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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군수 손병호는 형세가 위급함을 알고 급히  광주 관찰사 이도재 에게  구원을 요청 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그것도 믿을 수 없자  전주 관찰사 한진창 에게도 구원을 청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편지를 전달하려고 출발한 사자가 의병들에게 붙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전국 각지에 뿌린 격문을  이도재와  한진창도  받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주와  광주의 관찰사들이 몰라서 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격문 내용을 볼때  공격 대상이 일본군과  이지용등 반역 대신들 이었지  임금과 자기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태인으로  처들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태인 군수 손병호는  곧 애첩과  가족을  광주로  피난시키고 태인 동헌 뒷산에 올라 무성서원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

 태인 군수 산하 병사들 이라야 30 명에 불과 한 지라 감히  대적 할수 없음을 알고 있는 손병호는  구원병이 광주나  전주에서 오기를 기다렸으나  편지 자체가 전달이 되지 않은 편지이니  두 곳에서 반응이 있을 턱이 없었다 .


태인 군수 관하 군관이 보다 못하여  손병호에게  태인을 사수 하자고 하였으나  손병호는
"병사를 경솔히 움직일수 없다 .조금 기다리라"
하는 핑계로 듣지 않았다
약장 밑에는 강졸이 없는 법이다 .
30 여명의 군졸들은 손병호의 태도가 애매하자  아예 자기 가족을 챙기러 도망치거나 슬그머니 사라지는 자가 속출 하였다 .


새까맣게  몰려 오는 의병들이  태인읍을  무혈 입성하고 있었다
손병호는 도방 할 준비를 갖추고  그래도 뒷날 책망을 두려워함인지 서울로 사람을 놓아
" 태인읍에는 도적들의 깃발로 가득 찼으니 도적들에게 함락 될 듯 하나이다 "
하는 장계를 띄우고 광주 쪽으로 도망하였다 .


최익현 의병이  태인읍에 들어 서자  그동안  손병호의 학정에  숨 죽이고 살던 백성들이 나와 최익현의 창의군이 대오를 지어 보무도 당당히  태인읍으로 들어 가는 연도에는 백성들이 환영하였다 ,

최익현은  태인읍에 들어 서자 우선  태인읍을 점령 한 뜻을 고 하고자 문묘(文廟)에 나가  부득이하게  창의를 하게 된 사유를  고한 다음  명륜당에 들려 좌정하고  있자  그 모습에  감동 된 태인읍의 장정들이 속속 의병에 자진  참가 의사를 밝히었다 .


온 고을이  흔연히 호응하여  의병에 참가 하는자가  줄을 잇게 된 것이다 .
최익현은  손병호를 따르지 않고  그를 따르기로 한 향장(鄕長) 과 서기를 불러 총, 칼, 탄환등이 있는 무기고를  거두어 들이게 하고  임병찬에게  태인읍을 철저히 경계 하라는  지시와  함께 성을 순시케하였다 .
그리고 최익현은 일본 정부에 보내는 열 여섯 가지 일본의 큰 죄를  묻는 기나 긴글을 쓰기 시작 하였다

 

 일본 정부에 고 하는  글 

 

무릇  나라에 충성 하고 인간을 사랑 하는 것을  사람이나 사물의 본 바탕 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를 지키는 것을  도(道)라한다.
 아!  사람이 이런 본 바탕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은 것이나 마찬 가지이고  , 나라가 도(道)가 없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마련이다 .

나를 보고 완고한  보수 주의자 라고 할지 모르지만  비록 개화 하고 경쟁 한다는  선진 각국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바탕과 도를 저 버리는 나라는 역시 세계 속에  같은 대열에 끼일 수 없을 것이라 믿는바이다.

지나간 병자년에 귀국 사신 흑전 청륭(黑田淸隆)이 와서 통상을 간청 할 적에 나 익현은  그대들의 무례함을 배척하는 소장을 올려 항거 하였었다.


나  익현도 그 당시에 이웃 나라와 교제하여 서로 인사를 닦는 것이 아름다운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귀국의 정상을 익현이 유독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걱정하여 말 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는 이미 예전과 달라져서 동으로 뻗치는 서방의  세력을 혼자 힘으로는 막아 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한국· 청국·일본 세나라가 서로 수레의 덧방 나무와 바퀴 처럼 또는 입술과 잇빨 처럼  되어야 동양의 대국을 보전 하게 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도 족히 알 것이며, 익현도 역시 이리 되기를 심히 바라는 터이었다.


