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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jpg

 

아홉명의 의사는 모두 통곡하며 문 안에서 절하고 물러 가고 난 다음 , 임병찬과 두명의 상제 최영조·최영학과 호상 노병희 등이 최익현의 관을 따라가며 해로옥(海老屋)이라는 집앞에 당도하니 가게 주인인 일본인 해로(海老)의 아들 웅야(雄野)라는 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부산까지 풍랑으로 배편이 여의치 않아 수선사 법당에서 안치했다가 떠날것을 권하면서 그가 자진하여 앞서 길을 인도하므로 수선사(修善寺) 법당에 관을 내려 놓았다.

수선사는 비교적 높은곳에 위치해 있는 절로서 돌 계단을 몇 계단 올라가야 들어갈수있는데 입구와 경내가 좁아서 많은 인원이 최익현의시신을 문안드리기에는 적절치 않아 임시로 시신을 안치 하기로 하고 부산으로 배편이 되는 대로 떠나기로 하였다

최익현은 고국 땅에서 죽기를 원하여 죽기 전 까지 일본땅을 등으로 두고 눕지 않았다는 땅 대마도....쓸쓸히 눈을 감았던 대마도....일본 말로는 이즈하라 라고 부르는 이땅을 떠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9 일에는 최익현의 종질 최영설, 족손 최만식, 참봉 최전구, 최봉소가 서울에서 부고를 보고 급히 부산에 도착 하였으나 풍랑으로 배편이 없어서 객지에서 사망한 최익현의 시신을 보러 대마도로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익현의 막내 아들 최영복이 정산(定山) 으로부터 6백여 리를 달려 상무사에 와서 울며 몸부림쳤다.

한편 대마도에서는 바람이잠잠 해지자 발상하게 되었는데 최영호,·곽한빈등이 일제히 모여 치상에 대한 준비를 했다. 이날 저녁에 관을 받들고 배에 오를 적에 노병희가 초혼(招魂)하여 앞에서 인도 하고 항구 까지 나왔는데 여러 왜인들도 최익현의 높은 뜻을 보아 왔기 때문에 그들이자진하여 촛불을 잡고 서로 따라 와서 서러워 하지 않는자가 없었다고 한다.

21일 이른 아침에 부산에 시신이 도착 하는 날 , 최익현의 아들들과 ·조카· 제자등이 다 부두 가에 나와 기다렸다.
상무사 사원들 천여 명이 큰 상여를 갖추고 큰 글씨로 춘추 대의 일월 고충(春秋大義日月孤忠)’이란 글자를 비단에 써서 간대에 걸고 나와 최익현의 시신이 오는 배를 기다렸다 .
오전 8시 경에 일본 배 약진환(藥津丸)이 초량 앞 바다 항구에 정박하자, 자질·문생이 삼판선(三板船)을 타고 일본 배로 올라가서 관을 안고 통곡한 다음 관을 옮겨 하륙하였다.
김영규·권순도가 관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선생이시여 이 배는 대한의 배요, 이 땅은 대한의 땅입니다.”

통곡소리에 부두 가에 나와 있던 남녀노소 수백 명이 모두 울부 짖어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상여 줄을 잡고 따라가는 자가 하도 많아서 오리를 잇대었다.

이 때 음산한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고 가랑비가 내리는데 쌍무지개가 서남쪽으로 뻗어 상무사에 닿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관을 설위 한후에 사장이 사원을 데리고 통곡하며 존제(奠祭)를 올렸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광무 10 년 12 월 17 일 오전 4 시, 우리 면암 최선생이 원수의 나라 대마도 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고국으로 모시는데 가는길이 부산항을 경유하게 되어, 부산항 상사(商社) 직원 등은 상여 앞에 모여 곡을 하노라

아!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엔, 선생 한 분만이 사신 것 아니라, 온 천하가 다 산 것이니 살아 계셔 보람이 있었고,
선생이 돌아 가서는 선생 한 분만이 돌아 간 것 아니라 온 천하가 다 죽은 듯하니 돌아가셔도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선생의 생전의 갖은 고난은 하늘이 이나라 백성들을 대신하여 선생에게 시키려는 것 사후의 모든 숭배는 하늘이 이 도를 살리자는 것 ,외진 땅에 사는 이 백성들 역시 다 양심을 지녔길래 선생의 덕을 모두 본받아 바람 앞에 풀잎처럼 쓸렸고 만인이 외우는 그 이름 우리가 귀청을 뚫는 듯했습니다 .

젊어서는 학문에 힘써 진실한 문도였고, 벼슬해서는 나라를 위하여 뜻을 저바리지 않으셨고 , 임금께 상소하여 간한 것은 세상이 다아는 것이오 국난 위해 거사 한 것은 임진 왜란때 일본 놈들과 싸우다 죽은 중봉 조헌 선생의 충성과 무엇이 다르리오?

