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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jpg

 

 

조정에서는 최익현의 시신을 충남 정산땅 적당한 곳에 묻기를 원했으나 대전과 공주 논산등 왕래가 심한 땅에 묘를 쓴다는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물론 일본 통감 이또와 하세가와의 입김이 크게 작용 한것은 물론이었다

참정 대신 이완용은 이또에게 최익현의 묘를 논산군 상월면에있는 무동산에 묘를 쓰는것을 이또에게군 병력을 이용해 저지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
이또는
"참정대신께서 하시는말씀은 잘 알겠으나 민심이 만만치 않으니 그들이 원하는대로 묘를 쓰게 당분 간 놔둡시다"
하고 한발 물러섰다 .
기름 붓는데 불을 붙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결국 최익현의 장사는 정미년 2월 광무11년 무동산 아래인 연산 지경 마을 뒤산에 묻히었다 .
그런데 의정 대신 이완용이 통감부에 들릴 적마다 이또에게 불평을 하였다
" 묘를 쓴 이후로 공주와 대전, 심지어는 영호남을 왕래하는 조선 백성들이 꼭 묘를 참배하고 오고간다는데 눈을 뜨고는 그냥 두고 볼수가 없습니다 무슨 조치라도해야겠습니다 "
이완용의 말에 이또가 웃으며 대답한다.

"허허 대감 성질도 급하오 ,조선 속담에 흉가집도 사귈 탓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불길한 집도 잘 눌러 살면 아무 탈 없이지낸다는 뜻인가 본데 어차피 묻게 놔 둔 묘를 어찌 할수 없으니당분간 두고 봅시다 "
"시원 찮은 국에 입가 데인다는 말 잊지 마십시요"
"허허 독을 보아 쥐를 못치는 법이오. 좀더 두고 봅시다"

어쨋든 조정의 대신들은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어 장장 15 일간을 백성들이 상여를뒤따르고 있다는 소문에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될가봐 전전긍긍 하고있었다 .
수많은 백성들이 최익현의 산소에 들려 나라를 잃게 된 현실을 눈물로 통곡을하며 한을 푸는동안 의정대신겸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궁내부대신 심상훈,법부대신 이하영,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등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있었다 .

광주관 찰사로있던 이도재만 조상 차 다녀 갔을 뿐이었다 .
매천야록을 지은 황현이 최익현의 빈소를 방문 하였을때 방문 조객들의 명부를 확인해보았는데 촘촘히 적은것이 네권이나 되었지만 공무원 이름은 이도재 한사람 뿐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방문은 않고 최익현의 죽음을 애도하여 편지로 대신한 사람으로 김학진, 이용원, 이재윤 뿐이었다

다만 고종의 증조 형제로 벼슬이 승지로 있는 이재윤만이 최익현의 충절에 감복하여 벼슬을 버리고 최익현이 남기고간 각종 서적을 모아 관리하는등 최익현 사상에 몰두하였다 .
어쨋든 최익현은 죽고 나서도 조정은 그의 망령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최익현의 유지를 받들어 그해 11월에는 남원에서 양한규가 의병을 이르으켰다 .

양한규는 남원부 아전 출신 이었지만 최익현이 정읍 ,순창, 곡성을 점령하고 남원으로 진격한다고 했을때 남원 입성을 학수 고대하었던 말단 아전(공무원)이었다 .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어 돌아 오자 몰래 거사를 위해 자시 사재를 털어서 동지를 규합했다.

최익현의 의병이 모두 해산 되자 일본군도 긴장이 풀려 경비가 허술 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믐 밤 2경에 백여명의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이 접수한 남원 경찰서를 공격하자 왜경들은 사방으로 도망치었다 .
이에 힘 안들이고 점령한 양한규가 기분이너무 좋아서 동헌대청 위 아래를 올라갔다 내려 갔다하며 둘러 보고 있을때 느닷없이 총탄이 날라와 그 자리에 쓸어저 죽었다 .
저문밤에 갑작스럽게 당한일이라 의병들은 총탄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우왕 좌왕하고 있었다 .

의병들은 양한규가 죽자 모두 도망 치고 말았다 .날이 밝으면서 왜군들이 들여닥쳐 의병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쳬포 된사람들이 감옥을 가득히 메웠다 .
최익현이 죽은 다음 해인 1907년 3월 최익현의묘소를 참배를 마친 나인영이 을사5적 대신들을 죽이려고 하다가 체포 되는사건이 벌어지었다 .

