하여 양곡창고를 열어보니 도망간 조선군의 10만여석의 쌀이 비축 되어 있었다고 거짓 보고 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평양, 함경도까지의 기나긴 전선에는 보급로를 지키는 경비 병력이 병참업무 까지의 일을 맡기 까지한 안국사 혜경은 몸이 달치 않을 수 없었다

 부산 , 동래, 밀양, 안동, 상주, 충주, 죽산, 봉산, 황주, 양산, 대구, 선산, 문경, 음성, 양지, 백천, 개령, 한성, 개성, 등 주요 읍성과 그외에 함경도와 강원도에 일본군 경비 병력이 곳곳에 배치 되었다.

 

 

일본군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산적이라고 부르는 조선 의병 부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원래 일본군은 낙동강의 배를 이용하여 수운(水運)에 의존 보급물자를 운송하여 왔었으나 낙동강의 수운을 조선 의병들이 수시로 공격하자 이번에는 이를 만회 하기 위하여 산간(山間)을 이용 수송 했던것이다.

 

 

 

의병(義兵)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왜군 경비 병력을 무차별 공격 새로 뚫어 놓은 주보급선인 영산, 창녕, 현풍, 무계, 성주 주둔 왜군을 재차 공격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

 

 

 

한성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5 만명은 군량미가 떨어 지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모리길성(毛利吉成)들 중 만 여명이 작당하여 동대문밖에서 부터 양주벌까지 민가를 샅샅히 뒤저 쌀을 약탈하였다

 

 

일본군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 지는 징조였다

 길게 늘어진 전선을 경비 하기도 바쁜 왜군에게는 전라도 침공은 이제는 아예 꿈도 꿀수가 없었다

 

 

전라도 길목을 잡고 있는 곽재우(郭再佑), 지례(知禮)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금산(金泉)으로 쫓아낸 김면(金眄), 성주에 있는 왜군을 공격 하여 고령과 합천의 통로를 막도록한 정인홍 , 예안에서 거병 안동, 의성, 군위 에 배치던 왜군을 처 부시고 경상도 북쪽 을 일부를 차지 한 김해(金垓).....옥천땅의 조헌(趙憲)이 1700 명의 향병을 동원 했고 ,홍주의 신간수(申簡秀), 승장(僧將) 영규(靈圭)등은 대대적으로 청주를 공격 왜군을 한때 청주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들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경비 병력은 의기 소침 전라도를 넘볼기회를 감히 갖지 못했던 것이다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모두 장열히 전사 하였다 .이들 분묘가 지금도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하여 남아 있다

 

 

조선의 수군은 불시에 침략해온 왜선단에 의하여 경상 좌수사 박홍 , 경상 우수사 원균 등이 개전 초에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하고 전라도 지방에 있는 경상도와 제일 가까운 전라 좌수영의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 하였으나 이순신도 벼란간 당한 일이라 충분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당시 이순신으로서는 조정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다른 관할에 수군을 이동시킬수 없는 규정 때문에 원균이 올렸다는 장계에 의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조정에서 선전관(宣傳官) 조명(趙銘)이 가저온 임금의 유서(諭書)가 내려 왔다

"우수영 원균(元均)의 계본(啓本)을 받아보니 각 포(浦)의 주사(舟師)들과 함께 적을 공격 하기로 할 계획이 있다는 장계를 읽었노라 . 공은 각 포의 병선을 독솔(督率)하여 나가 신속히 적을 처 부시도록 기회를 놓지지 말지어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받자 출진하기로 작정하고 대선 (大船..坂屋船)24척, 중선(中船..狹船)15척, 소선(小船..探候船)46척을 동원 하였다.

이순신은 여수 좌수영을 떠나 거제와 통영을 거쳐 가덕도쪽 경상도 수역으로 들어 갔다.

이때 왜군은 저의들이 타고온 배들을 모두 해안선에 숨겨 두고 육군 수군 할것 없이 모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 하고 있었던 참 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오포에서, 왜군 대 부대가 상륙 하고 숨겨 놓은 적선 50 여 척을 발견 하고 나가 그중 대선 11척 , 중선 8척 기타 7 척에 승선 하여 빈 배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

그리고 오후에는 합포(馬山) 앞바다에 정박 시켜 놓은 왜선 5척을 발견 불질러 버렸다,

 

다음날 은 적진포(赤珍浦) 에 숨겨둔 적선 13 척을 발견 모두 불태웠다,

모두가 텅텅 빈 빈배였다

이순신은 육지에 올락 가 있던 왜군들이 전라도 지방을 넘본다는 정보를 듣고 파손된 배도 수리 할겸 일단 여수의 좌수영 으로 돌아 왔다 .

 

 

6월1일

 

, 이순신은 다시 조선 수군 배 23 척을 이끌고 당포(唐浦)에 숨겨 정박중인 왜선 23 척을 발견 불질러 버리고 , 6월7일 에는 영등포(永登浦)에서 적선 4척을 발견하였는데 불질러 격침 시켰다

육지 왜성에서 왜군들은 불타는 자기들의 빈배를 보고 공포감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

본국과 통할수 있는 유일한 배들이 빈 배 일 망정 모두 수장 된다는것은 사람의 목줄을 죄는것이나 다름 넚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조선 수군의 역활릏 얏 보았던 왜군은 급히 용인으로 올라가있는 왜 수군 사령관 협판 안치에게 일본 배가 60여척이나 바다에 가라 앉은 사실을 보고 하고 본국의 풍신 수길에게도 긴급히 보고 하였다 .

 

풍신 수길은 대노하여 협판 안치에게 남해안으로 원대 복귀를 명령하였다

 

 

 

협판 안치의 왜 수군이 부산에 도착 하였을떼는 일본에서 타고 온배가 거의 불타 바다속에 수장되고 없었다

" 이런 세상에 그래 조선 수군놈들과 전투 한 번 못하고 바다에서 불타고 있는 배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협판 안치는 배를 지키고 있던 왜 수군 장수 한사람을 불러 화풀이로 마구 뺨을 때리고 욕지거리르 퍼부었다

 

그러나 매를 맞고 있는 왜장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 사령관 각하 . 저도 할일을 다했습니다 . 각하와 태합각하에게 편지에 올렸듯이 배에서는 생활을 할수 없었습니다 . 모두 육전에 동원 된 마당에 몇 몇 안죄는 우리 수군으로는 적들과 대항 할수가 없었습니다 "

 

 

" 이런 바보 같은 놈 . 빈배로 정박 시켜 놓으면 눈먼 장님이라도 배를 불지를수 있지 않으냐 그런데도 자네 잘못을 니인정 않겠다는 거야?"

".............."

 

협판안치는 수원에서 못처럼 조선의 이광의 근왕군을 물리친 공로로 풍신 수길로 부터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남해안에 숨겨둔 배가 불살리게 했다고 질책을 당한 사실은을 엉뚱하게 왜성에서 감시 아닌 감시만 하고 있던 왜장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협판안치는 공명심이 남 다른 왜장이었다

바다에서 배를 지키고 있어보았자 아무런 공로를 인정 받지 못하게 될 것 같자 풍신 수길에게 건의하여 수군의 거의를 빼돌려 한양 공격시 육군에 가담 했던 것이다 .

 

 

그러나 아무리 육전에서 승리 했다 한들 그는 수장에 불과 했다

손에든 칼에 손을 벤격이었다

 

협판안치는 후회 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왜군들이 그들이 타고온 배가거의 불에 타 바다속으로 들어가 고 있는 동안 에도 한성 점령을 끝내고 평양을 향하여 진격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왜군들이 타고온 배들은 거의 불에 타거나 바다에 수장 시켰으니 이순신이 이 출동에서 불태우고 가라앉게 한 적선의 수가 기록에 의하면 도합 72척이나 되었다 .

