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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987 기사의 0번째 이미지사진설명매일 연구실을 돌며 새로운 것 없냐고 물어보던 최남석 고문은 `Mr. What`s new?`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키운 후배들은 벤처뿐 아니라 대한민국 바이오업계 전반에 중추로 자리 잡았다. 조중명 크리스탈지노믹스 대표, 김용주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대표, 박순재 알테오젠 대표 등 국내 대표 바이오 상장사 창업자들도 그가 발탁한 인재들이다. [한주형 기자]
 

 

[Weekend Interview] 韓 바이오산업의 전설 최남석 박사

 

5년후, 10년후로 미리 가서 깃발 꽂고오듯
늘 미래를 사는 기분으로 바이오 연구했죠
"듀폰도 부러워할 연구소 만들어 K바이오 인재 키워내 뿌듯"

  • 신찬옥 기자
  • 입력 : 2018.09.28 17:08:01  수정 : 2018.09.28 23:36:37
아름드리 저 나무는 누가 심었을까? 수십 년 전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름을 우린 모른다. 다만 그 혜택을 감사히 누릴 뿐이다. 한국 바이오 산업에도 묵묵히 씨를 뿌리고 묘목을 심은 사람이 있다. 국내 바이오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 최남석 전 LG화학 고문(82)이다. 그가 심은 씨앗과 묘목들은 수십 년간 무럭무럭 자라 세계가 주목하는 회사들로 성장했고, 매년 대한민국 미래를 먹여 살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그가 씨앗과 묘목을 심은 토양은 `럭키(현 LG화학)`다. 최 고문 개인의 일생에도, 제약바이오 산업 전체에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행운이라 할 만했다. 수십 년 후를 내다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는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최 고문이 일찌감치 우리 바이오산업을 이끌 인재들을 알아보고 살뜰히 키운 것은 구 명예회장이 먼저 최남석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눈여겨보았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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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고문은 구 명예회장에게 지원받아 아시아 최대 규모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 기술연구원)를 만들었고, 1980년부터 15년간 최장기 민간연구소장을 지내며 최고 인재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줬다. 이후 LG의 바이오 신화는 잠시 막을 내렸지만 이때 퇴사한 LG 출신들이 바이오벤처를 창업하며 연구를 이어갔고 수십 개 기업으로 키우며 최근의 글로벌 바이오 붐을 이끌고 있다. 그가 발탁한 인재들은 LG화학,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SK바이오사이언스, 보령제약, 종근당바이오, 제넥신, 제일약품,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오송·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한국파스퇴르연구소 등 국내 대표 기업과 정부 연구소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LG화학기술연구원 출신 대학교수만 170명이 넘는다. 여든의 노학자는 미리 보낸 질문지를 꼼꼼히 읽고 각각 키워드 서너 개를 스마트폰에 메모해서 인터뷰에 응했다. 달변은 아니었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키워드만 읽어도 완결된 스토리가 나오는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현장을 떠난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후배들이 그를 따르며 `영원한 보스`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돌아보면 늘 미래를 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5년 후, 10년 후에 미리 가서 깃발을 꽂아놓고 왔다고 할까요. 미래를 다녀왔으니 목적지까지 갈 원정대를 꾸려야지요. 능력 있는 인재를 중용해 책임을 맡기고 나면, 잘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이 내 일이었어요. 예나 지금이나 돈만 쓰면서 연구개발에 전념하는 조직을 보는 눈이 곱지는 않으니까요."

지난달 31일 서울 모 호텔에서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준 최 고문의 회고록(`비행기에는 백미러가 없다`) 출판 기념회에는 LG화학 전·현직 임원을 비롯해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바이오업계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크리스탈지노믹스 레고켐바이오 알테오젠 펩트론 폴루스바이오팜 와이바이오로직스 씨엔알리서치 SCM생명과학 스마젠 유디피아 제이앤씨 파이메드바이오 파이안바이오 브릿지바이오 등 국내 대표 바이오 기업이 총출동한 것이다. 이날 참석한 상장·비상장 바이오 벤처들의 시가총액은 LG화학을 제외하고도 2조원이 훌쩍 넘었다. 최 고문은 지나온 삶을 `고뇌와 환희` 두 단어로 요약했다. 오랜 고뇌 끝에는 환희에 찬 짧은 순간이 찾아왔고, 다시 길고 긴 고뇌의 시간이 이어졌지만 환희의 순간을 기억하며 견딜 만했노라고 노학자는 미소 지었다. 무수한 실패도 있었지만 자연공학자였기에 거듭된 실패도 다음 성공의 재료라고 생각했을 뿐 좌절하지 않았다고 했다. 누구의 삶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만 앞만 보고 달려온 그의 여정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마법처럼 이어져 있었다.