아,마침내 감옥에서 돌아 가신 절개는 나라위한 충절이오 . 그 의(義)는 세월의 큰 뜻이며 그 빛은 해와 달의 빛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그 깊음은 강과 바다와 같고, 그 높음은 산과 같네.

선생이 아니 계셨다면, 사람이 짐승이나 무엇이 다르며 , 선생이 아니 돌아 가셨다면
어느 누가 선생을 본 받아 목숨 던져 의를 취하겠습니까?
고개 넘어 바다 건너 만리 길에 갑자기 부고(訃告)가 전해 오니 온 세상이 같은 마음으로 선생 위해 슬퍼하지만 유독 저희들 몇 사람은 선생 위해 기뻐합니다.


파도 속에 높은 지주 ,어두운 길에 밝은 촛불 하루 아침 없어지니, 누구인들 기가 아니 막히리오만
아! 요즘 세상을 돌아보니 하루인들 어찌 믿겠나이까?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충신이 역적으로 뒤 바뀌니 ,아아 ,큰 집이 기울어지는 날 손 하나로 고일수 있을까?.
사는 것은 치욕이요 죽는 것은 영광이라 먼저 가신 우리 선생 그 아니 상쾌하리
먼저 가신 우리 선생 그 아니 마땅 하지 않으리.

몸은 고향으로 돌아 오고 영혼은 지하로 돌아가고 우리 대한의 옷으로 염을 하고 우리 대한의 예로 장사 하니 선왕을 뵌다 해도 무엇이 부끄러우리까.

민충정·공이나 조정승이나 ·송연재·나 홍금산이나 순절하신 여러 충신 차례로 나와 앉아 선생을 반갑게 서로 맞아 주리니. 하느님께 호소 드려 아무도 모르게 보호 받아 어려운 것 풀어지고 세상 일 바로 잡혀 우리 대한이 안전하고 우리 백성 윤택 하면 평생 두고 애쓰신 것 거의 다 생취 된 셈, 저희들 소망도 이 것 밖에 또 있겠습니까?

변변치 못한 글과 박한 제전 이지만 이 설음 어찌 풀리겠습니까 마는 저희들 목을 놓아 통곡하니 산도 들도 따라 슬퍼합니다

영이시여,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 슬프옵니다.

상여 메일 인부들은 다 상무사에서 마련 하였고 수천 폭의 죽은 사람을 위하여 쓴 만장은 모두 군대를 시켜 들게 하였는데, 곳곳에서 통곡하며 존제를 올리는 자가 길을 메워서 영에가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산 초량으로부터 겨우 십리를 가서 부산 면회사라는 곳에에 당도하여 잠간 멈추었다 바로 예전 금누관이라는곳이었다.
김종두가 부산 초량의 여러 인사와 함께 정성껏 존제를 올렸다.
문하생 조재학은 의령에서 이 곳까지 나타나 통곡하며, 삼베 두건을 쓰고 영여의 줄을 잡았다.
범어사 주지 봉련스님이 여러 스님들을 데리고 와서 존제를 올렸다.

12월 초10일 오후 2시 경에 관을 열고 다시 염하는데, 면모가 완연히 살아 있을때 생시와 똑 같아서 한 점의 시체가 썩어서 흐르는 물인 시즙(屍汁)이나 냄새가 전혀 없었다.
새 관으로 바꾸어 예전과 같이 봉안했는데, 이면식이 이 일을 맡아 보 았다.

12월 11일 이재윤이 명정을 고쳐 ‘면암 최선생 지구(勉庵崔先生之柩)’라 썼다.
이에 최익현의 종질 최영설은 집례로, 족손 최만식은 재무 담당으로, 문인 노병희는 호상으로, 곽한소·최제학은 문서 담당으로 각각 배정 되었다.
그리고 고석진은 명정에 ‘대한국 정헌대부 의정부 찬정 면암 최공지구(大韓國正憲大夫議政府賛政勉庵崔公之柩)’라 썼다 .

상무사 사장이 새로 상여 까지 만들어 주었고 또 치상에 필요한 갖가지를 모두 힘을 다해 주선해 주었다 .
이날에 존제를 올린 자가 30 여 명이나 되었고, 만장 지은 자는 천개나 되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도 조정을 믿지못하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마음이 의지 할데가 없었는가를 여실히 증명 해주고도 남는 상사였다.

22일 오후 6시 경에 비로소 초상이 났을때 처음 입는 성복을 하고 상주는 사각건을 벗고 상복을 입을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껍질을 감은 테두리인 수질(首絰)을 쓰고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흰 두건에 집베 옷에 집베 띠를 했다.

이 날에도 내빈으로 존제를 올린 이가 역시 수백 명이었다.
심지어 기생의몸으로 비봉이라는 여인이 소복을하고나타나 제문을 지어 나라를 위하여 죽은 최익현 영정에 슬프게 통곡하며 존제를 올리기 까지 하였다 .

12월 23일 오정이 가까와서 비로소 상여는 발인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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