나는 그동안   귀국을 반드시 미덥게 여기지는 않고  양국의 화기를 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20 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세상 일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야 귀국에서 하는 짓이 신의도 없고 의리도 없음을 보고 비로소 나의 예측이 심히 어긋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았고, 또 귀국이 지금은 비록 강대하나 나중에는 반드시 망하며 동양의 화는 그칠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먼저 귀국의 신의를 버리고 의리를 저바린 죄를 말 하고, 다음으로 귀국이 반드시 망할 것과 동양의 화는 그칠 때가 없는 그 연유를 말하기로 한다.

익현은 삼가 뒤져 보건대 우리나라 개국 사백팔십오년인 병자년에 우리 정부 대관 신헌·윤자승이 귀국 사신 흑전 청륭·정상형(井上馨)과 더불어 우리 강화부에 모여 맹약을 체결 한바 있었다


 그 제1조에 ‘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하였으니 이 뒤로 화친을 실현코자 할 적에는 피차 동등의 예로서 서로 대우하며, 털끝 만큼도 한계를 넘어서는 안되니 마땅히 먼저 종전처럼 우호에 장애가 되는 여러 규례를 일체 개혁 제거하여 영원히 신봉토록 하자.’
하였다.

 

또 을미년에 청국 사신 이홍장이 귀국 사신 이등박문과 더불어 마관에 모여 맹약을 체결했다 ,
그 제1조에서  귀국은  ‘조선의 자주 독립을 두 나라가 인정한 이상 털 끝 만큼이라도조선을  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고 귀국 명치(明治) 37 년 일·러시아 선전 포고에도 역시 ‘한국· 청국·두나라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게 한다.’는 귀절이 들어 있었다.

 

 또 귀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국제 공법을 위반 했다 하여 각국 에 통첩한 변명서(辨明書)에도 역시 ‘원래 한국은 독립 국가이니 그 주권을 유지하게 하자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하였다 ,
 또 사신을 서구에 파견 하여 전쟁의 기인을 설명 할 적에도 역시 ‘한국 독립을 공고 하게 하자는 것이다.’ 하였다.

 

이로  본다면 전후 30 년 사이에 무릇 귀국의 임금과 신하가 우리나라와 굳게 맹서하고 만천하에 성명한 것이 결국 우리 토지와 민족을 침략 하지 않고, 우리 독립과 자주를 박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부하고 나서지 않았는가.

 이에 따라 천하 각국에서도 역시 한국·일본 두 나라는 입술과 잇빨 의 입장이 되어 서로 보호 하고 서로 유지하며 피차 침략과 박해 같은 것은 전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었는가.


그러나 귀국은 우리나라에 있어 흉계를 꾸미고 포학을 부리는 것이 날로 더하고 달로 더하여 급기야 약속을 위반하고 도의를 저바리어 잘한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지난 날 외치던 ‘조선국은 자주 독립 국가로 일본과 더불어 평등권을 보유한다.’ 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니  오늘 날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한짓이 아니었는가?

 

지난 날 러시아와 서로 싸울 적에는 ‘한국의 토지와 독립과 주권을 공고하게 하자는 것이다.’하였는데 오늘날 어찌해서 귀국은 우리는 한국의 토지와 독립과 주권을 빼앗았으며, 지난 날에는 ‘서로 침략과 월권(越權)과 시기를 하지 않겠다.’고 거듭거듭 굳게 다짐했는데, 지금에는 전혀 침해와 약탈만을 일삼아 우리 2 천만 민족의 복수심을 불러일으켜 모두 동쪽을 향해 앉지도 않게 만들었는가?