 배에 잔류하고 있던 왜군 88 명은 죽이거나 사로 잡혔다. 그동안 왜군들은 자기들이 타고온 배중 72척이나 불타거나 수장 되었는데 이것을 보면 풍신수길은 육전에 의한 영토 확보에만 전념 했지 조선 수군에 의한 피해는 예상을 전혀 못하고 방심 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뒤늦게 자기들이 타고간 배들이 72척이나 조선 수군에의하여 수장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 (大怒)하여 용인(龍仁)과 광교산에 나가 있던 일본 수군(水軍)의 수장(水將) 협판안치(協 坂安治)가 거느린 수군1600명을 경상도 웅천(熊川)으로 원대 복귀 명령을 내린것이다

 

 

풍신 수길은 협판안치에게 불타거나 수장되지 않은 배 70 여척을 모으게 하고 일본 본토에서 40여척을 추가로 보내는 동시 수군 병력도 강화 하여 명실상부한 본격적인 해상 전투 위용을 갖추고 조선 수군 에대한 복수를 할것을 마음 먹었다.

새로 구성된 왜선단은 지금 까지 조선 수군이 일방적으로 불지르고 침몰 시킨 그러한 일본 수군이 아니었다.

 

 

 

왜군 수장 (水將) 협판안치(協坂安治)는 수군(水軍)이면서 용인(龍仁)과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조선 육군을 패퇴시킨 장본인 이다.

이번에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다시 본격적인 해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

 

 

 

조선 수군도 지금 까지 나가기 만 하면 불태 우고 침몰 시켰던 쉬운상대가 아님을 정보를 듣고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적 함선 숫자도 숫자 이지만 1600 명이나 되는 협판안치 의 수군도 만만치 않았다.

왜선단은 거제도 견내량(見乃梁)에 닻을 내리고 조선수군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하기 만 하고 있던 왜군은 처음으로 공격 태세를 갖추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조선군은 먼저 한산도 앞 바다로 나가 왜선을 유인 하기 시작 했다 .왜선이 공격 태세로 조선 배에 접근 하며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 했다 .

조선배가 피하는 척 하고 물러 나는 척 하면서 조선수군이 학익진법(鶴翼陳法)에 의한 좌우날개 형으로 일본 선단을 포위하고 적함에 총통(銃筒)을 쏘아 대며 화살을 적선에 쏘아 대었다 .

 

 

 

왜군은 육지에서 모양으로 조총의 위력을 기대 하고 마구 쏘아 부쳤으나 배에서의 조총은 무용 지물 이었다 .

배와 배 간의 거리가 조총 사정거리 권내에 도달 못했을 뿐 만아니라 일본의 배는 가볍고 용골이 되어 있지않아 조선 배에 부딧치면 여지 없이 먼저 깨지는것은 일본 배였다.

 

일본배는 총통이 없었다 . 조총은 바다 에서는 위력이 없었다 , 더구나 그동안 일본 수군은 바다 에서의 실전 경험도 없었다

 엉뚱하게 일본수군은 조선 내지로 깊숙히 들어가 경비 병력으로 만 근무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조총을 유효 사거리내로 하기 위하여 조선배에 바싹 부디치면 조선의 육중한 함선이 들여 받아 침몰 당하기 일수였다.

더구나 조선수군은 거북 모양의 철갑선을 동원 종횡 무진으로 일본의 가벼운 배를 침몰 시켰으니 적은 대선 28척, 중선17척, 소선7척을 불태우거나 침몰당하고 도망갈수 밖에 없었다.

 

이싸움이야 말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과의 싸움다운 싸움을 한 바다 에서의 최초의 대전으로 조선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 꼽는다 ,

 

 

조선군은 여세를 몰아 가덕도, 안골포, 에서도 대선 21척 , 중선17척, 소선 7척을 격침 시켰다

이 싸움에서 적병 250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

 

또 이싸움은 종전과는달리 조선군의 피해도 매우컸다 .

전사자가 19 명이나 발생되고 전상자도 100 명이나 나왔다.

 

 

 

이번 싸움에 서 일본군은 자기네들 배의 취약성과 조총의 한계성, 대포가 없는 해전 이라는것은 무모한 전투 일뿐이라는데 통감하고 조선수군이 걸어 오는 해전에는 절대 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 철갑선 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 하오?"

"그렀습니다 ,우리는 흉내도 못 낸 다고 합니다 "

"그렇 다면 우리도 무겁고 견고한 배를 만들면 될것 아니오?"

 

 

 

" 태합 각하, 지금 우리는 그런 배를 만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일본군은 지금 평양 , 함경도로 육군 ,수군 가릴것 없이 진격 중에 있는 동안 적의 전라 좌우수영 에서는 거북 모양의 철갑선을 제조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 에게 철갑선을 만들 기회와 시간을 준것 밖에 않됩니다"

" 허,...참...난감하군... 무슨 대책 이라도 없오?"

 

 

" 태합 각하, 말을 계속 하겠습니다 .우리 수군의 약점 세번째를 말씀 드리자면 , 우리 수군은 육전에서는 조총을 실제로 잘 써 먹었습니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사정 거리와 습도 관계로 무용 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적은, 총통 이란 대포를 쏘아 대고 있는 동안 우리는 조총 하나만 믿고 쏘아 대니 모두가 소용 없는짓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수군이 적의 배에 밧싹 접근 하여 조총 사정 거리에 도달 할때를 기다려 사격 하면 될것 아니오?"

"각하 맞습니다 ,

 

바로 그 점입니다 , 육전에서 우리가 승리 한것은 바로 그런 접근법을 써서 적을 압도 하고 가는곳 마다 승리 한것입니다 .

그러나 해전은 다릅 니다 우리의 배가 조선의 배 이상으로 육중하고 튼튼 하다면야 그런 접근법이 통했을 런지 모릅니다

 

, 아까 말씀 드린대로 조선배는 육중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

우리가 접근법을 써보려고 할랴 치면 조선 배는 우리 배의 옆구리를 들여 받아 우리 배는 여지 없이 침몰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

"오...경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소 ,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구려 , 무슨 뾰죽한 묘책이라도 없오?"

"태합 각하 ,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뭐요?"

 

 

"개전초기에 경상 좌우수영을 무력화 시킨것 처럼 전라 좌우 수영을 공격하여 무력화 시키는 것입니다"

"전라 좌우 수영이라면 전라도 순천, 과 해남에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들의 본거지를 쳐서 없애야 힘을 못쓰지 그대로 놔두면 계속 후환이 될것입니다. "

"그러면 그들이 저리도 막강한 함대를 갖고 있는데 어찌 한 단 말이오?""아까 말씀 드린대로 현재의 우리 수군 형편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 따라서 적의 본거지인 순천, 여수, 해남을 공략 하려면 육지를 통해서 공격 하는수 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내가 먼저 소조천 융경(小早川隆景)이나 안국사 혜경(安國寺惠瓊)에게 전주성을 공격 하라 했는데 실패 한게 아니오?"

"그렇습니다. 전주성은 종전 까지만 해도 쉽게 칠수 있다고 생각 했었는데 , 이치 전에서 나타난 권율 이란자가 전라도 순찰사가 된후 부터 철저한 훈련과 방어 에 전념 하는 동시에 소위 의병 이란자 들과 긴밀한 연락 체제를 갖고서 방어에 너무 철벽 같아 전주성 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

 

 "그 산적 이란놈들 말이오?"

"그렇습니다 , 조선인 들은 의병 이라고 부릅니다 "

 

"그러면 바다로도 안된다, 전주 감영 점령도 불가능 하다 면 그럼 어쩌면 좋소?"

 

"태합각하 , 전라도 좌우수영을 먼저 치시겠 다면 구태어 전주 감영이 있는 전주 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 직 바로 조선 남해안 육로를 통하여 순천과 해남을 치면 될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곳을 칠려면 진주성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쉽겠소?"

 

 

"각하 우리 일본 육군이 어떤 부대 입니까? 그까짓 진주성 하나 쯤이야 함락 못 시키겠습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 지만 육전에 참전하고 있는 육군 일부와 수군을 부산으로 일단 집결 시킨다음에 이기회에 진주성을 공격 하여 점령한다면 이순신과 이억기가 있는 적의 수영(水營)점령은 누워서 떡 먹기 보다 쉽습니다.

 

 

 

조선 수군은 육전에 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의 수군 영을 점령하고 나면 조선수군은 바다에서 떠 돌아 다니다 무인도로 가던가 바다에 빠저 죽고 말 것입니다,

 

그정도가 된후 우리 수군이 나타나면 적 패잔병은 모두 항복 하고 말것입니다"

"허...참 좋은 생각이오 , 그럼 우선 진주성 칠 준비를 하도록 합시다"

 

 

 

풍신수길은 장차 진주성(晉州城)을 우선 치기 위하여 소조천융경(小早川隆瓊)에게 명령을 내렸다

 풍신수길이 왜군이 진주성을 치기위하여 한성 방면 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부산 으로 내려 오도록 명령한 병력은 다음과 같다.