―구 명예회장님이 자주 불러 독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녀오실 때마다 사장단과 임원진이 내용을 많이 궁금해했다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당시에는 다들 엄청난 비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요. 사실 비즈니스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요. 회장님은 열 살이나 어린 저를 자연인 대 자연인으로 대해주셨어요. 주말이면 머무르시던 연암축산에 부르셔서 자주 갔는데 요리 이야기도 하고 키우시던 버섯 이야기도 하고 그랬죠.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서 낚시랑 텃밭 농사 경험이 많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묻고 들으시곤 하셨어요.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회장님께서 바이오 사업 진출을 선언하신 건가요.

▷1981년 가을이었지요. 하루는 회장과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하는 그룹 최고경영자회의에 오라고 하셔서 갔습니다. 농담처럼 이제 코끼리만 한 돼지가 나온다, 사람이 200세까지 살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오갔는데, 회장님께서 "유전공학은 럭키에서 하지"라고 한마디 하셨어요. 일순 좌중이 조용해지니 "(구 명예회장님 동생인) 구자학 당시 럭키 사장에게 맡긴다"고 못 박으셨어요. 다들 깜짝 놀랐죠.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파격적인 결단이었지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유전공학이란 `뿌리는 감자, 열매는 토마토` `땅속에는 마늘, 땅 위에는 고추`라고 소개될 때였는데요.

▷최고경영자가 시대 흐름을 읽고 결단한 것이지요. 당시만 해도 유전공학은 `머리`만 있으면 선진국과 경쟁해 볼 수 있는 분야였어요. 고분자화학을 전공한 제가 유전공학팀을 책임지게 되니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불가능에 도전했으니 돌진할 수밖에요.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출범 6개월 만에 균주와 효소 개발을 성공시켰어요. UC버클리대에 있던 김성호 박사와의 인연으로 당시 세계 최고 유전공학 연구 기업이었던 카이론(Chiron)과 기술협력 계약을 맺고, 미국 현지법인 럭키바이오텍(LBC)도 설립했지요.

―회고록에 나오는 당시 럭키중앙연구소의 성과는 놀랍습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허가를 받은 한국 최초의 국제 공인 의약품도 나왔지요.

▷1989년 세계 최초로 유전공학적 암 치료제 `감마 인터페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죠. 1991년 매경이 주는 iR52 장영실상을 처음 받았고, 이후 3년간 상 여섯 개를 받으며 화학 회사로는 최다 수상 기록도 세웠습니다. 1991년 한국형 C형간염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규명했고 간염진단시약을 개발해 승인을 받았고요. 1993년에는 인간성장호르몬 유트로핀을 개발했는데, 우리 바이오 기술로 시장을 선점한 인간성장호르몬은 20년 동안 매출을 1조원 올렸어요.

―`세계 최초` 기록을 쓰면서 신나게 일하시던 시기였네요.

▷신명과 사명감으로 일했죠. LBC 소장을 맡았던 조중명 박사, 김성호 박사와 트리오로 일할 때는 정말 즐거웠어요. 럭키중앙연구소는 시대를 앞서간 곳이에요. 럭키가 민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대덕전문연구단지에 중앙연구소를 세운 것이 1979년 12월입니다. 1984년 미국 현지에서 조 박사가 바이오 신약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김용주 박사가 합성신약 개발에 올인했죠. LG가 못하면 한국에서 신약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소신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새로운 미래 먹거리인 전자재료에 뛰어들었고요. LG에서 내 아이디어를 충분히 발휘해서 일하는 기쁨을 누렸어요. 민간연구소에서 최장기 연구소장을 지내는 동안 크게 간섭도 받지 않았고요. 놀랍고 감사한 일이죠(럭키중앙연구소는 1979년 40여 명의 연구 인력으로 출범해 최 고문이 퇴임하던 1995년에는 30배가 넘는 1161명의 연구개발 인력을 확보했다.)

