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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선조가  총애 하여  세자로 삼으려 하는 시도 때문에  분란이 일어 나자  선조의 마음의 병은 극도로 악화 된다

 

선조의 나이 쉰 다섯 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 대군의 생모 인목 왕후의 나이 스물세 살, 왕세자 광해군의 나이 서른 두 살이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 할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영창대군은 태어나기 전 부터 불운에 찬 삶이 운명지워져질 줄 누구인들 알았을까?

 

후궁 소생인데다가 장남도 아닌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 되어 있는 마당에 광해군 보다 아홉 살 어린 계모 인목왕후(仁穆王后)로부터 적장자인 대군이 태어 났고  적장자의 왕위 승계 여부가 국왕의 정통성에 커다란 흠집을 낼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면 왕세자가 되지 못하는 적장자 대군이 태어 났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파란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607년 10월 9일 선조는 마음의 병이 악화 되어 급기야에는 정신을  잃고 쓸어지었다

이틀후인 10월 11일  겨우 정신이 다시 든 선조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겠다며 유영경, 신흠, 한응인을  부른다 .

그들은 늙어서 낳은  적통의 자식으로서  후계자로 바꾸려 했던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가보다  하고 얼굴을 마주 보며 모두 입시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미 세자로  책봉 되어 있는 광해군을 바라 보면서

" 혼아  , 나의 수명은 다 되었나보다 .부디   너의 동생  영창 대군을 사랑하라 . 그리고  제신들은 들으오 , 내가 죽는 마당에 생각 해 보니   나이 어린 영창대군이  걱정이 된다 . 잘 보호 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미 세자로 책봉 되어 있는  광해군을 과인의 후계로 임명 한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 만장 했던  선조는 세상을 떠난다  

향년 57세

 

선조대왕 .....
그는  임진 왜란시 왜군이 파죽지세로 적이 몰려오자 수도 한성에서  어쩔수 없이 떠날수 밖에 없었다

최근 그 사실을 가지고 왜란 당시 상황은 전적으로  무시한채  그것이 "도망이다"  .아니다  불가피한  "일시적인  대피"였다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후자가 맞는 말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어느 임금이라도  그길을 택할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간과 하고 있다는데 문제가있기 때문이다

 

 선조 대왕을  그 토록 비방하는 그들의 말대로  선조대왕은  과연 당시 백성을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당시 그가   백성을 구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왕이 적에게 항복하여 나라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중국이라는 우방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라를 다시 살려 내어야 했다 

선조가  현명한  국난 극복의 군주라는 것은 바로  그점이었다

 

그는  자기 목슴 하나 구하려고  중국으로 건너 가려 한  비겁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호종 했던  많은 신하들도 역시 그랬다 .

 

사람들은  임진 왜란 당시 상황을  지금의 잣대로  멋대로 평가하고있다

심지어는 당시 선조대의 불가피했던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분노한 백성들이니,  조선의 백성들이  선조대왕이 미워서 자진하여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느니. 경복궁을 불을 지른것도  왜군이아니고  조선 백성들이라는 둥  상식에도 맞지 않는  소리들을 하고있다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인재와 재난이  마치 선조대왕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 하지만 그 근원을  찾자면  그것은  첫째 조선 200면 태평성대를 지내 오던  선조 이전 왕들의 유비무환을   선조에게 물려 주지 않은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애써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당시  왜국은  전국 시대로  눈만 뜨면  칼질과 총질로 나라가 온통 피빗으로 물들어 통일된 에너지의 분출할 탈출구를  찾고있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의  책임을  전적으로 선조대왕에게  떠 넘기는 것은  잘못 되어도  훨씬 잘못 된것이다

 

임진 왜란시 선조대왕 같이 끊질기게  무려 7년여 동안  준비 된  왜군과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이끌고 저항 했던  임금....