 

 

 

가등광태(加藤光泰) 1000명

목촌 중자(木村重慈) 3500명

소야목봉전조(小野木逢殿造) 1000명

조곡내선(槽谷內膳) 200명

강본동정(岡本動政) 500명

계 6200명

 

 

소조천융경(小早川隆瓊)이 제장 들을 불러 모았다 .

 

 

"태합 께서 조선의 수군이 우리가 육전에 집중 하느라고 바다를 소흘히 한틈을 타 우리 배를 수도 헤아릴수없이 불을 지르거나 침몰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었오 ,

 

그래서 태합 께서는 조선군의 행동에 분개 이를 혼내주기 위하여 한산도 앞 바다로 나갔으나 우리 배의 취약성과 조총 등에 문제가 있어 육전 모양으로 군사 숫자로 만은 수전에 승리 할수 없는 입장이라 일단 철수를 한것이오

 우리가 적을 바다에서 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오 . 그래서 태합 께서는 방침을 바꾸어 전라 좌우수영을 육로(陸路)로 치라는 엄명이 하달 되었는데 전라 좌우수영이 있는 순천과 남해를 치려면 진주성을 공략 해야 하는데 진주성을 함락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을것이 예상되오,제장들은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기 바라오"

 

 

풍신수길은 일본 본토에 데리고 있던 이달정종(伊達政宗)에게도 지원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가도록 하여 급파 시켰다 .

 진주성를 공략 하라는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한성 부근에 주둔하던 왜군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었다 .

 

 

 

경상감사 김수(金粹)가 이순신에게 적 동태에 대한 공문을 보내 왔다 .

"북진하던 적들이 최근 양산 김해 방면으로 행군하여 내려오고 있는데 그들의 행로를 보건대 부산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또 부산 앞바다에는 각처의 적선들이 모여 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 그들의 행색을 보니 많은 짐을 짊어 진것을 보아 저의 나라로 가려는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 "

하는 내용 이었다 .

 

 

 

이순신은 부하를 불러 소형배를타고 밤중에 부산포 앞바다의 동태를 알아 오도록 하였다 .

적의 동태를 살피고온 병사가 이순신에게 보고 한 내용은 적들의 함대가 모두 부산 앞바다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

 

이순신은 적의 대부대와 함정들이 모이는것을 보아 필히 왜군들이 본토와 교대하는 부대가 아니면 새로운 해상 작전을 획책 하는것이 틀림 없는것이라 생각 하였다 .

 

이순신은 이기회에 많은 적들을 바다 속에 쳐 넣을 기회가 온것으로 보고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

 

8월29일

이순신과 이억기는 전라좌우 수영의 대형선 74척과 중선 92척을 이끌고 사량(蛇梁...통영군 사량리)로 향하면서 경상 우수사 원균에게도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거제도(巨濟島)를지나 동래땅 장림포(長林浦..사하면 장림리) 앞바다에서 3수사(水使)회의를 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 이 선상에서 밤늦도록 의론 한결과 적의 해상 활동의 근거지인 부산포 본진(本鎭)을 치기로 하였다.

 

 적수군은 모두 부산포에 집결 하였다 , 왜군은 한산도 큰 바다 에서 실전 한것을 거울 삼아 경솔하게 바다 한 가운데로 않나오는듯 했다.

 실제 풍신수길도 안골포 에서의 경험을 생각해서 가급적 바다에서는 소극전법(消極戰法)을 쓰라고 왜군 수장에게 지시 했다 .

9월1일

새벽을 알리는 아침 닭이 섬저쪽에서 우는소리가 들렸다

조선수군166척의 연합함대는 부산포로 향하였다.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적의 대형 선박 2척을 발견 하였다 .

두척다 섬 가까이 정박하고 있었다. 두배 가까이 접근 해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

 

 

 

배에 올라보니 왜군 5명이 산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일제히 활을 쏘아 죽이고 선체 내부를 보니 엄청난 양곡과 전쟁물자가 실려 있었다.

조선군은 배에 불을 질렀다 , 시커먼 연기가 절영도 주변을 감싸고 붉은 불길이 무섭게 타올랐다 .

 

 

원균이 작은 배를 부산진성 가까이 보내어 적의배위치를 확인하여 오라 지시 하였다 .

적함대 동태를 알아 온 병사 보고에 의하면 적 함대가 부산진을 필두로 하여 동쪽산 기슭까지 새까맣게 약 470 여척이 정박 해있다는것이었다.

 

 

 

왜선단은 조선군의 배가 조심스럽게 접근 해도 반응이 없었다 .

원균이 먼저 적함 가까이 닥아갔다 ,

적함에 근접 시키고 적함 내부를 들여다 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

조선 수군이 왜선에 오르려 하자 적병 3 명이 조총사격을 하며 나타 났다 . 원균 군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모두 사살 하였다 ,

왜군들이 조선군 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 하였으나 조선 배에 도달하기 전에 사정 거리가 닿지 않아 바다에 탄알이 힘없이 떨어 지기만 하였다

 

 

 

조선군은 총통을 쏘아 대기 시작 하였다 , 왜선에 포탄이 떨어지자왜군 경비병 들이 육지 산쪽으로 도망 가기 시작 하였다.

 왜선이 여기 저기 불이 붙기 시작 하였다 6 군데에 진을 치고 숨어 있던 왜병 들이 일제히 조선 배에 집중 사격을 가 하였으나 총탄은 조선 배에 도착 하기 전에 바다에 떨어질 뿐이었다

조선군은 빈 적선에 올라 불을 질렀다

 

 

온바다가 화염에 휩 싸이고 왜군이 쏘는 조총 소리와 화살 시위소리 총통 발포 소리로 온 바다가 어수선 했다

조선군은 왜선 100 여척에 불을 지르고 바다에 침몰 시켰다

왜군들은 해안 산속에 숨어서 조선군 에게 총탄을 쏘아 대면 서도 조선 함대의 위세에 눌려 감히 바다로는 나오지 못하고 육지 에서 화염에 싸인 일본 함선만 바라 보고 만 하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오기전에는 수군장 보다는 육군장으로서 오랜 경험을 쌓았다.

함경도 병마사 이용의 군관으로 도 있었고 함경도 조산보 (造山堡 ) 만호(萬戶)로 있다가 녹둔도(鹿屯島)전관(田官)으로 있을때 여진족이 녹둔도를 기습 시 적을 추격한 사건으로 백의 종군 하였다가 특사 되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기회에 지난 북쪽 오랑캐 와의 육지 에서 쓰라린 육전 경험을 만회 하기 위해서 라도 상륙 하여 부산진성 을 공격 하고자 생각했다 .

" 아무래도 우리가 적 함대에 불을 질러 태우거나 격침 시키는 것 만으로는 불충분하오 적진 이있는 육지로 직접 상륙 하여 부산진성 의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도록 합시다 "

 

하고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 에게 제의 하였다

경상도 지방의 지리를 잘 아는 경상 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의견을 제시 하였다.

"웅천(熊川), 창원(昌原)에 적들이 많이 웅거 하고 있고 웅포(熊浦), 김해(金海), 양산(梁山) 양쪽 강안에 적선이 정박중 입니다 .

 

그런데 장군의 말씀 대로 부산진 부터 정면 공격을 한다면 배후에 있는 적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을 것입니다 .

앞뒤의 적들이 협공을 해올 것이 분명함으로 정면 공격은 뒤로 하고 우선 웅천(熊川)을 먼저 공격한다음 이들과 연락되는 배 부터 모두 수장시켜 버린 다음 차례로 김해와 양산을 치고 나서 마지막 으로 부산진성을 공략 하는것이 옳을듯합니다 "

 

 

전라우수사 이억기 가 나선다.

