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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학(17회).jpg

 

"하나 둘 하나 둘 힘차게 뛰어야지."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영원아웃도어 대표)는 가을을 만끽하며 달리는 러너들을 응원했다. 젊은 러너들을 응원할 때면 자상한 어른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옷 가운데 영원무역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의류를 어김없이 가려내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날카로운 최고경영자(CEO)였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국제섬유생산자연맹(ITMF) 회장이기도 한 성기학 회장은 이날 700여 명의 회원과 함께 섬유패션인 걷기 대회에 나섰다. 성 회장은 2시간여 동안 산책을 하면서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성 회장은 이날 한국의 기업인, 영원무역 CEO, 섬산연 회장 그리고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소회를 솔직하게 들려줬다. 1974년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영원무역을 설립한 성기학 회장은 영원아웃도어를 이끌며 국내 아웃도어시장을 개척한 입지전적 기업인이다. 그는 해외 유명 브랜드에 OEM으로 수출하며 영원무역을 매출 2조원대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또한 2014년부터는 섬산연 회장, 이어 올해는 ITMF 회장에 추대돼 국내를 포함한 글로벌 섬유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성 회장은 서울대 무역학과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했다. 산을 사랑했던 그는 가장 좋아하는 산으로 설악산과 지리산을 꼽는다. 학창 시절에는 1년에 두 번씩 등반에 나섰지만 지금은 바쁜 업무 탓에 산을 자주 찾지 못한다. 1년 365일 중 200일 정도는 해외 출장으로 일정이 빼곡하다.

―올해 9월 ITMF 회장 취임으로 세계 섬유업계 수장이 됐다.

▷지난 9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ITMF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돼 2년간 일을 맡게 됐다. ITMF는 1904년 설립된 국제섬유단체로 긴 역사가 있다. 전 세계 30여 개국, 94개 섬유단체 및 기업이 가입돼 있는 글로벌 최대 섬유단체다. 한국 섬유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 섬유산업 중흥을 이끌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섬유 및 의류산업이 어렵다.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려가 많다. 요즘 글로벌 의류 산업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해외 업체들은 초단납기를 요구하고 있다.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데 현재 국내 환경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내년 한국 경제 성장률을 기존보다 0.6%포인트 낮은 2.3%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2.5%보다 더 낮은 수치다. 한국의 경제 상황과 관련해 어두운 전망이 계속 쏟아져 나와 걱정이 크다.

―주52시간 근무제 등으로 기업의 애로사항이 더 커지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은 법으로 강제할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업종 또는 업체마다 자율적으로 시행해야 할 부분이다. 근로자들 중에는 일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이가 많다. 원하는 이들은 일을 더하게 하고 그에 맞는 보상을 하면 된다. 고용주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해 근로자의 권리를 착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국가는 이런 부분을 컨트롤하면 된다.

`사적 자치의 원칙(principle of private autonomy)`이라는 게 있다. 사법상 법률관계는 개인들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책임하에서 규율하고, 국가는 이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계약 자유의 원칙은 시장 경제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지나친 규제와 급격한 변화로 인해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개성공단 진출을 고려하는지.

▷개성공단은 글로벌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경제는 각국이 합의한 무역질서에 맞춰서 움직인다. 국내만 보고 운영하는 기업과 세계를 상대로 운영하는 기업은 개성공단에 대한 접근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글로벌 무역 질서 속에서 각 기업이 본류의 사업을 펼쳐나가는 기준과 판단은 각기 다를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업들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물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깊이 들어가도 감당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얕은 곳에서도 허우적거릴 수 있다.

―지금 기업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한국에서 잘 뛸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 안에서 잘 돼야 밖에 나가서도 잘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에 사업 환경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기업은 한 번 넘어지면 다시 뛰기 힘들다. 주저앉은 기업에 일어나서 다시 뛰어보라고 한들 이미 앞선 경쟁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거기다가 한국은 기업을 죄악시하는 분위기까지 만연해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딸은 대기업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모순된 측면이 있다.

―공장을 자주 찾는다. 이유가 있나.