6월에는 일본으로 도망 갔던 박영효가 돌아 오고 통감부에서는 내각 관제를 개정하여 의정부를 다시 내각으로 바꾸었다 .이완용을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
이제는 조정에 대하여 바른 말할 사람이 없었다 .이준,이상설, 이위종등이 고종의밀명을 받고 유럽 화란에서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나타나 보호조약이 고종 황제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설파하였다 .
이사건으로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에 까지 나타나고 결국은 고종의 황제 자리를 황태자 순종에게 양위하라는 압박을 받고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한다

이를 본 조선 시위대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 .
이날밤 이완용의 집에 누군가가 방화를 하였다 .
이완용은 이에 겁을 먹기는 커녕 다음날 조정에서 양위식을 거행 하도록 만들었다 .
이 자리에서 물러 나는 고종은 태황제라 칭하게하고 순종을 황제라고 칭하게하였다 .

이완용은 이에 끝나지 않고 이또와 사이에 한일 신협약을 발표하였다 .
정미 7조약이라고부르는 이조약의 핵심은 일본 통감부가 한국의 관리(공무원)들을 임명하는권리를 갖는다는 조약이었다 .
8월에는 한국군대를 정식 해산하였다 .

한국군 시위대 참정 박성환이 분을 못이겨 총을 거꾸로 향하여 들고 자살하였다 .
이에시위 보병 연대 제1.2대대가 일본군과교전을 벌렸다
연호를 융희로 바꾸었다 1908년 새해가 되자 경기,강원도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
4월에 내부대신으로 송병준을 임명하였는데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한국인을 모집하였다

한국인들 앞잡이들을 내세워 대한 제국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
1909년 일본통감부는 공무뭔 인사권에서 부터 한국군 까지 완전히 해산 시키고 나더니 이번에는 한국인들의 재산권에 대하여서 까지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
즉 지금 까지 내지 않던 가옥세, 주세,담배세,등 세법이라는것을 발표하였다 .
한국인들의 마지막 보루인 재산권 마저 세금으로 박탈하여 착취 하자는 속셈이었다 .

출판법,민적법,등등 눈코뜰새없이 한국인들은 껍데기 옷까지 벗기고있었다 .
한국의백성들은 이또가 한국을 무력화시키고 보호조약을 강요한 원흉으로 보고 그를 원망이 하늘을 찌르자 일본정부는 슬며시 이또를 추밀운원장으로 불러들인다

한국백성들은 이또가 일본으로 떠나는것을 보고 착잡한 마음을 갖고있다가 안중근이만주 할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하는사건이발생하였다 .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들어가, 역두에서 러시아 군대의 군례를 받는 이또에게 10보 이내의 거리에 까지 접근, 권총으로 이또의 배와 등에 세발을 명중시켜 즉사케 하고, 이어 할빈 총영사 , 궁내부대신 비서관등 일제의 침략 첨병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 되었다.

안중근은 곧 일본관헌에 넘겨져 여순의 일본감옥에 수감되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했다.
안의사는 '동양 평화론'과 최후 진술에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 중, 일 삼국이 대동 협력 해야 하며, 일본이 침략으로써 동양 평화를 파괴 했기 때문에 이또를 처단한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했다.그는 중국 만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에 앞서 "노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한다"는 글도 남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같다

하늘이 사람을 내리셨으니 온 세상 모두 형제 이어야한다 .
인간이란 각각 자유를 지키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문명 시대라고 하나 우리 한국만이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동 서양을 통하여 똑똑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고,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각자는 천부의 본성을 지키며 도덕을 숭상하고 서로 싸우지 않으며 평화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직업들을 가지고 태평을 함께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문명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떤가?. 지금시대는 그렇지 못하니 문제이다.
이시대의 싸움은 높은사회의 높은 인물들이나 논하자 는 것이 싸움 목적이요, 그들이 추구하는것이 살인 기계나 하는짓이나 마찬가지 이니 동서양 육대주는 포탄의 연기와 빗발치는 탄환으로 어느 날이고 편안한 날이 없으니 이 어찌 개탄하지 않겠는가. 지금 동양 대세로 말해보면 참상이 극심하여 진실로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또란 놈은 천하의 대세를 헤아리지 못하여 잔혹한 정책을 남용하니 동양 전역이 짓밟히고 깨어지는 장소로 변하고있다 .
아, 슬프구나. 이 나라에는 천하 대세를 깊고 멀리 생각해야 할 뜻 있는 청년들이 나와야 하거늘 이시대의 젊은이들은 어찌하여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있는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불의를 보고 참지 못여 중국 만주 할빈 땅 만인의 눈앞에서 총으로 쏘아 늙은 적 이또의 죄악을 성토하고 뜻있는 동양 청년의 정신을 경고하고 각성 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
안중근은 이러한 글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었다