"그런데 육지의 적병 들을 바다로 유인 해도 ,나오지 않으니 방법은 상륙 하여 적을 치는 것이 타당 하겠소 만은 제 생각 으로는 양산을 치든, 부산을 치든 ,그런 문제 보다도 적을 섬멸 하려면은 우선 수륙 양면 작전을 통해 함께 공격 해야지 우리 수군만으로는 공격한다는것은 무리 입니다

 

 

 

. 적은 기마병과 보병용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수군(水軍)이면서도 조선 침략 이래 육전(陸戰)에 길들여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방적으로 상륙전을 벌린다면 우리가 그들의 계략에 말려 드는것 밖에 않됩니다 . 아무래도 육지에서 활약 하고 있는 곽재우 장군과 충분한 협의후 공략 하는것이 타당 할것 같습니다 "

 

 

"마음 같아서는 원수사(元水使)말씀대로 했으면 좋겠 지만 부산에 적을 두고 양산 , 창원 쪽으로 간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 하오,더구나 오늘 진시(辰時...오전8시)에 작전개시 하여 지금 신시(申時...오후3시)가 다 되었습니다

군사 들도 점심도 결한 상태로 피곤한 상태 이므로 더 이상을 싸운 다는것은 무리 입니다 이 수사(李水使)말씀대로 육지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수륙 합동 작전을 펴려면 일단 여수 본진으로 갔다 가 협의 후 다시 작전을 꾀 함이 옳을 듯 합니다"

 

이순신은 이억기의 말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

조선군은 더이상전투를 중지하고 가덕도에서 하루밤을 묵은후 다음날 여수 본영으로 돌아 왔다 .

이번 전투에서 경상감사 김수가 이순신에게 통고한 왜군 퇴각설은 잘못 판단한 정보가 되고 말았다

왜군들은 퇴각을 하러 한성에서 내려 오는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략을 위해 이동중인것을 김수가 잘못 판단하여 통보 한것이다.

 

 

 

김수가 보낸 잘못된 정보로 이순신은 김수의 말 만 믿고 부산 앞 바다로 3도 수군 연합 함대를 출동 하여 왜군 이 바다를 건너 귀국하려는 부산을 공격하여 적을 섬멸 하고자 하였던 것이었으나 진주를 치려는 왜군의 의도와는 정 반대인 일본군 퇴각으로 오판을 하게 된것이었다.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커녕 그 시각에 진주성으로 속 속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난 조선 수군에 대해서는 별 반응을 나타 내지 않았던 것이다 .

 

 

김해성(金海城)에 있던 가등광태(加藤光泰)와 장강충여(長崗忠與),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 목촌중자(木村重慈)등 왜장 들은 작전 회의 끝에 2 만 병력을 동원 하여 로현(露峴)과 창원을 거쳐 진주성(晉州城)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

 

 

 

도원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있는 진주 목사(晉州牧使)김시민(金時民)을 돕기 위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이광악(李光岳), 진주 판관 (判官)성수경(成守慶) . 전 만호(前萬戶)최덕량(崔德良).권관(權官), 이찬종(李纘宗)이 거느리는 조선관군 병력 3800 명은 지원군을 보냈다 

관군 이외에  의병장 곽재우(郭再佑)와 호남 지방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이 거느리는  2000 여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발했고  진주 목사 김시민은  물샐틈 없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원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하였을 때 부터의   관군의체제는  진관제라는 제도 였다

그러나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잔관제가  허물어지면서  제승방략 체제로  바뀌어  버렸다

진관제는  작 지역을 분활해서 소규모부대 가 각  지역의방위를  담당하는 제도로  적이 소규모일때 는  빈틈없이  방어하는데는 적합했으나 대규모 적에게는  각개 격파 당할수있는 약점이있었다

 

반면  제승방략 체제는  지원부대가  예비 하고있다가  일단 대규모 공격이있을 경우 전략거점으로 집결하고  이를 지휘할 장수가 이집결된 지원군과함께 군을지휘하는 형태로서 전면전에는  강한 면이있었다 .

 

임진란 초기 도체찰사 유성룡은  시종 일관   진관제를 강력 주장했다 

그러나  유장 출신이지만  병법에 능통 했던  도원수 권율은  처음 부터  제승방략 밖에 왜군을 이길수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권율은  그렇기 때문에 일개 광주 목사에 불과했던 유장 출신이  이치령 전투의 대승과  이어 독산성 전투의 승리  그리고 행주 산서의대승을 걷웠던 것이다

권율의 이러한 대승 이면에는  제승방략의 약점인  후방  방비를  소흘히  하지않았다는 점이었다

 

 

 

권율은 수도 탈환을 위하여 두번이나  대규모로 전라도 광주에서  수도권으로  군사를 동원 했는데   군사의  3분지1은 광주를로 처들어 올지 모를 합천 초계와 이치령에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시키는 치밀함을 잊지 않았다

 

제승방략은  각지에  대기하고 있던 군병력이 전시에는  한곳의 전략 거점으로 집결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지휘할  총사령관이   대군을  지휘 하기  때문에  전면전에는 유리하나 만일  모여진 이 병력이 이 무너지거나  전략거점에 집결이늦어지는 경우에는 후방이  노출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임진란 초기에 이일이  상주 까지  내려 갈적만 해도 그랬다

제승방략하에  이일은 군사 80여명을 이끌고 상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왜군은  상주 북천에 내습   조선의이일군은  여지 업이 무너지었던 것이다 

 

 임진란 초기  일본군과  전투에 있어서 진관제냐  제승방략이냐 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성립 할수 없는 것이   조선은   그야 말로 200여년간   태평성대를 누리고있었고  일본은 100년동안   치고 받고  하고있었으니  태조 ,정조,태종 , 세종 등등  14대 임금을  거치는 동안  임진란 같은  큰  난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는 문제점이있었다

 어쨋든  유성룡의진관제와  권율의  제승방략론은  임진 왜란에 있어서는  후자의 주장이 맞아 들어간거은 사실이다

 

 

 

 

 
 

 

 10월3일

 

왜군들은 3개 종대로 나누어 진주성을 목표로 함안을 거쳐 어동령(魚東嶺)을 넘어 진주 동쪽인 마현(馬峴) 을 또 넘어 진주 성 외곽으로 진군 해 들어 오기 시작 했다 .

 

 

진주 목사 김시민은 성루에 올라 용태기(龍太旗)를 높이 세우고 3800명의 군사 말고도 성내에 있는 노인 여자 들까지 남자 옷을 입혀 왜군들 눈에 띄게 하여 군사 수를 부풀려 보이게 하였다.

 

 

왜군이 진주성 동쪽 임연대(臨淵臺)부근에 진을 친것은 신시(申時..오후4시경 )가까이 되어서 였다.

 

10월 4일

아침해가 진주성 내외가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조용히 떠올랐다 .

적이 별안간 진주성을 향하여 조총 사격과 이변 전투에 처음 사용하는 포를 쏘았다

 

 

왜군 이 형형 색색의 지금 까지 조선군이 보지 못하던 옷을 입고 성밖을 가득히 외워 싸기 시작 했다 .

조총수 1000명이 한꺼번에 진주성내를 향하여 쏘아대니 총알이 우박처럼 떨어젔다. 이윽고 2만 의 적병이 약속이나 한듯이 함성을 질러 진주성주변을 압도 하였다 .

 

 김시민은 왜군들의 행동에 동요됨이 없이 경상좌도 감사 김성일(金誠一)에게 화살을 충분히 보내 줄것을 요청 하였다 . 김성일은 많은 화살을 보내 왔다 .

 

의병장 곽재우, 최강(崔堈), 이달(李達)등이 속속 도착 되어 조선군의 사기가 오르기 시작 했다. 왜군들은 조총을 쏘는 한편 성밖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 했다.

왜군들은 여러군데 에다 근방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묶거나 소나무등을 쌓더니 대죽을 엮어 그안에 판자를 세운뒤 그안에 흙과 돌을 메꿔넣었다 .