―우수한 인재들을 초빙해 오고,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덕분이지요.

▷저는 연구소 조직은 최소 10년 단위로 내다보고 연구활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10년 후 먹거리를 마련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장 돈을 못 벌어도 당당하라고요. 물론 이건 내 입장이고 각 사업부에서는 힘들게 번 돈을 쓰기만 하는 연구소장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기업에서 10년 후, 20년 후를 걱정하는 것은 오너뿐이지 임원이나 사장들은 그해 실적에 연연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내가 한 가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비난을 나 혼자 다 받고, 연구원들에게는 일체 내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리더는 자기가 받은 스트레스나 압박을 아랫사람들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원칙이었어요(조중명 박사나 김용주 박사는 LG에서 연구하던 시절을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최 고문님 덕분"이라고 회고했다. 이런 LG연구소의 DNA는 고스란히 국내 바이오벤처 업계로 이어져 10년 이상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80년대에 매년 수차례 해외 출장을 다녔고, 스카우트할 인재 리스트를 품고 가셨다고요.

▷"원하는 대로 연구할 수 있게 해주마"라고 꼬셨지요(웃음). 회사에서 채용을 반대하는 사람도 장점만 보고 뽑았고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박순재·정혜신 박사의 경우도 부부 과학자를 채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실력 있으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밀어붙였어요. 연구소가 정착되고 나서는 석사 연구원들이 해외에 가서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열심히 연구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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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후배들은 여전히 그를 찾아온다. 최 고문과 일했던 많은 후배는 난관에 부딪칠 때면 `최 고문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다며 존경을 보냈다. 평생 함께한 아내와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 평온한 오후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노후`였다. [한주형 기자]
―인재등용 원칙은 무엇이었나요. 잦은 조직개편을 하시고 1992년 당시 파격적이었던 `그룹 리더제`를 도입하셨는데요(그룹리더제 도입으로 LG 연구소에는 직급이 낮은 사람이 리더를 맡고 직급이 높은 사람이 팀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생겼다).

▷연구원들에게 능력에 걸맞은 혜택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난 개인적으로 인센티브를 따지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해외 박사나 서울대·카이스트 출신을 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절대 아닙니다. 오직 열정과 태도, 능력을 보고 뽑았어요. 나는 일을 맡겨봐서 성과를 못 내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지 않았어요. 성과를 내는 사람을 위해서는 없던 자리도 만들어서 올렸고요. 연구소장 당시 저는 두 가지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무엇을 할 것인가? 누가 적임자인가? 바이오테크와 정밀화학과 고분자소재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회고록에는 연구원들을 아껴주신 일화가 많습니다. 연구원들 이름과 소속을 다 외우셨다고 하던데요. 출판 기념회 때는 월급을 털어 연구원들 외상값을 갚아준 이야기가 화제였는데요.

▷`OB 비어킹`이라고 유성에 맥줏집이 있었는데, 우리 연구원들이 술값을 달아놓곤 했어요. 월급날이면 찾아가서 몇 번인가 갚아줬더니, 소문이 나서 오히려 안 달아놓더라고요(웃음). 250명인가 300명까지는 연구원들 이름을 다 외웠습니다. 그 시절 치열하게 연구하고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며 동고동락한 친구들 중 일부가 `골수팬`이 됐고, 은퇴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자주 찾아줘요. 이번 출판 기념회도 한규범 파이안바이오 대표, 박세진 레고켐바이오 부사장 같은 친구들이 애써줬고요. 참 고맙고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소장으로 재직할 당시 연구소 전 층을 돌면서 연구원들에게 "What`s new?"라고 물어서 아예 별명이 되었다고요.

▷어제 봐놓고 오늘 또 "What`s new?"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없습니다" 이래요. 그런데 매일 물으니까 대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내가 마음이 급해서 팀장들을 불러요. 외국 석학들과 나누고 온 이야기, 최신 트렌드 등을 전해주고 숙제를 내줍니다. 김용주 박사 같은 사람들은 당시 제가 부르면 초긴장을 했다고 해요. 너무 어려운 숙제를 내줬나봐요(웃음). 그래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성과를 가져오곤 했어요.