 

그의 국난 극복의 정신은 그를 비난하기  보다도  오히려 그를 존경하고 본 받해야 할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부에서는 임진 왜란의  엄청 난 인재와 재난을 가지고  선조대왕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비난들 하지만  선조대왕 자신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말한적이 없다

 

그는  조선 말기 처럼  한일 합방을  당하여 나라를  빼앗긴 임금도 아니었고 대신들도 이완용  같이 나라를 팔아 먹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그토록 당시 나라를 구한  유성롱이나 많은 대신들과  선조대왕을 가지고  그토록 폄하할까 ? 심지어는  그를 향해 욕지거리 까지 하는자 까지  있으니 정말 제 얼굴에 침 배앗기다


선조 대왕이야 말로 의연하고 뚜렷하며 동시에  때로는 물러 날 줄도 알고  때로는  적을 궁지로 몰아 넣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임금이었다 .

뿐만 아니라 자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 질 줄도  알고  하늘의 도움과  의병을 이르킬 정도로  나라를 지키려한 백성에게 공을 돌릴 줄도  아는 큰 그릇을 가진 인물이었다


요즈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임금 선조대왕을 가지고 이상한 잣대로  소설을 써서 그를 평가 하지만  선조대왕은 이순신을  한번도  자신에게 위협적이라고 느낀적이 없다.

 선조대왕은  이순신이 죽자  그 공로를 인정 애통해  했을 뿐만아니라 그에게 큰 벼슬 까지  추가 내렸다 

아울러  후히  장사 까지지 내려 주었고 묘비 까지  임금 묘 수준으로  우대 하였다

 

임진왜란 시 논공  행상표를 보아도  선조가  이순신을  높이 평가 하고 있는 면을 보면 선조대왕이  이순신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수 있다 

 

선무 공신 

 

1등  이순신  (추증 벼슬; 해풍부원군) 

 

       권   율  ( 추증 벼슬; 영가 부원군 )

 

       원   균  (추증 벼슬;  원능군)

 

또  한가지

비난자들은 이순신을  선조가 틈 날 때 마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데 이 사실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

 

역시 비난자들은 선조 대왕과 그 신하들이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인재와 재난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슴을 받쳤던  임진 왜란 당시  우리 선조들을 그렇게  현재의 정치적 이용물로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함부로 폄하 해도  되는 것일까?

 

임진왜란 전후 나라를 위해 목슴을 받친 영령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 해야 할 우리가 ,선조대왕의 책임이 어떻고  이순신 장군이 어떻고 하면서 편가르기나 하는  오늘의 세태는 정말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지키려고  고군 분투한  선조대왕이나   대신 유성룡,  이항복 , 이순신, 권율, 원균 같은 인물들만이   국란 극복을 했다고 생각 하는 것도 큰 과오이다

임진란은 선조대왕 이하 전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극복한  민족의  대승리였기 때문이다

 

 

구한말 일본군들에 의하여   수도 서울에서 왕궁을 포위 당하고도  황제 운운하면서   외교권  군사권 까지  빼앗겼던  임금과  대신들을  선조대왕과 유성룡 ,이항복  같은 인물과  동등하게 비교 하면 안된다 

 일제 36년간을 일본의 노예나 다름 없는 생활를  하게 한 고종 보다도 선조를 더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6.25 사변을  승리로 이끈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싸잡아  비난하기 위한  야비한  인간들의  장난 때문인것이다


생각 하면  선조대왕이야 말로  나라를  구한  구국(救國)의  영웅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 왜란은  선조나, 유성룡 같은 주역들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온백성들이  곳곳에서 의병을  이르켜  왜군이 스스로 물러가게 한  의병들의  공로는 누구라도  이의를  달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임진 왜란 당시 사망한  이순신 원균등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사를 제외한  일반 중요  사망자 명단이다

 

 직명          성명          사망년도       사망 일자

 

