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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재.jpg

 

                          이도재
 
최익현이 송병선의 편지를 받아 든 것은 그가 나라를 왜놈들에게 빼앗긴 것을 분개하며 음독 자살한 후였다 .
"연제 송공(宋公)이 자살했다고?"
최재학이 편지와 함께 알려온 비보에 최익현은 비분 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
(모두가 죽는구나 ....모두가 자살하는 구나 ....나라는 왜놈들에게 빼앗기게 생겼는데 모두가 자살하면 이나라는 누가 지킨다는 말인가?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간의 도리는 지키겠다만 그러나 모두 죽기만하면 누가 다시 이 나라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아아, 아직 죽지 않은자들아..... 마음과 힘을 합쳐서 나라를 건져내자 )

최익현이 송병선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손을 가볍게 파르르 떠는 것을 감지한 최제학은 최익현에게 말한다 .
"선생님 , 이제 이 나라의 조정을 믿을 수 없습니다 .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황제를 찾아 뵙고 일본에 굴복 하지 말 것을 상소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최후의 수단인 자살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토록 선생님께서 부국 강병을 외치신 대로만 했더라도 이 나라는 왜놈들의 먹이 감이 되지 않았을 터인데 ....."
" 황제는 이름만 황제이지  일본놈들에  아부하는  권력만도  못하고, 황제의 명령이 있으되 통감부 명령만 못하고, 대신들의 온갖 모략에 의하여  나라 정치를 제대로 못하여  일본의 보호만 받으려 하는 놈들만이 있으니  어찌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옛말에  임금의 성격이 아둔하여  모든 일은 대신들에게 맡기어  문제나 일으키고  즉흥적으로 행동하여 어떻게  되든 말든  저질러 놓기만 하며   결단심도 미약하여 어떤것을 어떻게 지시할줄 모르며  남에게만 의존하여  자립정신이 없는  임금의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하였네....
우리나라가  바로 .그 꼴이야 .
 이처럼 무능한 정부를 믿었다가는 나라를 빼앗기고 말겠으니 최후 수단으로   무능하고 간교한  대신 놈들을 정부 내 에서 몰아 내고  일본놈들 을 이땅에서 몰아 내자면  전 백성들이 일어나  싸워야 한하네 "  
"선생님 , 의병을 일으키자는 말씀 아닙니까?"
"맞아 다른길이 없어 "

최익현은 최제학에게 붓과 벼루를 가져 오라하여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
일곱장의 편지를 쓴 최익현은 편지 겉봉을 썼다
보낼곳은 다음 일곱군데였다
판서 이용원, 홍문관 태학사 김학진, 관찰사 이도재, 참판 이성렬, 참판 이남규, 면우 곽종석, 간재 전우 였다 .
모두가 불에 타는 것을 끌어 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듯 이 나라의 위기를 건져내자면 전현직 벼슬을 한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직접 나서자는 내용이었다 .
그러나 기다리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판서를 지낸 이용원은 최익현이 보낸 편지를 무슨 불온 문서라도 본듯이 질겁을 하고 외부인이 볼까 무서워 하인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였고 , 김학진은 최익현의 편지를 받아 들자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었다 .
김학진을 최익현이 기대 한 것은 그가 안동 김씨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라를 위하여 몸 받힐사람으로 알았던것이다

김학진은 안동 김씨 문중에 서울 출생으로 이조판서 김병교의 손자였다 ·동부승지 ·호조참의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도승지를 거쳐 형조 ·공조 판서를 지냈으며, 전라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전라도관찰사 김문현이 파직 되고 그 후임으로 임명 되었다.
이어 병조판서가 되고, 1899년 홍문관 학사 ·궁내부 특진관 ·시종원경 ·태의 원경을 거쳐, 1906년(광무 10) 홍문관 태학사를 지냈으며, 1907년(융희 1) 기로소에 들어갔다.

후일국권피탈 뒤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자였다
이런자들이 최익현의 제의를 받아 들일리만무였다 .
그중 최익현이 크게 기대했던 사람은 병권을 쥐고 있던 광주 관찰사 이도재였다 .


이도재는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86년 호군으로 있을 때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1894년 김옥균 정부가 수립되자 풀려났다. 같은 해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봉준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한 공로로 , 전주부 관찰사가 되었다가 군부 대신을 거쳐 학부대신이 되었으나 단발령을 반대하여 사직했다.
뒤에 재차 학부대신이 되었다가 광주 관찰사로 나가 있었다.