 

 지난날에는 체결된 조약은 절대 변경 하지 않고 영원히 신봉하며 영원히 서로 편안 할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는데, 지금에는 조약을 변경하여 신봉하지 않고 서로 편안 하지도 않으니 이는 하늘을 속이고 신명을 속이고 또 천하 만국을 속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 익현은 그대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저 한다  
지난 갑신년에는 죽첨진일랑(竹添 進一郞)이 변관을 꾸며 우리 황제를 협박하고 우리 재상들을 죽였으니 맹약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가 첫번째요,

 

 지난 갑오년에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난을 꾸며 우리 궁궐을 불태우고 우리 재물을 약탈하고 우리제도와 문물을 폐기시키었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독립 국가라고 떠들면서  다른 날 우리나라를 나라를 빼앗을 기틀을 만들려고 한  흉계가 들어 났으니  약속을 어기고 도의를 저버린 죄가 있으니, 이것이 두번째요.

 

을미년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변을 꾸며 우리 국모를 시해케 하여 천하 만고에 없는 대역죄를 짓고서도 시해범에 대한 모든 것을 숨기기 만하고 도망 간 그 도적을 한 놈도 잡아 보내 주지 않았으니 그 살인범놈들의 대역 무도한 행동은 한갓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가 한이 없거늘  이것이 세번째 죄요,

 

 임권조(林權助)·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협박하고 약탈한 일은 이루 헤일 수 없거니와 그 중 가장 큰 것을 말 하자면 각처 철도의 부설에 있어 경의선 철도는 당초에 알리지도 않고  제 마음 대로 만들었으며, 어장·산림·삼포(蔘圃)·광산·항해 등 무릇 한 나라의 재원이 되는 큰 이권은 모두 남김 없이 우리로 부터  빼앗았으니 이 역시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 죄가 네번째이다.

 

그 뿐이랴 군사상 필요 하다는 명칭하에 남의 토지를 강제로 점령하고 백성을 침해 하며 무덤을 파내고 가옥을 헐어 버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정부에  개혁 운운하며 우리 조정에  개혁을 권고한다 해놓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비루하고 패악한 무리를 추천하여  개혁 세력이라며 벼슬을 주라고 강청하며,  부패 척결이니  어쩌니하면서 뇌물은  더욱  성행하여 추한 소문이 낭자하니 그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그 죄가 다섯번째이다.

 

철도·토지·와 군사 작전 관계에 있어서도  전쟁 시기에 있어서는 혹시 군용을 빙자하고 사용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철도를 우리나라에돌려 줄 생각을 하려 들지 아니하며 토지를 여전히 점령하고 군사작전을 빙자  여전히 내놓지않으니  이 역시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가 그 여섯번째 아닌가? 

 

일본은 우리나라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꼬여 의정서(議定書)를 만들면서  우리 국권을 줄어 들게 하고  의정서 내용에다 가는  우리의  독립과 영토 보전 같은 것은 아예 논하지 않았으니 이 역시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버린 죄목이 그 일곱번째 아닌가? 

 

 우리나라의 벼슬아치나 선비들이 최근  상소하는것은 모두 제가 제 임금에게 고하고 제 나라에 충성하자는  것인데,  그대들은 왜 우리나라 사람을 포박을 가하여 오래도록 가두어 두고 놓아 주지 않는가?  이것은 충신의 입을 막고 공론을 억압하여 오직 우리 국력이 세계에 떨치게 될까 두려워서가 아닌가? 이것이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버린 죄가 그 여덟번째이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일본에 아부 하는자들을 회유하여  일진회(一進會)같은것을  만들어 그들로 앞잡이를 삼고 또 그들을 교사하여 선언서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공론이라 칭하였을뿐만아니라  우리 스스로 국민 된 의무를 다하고자 만든  보안회(保安會)나 유약소(儒約所) 같은 것은 치안을 방해 한다 하고  몰아 부쳐 우리 지사들을 포박하고 구속하니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가 그 아홉번째이다.

 

 일본은 노동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강제로 역부를 모집하여 소 부리듯 돼지 몰 듯 하였을 뿐 만 아니라 , 조금 만 뜻에 맞지 않으면 선뜻 죽여 버리되 마치 풀을 베듯이 하지 않았는가?, 또 우매한 백성을 꼬여다가 몰래 멕시코에다 팔아버리고  그것도 멕시코로가는 배에서  아비가 아들을  팔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우리 백성의 부자 형제로 하여금 서로 원한 품고 원수를 알고도 서로를 알리지 못하게 하며, 멕시코에서 학대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도 돌려 보내지 않았다니 이는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목이 그 열번째이다.

 

또 위의 중추기관인 전신국·우편국을 강탈하여 일본이 자유로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버린 죄 그 열 한번째이다.