예조판서     권극지       선조 25년      4월 28일

유도대장     이양원                           5월 12일

이조 참의    이순인                           8월 7일

한성 판윤    박순원                           8월 4일 

왕자           신성군                           11월 5일

의주 목사    이유청                           5월 29일

호조판서     이성중      선조 26년       7월 7일 

경상 우병사 김   면                           3월 11일

원좌의정     김귀영                           5월 29일

의병장        김   해                           6월 19일

대사성        우성전                           7월 19일

인성 부원군  정철                             12월 18일

검찰사         이산보     선조 27년        4월 30일 

사간           박동현                            4월 17일

좌의정        유홍                              12월 25일

함경감사     윤탁연                            9월 22일

평안조도사  홍세공      선조 31년        7월 1일

함경감사     윤탁연                            9월 22일

 

선조대왕

그는   개인적으로 전란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다가  1608년  2월 1일  승하했다 . 향년 57세 .

한 마디로  선조는  조선의 왕들중  가장 참혹한 조선  최대의 비운의  임금이었다

 

선조의 성격이   괴팍하다느니 ,무능 하다느니  뻔뻔 하다느니 하면서 그를 매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조용한 성격에다가 염치를  알아  매우 겸손 했고  인재를 잘  활용 할 줄 아는 현명한 군주 였다

 

흔히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 할 때는  역사적 전후의  상황과 정확한 맥락을 연관 지어서 설명할수 있어야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일고의 가치 조차도 없는  감정 섞인  말투로  욕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진실을  무시하고  자기의 감정적인 사견(私見)을  마치 진실인것 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수 없다 .

 

오늘날 자기의 정치 이념에 편승하여  국난 극복의  훌륭한 임금을 매도 하려 드는 것은 역사를 바로 보는  정도(正道)거 아니다

 

1592년  4월에  일어 난 임진 왜란을 비유 하자면 조선이라는   땜이 터져 물 바다가 되는  경우이거나 화산이 폭발하여  것잡을수 없는 상황이나 똑같다

200여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역대 조선왕들이 대대로  변변한 군사력을 유지 못한  덕(?)에  선조는   거대한 조선이라는 땜이 터져서  대피하는 상황과  어쩌면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러한 긴급 대피를 가지고 흔히 도망 ,도망하는데  도망이라는 말은 적합치 않은  단어이다

 

도망이라기 보다  대피라는 말이 적함한 단어이다

 

잠시  평양도  좋고   의주라도  좋다 . 

명나라로 도망하려 했다고  그를비난 하는데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일 명나라로  잠시 대피 하였다 한들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극복 하려 하는 의지가 있는한   선조가 자기 땅을 두고  설마  자기 혼자만 살려고 도망이라는 것을  했을 까?

 

왕이라는 상징적인  몸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같은 시절이니 그가 선택한  피난은 그렇게 폄하거나  욕을 해서는 인된다

선조를  까닭없이 미워하는 소설가들은  선조가  피난하는 장면을 그럴듯하게  묘사해 놓고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비난 .원성이 자자하다고 그려대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200여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백성들은  졸지에 당하는 전란에  처음에는  모두  왜적을  피하여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지만 여기 저기서 의병을 이르키어  의주로 임시수도를 옮긴  선조 대왕를  지주로 하여 똘똘 뭉쳐서  국난을 극복한 위대한 백성이되었다

 

백성들이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되었느니  백성들이  분노하여 궁궐에  불을 질렀느니  하는  묘사는  선조를 고의적으로 비방하기 위한   일부 소설 작가들의 글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백성들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은 완전 조작된 거짓이 분명 한것은 당시 졸지에 당한 난리에  피난하기에 바삣던 사람들이  언제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구한말 조선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후에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 36년 동안이 임진왜란과 다른 것은  일제는 조직적으로  장기간  조선 밀정을 양성하여  식민지 통치를 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앞잡이 한사 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땜이 터저서 대피 하기에 것 잡을수 없는  백성들이 어떻게 앞 잡이를 했다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허구성으로  선악을 대치 시켜서  소설을 쓰는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장난 같은 글을 믿고  마치 선조가  도망이나 다니는  비겁한 인간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않다