이도재는 옛날의 이도재가 아니었다 . 최익현의 편지를 받아 들자 코웃음을 치었다.
(보수 꼴통.......)
이도재는 최익현을 옛것만 고집하는 한심한 늙은이로 평가 하고 있었다 .단발령 때 사표를 내던지고 포쳔에 있는 최익현을 찾아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최익현의 편지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

이성렬은 충남 아산 외암 마을에서 태어나 문과 급제하여 승지 대사성에 , 참찬으로 있었다 . 그는 최익현의 편지를 읽고 두말 않고 벽장 깊숙히 감춰 두고 반응이 없었다

이남규는 이미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 낙향하여 글을 읽고 있었으나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도망하친 민 종식이에 그의 집에 은신하여 동지인 정재호 , 이세영 , 박윤식, 이상두등과 의논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비밀리에 대술면 으로 민종식을 찾아 구수회의를 거듭하던 중 뜻 밖에 일경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민종식은 피신하고 김덕진 등 은 모두 체포 되어 공주 감옥으로 끌려가 자 경황이 없었다.
면우 곽종석은 . 경상남도 거창 출신으로 중추원 의관이 되었으며, 1903년 비서원승에 특진하였고, 이어서 참찬으로 시독관을 겸하였다. l905 년 을사 조약이 체결 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 하라고 상소 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는 상소문을 제출하여 경남 거창으로 낙향하여 세상 일을 잊고 있었다

전우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임헌회 문하에서 20 년간 학문을 닦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강원도 도사 ·장령 ·순흥부사 ·중추원참의 등에 보직 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외딴 섬으로 들어가 전라도의 계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최익현은 제자 최제학과 고석진을 불렀다.

"아, 함께 일 할 사람들이 이토록 없다는 말인가? 벼슬 만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자들과는 나라를 구할수 없다 할수 없다 자네들이 나라를 건질 만한 인물을 찾아 주기 바라네..."
고석진이 말한다 .
"선생님 , 벼슬을 했다고 모두 나라를 위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 하시면 착각입니다."
" 물론이지 ,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야 . 하지만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아 볼 일곱명 만큼은 내가 너무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어 "

" 개중에는 사정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중대 시기에 벼슬 길에 오른 사람들이 선생님의 충정을 알아 주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야속 하기도 합니다 "
"허허, 나라가 없으면 그놈의 벼슬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 선생님 정부를 이제는 믿을 수 없습니다 . 온갖 권모 술수로 저희들 끼리 다투더니 이제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모른 척하고 있는 사람들과 무엇을 의논하겠습니까?"
" .................."
"선생님 제가 한 사람을 추천하겠습니다 "
"누구인고?"
" 태인 사람 임병찬이라는 사람입니다 ."
"임병찬?"
"이미 갑오년 부터 떼지어 다니며 약탈, 일삼는 도둑 무리들을 토벌한 공이 있어 그가 나라를 위한 충의와 용맹심을 높이 살만한 인물입니다 "
"..............."

고석진은 전라도 고창 출생으로 최제학과 함께 최익현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최익현은 최제학을 불러 편지를 써서 임병찬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임병찬(林炳瓚)은 1851 년 2 월 옥구군 서면 (현재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네살에 오언고시를 지을만큼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다
1882년 그의 나이 31살에 태인현 산내면으로 이사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는등 어지러운 세태를 보고,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려했던 것이다.

1886년 조정에서 거문도에 진(鎭)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감독관에 추천하자 관직에 나아갔다. 거문도진이 예정대로 완공되자 조정에서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에 임명하고 그의 선대 3대를 추종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이어 낙안군수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면서 t세금을 줄여주고, 아전들의 폐단을 시정하여 죄 없이는 단 한대의 매질도 하지 못하게 엄히 다스렸다.
이에 감복한 주민들이 사례를 하고 선정비를 세우려 했으나 모두 물리쳤다. 말하자면 명목민관이요, 청백리였던 셈이다.

1890년에는 차례로 군산진, 성당진, 법성포진의 겸관 사관을 겸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무남영우영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자를 모신 사당과 흥학재를 지어 제자들을 모아 한학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가르쳤다.
그럴 즈음 대한제국은 점차 기울어, 1905년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이르자 전국의 선비들이 비분강개 하였고 여기저기 장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임병찬도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크게 실망,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를 옮겨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묘 아래서 시묘살이를 하기로 작정했다.

이때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려 동지를 구하던 참이었다.
최익현은 호남에서는 전주의 전우와 호남의병을 일으키고, 영남에는 거창의 곽종석과 연락하여 영남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난감한 상태였던것이다

결국 인물을 물색중 군사전략에 뛰어나다는 군수출신 임병찬과 연락이 닿게 된것이다 .
최익현은 가묘에나가 조상에게 마지막을 고하였다
가묘는 고려 말 정몽주가 시행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당시는 불교가 성행한 때였으므로 쉽게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사당의 시행이되었다 . 선조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층에 일반화되었고 서인들도 이에 따랐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대청 모퉁이나 기타 적당한 곳에 부설하였다.
사당에는 3 년상을 마친 신주를 모시는데, 옛날에는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을 세워야 했다.

각 위패 마다 제사상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 쌍씩을 놓으며, 제일 높은 조상 앞에는 향상을 놓되 그 위에 향로는 서쪽, 향합은 동쪽에 놓는다.
최익현 은 가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자는 결심이 굳어진 이상 이제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목슴이 아니었다 .

나라가 위급에 처했다고 자살을 택한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을 생각하니 더 마음이 굳어 지었다
1906년 3월 24일 임병찬이  73살의 최익현을 직접 찾아왔다. 이날 임병찬은 최익현을  사제의 의로써 구국의 길에 동참키로 다짐했다.

의병의 봉기는 태인(현재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첫 깃발을 올리기로 하였다
최익현이 임병찬과 함께 포천에서 전라도로 떠나던날 서울을 지나는 길에 대궐에나가  황제에게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라는 마지막 상소를 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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