▷시간이 날 때마다 공장을 방문하려고 한다. 지금 이렇게 잘 걸을 수 있는 것도 공장에 갈 때마다 1만5000보 정도를 걷기 때문에 단련이 된 거다. 평소 제품이 만들어지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본다. 이러다보니 직원들에게 `땀수가 안 맞는다. 밸런스가 틀어졌다, 구김이 생긴다`며 잔소리도 많이 하는 편이다.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새로 만들어 오라는 주문을 종종 한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나름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도전과 디테일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을 때 좋은 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일을 할 때는 처음부터 철저해야 한다. 옷이라는 것은 직물, 염색, 디자인, 가격, 유통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다. 이 중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 때 후원 제품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가장 먼저 후원에 참여했다. 사실 올림픽 후원은 생각보다 마케팅 효과가 크지는 않다. 노스페이스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의류, 모자, 장갑, 신발 등 각종 세트 5만여 개를 지원하는 등 전체적으로 500억원 상당 비용을 썼다. 혹한의 날씨가 걱정이었는데 적어도 옷 때문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거면 된 거다. 당시 회사에서는 연간 1억달러어치 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최고의 팀이 모두 참여했다. 그래서 품질만큼은 자신 있었다. 나는 평소 `거저 주는 물건일수록 좋은 것을 준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수십 년 전에 지인들에게 선물했던 옷을 지금도 온전한 상태로 잘 입고 잘 간직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아웃도어시장이 예전같지 않다. 걱정이 많을 것 같은데.

▷아웃도어시장을 여전히 밝게 본다. 사람들은 아웃도어 의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사실 시장 전체 규모가 줄어든 적이 없다. 유니클로 등 제조·유통 일괄(SPA) 브랜드들이 범용성을 갖춘 아웃도어 의류 제품을 생산하면서 시장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이다. 물론 이 시장에는 경쟁자가 엄청나게 많다. 예전에 없던 경쟁자와 싸워야 하는 새로운 국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양한 업체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추고 나와 시장이 확대되는 건 바람직하다. 나름의 개성과 장점을 갖춘 브랜드들이 나오면 선의의 경쟁이 펼쳐질 수 있다.

―경쟁자로 생각하는 업체나 업종은.

▷이 세상이 경쟁자다. 예전에는 아웃도어 옷을 입고 등산을 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셔츠 한 장을 입고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웃도어의 경쟁자는 동업자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인 것이다. 누군가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스키장을 찾았다고 치자. 그런데 기술이 급변하면서 스마트폰이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다면 스키장의 경쟁자는 스마트폰이 된 것이다.

■ 출근길 아웃도어 패션 볼때 "새 문화 만들었다" 자부심
잠들기 전 스쾃이 건강 비결
고향서 친구 만나는 시간 소중
 

성기학 회장은 지난 10일 카메라를 직접 목에 걸고 나와 가을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며 환하게 웃곤 했다. 등산 외에도 사진 찍기를 취미로 갖고 있는 성 회장은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라며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며 내내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회원들과 함께 손으로 하트를 만들며 추억을 담았다. 카메라 컬렉터이기도 한 그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정밀 기계를 좋아했다"며 "이 작은 카메라에 담겨 있는 다양한 과학적 원리를 보고 있으면 마치 예술의 총체적 결합처럼 보이는데, 섬유나 옷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시간 날 때 즐겨 하는 일은 무엇인가.

▷젊은 시절 캠핑이나 클라이밍을 즐기다보니 최소한의 도구로만 사는 미니멀한 삶에 익숙하다. 일 년에 한두 번 친구들과 함께 고향 창녕 고택에서 만날 때가 참 좋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꼭 가지려고 한다. 요즘엔 자기 전 스?과 봉체조를 꼭 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서너 번 개인 퍼스널 트레이닝(PT)을 꼭 받는다.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운동을 하다 보니 오히려 4~5년 전보다 건강이 더 좋아졌다.

―세 딸이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평소 어떤 부분을 강조하나.

▷세 딸(성시은 영원무역 이사, 성래은 영원무역홀딩스 사장, 성가은 영원아웃도어 상무)에게 평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나의 부친 역시 나에게 별로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일이라는 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눈치껏 살피고 움직여야 한다. 나는 젊은 시절 일하느라 너무 바쁘게 살아서 어린이날에도 아이들을 공장에 데려와 놀게 했다. 아이들이 네 살, 다섯 살밖에 안됐을 때부터 그랬다. 그러다보니 딸들도 어린 시절부터 공장이라는 곳에 익숙해졌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참 힘든 일인데, 딸들이 이를 마다하지 않고 해보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국내 아웃도어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아웃도어 옷을 입고 주말에 산에 가는 모습을 보면 건전한 라이프스타일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또 과거엔 점퍼를 입고 출근하면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이제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고 즐기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옷으로 생활이 다양해지고 쾌적해지고 편안해진 것이다. `입는 것도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기업인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해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성기학 회장은…

△1947년 서울 출생 △1965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1970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4년 영원무역 설립 △1984년 영원무역 대표이사·회장 △1992년 골드윈코리아(현재 영원아웃도어) 설립 △1998년 무역의 날 1억달러 수출의 탑 △2008년 금탑산업훈장 △2014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2018년~ 국제섬유생산자연맹 회장

[이윤재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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