 

더구나   선조가  피난을 갈때  파주땅 고개 마루에서  서울이  불빛을 보고  저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화난 백성들이  궁권에 불을 질렀다고 당파 싸움으로  조선왕조 실록을  수정 실록으로 바꾼 당파 싸움의  왜곡된 글을  소설가들이 자주 인용 하여 쓰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경복궁이 불탔다는  내용은  선조 실록에는 "불이  났다" 이렇게만 쓰여 있었다  

 

그런데 선조 수정 실록서는 왕실과 조정이 서울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도성이 불탔다’ 라고  멋대로 고친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실롯 원본 선조실록에서는 ( 5월 3일자 기록) 왜군의 동태를 기술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다’고 만 되어 있다

 

경복궁 화재의 시점과 원인에 대해  이와같이 엇갈린 기록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선조실록을 쓴 사람들이  동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시기한  서인들이  정권을 바뀐 뒤  선조수정 실록이라는 것을 써서  당시 임금을 모시고 전란을 이겨 낸  영의정 유성룡등 동인들을 시기하여 만들어 낸 조작이었다

 

 가령 선조 실록이나  선조 수정실록을  액면그대로 받아 들이기로 하자  그리고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조선시대  요사이 모양으로  직업적으로  하는 (?) 데모 꾼도 있는 것도아니고  조직적인 반대 정치 세력도  없어 백성들은   대피하기도 바쁜데  어느 누가 저희 나라 왕궁에 불을 지른다는 말인가? 

 

소설을  재미 있게  하기위 하여  허구로  구성했 다면  그럴수도 있다 하겠지만  그것도  엉터리 같은 구성이다

 

궁성을 성난 군중이 불을  질었다는  묘사가  거짓인것은  임진왜란시  서울에 제일 먼저 입성한  일본 장수가  전쟁이 끝난후 귀국하여 쓴 수기에서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하고있다

 

 

당시 일본 장수 "오제키"의 <조선정벌기> 5월 3일자 글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휘하 장수였던 오제키 사다스케(大關定祐)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

 

* 5월 3일 술시(戌時)에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金殿)이 늘어선 기와집과 넓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의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했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4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비로소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 진시황의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하고, 신성하며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소오스시마ㆍ아리마ㆍ오무라도 그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라고 적혀 있어, 왜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궁궐이 보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상황과 문헌 자료에 근거해 볼 때  경복궁 화재의 원인은 조선 백성들에 의한것이  아니라 왜군에게서 찾는 것이 맞는말일것이다 .

선조가  파주 고개마루에서 본 불빛은 이미  왜군이 들어 온후 왜군이 저지른 방화의 불빛이 분명 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선조 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에  나타난  오늘날  정치판 싸움 같은 인물평

 

유성룡 인물평

 

"유성룡은  좁고 굳세지 못해 이해가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못했다.…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선조실록>

 유성룡을 선조실록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선조수정실록)

 

윤두수 인물평

윤두수는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비루한 사내다.”(<선조실록>)

 “윤두수는 사신이 허위로 날조해서 모함하느라 급급했다.”(<선조수정실록>)

 

정철 인물평

“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되어…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선조실록>)

 “정철은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승 노릇을 1년 남짓 했고,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선조수정실록>)

 

이이첨  인물평

“정언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선조실록>)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선조수정실록>)

 

기자현 인물평

“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선조실록>)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를 칭찬했으니 주벌(誅罰)을 가해도 모자라다.”(<선조수정실록>)

 

선조~광해군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물평이다.

이토록  실록과 수정실록이  다르다

 

 <선조실록>은 류성룡과 윤두수, 정철을 부족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폄훼했지만, <선조수정실록>은 “그것은 전적으로 <선조실록>을 쓴 사관들의 잘못된 서술”이라면서 긍정평가를 내렸다.