―미국에서 한창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에 고문님은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브루클린 공대는 작은 학교였지만 당시 고분자화학의 창시자 허먼 마크 교수 등 대가들이 모여 있어 이 분야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었어요. 가보니 교토대를 비롯해 도쿄대, 오사카대 등 일본 학생들이 스무 명도 넘어요. 조의환 박사랑 나랑 "일본 애들이 이렇게 많다니 여기 오길 잘했다. 어디 한번 이겨보자"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침 10시에 나가서 실험하다가 집에 와서 저녁 먹고 다시 돌아가서 새벽 1~2시까지 매달리곤 했죠.

―머리 굿맨 교수, 허먼 마크 교수, MIT 교수 앨런 마이클스 박사를 은사로 꼽으셨어요. 세 분 모두 열정적인 한국인 제자를 퍽 예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먼저 문제의 핵심을 찾고 거기 매달리는 학생이었어요. 일찍 가서 장치를 셋업해놓고 기다리는 나를 굿맨 교수가 칭찬하곤 했죠. 굿맨 교수에게는 학문적 가르침 외에도 배운 것이 많아요. 세계의 음식과 와인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고 좋은 식당도 많이 데려가 주셨죠. 나도 교수님께 배운 대로 후배들에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마크 교수는 장비를 잘 다룬다며 `동양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지어줬지요. 활동영역과 업무범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는데,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마이클스 박사는 듀폰 같은 대기업 입사를 생각하고 있던 나를 파메트릭스와 ALZA라는 바이오벤처로 이끈 인물입니다. "What`s new?"라고 묻는 습관도 마이클스 박사에게서 모티브를 얻었죠.

―약물 전달방식을 연구하던 파메트릭스에서 고분자화합물인 `폴리 오르토 에스테르(제품명 ALZAMER)`를 개발한 것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으셨는데요.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최 고문의 목소리가 두 톤쯤 높아졌다.) 정말 짜릿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죠. 고분자화합물이 필요한데 합성물질 중에도 없고 천연물질 중에도 없는 거예요. 새로운 고분자화합물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우고 여섯 가지 요건을 정했어요. 물에 닿기만 하면 분해될 것, 그 물질이 해롭지 않을 것, 오래갈 수 있고 구성성분이 주사 가능한 물질일 것 등이었죠. 그런데 이게 참 어려워서 몇 달간 매달려도 풀리지 않는 겁니다. 어찌나 그 문제에 골몰했던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에도 고뇌에 빠졌어요. 지칠 만도 한데 오기가 생겨요. 그렇게 계속 생각하다 보니 마치 선물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한밤중에 실험실로 달려가 시험해보니 정말 되는 겁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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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오르토 에스테르를 세상에 내놓으신 후에 듀폰 같은 글로벌 기업에서 러브콜이 오고, MIT에서 초빙 요청을 받기도 하셨는데요.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오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미국에서 15년을 공부하다 보니 고국이 그리웠어요. 일생에 남을 큰 프로젝트도 마무리했으니 이쯤 해서 고국에 가서 할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죠. 타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한 아내와 남매를 데리고 KIST로 오게 됐습니다. 계속 연구했다면 아카데미 쪽으로 풀렸을 텐데, 한국으로 돌아와 내가 한 일들을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KIST에서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성과를 내십니다. 당시 선경(현재의 SK)의 위탁을 받아 오디오·비디오 기초소재인 자기기록용 폴리에스터 필름을 개발하셨죠.

▷KIST로 오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구하고 그 성과를 산업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폴리에스터 필름도 그중 하나였고요.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까지 나선 끝에 제 뜻이 관철되었어요. 매년 수천억 원대의 수입 대체효과와 수출 실적을 낼 수 있게 됐다고 선경에서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KIST에서 선경이 아닌 LG 연구소로 이직을 합니다. 안정된 국공립 연구소장 자리를 마다하고 민간 연구소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나는 1970년에도 듀폰이나 유니언 카바이드 같은 대기업을 마다하고 "한번 붙어보자"는 생각으로 벤처를 선택했어요. LG로 간다고 하니까 `돈에 팔려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는 평생 보수나 직급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경에 갔다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세간의 입방아가 싫어 당시 입사를 권유한 선배가 있는 LG를 선택했어요. 이후는 아시는 대로예요.