 

또 강제로  일본 고문관을 우리나라 각 부에 두어 스스로 후한 봉급을 받아 먹으면서 우리를 망치고 우리를 무너뜨릴 일만 하였는데, 그 중에도 군인과 경찰에게는 특혜를 주었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재정에 대한  세금 제도를 예를 들더라도   개혁한다는  구실하에 세율을 두배 세배로 올려  저희들 마음대로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이니 그 열두번째이다.

 

그뿐이랴  일본은 강제로 차관(借款)을 일본에서 들여와  재정을 정리 하였다지만 새로 만든 돈의 색과 질의 경중이 구화와 별로 다를 것이 없고, 다만 그 돈 수효만 배로 늘렸을 따름인즉 스스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한 나라의 재정을 고갈 시키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유통하지도 못할 종이 쪽지에다   조선 은행 돈이라며  억지로 ‘원’이다 ‘화’다 이름 붙이고 , 게다가  우리나라 재정을  개혁 한답시고  일본에서 헛 이름만  학식과 기술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우리나라에 초빙형식으로 들어와서 후한 봉급만을 받아 먹고 있으니 이것은  개혁 개혁 떠들면서 우리 생생한 피를 또한 빨아먹고 빈 껍질만 남기자는 수작이라, 이 또한 야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 그 열세번째 죄가 아닌가?.

 

또 작년 10월 21일 밤에는 이등박문과 임권조·장곡천호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 대궐 안에 들어와 안팎으로 에워싸고 정부를 위협하여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이 스스로 가(可)자와 부(否)자를 써 놓고 우리나라 대신들의 도장을 빼앗아 마음대로 찍어서 우리 외교권을 뺏어다가 자기들의 통감부에 두어 우리 자주 독립의 권리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게 하였다.
 그러하고도 오히려 우리나라를 위협한 사실을 숨기려고  세계 이목을 가리려 드니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 그 열네번째이다.

 

처음에는 다만 외교를 감독 한다 하더니 나중에는 우리 나라의 정치와 법 집행을 일본  마음대로 하더니 이번에는  일본에서 데려온 소속 관리를 많이 두어 우리로 하여금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걸핏하면 바로 공갈협박이나 하니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죄목의 그 열다섯번째이다.

 

   근자에 또 이민(移民)하는 규례를 만들어 인정하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에  강청 한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 이것은 바로  우리 4 천년 동안 살아온 터전을 우리 조선 인종을 바꾸어 버리려는 음모를 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도 이 땅에 남아 있게 하지 않으려는 음모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야 말로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바린 것으로서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극악한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큰 죄 그 열 여섯번째이다.
 
아! 약속을 위배하고 도의를 저버린 귀국의 죄가 어찌 이것뿐이랴

특별히 그 대략만 들어 말한 것이다.

 이 열 몇 가지 죄와   그대들이  각국과 맺은 강화도 조약·,마관 등 조약,등을 비교해보면  그대들이  여우처럼  세계 각국과 우리를 속이는것이  다람쥐 처럼 간사한 것과 무엇이다르랴?
그대들은  과연 우리 백성들이 일본이 우리를  지지해 주고 우리를 튼튼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겠는가?.

 

귀국은 매양 우리 황상 폐하께서 지난 날 아관파천(俄館播遷)하신 것을 들어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때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명성황후께서  흉한 화를 당 하셨을때 밤낮으로 놀라시고 두려워하시는 마음이 과연 어떠 하시었었나를  손톱 만큼이라도 생각해 보았었나 말이다

 

더더구나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등 역적의 무리가 일본의 세력을 빙자하여 우리 황상으로 하여금 수족을 마음대로 못 놀리게 하였으니  우리 황제께서는 어느 때에 다시 어떤 화가 있을지 모르는데 어찌 앉아서 그 변을 기다리며고 앉아 계시었겠는가? 
 을미년 12원 28일의 러시아 공관으로 피할수 밖에  없었던것은 만부득이 한 데서 나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러시아  공관으로 갈 수 밖에 없게 된 사태도 역시 귀국의에게도  어느정도  책임이있는바 어찌하여 오히려 우리에게 유감을 둔 단 말인가.