또 <선조실록>이 ‘좋은 사람들’이라 극구 칭찬했던 인물들을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스스로 역사를 포장하려 했던 파렴치한’이라 손가락질 하고 있다.

심지어 주벌을 가해도 시원치않다고까지 저주했다.

 

왜 그랬을 까?

1623년(인조 1년) 지사 이정귀가 광해군대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대북파인 기자헌과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찬술한 <선조실록>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년)부터 이항복과 이정구, 신흠 등이 편찬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됐다.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이정구가 주장한 ‘적신의 괴수’란 바로 대북파 기자헌과 이이첨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수정작업에 나선 것이다.

 

사초를 잃어 임금의 행적에 따라 서술할 수 없지만 신하들의 <열전> 형식을 통해서라도 <실록>을 편찬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편법이 아닐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에 따른 대북파의 몰락으로 수정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가 직접 원인이 됐지만, 사실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서술이 <수정실록> 편찬의 빌미가 됐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대북 정권의 입맛대로 자파는 자화자찬하고, 다른 파에 대해서는 비방을 일삼는 서술로 일관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당파성을 띄면서도  당파성이 없는 인물 들인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이덕형·이현영 같은 인물들과, 류성룡·정구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이항복·윤두수·신흠·이정귀와 김상헌 등을 닥치는 대로 비방했다.

 

하지만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치않은 작업이었다.

이정귀 등의 상소로 추진됐지만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병란이 겹치는 바람에 지지부진했다.

 

결국 <선조 수정실록> 편찬은  이식의 상소로 시작됐다

 

이식(李植)은 광해군 2년에 과거에 급제 하여선전관으로 있을 때 였다 

 선조가 죽으면서  동생을 잘  돌봐주라는 부탁에도 불구 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배다른 동생인  영창을  서인(庶人)으로  만든 것 까지는 좋은데  그를 강화에 위리안치 시킨후 이듬해 살해당하는 사건 이발생하였다 .

 

 이이첨등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 까지  폐모론을 내세워 서궁(西)에 유폐시킨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西人)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훗날 결국 서인(西人) 주도의 반정()에 의해  광헤군은 폐위 당하기는 했다

 

당시 서인들에 의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식은  광해군과  이이첨등  대북파들의 꼴울 보기 싫다하여  대북파들 농간에 동생 까지 죽이고 인목대비 까지 유폐시키는 것에 분개  이를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버리고  양평으로 낙향한다 

 

 

광해군은  자기의  행동에 반발하는  이식에게  벼슬을  줄것이니 다시 조정에 나오라고 회유 했으나  나오지 않자 광해군은 왕명을 어겼다 하여 구속시키 까지 했다

 

결국  인조 반정에 의해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후에야 이식은 인조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벼슬을 하기 시작한다

이조 좌랑, 참의 , 동부 승지 ,우참찬, 대사간, 예조 참판등이  서인들과  광해군이 없는 인조에게서 받은 그의  벼슬이었다 

 

인조  20년 병자 호란때 였다

남한산성에 피난했던  인조가 청나라군대로 부터  포위를 당하자 인조는 저들에게 잡히면  죽을 가봐 겁을 먹고있었다 .

여기서도 고질적인 당파 싸움이 시작되는데 청나라의 항복요구를 들어주자는  주화파(主和派)대신들과  임진 왜란때  선조를 구해준  명나라의 적국인  청나라를  인정할수 없다는  척화파(斥和派)들간에  대립하게 된다

 

인조는 주화파 대신들이 청나라에 항복만 하면  왕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솔깃하여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  서쪽문을  걸어  나와  지금의 송파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3번   절을 하고 절할때 마다  땅에 세번의이마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仇叩頭 )를  행한다

 

목슴을 구걸한   인조는   창경궁으로 돌아갈수 있었으나  남한산성을 지키겠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군인들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두손을  포승줄로 묶인채로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 갔다

 