 

 

금새 성 높이까지 흙과 돌이 쌓이더니 성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진지가 구축 되었다. 왜군들이 그위에서 성안을 향하여 조총괴 활을 쏘기 시작 했다. 조선군도 적의 진지 를 향하여 빗발치듯이 화살을 쏘아댔다

왜군들이 수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일제히 성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 하였다 ,

조선 육군이 지금까지 한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천지를 진동하며 왜군을 향하여 포를 쏘기 시작 했다

 

 

준비 해둔 큰돌을 던지고 쇠솥에 펄펄 끓인물을 마구 쏟아 부었다 , 적들은 기어 오르다 혼비 백산 하여 감히 접근을 못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쌍방간에 전투는 소강상태로 돌아가고 조용해젔다

 

 

이날밤 2경(밤10시)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00명을 이끌고 남강 건너편 진현(晉峴)고개 위에 올라 횃불를 별안간 밝히며 500 여명이 일제히 뿔로된 호각(呼角)을 불어대니 조용한 성내에서도 별안간 일제히 호각소리르 내기 시작 하였다.

 

 

 

깊은 잠에 빠젔던 왜군과 경비병들이 놀라 진영내 큰 혼란이 일어났다 . 5경(새벽 4시)이튿날 아침이 밝아지기 전 왜군들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1만명은 동문 (東門) 신성(新城)을 공격 하고 나머지 1만병은 북문 (北門)을 공격 하였다 .

 

조선군은 호각을 불고 있을때부터 적들의 공격 있을것으로 예상하고 2교대로 대기 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적들 머리위에 비격진천로의 포탄을 퍼 부었다.

성을 기어오르는 적들 머리 위로 퍼붓는 펄펄 끓는 물이 쏟아 젔다 ,

 

아침해가 솟아 올라 적들의 시체가 성밖에 쌓이는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왜군들은 시체를보자 더 악에 받혀 공격의 도를 강화 했다

 

그때였다 ,지휘하던 김시민이 적 총탄을 맞았다 이를 보고 옆에 있던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이 목사 대신 동문 (東門) 북격대(北隔臺)에서 군사들을 지휘 했다.

 

 

이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 되어 4경(밤 2시)까지 지속 되었고 피아의 인마소리 총소리, 호각소리 포쏘는 소리로 밤 하늘을 뒤덮었다. 이때 였다 적진 영막(營幕)에 불길이 솟기 시작하였다 , 적 지휘부가 불이 붙은것이다 , 왜병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리었다 .

 

 

어쩐일이지 조총소리가 별아간 멈추고 왜병들이 서서히 물러 나기 시작 하였다.날이 다시 밝아지면서 왜군들의 행열이 진주성을 뒤로 하고 사라지기 시작 했고 격전장은 피비린내와 인마의 시체가 즐비 하였다 . 성안의 장병들 도 지칠대로 지치어 왜군 추격은 엄두도 못내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순찰사 김성일은 , 경상좌도 감사직에서 전보되어 거창부(居昌府)에 있었는데 진주성 승리 소식을 보고 듣고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

 

성에 와보니 적의 시체가 산더미 같고 버리고 간 병기 외 군수 품이 즐비 하였다 .

 

 

 김성일은 성안에서 전상을 입고 누어 있는 김시민의 손을 잡고 위문 하고 나와서 김해 부사 서예원에게 목사를 대행케 하고 임금께 치계(馳啓...임금께 급히 보고 하는것)를 올렸다.

 

 

 

풍신수길 이 전라 좌우 수영을 섬멸하려던 계획을 갖고 남쪽에 있는 진주성 공략하려던 작전은 이렇게 하여 좌절 되고 말았다 .

 

만일 이싸움에서 조선군이 패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 조선이 유일하게 자랑하던 수군의 본영(本營)인 여수와 순천 남해가 적수중에 들어갔다면 조선 수군은 아마 바다 위를 떠돌다 결국은 분해되고말 았을지 모를 중요한 전투였다 .

 

 

부상을 당한 김시민은 병석에 누어서도 적의 동태를 물으며 전투복을 항상 옆에 둔채로 빨리 일어나 다시 적들과 싸우겠다 하며 북쪽에 있는 선조 왕을 향하여 엎드려 절하며 눈물로 충성을 다짐 했다고 전한다

그는 전상(戰傷)이 너무 깊어 전투복을 머리 맡에 놓고 결국 이세상을 하직 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39세 였다.

 

 

명에서는 조승훈 패주이래 망연자실 하고 있을 때 유격장 으로 있는 심유경(沈惟敬)이 란자가 나섰다.

그는 원래 명나라 절강성 사람으로 일본 사정에 능통 하다고 자청하며 조선 문제를 자기가 일본과 타협하여 오겠다고 병부상서( 兵部尙書)석성(石星)에게 자청 하였다 .

 

 

 

"소인은 절강성 에서 잘랄 때 부터 일본 무역상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들과 접촉이 많았었아 온데 이번에 적진에 직접 찾아가 왜군 장수를 만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군의 진격을 멈추도록 타협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심유경은 석성에게 말하였다.

 

 

석성은 왜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의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당황하고 있던차에 심의경의 얘기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석성은 심유경에게 즉석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란 칭호를 주고 왜장과 대면시에는 이칭호를 사용하라고 까지 하였다 .

 

 

 

 

심유경이 의주 용만관(龍灣館)에 이르자 선조가 직접 그를 만났다.

 

 

심유경은

"소인이 직접 왜군 진에 들어가 명나라 황상(皇上)의 어명을 그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저의 본국으로 즉각 돌아가겠끔 하겠습니다. 만일 그놈 들이 순순히 물러 가지 않을시 에는 당연히 명나라 대군을 동원해 처부실것 이오니 안심 하시 옵소서 "

하고 왕을 안심 시켰다.

 

 

 

"명황제 어명이 아무리 권위가 있다 한들 왜적들은 유별란 독종(毒種)인데 황제의 어명 한마디로 꿈적이나 하겠소?"

하고 선조가 말하자

"황상 께서는 일본이 만일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요 , 옛날과 다릅니다 . 이시람이 온갖 방법을 동원 해서라도 그들의 수족을 얽어 놓고야 말겠습니다 , 과히 염려 마시옵소서 "

하고 심유경은 자신 만만 하였다.

 

 

심유경은 순안(順安)에 도착 하여 그의 집사 (執事) 심가왕(沈嘉旺)을 평양 으로 먼저 보내면서 소서행장 에게 서면을 먼저 띄웠다 .

9월1일, 심복 부하 6 명을 대동하고 심유경은 평양성 으로 들어 갔다 .

소서행장은 명나라 유격장군이 왔다고 하여 칠성문(七星門)밖에 장막을 특별히 치고 환영 준비를 해놓았다.

 

회담은 이시(已時...오전10시)에 시작하여 미시(未時...오후 2시)까지 까지 지속 되었다. 일본측은 소서행장, 종의지 , 우천조신(柳川調信), 현소(玄蘇)등이 출석 했고 통역은 일본말을 할 줄아는 집사 심가왕이 했다.

 

 

회담은 조선인은 한명도 참여 시키지 않아 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회담후 나온 심유경이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적이 내 말을 받아 들이기로 하고 평양에 표말을 서로 입회 하에 박아 놓으며 앞으로 50일간 은 서로 그선을 넘지 않도록 약속하였소 , 서로 그선을 넘지 않기로 하였으니 서로 침범 않도록 하시오."

하였다

심유경이 의주로 돌아가 선조에게 왜군과 조명군(朝明軍)이 앞으로 50일간을 분계선을 넘지 않기로 하고 푯말을 세우고 나왔다 하자 선조가 못 마땅해 했다

 

 

"지금 조선 8도에는 조선 관군과 의병 들이 적들의 보급선을 끊고 한성을 수복 하려고 하던 참인데 앞으로 50일간을 휴전을 한다면 어쩔려고 그러는것이오?

 

 

 

더구나 앞으로 겨울 철이 닥아오면 적들도 혹독한 겨울을 이기지 못할것인즉 이 기회를 틈타 한성을 수복할수있는 기회요, 이런 좋은 기회를 왜놈들 에게 내주고 마는것 인데 어찌 그런 약속을 한단 말입니까?"

 

 

심유경이 답한다

 

"이사람이 적을 평양에 묶어 놓은 것은 명나라가 왜적을 칠 힘이 없어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선조 께서 우리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적을 칠수만 있다면야 제가 적중에 왜 들어가 그들과 담판을 하려 하겠습니까? 50일간의 기한을 둔것은 왜적을 위해서 정 한것이 아닙니다 .