―미래를 내다보는 남다른 안목은 타고나신 걸까요. 특히 아버님이신 민물고기 학자 최기철 박사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지요. 당시 가부장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사고와 부드러운 인품을 가지고 계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대화가 미래지향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와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잖아요. 초등학생 시절 서울로 올라와서 만난 청계천 뒷골목의 부품상가들은 저의 첫 번째 과학실험실이자 놀이터였습니다. 한쪽에는 개고깃집이 늘어서 있고, 한쪽으로는 전지만 파는 가게, `도란스`만 파는 가게, 라디오 부품만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지요. 여기가 우리나라 전자공학의 시발점이고, 벤처기업의 태동지라고 저는 생각해요.

―회고록 제목이 `비행기에는 백미러가 없다`입니다. 비행기를 몰고 앞만 보고 달려 도착한 곳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저는 후회 없이, 만족스럽게 살았어요. 내가 이루려던 것을 다 이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남겼습니다. LG 연구소는 규모도 규모지만 인력 구성도 이보다 좋을 순 없을 만큼 완벽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듀폰에 입사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는데, 듀폰도 부러워할 만한 연구소를 한국에 만들었으니 뿌듯한 일이지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연구에 임하는 자세를 알려주신다면요.

▷세 가지 자질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 오리지널리티에 충실해라.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져라. 끝까지 밀어붙여라!

―공학도로서, 바이오산업 플레이어로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몇 점을 주시겠어요.

▷공학도로는 치열하게 연구했던 것을 높이 평가해서 80점, 바이오산업 종사자로서 좋은 후배를 많이 배출했으니 80점, 아버지와 남편으로서는 60점을 주겠습니다. 60점 이하면 이혼을 당했을 건데, 아직 잘살고 있는 걸 보면 과락은 면했나 봅니다(웃음).

―일과 연구에 몰두하시다 보니, 아무래도 가족에게는 소홀하셨겠습니다. 회고록에는 가족들을 챙기지 못한 미안함이 묻어나는데요.

▷첫눈에 반한 아내는 이대를 나와 서울대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던 재원이었어요. 나와의 결혼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커리어를 포기하고 저를 뒷바라지하며 두 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죠. 지금도 저는 아내 없이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결정을 다 따라주고 평생의 도전을 응원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 최남석 박사는…

1935년 순천에서 `물고기 박사`로 유명한 최기철 박사와 이복순 여사의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와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방부 과학연구소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2년 미국으로 유학해 브루클린 공대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4년 한국에 돌아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화공연구부장, 고분자연구부장을 지냈다. 1980년 럭키중앙연구소 연구소장으로 시작해 1995년 LG화학 부사장 겸 기술연구원장까지 15년간 최장기 민간 연구소장 기록을 세웠다. 한국 바이오산업을 이끄는 인재들 중 상당수가 최 박사의 제자들이다. 최 박사는 `바이오 인재 사관학교 교장`이라고 불린다. 1999년 퇴임하고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김순복 여사와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최남석(6회).jpg

 



[신찬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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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윤동천(28회) 서울대 미술관 관장 '미니멀 변주'...작가 11명의 회화·조각·설치 소개

    Date2018.10.31 By사무처 Views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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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수필가 오세윤(11회)의 첫 시집과 시조집 출간

    Date2018.10.31 By사무처 Views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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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조현철(19회) 동문 옴니버스 사진전 안내

    Date2018.10.29 By신태건 Views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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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32회) 이양구 동성제약 대표이사 ‘2018 서울특별시 봉사상 시상식’에서 대상수상

    Date2018.10.29 By사무처 Views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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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이희범(19회) 202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평가위원으로 선정

    Date2018.10.22 By사무처 Views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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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이주연(36회) 아이두비 CPO 생생현미 누룽지칩

    Date2018.10.15 By사무처 Views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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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김태식(22회) 전국생활음악대회 출전

    Date2018.10.15 By사무처 Views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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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김종량(20회) 한양대 ' 4차 산업혁명과 인권 ' 심포지엄

    Date2018.10.10 By사무처 Views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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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한상길(28회) 제9회 원주 세계 고판화 문화제

    Date2018.10.08 By사무처 Views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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