 항복의  대가는 이것으로 끝나지않았다

청나라 황제는 조선의 이쁜 여자만을  부인이고 처녀이고 상관 없이  80여명을  골라  청나라로 데려 가겠으니  차출하라고 명령한다 

 

 인조는  처음,천한 여자들만을 골라 보내려 했지만  청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 자기들 군사들을 시켜 여염집 까기 가택 수색을 하여   예쁜 여자들을 골라 내었는데  사대부 부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  청나라  관리들의 첨으로 되거나  노리개 감으로 변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항복이라는 것은  이만큼 무서운 것이다

끝까지  저항하여 왜군을 몰아냈던 선조와 비교 하면  인조는  정말   한심한 임금이었다

 

 중국 심양으로  끌려간 여인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첩이나  노리개로 변했지만  도중에  도망친 여자들도 있 는 여인도 있었고  늙어서 쓸모 없는 여인은 조선으로 돌려 보낸 여자들도 있었지만 고국이라고 돌아오면 환영할줄로 말았는데  현실은  생판 딴판이었다

 

중국에서  서울 까지 1800여리를 돌아왔는데  이여인들을 따뜻이 맞어 주기는 커녕 " 화냥년" 이라는 멸시  일까지벌어지었다

화냥년이란  한때 바람피운 여인을 두고  부르는 대명사 처럼 유행한적이있었는데 화냥년이라는  한자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온말로서 고향으로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자라는  뜻인데  최근 까지도 그 낱말이남아있다

 

 

 

 인조가  여자를 지켜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자들을  공출하여  받친  정말 한심한  임금이었다는 것은  아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있을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기전 마음이 착잡했다

 

왜  선조임금  모양으로  일시 피하여 결사 항전이라도  못했던가  그러나 때는 늦었다 .

청나라 군대가 남한 산성을  포위하여 쥐새끼 하나  빠저 나갈 구멍을  남기지않고있기 때문이었다

결사 항전하다가  죽는다?

 

인조는  여기 까지  생각 해보았다

 

그러면  조선의  백성들은?

이렇게 되는 경우  종묘사직 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주 없어진다

 

여기 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였다

 

영의정 김류에게 묻는다

" 영상 어찌하면 좋겠소"
".............................. "
" 요구 조건이 무엇이오?"
" 명과 화친을 중단하고 자기들은 중원의  황제이니, 전하가 신하 예로   항복을 하면 전하나  대신들의목슴은  살려주겠답니다 "
"목슴은 사려 준다고?"
".........................."

" 대신  조선은  황제의  명령을 무엇이든지  들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 쯧쯧 ...어찌 이런일이......"

"전하 저자들이  항복을 안하면 이 남한산성을 쑥대밭을 만들고 말겠답니다 . 일단 항복하시는 것이 .... 한가지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상헌등  10명의  대신들을   청나로 끌고가겠다는 것입니다 "
".................."

 

결국  인조는  항복을 하게 되었고  김상헌등  10명은  청나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바람에  척화파대신으로  지목된  이식도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심양()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이후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그후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 5천을 보내달라고  하자 그는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내세워 반대했다.

 

 

이식은 광해군을 끝까지 싫어 했다

 이어 광해군이 싫으니  선조 까지  싫어 지었다  

특히 . 그는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을  감싸고 도는  영의정 이이첨을   더 증오 했다 .

 

이유는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고 .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으며. 폐모론을 주장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것 때문에  반대를 하던 대신들 편에 들었다가 사표를 내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던 그를  광해군이 조정에나오라고 압박을 하는것을 끝까지 거부 하자   어명 불복죄로 감옥살이 까지  했던 과거의  분풀이를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는  인조반정후  보라는 듯이  개선 장군 처럼  인조 밑에서 광해군과 선조 , 그리고 대북파 세력을 깎아내리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하여  최후로 " 선조  실록"을  불실하다는 명목을 붙여 소위 선조수정 실록이라는  조선 왕조 실록 역사상 볼수 그 유래를  없는 "수정" 실록에 손을 댄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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