안중근 말 대로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한국은 그들의각본대로 이른바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고, 통감 정치를 실시한 데 이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또를 처단한 후부터 한국의 주권은 완전히 빼앗기고 그들의 식민지화 하려는 계획은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법부(법무부)를 없 애버리었다 .또 각지에서 항일 무장봉기가일어났다
그럴수록 최익현의묘소에는 비분강개한 참배객이줄을 이었다
이또가 일본의 추밀원의장으로 승진한후 부통감으로있던 소노 고노스께(曾禪荒助)가 통감으로 승진하였는데 그는 승진 하자 마자 그동안 교활한 이또의 정책의 한술 더 떠 본색을 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

그는 이또가 살해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더욱 한국 침략의 마각을 들어 내었다 .
우선 을유 각서라는 것을 이완용으로 부터 받아 내어 대한 제국의사법권과 감옥사무를 일본에 위탁 하라는 미명 하에 사법권 마저 박탈하였다 .
그 다음에는 군부(지금의 국방부)마저 폐지 시켜 버렸다 .

나라를 강하게하는 법을 흔히 부국 강병이라 일컫는다 .
그런데 부국 강병은 커녕 소노 통감이라는 자는 지금 까지 내지 않던 가옥세, 주세,담배세,등 세법 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한국의 경제권을 박탈 하더니 이제는 군사력 마저 백지화 시켜 무력화 시킨 것이다 .

소노는 한국의 재정권을 철저하게 씨 말리기 위하여 한국 은행이라고 부르는 한국 정부의 의지와는 전혀 다른 듣도 보도 못한 금융 통제 기관도 설립하였다
소노는 일진회 이용구를 앞장세워 한국과 일본을 합방 하여야 한다는 건의서를 대한제국 정부에 제출 하게 하는등 껍데기만 남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시작하였다

이용구
그는 누구인가 ?
그는 경북 상주 출생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2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함께 투옥되었으나 사형은 면하였다.
그후 동학당을 진보회로 고쳤다가, 1904년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一進會)에 합병하였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고, 1905년에는 이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설하여 교조가 되었다.
그는 일진회회장되어 소노 일본통감과 자주 접촉하며 일본의앞잡이노릇을 톡톡히하고있었다 .
그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소노 조선 통감과 내통하면서 공식적으로 고종황제, 총리대신 이완용, 일본의 조선통감 소노등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올리는 쑈를 거침 없이한 것이었다 . 물론 그가 나중에 사망 후 일본으로부터 훈(動) 1등 서보장(瑞寶章)까지 받은것은 나중 얘기다 .

조선통감 소노는 이러한 이용구와 한국 병합에 대한 의견을 기탄 없이 자주 교환하였다
소노는 이용구에게 자주 한국 병합의 제일 걸림 돌이 무엇이냐고 의견을 물었다 .
그는 시천교 교주 답게 한일 합병을 하려면 우선 항일 무장봉기 세력부터 꺾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
소노 통감이 이용구에게 현안 문제를 물었다
"영호남 유림들과 해산 되어 귀향한 조선군 시위대 출신, 폭도들만 통제하면 일한 합병 문제는 급물살을 타지 않겠소이까?"

의병을 폭도로 말하는 소노 조선통감의 말에 그는 거침 없이 대답하였다
"통감 각하 나는 이나라의 백성들의 정신을 동학당에서 진보회로, 진보회에서 일진회로 이끌어 온 사람이지만 .지금 통감께서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유림이나 퇴역 시위대만 제거 하면 만사 형통 할것으로 생각 하시지만 그것은 계산 착오입니다 . 지금 통감께서 하실 일은 우리 조선의 백성들의 항일 의식을 안정화 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

"허허, 조선의 대감들은 우리 일본의덕으로 기차도 놓고 전화도 놓아 잘 살게되었으니 개혁을 시켜 주는 우리 일본을 존경하고있 는것으로 알고있는데 조선 정부의 신민인 조선 백성들이 같은 생각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
"어째서요?"
"유림이나 ,퇴역 시위대 문제가 아니라 한국 백성들의 보수적인 정신 상태를 뜯어고쳐야 합니다 "
"그러자면......"
" 여러 가지가 있지요 ...이를테면 ..."
"이를 테면 무엇이오?"