 

 

우리 대 명군(大 明軍)이 조선 까지 들어 오려면 우선 조선에는 도로가 잘 발달 되어 있지 않아 행군시 길이 질어 군대 이동이 수월치 않습니다 . 가을 추수가 끝나고 논에 물이 마른 다음 거병 하기 위하여 좀 늦춘것 뿐입니다. 또 잡혀 있는 왕자들도 돌려 보내고 난다음 저들을 치려면 50일이란 기간은 필요 합니다 . "

 

 

심유경은 그날로 저의 나라로 급히 돌아 갔다 .

 

 

10월 5일 예조판서 윤근수에게 임금은 심유경에게 50일간의 휴전안을 취소 하고 명군을 다시 보내 줄것을 간청 하도록 요동에 보내 보 았으나 허사 였다

명은 일본군이 조승훈의 조선 파병에 여지 없이 실패로 끝나자 큰 충격에서 벗어 나지를 못했다. 일본군이 생각보다 강군 이라고 생각이 바뀐것이다.

 

명황제 신종은 요동 지방에 나가 있는 요동 순안 어사(巡按御史)이시자(李時玆)를 급히 불러 드렸다 .

"최근 왜군이 의주로 진군 하여 온다는데 그동안 요동 지방과 조선 사정을 알아 보았는가?"

 

 

이시자가 황제 에게 조선 정세를 보고 했다 .

 

 

"폐하 , 일전에 조승훈이 평양전에서 일본군에게 패한것은 일본군을 너무 얕 보았기 때문입니다 , 적은 조총을 가지고 대항 하는데 조승훈은 기껏해야 기마병과 활 칼이 전부였습니다 . 왜군을 우리나라 절강성 과 복건성에 나타 나던 왜구 정도로 생각 했다가는 적을 이길수 없습니다. "

 

 

"그러면 어찌 할고?"

황제가 매우 걱정 되는 눈치 였다 .

"폐하 , 조승훈은 요동 부총병입니다 . 왜군과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무뢰한 입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왜구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절강성부대로 선봉을 삼고 요동군이 그 뒤를 따르게 하되 무기로는 왜군이 갖고 있지 않은 남방 절강성 의 포병이 갖고 있는 각종 포를 동원 하심이 가할줄로 사료 됩니다 ."

 

 

"남방 절강성 군을 조선전에 투입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텐데........."

신종이 곤란 하다는 듯이 난색을 표했다.

 

 

"폐하 , 듣기에 병부 상서 석성 이 심유경을 시켜 왜장 과 50일간의 휴전을 약속 했다는 말을 들었 사온대 . 50일 이전에라도 신속히 움직이면 곧 조선전에 투입 할수 있습니다 "

 

 

" 50일이란 날자는 실은 적들과 화의를 맺어 그들 스스로 물러 나게 하려던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 었는데.

 

"

신종은 그래도 망설이고 있었다 .

 

 

이시자는

"폐하 , 왜적은 지금 평양을 함락 하고 의주로 진격 할 것입니다 . 그들의 목표는 조선 왕을 사로 잡는것으로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 반드시 요동으로 처들어 온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요동 백성들이 전전 긍긍 하고 있습니다 통촉 하시 옵소서"

 

하고 사태의 급박성을 보고 했다.

 

 

신종(神宗)은 이시자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 하여 그날자로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을 북경(北京), 천진(天津),요동(遙東)을 방어 하는 비왜 경략(備倭經略)으로 임명 하였다.

 

 

신종은 우선 일본군이 만일 에라도 육지 아니면 바다로 중국을 침략시 대비 대책을 세우고 신속히 보고 하라고 지시 했다 .

 

 

 

송응창이 현장 방비 태세 점검후 신종에게 보고 했다.

 

 

"폐하 신이 어명을 받고 요동 지방과 천진을 다녀 왔습니다. 요동방어를 위하여는 전차, 화포 , 등을 준비 해 놓았고 조선 근방 야산에는 참호를 파놓도록 했습니다 ., 천진 방면은 전선(戰船)을 준비 토록 했습니다 ."

 

 

"왜적들의 기세가 대단한 모양인데 지키기만 하면 되겠는가?"

 

 

"폐하, 신의 생각으로는 일본군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나가 싸우던가 아니면 소극적으로 우리 국토만 지키고 있던가 두가지중 한가지를 선택 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될 소지가 있습니다 .

 

 

폐하 , 이 두가지중 나아가 싸우지 않고 수비 만 한다면 우선 조선과 요동땅의 지리적 조건을 무시 할수 없습니다 . 요동 에서는 언제 부터인가 조선과 요동관계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잇빨이 시려진다)관계와 같다 라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

 

이말은 앞으로 만일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늘 경우 요동지방은 전쟁터로 변할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전쟁에 휩 쌓여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고 적은 그들이 주장하는 가도입명(假道入明)본래의 목적이 결국 실현 되지 않을지 누가 장담 하겠나이까? , 따라서 조선과 명나라는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 인것입니다 ,"

 

 

" 그야 물론 우리 땅이 그놈들의 전장터로 만들수야 없지 , "

 

 

하고 신종이 한참 숙고 하더니

"하지만 왜적과의 전투는 조선같이 산이 많은 지역 보다 오히려 요동벌 같은 넓은 지역으로 끌어 들여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 들이 나아가 싸우는것이 유리 하지 않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아닙니다 , 우리 입장으로는 왜적은 조선 국내로 한정시켜야 유리 합니다 . 우리 명군이 조선에서 전투시 유리한 몇가지 조건을 말씀 올리면 우선 조선의 험악한 산악 지형을 잘 이용하여 이시자의 말대로 남방 복건성 등 의 포병 을 동원하여 지리적 조건에 부합 되게 싸우면 됩니다, 일차 조승훈의 동정군(東征軍) 이 패한것도 기마병에 너무 의존한 탓입니다

 

 

 

.다음 전쟁을 하려면 군량미나 각종 군수 물자가 필요 한데 만일 요동으로 일본군을 끌여 들여 싸운다면 조선에게 군량미와 군수 품을 대라고 할수 할수 없습니다 .

 

국내전을 치루자면 전쟁물자의 조달과정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되지만 조선 국토내에서 싸운다면 조선은 이번 전쟁의 구원 요청자이므로 우리가 필요한 군수물자를 대라 하면 꼼짝 못할것입니다."

 

 

신종(神宗)은 송응창의 말이 옳다고 판단 하고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여 45000여 대군을 2차로 조선에 파병 하기로 결정 하였다 . 10 월 16일 이여송은 도독 (都督)이되어 동정군 (東征軍..동쪽을 치는 군대)의 총 지휘를 맡았다.

 

 

 

조선에서 돌아온 심유경은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고 했다 .

 

 

 

"왜적들과 담판에서 그들은 명나라 황상 께서 만 군대를 조선에 출동시키지만 않는다면 자기들도 일본으로즉시 되돌아 갈것인즉 우선 대동강을 경계로 하여 평양서쪽을 조선에 물려 주겠노라 했고 명에 대하여는 봉공(封貢)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 "

하고 보고 했다,

 

 

 

그러나 심유경이 이런 보고를 하고 있던 때는 벌써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 으로 동정군 2차 조선 구원군 출동 명령이 떨어 진 후였다 ,

 

석성은 협상 사실을 신종 황제 에게 보고 하고 동정군은 동정군 대로 출동하고 적과의 협상은 협상대로 심유경이 계속 하도록 지시 했다. 적들을 방심하게 하기위한 술책이었다 .

 

 

 

심유경은 2차로 평양에 들려 소서행장에게 그동안 잡혀 있는 두왕자를 돌려 줄것을 요구 하였다 , 이말에 소서 행장이 대답했다

'"장군 께서 요청하신 두 왕자 관계는 함경도 에서 일어난 사건 이므로 제 소관이 아닙니다 , 차후 협의 하시기로 하고 , 우선 약속 한대로 우리 군을 대동강 으로 돌아 가겠습니다 "

 

 

왜군들은 오히려 심유경을 이용하려 들었다.심유경은 2차회담에는 아무런 성과 없이 되돌아 왔다,

 이여송군의 왕필적(王必迪), 오성충(吳性忠)등 의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느기 시작 했다

 

 

이치령 전투 이후 전국 각지 에서는 의병이 일어 났다 . 이것은 권율이 처음으로 이치령 에서 조선군이 왜군과의 싸움 에서 이긴것에 대한 백성 들이 용기를 얻은 탓 이었다 .