그러나 동양의 대세로 보아서 지난 날 귀국이 러시아와 싸울 적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귀국의 군사를 환영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인데, 급기야 귀국이 전승하고 돌아와서는 오히려  그대들은 더욱 흉포하여 우리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어육의 참화를 면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가령 러시아가  귀국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동양이 러시아에 먹혀들었더라도  지금 우리 나라가  귀국으로 부터 받는  핍박이 그보다 더 할수 있겠는가?

 

아 ,지금 우리나라 백성들은 앞으로 모두 반드시 죽거나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제우리 백성들은 죽고망한 거나 마찬가지가아니겠는가?.

비록 우리가 그대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어 압박을 달게 받는다하더라도  마침내 우리가 죽고 나라가  망함을 면치 못한다면  어찌 주먹을 한 번 휘두르고 소리를 한 번 외칠 용기가 없겠는가.

 어찌 원수 나라에게 달갑게 노예가 되어 하루의 생명을 연장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러시아가 귀국에 대한 원한을 잊을 리 없으니 조만간 동쪽으로 몰아치는 행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천하 사람이 다 말하는 바이니, 이 때를 당해서 비록 우리 동양3국이 똘똘 뭉쳐 각기 완전한 힘을 기른다 해도 오히려 보존하지 못할까 걱정 되는데 하물며 우리 동양3국이 서로 시기하고 서로 원망하는 한 집안 끼리 적대시 하는 행동을 면치 못하면서 서구 각국을 억제하려는 귀국의 경솔하고 천박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아. 이래도 전혀 자기 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귀국의 태도를 보고 만 있으란 말인가.
귀국이  분별 없는 행동을 계속 한다면  귀국의 멸망은 멀지 않을것이며 동양 전체가 아울러 망하는 화도 얼마 안 가서 닥쳐 올 것이니, 이는 귀국이 또 어찌  동양에 화를 끼친 죄를 면하려하는가.
 나는 이 때문에 지금은 귀국이 비록 강하기는 하지만 종당에는 반드시 망하며 동양의 화도 그칠 때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진실로 귀국을 위해 말한다면 빨리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으며, 근본으로 돌아 가는 길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고 도의를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을 지키고 도의를 밝히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빨리 이 글월을 귀국 황제께 올리어, 위에 열거한 열여섯가지 큰 죄를 모두 뉘우치고 개혁하여 통감부를 철회하고, 고문 및 사령관을 소환하고, 다시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을 파견하여 공사로 삼으며, 또한 각국에 사죄하여 우리 독립 자주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게 하여 두 나라로 하여금 과연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한다면 귀국도 태평의 복을 누릴 것이며, 동양의 대국도 역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는 날이면 착한 자에게 복을 주는것이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주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하늘의 이치다.


익현은 비록 시국 형편은 잘 모르지만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약속을 지키고 도의를 밝히는 길에 있어서는 학문에 익숙한지라, 국가와 민족의 화가 궁극에 닥친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니, 오직 죽지 못해 한이 된 적이 오래였다.
불행히 지난 봄 치욕을 당하던 날에 죽지 못하고 또 지난 10월 21일의 변고를 보게 되니 남의 나라의 노예가 되어 구차히 살 수는 없다고 생각 되었다 

 그래서 곧 수십 명의 동지와 더불어 함께 죽기로 결단한 바 장차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가 이등박문·장곡천호도 등과 한 번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나 다하고 죽을 작정이며, 또 선비로서 나와 함께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거병하였다


이에 먼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털어 내어 이 글을 만들어서 귀국 공사관에 부송하여 조만간 귀국 정부에 전달하게 하자는 것이니, 대개 우리나라를 위해 이러는 것만 아니라 역시 귀국을 위해서도 이러는 것이며, 귀국을 위해 이러는 것만 아니라 역시 동양 전체를 위해 이러는 것이다. 재고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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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07Aug

    勉庵 崔益鉉 (139) -救國 戰線-

    Date2017.08.07 By권영환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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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03Aug

    Now everybody calls me "Professor Sung" ㅎㅎ

    Date2017.08.03 By성광필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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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1Aug

    또다시 교수님 소리를 학생들로 부터 듣게 됬다.

    Date2017.08.01 By성광필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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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30Jul

    금강산

    Date2017.07.30 By성광필 Reply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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