" 통감께서는 논산 상월면에 있는 최익현의 묘소에 가 보셨습니까?"
" 그영감이 죽은지가 벌써 1년이넘었는데 그곳에는 왜가 봅니까?"
"허허 통감 각하는 그쪽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그쪽 사정이 어떻다는것입니까?"

" 지금 그 묘소에는 영호남을 오고가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참배 하지 않는자가 없다고 합니다 . 그들은 참배 할적 마다 . 우리 대감들을 욕을하며 이토록 우리나라를 도와 주려는 각하를 몰아 내어야한다고 성토 하는 성토장이 되었다 합니다 .
이런 불씨를 방치하고 계시는 각하가 참으로 불쌍합니다 "
"허허 ...불쌍 하다니오. 그 까짓거 그곳에 참배 못하게 통제하면 되지 뭘 그러시오?"
" 아닙니다 .물이 계속 흘러 들면 봇물은 터지게 되어있습니다 .언제 폭발 할지 모릅니다 "
" ......................"

소노 통감이 이용구의 말에 말문이 막히었다
이용구가 말을 잇는다
"통감각하 , 이말을 하여 드리니까 .무엇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하고 계십니까? "
" 그러면 대감께서는 어찌 하면 좋겠소?"
" 그 곳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유림이나 퇴역 시위대 뿐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
"그러고 보니 통제 한다는것도 문제는 있소이다 "

난감한 표정으로 있는 소노 통감에게 이용구가 다시 말을 잇는다
" 방법은 있습니다 "
소노가 귀가 번쩍 뜨였다
"무엇이 오이까?"
" 최익현의무덤을 아주 외진 곳으로 이장 시켜 버리십시요"
소노 통감이 무릎을 친다
" 하. 그것참 좋은 생각이외다 . 생각 해 보니 그 논산이라는곳이 영호남과 경기충청도로 통하는 큰길 옆이라 ......"
통감의 지금 까지 어두운 표정이 금방 밝아지자 이용구는 신바람이났다

"각하 제가 최익현 묘를 이장 시켜 드릴 만한 장소를 알려 드릴까요?"
"어디입니까?"
" 이장을 할때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 같이 먼곳으로 이장하면 백성들의 반발이 있을것이니 같은 충청도 지방내로 후미진 곳을 찾아 이전 시켜야 유족들이나 유림들의반발이 심하지 않을것입니다 "
소노 통감은 어서 이전 장소부터 듣고싶었다
" 말씀 해보시오"
" 충남 광시라는곳을 아시고 계십니까?"
"잘 모르겠소이다 "

" 그러니까 그곳이 최익현의 명당이라는 말씀입니다 "
"혹시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소노가 겁을 내자 이용구가 껄껄 웃는다 .
"소노 각하 무엇을 그렇게 망설이십니까 ? 그 논산 상월면 이라는곳이 교통 요지아닙니까? 북으로는 공주 남쪽으로는 논산 동쪽으로는 대전, 이곳에 신작로를 내시라는것닙니다 . 도로를 새로 내야겠으니 묘지를 이전 하라하고 하면 제 아무리고집이센 최씨 집안이라도 별수 없는것이 아닙니까?"

소노 통감이 이용구의 아이디어에 또 한번 감복한다
"허허, 역시 일진회 회장님은 다르시오그려"
이렇게하여 최익현의묘는 인적이 드믄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전 하게 되었다

이렇게하여 최익현의 묘는 일본 통감부는 참배객이 몰려드는것을 방해하기위하여 1910 년 그들의 의 강압으로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한적한 곳으로 이전을 한것이다 .
요사이도 최익현의묘는 근방 까지 가서도 찾을수 없는 한적한 곳이다
최익현의 묘소는 일제는 악랄하게도 조선의 앞잡이 이용구와 함께 이장을 강요 당하여 외로운 곳에서 찾아오는사람도 없는곳에서 묵묵히 이나라를 굽어 보고 있을 뿐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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