 

의병들 뿐만 아니라 관군들과 일반 관리들 까지 용기를 얻어 적과의 싸움에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의병 들이 일어 난곳은 다음과 같다

거창(居昌), 성주(星州)지례(知禮)에서 정인홍(鄭仁弘) 김준민(金俊民)이,

여주 목사 원호(元豪)는 여주(麗州)에서,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은 임실에서 ,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낙동강을 무대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금산(錦山)에서 ,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는 영천(永川)에서,

의령(宜寧)에서는 곽재우(郭再佑)

 청주(淸州), 금산(錦山)에서는 조헌(趙憲)과 스님인 영규(靈圭)가,

경주성(慶州城)에서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이,

의병장 류종개(柳宗介)가 소천(小川)에서 ,

의병대장 정문부(鄭文孚)가 경성(鏡城)에서,

의병장 장사진(張士珍)이 인동(仁同)에서 ,

의병장 임중량(林仲樑)이 중화(中和)에서,

개령(開寧)에서 최경회(崔慶會)가, 예안에서

 김해(金垓)가, 호계에서

이대기(李大期)등이 , 경기도 지방에서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叔夏), 최흘(崔吃), 이로(李魯), 김탁(金琢), 남언경(南彦經), 유대진(兪大進), 이차실(李次失) , 홍계남(洪季男) 같은 이들이 각 지역에서 용감히 적을 괴롭혔다 .

 

당시 의병 활동은 의병장이 주동이 되어 의병을 모집한 경우와 유생들 중에서 의병장으로 추대 되어 의병장이 된경우였다 .

 

당시 의병의 성격을 관군과 비교한 우참찬(右參贊) 성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召募之人이 全國 에서 義旅를 모아 各者가 軍을 만들어 州나 縣의 부름을 받지 않는자를 義兵이라 하고 地方 守領들이 軍民을 調發하여 元帥의 節制를 받는자를 官軍이라 한다"

( 의병을 모집 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 에서 의(義)로서 맺어진 군사를 만들어 국가의 징병 과는 별도로 활동하는 군사를 의병이라 일컫고, 국가가 백성들 중에서 징병 하여 장수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자를 관군 이라 일컫는다 )

라고 정의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의병 이란 대국적 으로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만 관 (官)이 아닌 의병장의 지휘를 받으면 서도 각자 에게는 어느정도 자유가 있다는데 그 차이가 있었다.

 의병이 일어난 동기를 잘 분석해 보면 왕의 서천(西遷)과 일본군의 한성 점령으로 충격을 받은 유생들이 임금을 모시는 대신들의 태도에 의분을 참지 못 한 데에 근본 원인이 있었다.

 

 

 

게다가 조정 대신들은 전쟁 에 대비 못한 책임을 일선 군 관 들에게 만 떠넘기고 자기들은 피난에 바빴 으므로 적에게 노출된 지방 유생(儒生)들은 스스로로 자기 향토를 지키지 않으면 않 되었던 것이다.

 

의병장 출신중에 유생(儒生)들이 대부분을 차지 한것은 그들이 사는지역 에서는 물질적 으로나 정신적 으로 영향력이 대단한 인사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의병 들은 자기 계통의 유생 들은 말 할것도 없고 양반집 에서 부리던 종 , 양반 소유의 논밭 을 갈고 있던 농민 , 같은 부락 에서 끈끊 맺어진 장정 들이 주로 맺어지기 시작 했던 것이다.

 

 

 

그후 이들 중에는 왜적과 싸움 에서 패해 이리 저리 방황 했던 장졸과 관군 중에서 일부 지원 나온 장졸 들도 합세 하였다.그밖에 난을피해 피난 다니던 오도가도 못하던 난민들도 의병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김수가 곽재우를 모함 여 보고 하였다 .

 

사실 곽재우는 자기의 개인 재산 까지 털어 의병으로 나옴 으로서 살기 어려운 부하의 가족 까지 도와 주었던 사람 이었다

 

,곽재우는 백성들로 부터 군량미를 징발 한적이 없다 .

 

 

 

이런 그를 김수는 곽재우의 직언에 분개 하여 조정에 치계(馳啓)함으로서 왕이 읽어 보고 놀라게 하였다

 

.

임금은 초유사 김성일 게 이 두사람 관계와 곽재우의 행실을 상세히 알아 보라 하였다 .

김성일이 조사한 곽재우의 비리는 정반대 였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왕에게 보고 하였다

 

. 오히려 곽재우의 신출귀몰한 홍의장군의 활약상을 소상히 보고 하였다.

 

 

임금도 곽재우의 활약상을 그동안 각종 보고를 통해 이미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않고 있었다.

 

 

 

왜국에 다녀와 황윤길과 정반대의 일본정세 보고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선조는 김성일의 그간 보고 태도의 진실성도 점검할겸 김성일 에게 김수와 곽재우 간에 갈등 을 소상히 보고 하라 지시 했다.

 

 

 

김성일 의 보고는 그 일이 있고 난후 보고 내용이 성실 했다, 임금은 김성일에게 두사람을 중재 하여 서로간에 오해 없이 왜적을 물리 치는데 전념하게 하라고 지시 했다 .

 

 

이일은 초유사 였던 김성일의 중재로 임진 전쟁이래 제일 강력 했던 곽재우 의병을 해체 시킬번한 위기를 넘겼다.

호서지방 에서 활동 하던 의병장 조헌(趙憲)도 충청 관찰사 윤선각(尹先覺)과 갈등을 일으 키고 있었다,

조헌이 청주성 탈환등 호서지방 에서 왜군을 몰아 낼때 지방 수령들중에 지(智)와용(勇)을 겸비한 조헌을 적극 도와 관군을 동원 지원한적이 있었다 .

 

윤선각은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고 일방적 으로 관군을 동원 조헌을 도와 자기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고 의병에 가담한 수령을 한때 감옥에 감금 하였다가 풀어 준적도 있었다 .

이렇듯 관군과 의병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불화가 심했다.

 

 

 

권율은 이점을 매우 우려 하고 있었다 ,

관군과 의병의 대립 관계는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조선 으로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것을 누구 보다도 더 잘알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청년 시절 경력 로 우연 하지 않게 조헌과 곽재우등 은 친구 이상으로 막역한 사이로 전쟁중에도 개인간 서찰을 주고 받는등 친분 관계가 돈독 하였다.

 

 

조헌 같은 경우에는 권율이 처사 시절 지리산 서 조식선생의 강론과 무예를 익히며 있던 그와 그곳에서 만나 시국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조헌은 명 나라에 다녀와 그에게 주었던 기효신서 는 병서 덕을 톡톡이 보고 있는 참이 었다.

 

 

권율은 조헌이 의병 활동상 어려 운점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각종 애로 사항을 아끼지 않고 지원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어떤 의병장 들은 자진하여  관군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찾아 들었다 . 권율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 하였고 그들을 적극 배려 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권율군은 관군이 아니라 의병이라 불릴만큼 의병장들이 각 의병들을 대동하고 찾아들어 이제는 막강한 규모를 자랑하는 군대로 커진것이다 , 그는  군사 수가 많아지는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 그냥 전라도 지방에만 안주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

 

 

권율은 최근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시간이 많아 젔다.

장차 근왕지계(勤王之計)에 뜻을 두고 있었던것 이다 .

조선의 심장부인 한성을 수복하여 임금을 서울로 모셔 한다는것이 그에게는 큰 꿈이었다,

그렇다고 전라감사 로서 전라도를 소흘히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

근자 전라도 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전라도를 감싸고 있는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는 이치령 전투 이후 의병의 활동과 경상좌우도 관군의 활약상이 대단 하여 왜군 경비 병력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왜군은 이순신 수군 본영이 있는 순천과 여수 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진주성을 공격 하였다가 막대한 피해를 보고 도망간 후로는 왜군들은 불안하 기 짝이 없었다 .

 

더구나 함경도와 평안도 까지 길어진 왜군 보급로를 조선의 의병과 관군이 수시로 공격 하여 보급로 경비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왜군들은 그들의 길어진 보급로에 신경 쓰지 않을수 없었다 .

 

거기에 전라도에는 권율이란 새로운 정예군이 도사리고 있으니 전라도 곡창 확보의 의도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항이었다 .

