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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_앞_명성황후_국장행렬-1897[1].gif

 

 

대한제국,
일본이 전방위로 한국을 압박 해 오고 있는데  고종은 태자비 간택 문제로  처녀들 결혼을 일시 중단하는 간택령을 내려 놓고 있는 판이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 계획은 대체적으로 네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가 무력을 이용한 침략이었다
.그 예를 들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몰아 내고 대내적으로는 의병을 탄압 하고 한일 의정서와 을사보호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것이 그예였다 .

 

두째로는 외교를통한  침략이었다.
 대한제국은  주변  중국, 러시아,일본 3 강대국을  이용한  엄정한 중립국을 표방 만이 살길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한일 협약과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하여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하였다 .
그뿐만이아니었다 .한국은 도외시 한 채로 미국과는 태프트-가쓰라 협약,  영국과는 영일 동맹,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 등을 맺어  한반도에서 저들의우월권을 공인 받았다

 

셋째는 경제 침략이었다
.한일 협약에 의해 대한 제국에는이미 재정 고문이라는자가 개혁을 외치면서 들어와 있었다 .이 재정 고문이란자가 한국의 국가 예산편성을 좌우하였다
.게다가 이 자는  일본에서 거액의 악성 차관 까지 들여와 한국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
그뿐만이나었다  이를테면 황무지 개발권,철도 ,광산, 이루 말 할수 없을 정도였다 .


넷째는 언론 침략이었다.그들은 한국에 한성 순보니 조선 신보,조선 순보니 하는 신문을 처음 한국에 들여와 자기들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 시키는데 주력하였다 .

넓게는  전방위 압박을 가여 성공 단계에 들어 갔다면  구체적 실천 단계로는  전국에서 불꽃 처럼 일어 나는  의병들을 진압 하는 일이었다.

 

 대한 제국  얼빠진 대신들과 일본은   이 나라의 의병들을 비도(匪徒)라 불렀다 .
떼 지어 다니며 살인,약탈을 일삼는 무리라는 뜻이다 .
왕이 일본인이 무서워 러사아 공관으로 피신을 가고 왕후가 피살 되자 전국에서  의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들을 때려 잡자고 일어난 의병들을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무리라는 뜻의 비도로 비하 시킨 일본인들의 의도를 짐작 할만 하다 .

하지만 당시 이 나라의 대신들도  일본인들과 같은 시각으로  의병을 보고 있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승려들 까지 무기를 들고 일어 난 것은 비단 구한말 때 만도 아니었다 . 임진왜란 때 사명당등  훌륭한  종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의병으로  둔갑 하였던 것이다 .

 임진 왜란때  도원수 권율이 지휘했던 관군이 왜적을 물맅친  단초 역활을 했다면  대한 제국의 관군들은  한다는 짓이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인 의병들을  진압 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었다.
그래도 고종 황제는 최익현의 의병을 임진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 수준으로 보았는지 "무력 활동을 자제하라"는 칙령을 내리 었을 정도였다 .

 

허수아비나 다름  없는 고종 황제의 이러한  칙령은  대신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었다
왜냐하면  조정 대신들은  임금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는 척하면서  생각은 일본 통감부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신들의 생사 여탈권을 일본 통감이 갖고 있으니 말이다 .

최익현은  광주 관찰사로 있는 이도재 만큼은  이러한 대신들과는 달리 행동 할 것으로 보고 편지를 썼던 것이다 .


 머리 단발령을 반대하여  낙향 했을때 찾아 왔던  의로운 청년 선비 이도재로  최익현은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이도재는 학부 대신등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완전히 변해있었다 .
최익현은  이도재에게 편지를 통하여  의병으로 서울 까지 진격하여  나라를 팔아 먹은 박제순, 이완용등 5 적들을 목 베이고   황제 폐하를 모시는동시  일본과 담판하여  통감부를 페지하여 일인들이 스스로 물러 가게  할터이니  같이 거병하자는 뜻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

최익현은 최부위에게  편지를 주며  광주로 가서 광주 관찰사 이도재에게  전달하고 답을 받아 오라 하였다 .


광주로 갔다가 돌아 온  최부위가  최익현에게 난감한 표정을짓는다
" 그래 이 관찰사가  뭐라하던가?"
"  놔 두고 가라는 말만합니다 "
" 회답을 안 써주던가?"
"그렇지 않아도 답서를 받아 오라 하였다고 말 했더니 ,바빠서 글 쓸 시간이 없으니 추후 인편에 보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
"  급하다고 하지"
" 급히 답변 서신을 써달라고 간청은 했습니다만  이삼일내로 보내 주겠다는 말만 듣고 왔습니다 "
".............."


 이틀이 지나도  이도재의 답신은 없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제자  이용길,  손종궁이 잇달아  말한다
"선생님 , 이도재라고  다른 대신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녹을 받아 먹는 놈치고 남을 헐뜯기 만 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에게  무슨 협조를 구하십니까?"
"일본 놈들이 무서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행동을 밥 먹듯이 하는 절절 매는 자가  선뜻 선생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래도 이 감사 만큼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
" 선생님  , 정치나 벼슬 하는 놈들치고  개혁한다고 안 떠드는 놈이 없고  세금 싫어 하는 놈 못봤습니다 .그런 놈들에게 이러한 비상시기에  나라를 구한다고 협조를 구하는것은 사치스러운 이야기입니다 .  선생님 같이 지조 높은 분을 비도로  매도하는 놈들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포기 하십시시요"
" .................."

 최익현은  단발령을 내렸을 때 벼슬을 버리고 포천 자기 집으로 찾아와  일본놈들의 사주를 받은  김홍집 내각을 비난 하였던 열혈 청년이 었던 이도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도재
최익현은  이제 와서 이도재의 마음을 더 이상 헤아릴수 없었다 .
( 방관자가 아니면 교활 한자 인지도 모른다 )
 최익현은 이도재에 대하여는 더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하였다

 

임병찬이 군사들을 조련하고 있었지만  당장 급한것이  군량미와 무기 공급이 우선 급하였다 ,
최익현은 영남 호남 각처로  협조를  요청하는 편지 쓰기에바빴다


평소에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큰 소리 치던 사람들도 막상  편지를 받아 본  뜻있는 사람들도 막상  최익현의 서신을 받자 손이  부들 부들 떨리었다 .
심지어 편지를 가져 왔다고 하자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이라고 해도  모여지지 않았다 .

 오직 문하생 핵심10 명만이  최익현을 쫓아 다니며  일을 수행 하였다
역시 무기와   군량미가 제대로  확보 될수가 없었다 .


그렇다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나라 사정을 그냥 두고 만 볼수는 없었다.
(신자(臣子) 로 있는 이최익현이가  국난(國難)을 맞이하여  이대로 만 있다는 것은 의(義)가 아니다 )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있을때  제자 손종궁, 이용길이 은진에 있는  서경순이라는 사람이  비밀리에 300명의  정예 병력과  무기와 군량미도  준비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훈련은 일단  3 월말로 마치고  4월 6일 본격적으로 태인읍  점령 부터  시작 하기로하고   출정을  결심하였다

3월 23일  최익현은 서경순을 만나  다짐을 받고 서경순으로 하여금 임병찬의 손자 임진을 통하여 종성에서 훈련을 지도하고 있는 임병찬에게 거사 날자를 알리도록하였다 .


최익현은  일본군의 시선을 분산 시키기 위하여  고석진을  충청도 정산으로 보내어 같은 날자에 거사 하도록 편지를 보내 놓고  정시해에게는  영남 지방에서 봉기 하도록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
 또 전라도 지방은  무장 사람 김기중, 익산 사람  이규홍, 임실 사람  이석용을  호남 각지에 보내어  거병 할때 군량미를 차질 없이 보내 오도록 조치 하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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