임금은 여러 경로로 관군과 곽재우의 의병 관계의 소식을 대신들로 부터 많이 듣고 있었다 .

 

관군의 명령이 의병들에게 씨가 먹혀 들지 않고 있다는 보고도 듣고 있었다

임금은 의병과 관군 관계를 감안 권율에게 의병을 총괄 감독 할수 있는 직책을 주어 감독함이 어떨가 생각하였다 .

 

 

11월 12일

 

선조는 권율을 경기, 총청, 전라 삼도 의병 통합 지휘 필요성을 생각 하고 있었다.

그것은 최근 진주성 에서 진주 목사 김시민과 곽재우, 최경회등 많은 의병 들이 참전 하여 대승을 이룬데 고무되어 종전과는 다른 합동 작 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이유 때문이었다.

 

 

국내 상황이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주성 싸움 에서 왜군이 물러 가게 한것은 권율이 의병장 김면과 관군을 이끌고 있는 합천군수 배설에게 편지를 써서 지금까지 배척을 받던 경상 우도 감사 김성일을 지원하라고 간곡히 권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의병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은 합천 군수 배설(裵楔) 경상 우도 감사 김성일(金誠一)과 합동 작전 으로 성주를 점령 하고 있던 일본군 수장(守將) 계원강(桂元綱)을 공격 하여 왜장 촌상경친(村上景親)등에 중상을 입혀 가며 성주성을 수복 하는 전과를 올리었던 것이다

 

 선조는 전격적으로 전라 감사 권율 에게 경기 , 충청, 전라, 삼도의병 통합사(三道義兵 統合使)로 임명하도록 도승지를 통하여 명했다 .

 

선조의 생각 으로는 권율 에게 경기, 충청, 전라, 삼도의 의병 통합지휘권을 줌으써 권율 에게 막강한 힘을 주어 장차 서울 수복의 주춧돌을 쌓고자 하는 생각 에서 였다.

 

 

 

그러나 왕의 전격적인 발령이 알려지자 사간원(司諫院)이 떠들썩 했다

사간원 회의가 열렸다 .

 

안건은 권율의 경기 ,충청, 전라 삼도 통합사 발령에 대한 논의 였다.

 

대사간 (大司諫) 김응남이 대청에 자리 잡고 앉있다

 회의를 진행하는 , 도리(都吏)가 선창하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모두 좌정 해주시오"

 

사간(司諫), 헌납(獻納), 정언(正言)등 13 명이 일제히 좌정 했다.

 

종 3품 사간이 설명 했다

"오늘의 안건은 전라 감사 권율에게 경기, 충청, 전라 삼도 의병 통합사라는 대전 회통 에도 없는 직책을 맡도록 상 께서 임명 하신건에 대하여 그 타당성을 논의 하고자 함 입니다. "

대사간 김응남이 먼저 말을 꺼낸다.

 

"임금께서 삼도 의병통합사 라는 직책을 정 하셨다면 그 직책이 법에 있는사항 이요? 아니면 어느 대신의 건의로 임금께서 받아 들인 사항이오 ?"

사간이 나섰다

 

"상감 께서는 어느 누구와 상의 한것은 없으시고 아마 최근 왜군과의 싸움 에서 관군과 의병장간에 협조가 잘 된탓에 성공적으로 승리한데 대한 기쁜 마음에 한성 수복을 염두에 두고 경기, 충청, 전라 삼도의 의병 통합의 필요성를 느끼시고 내리신 명령 인것 같습니다. 사실 통합사(統合使)라는 직책은 대전회통의 법에도 없는 직책 입니다."

김응남이 좀 의아 하다는 투로 묻는다

"그런데 상감께서 하필 이면 전라 감사 권율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오?"

 

사간이 대답한다

"권율은 동서인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을 뿐더러 무장 으로서의 덕목을 고루 갖추 었다고 생각 하신것 같습니다

 김응남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어느 당파에 치우치지도 않은 인물 이라는것은 알고 있소만은 그는 무장 출신도 아닌 유장(儒將)출신이 아니오 ?.

상감 께서는  이치령 전투에서 어쩌다가 승리 한것 하나만을 가지고 법에도 없는 직책을 만들어 가면서 까지 그에게 의병 통합사 라는 중책을 만들어 제수 한다는 것은 각도 감사들의 불만을 살 것인즉 이번 인사는 부당 한것으로 생각되니 의견 들을 말해 보시오"

 

 

정5품 헌납(獻納)이 나섰다

"듣사옵기는 권율공은 비록 유장 출신 이라 하오나 다른 무장들과다른 데가 있다 합니다.

 공은 평소 생활이 검소 하고 절도가 있으며 , 부하 통솔 이나 다른 장수들과 의병장들과 관계 에서도 신의가 있어 주변 에서 잘 따르는사람들이 많다 합니다

 

또 무슨 일이든지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매사에 사려가 깊어 즉흥적 으로 경솔히 하는일이 없고 의병장들 이나 부하 또는 백성 들을 감쌀 줄 아는데다가 무슨일이고 최선을 다하므로 빈틈이 없다 합니다.

 

 

 

또 공은 사사로운 일에는 항상 초연 하여 전쟁중 에도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 걱정을 형들에게 틈틈히 묻는 등 효성이 지극 하며 형제들 간의 우애도 돈독 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공은 평소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그렇지 인물로 보아서는 어디 내 놓아도 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권율의 인물 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응남이 이 말이 못 마땅 한듯이 헌납을 쏘아 보며 말한다

"지금 이 자리가 권율 인물평을 하자는 자리요?.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것은 과연 한도(道)의 감사가 관활권이 없던 다른 두도(道..경기 충청)의 의병을 통합 지휘함 으로서 일어날 이후의 사태를 걱정 해서 하는 말이오 ,

전라 감사 권율이 아무리 유능 하다 해도 엄연히 경기외 충청도는 감사가 각각 있어 관군과 의병을 통활 하고 있는터인데 전라 감사가 더구나 법에도 없는 직책을 주어 경기 충청도의 의병 까지 지휘 한다는것은 말도 않되오.

즉각 이 사항이 부당 함을 주상께 주청 하여 바로 잡아야 옳을 줄아오 "

하고 김응남이 사간원 전원의 동의를 반강제적으로 구한다

 

계속

 


  1. 30Oct

    Sound of Silence

    Date2017.10.30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2. 29Oct

    쌍화차 마시며 음악 들어요 ㅎㅎ

    Date2017.10.29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3. 29Oct

    내가 대한극장에서 처음 본 70 mm 영화 ㅎㅎ

    Date2017.10.29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4. 28Oct

    Eine kleine Nachtmusik

    Date2017.10.28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5. 27Oct

    아침에는 대학강의 저녁에는 그림 ㅎㅎ

    Date2017.10.27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6. 25Oct

    A Professor at Computer Science Department, San Jose State University ㅎㅎ

    Date2017.10.25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7. 18Oct

    강의하러 올라가요 ㅎㅎ

    Date2017.10.18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8. 18Oct

    나의 부모님

    Date2017.10.18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9. 16Oct

    금강산에 가고 싶어 그렸어요. A beautiful mountain in North Korea

    Date2017.10.16 By성광필 Reply0 file
    Read More
  10. 14Oct

    새벽이오기전에(27)-이순신의 계략-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1. 14Oct

    새벽이오기전에 (26)-이순신의 함대 -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2. 14Oct

    새벽이오기 전에-25) 평양 사수-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3. 14Oct

    새벽이오기전에(24) 짓밟히는 산하-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4. 14Oct

    새벽이오기전에( 23)-태풍이 불어 오고 있다-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5. 14Oct

    새벽이오기전(22)-흔들리는 서울장안-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6. 14Oct

    새벽이 오기전(21)-무너지는 조선 강토-

    Date2017.10.14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7. 02Oct

    새벽이오기전(20)-임진왜란-

    Date2017.10.02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8. 02Oct

    세벽이오기전(19) -조선왕을 포로로 잡아라-

    Date2017.10.02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19. 02Oct

    새벽이 오기 전(18) - 명신 이항복-

    Date2017.10.02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20. 02Oct

    새벽이오기전(17)-임금이 사랑한 왕자-

    Date2017.10.02 By권영환 Reply0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 241 Next
/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