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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고부군에 키가 녹두 알 만큼이나 작다 하여 녹두 장군 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 있었으니 다부진 몸 매를 갖은 갖 마흔 살의 전봉준 이라는 남자였다 .
그는 집안이 가난 하여 비록 세 마지기 밖에 않 되는 농토의 소농 이었지만 일찌기 글을 배워 동네 어린이 들에게 글을 가르처 훈장으로 생계를 보태어 살았다.

1890 년경 최재우라는 사람이 유교 불교 도교를 짜 맞추어 만든 동학 이라는 종교를 만들어 민간 신앙으로 영 호남 지방으로 급속히 번저 나가자 고종 27 년 35 세때 동학에 입교 하고 그뒤 얼마 안돼 고부 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 받는다

이때 전라도 고부군에 조대비의 친척이라고 자칭하는 조병갑 이라는 사람이 군수로 부임 해왔다.
말이 조대비의 친척이지 실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남보다 더 낸 덕으로 대원군으로 부터 벼슬 자리를 손쉽게 얻은 인간이었다
그는 부임 하자 마자 농민 들에게 황무지 개간 허가를 내주면서 개간만 하면 세금을 않 받겠다는 약속을 깨고 추수기에 이를 번복 세금을 걷워 들였다.

재산 좀 있는 백성 들에게는 가족간의 화목치 않다느니, 불효 한다느니,음탕한 짓을 한다느니 노름을 일삼는 다느니 하는 터무니 없는 죄를 만들어 잡아 가두고 속전(贖錢...죄를 면 하고자 받치는 돈)을 받고서야 풀어 주었다.
심지어는 자기 부친의 비각을 세우겠다며 농민 들로 부터 세금조로 1 천량을 거두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핑게 삼아 마구 항목을 만들어 세금을 걷우워들였다 ,

지금 시대 같으면야 세금을 걷우 려면 반드시 조세 법률 주의라 하여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법률로 정하여야 만 가능 하겠지만 당시에는 군수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으니, 세금 걷는 명목 이야 식은죽 먹기 보다 쉬운 일이었다 .
조병갑은 농민들의 숨가쁜 어려운 살림에는 아랑곳 하지않았다.

군수의 횡포에 대하여 농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불평 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세금 걷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마침 고부읍 북쪽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 이 보(湺....논에 물을 대기위해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드리는곳)를 헐어 내고 농민들을 동원해 새롭게 둑을 쌓았다 농민들은 이 저수지의 물을 끌어 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수 없었다 .

조병갑은 이것을 이용했다 .지금 까지는 대가 없이 마음 대로 물을 퍼 댔으나 조병갑은 물세를 받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부임 하자 마자 보를 새로 바꾸어 쌓은 것이다
"아니 세상에 그냥 지나가는 물을 막아 놓고 돈을 내라니 세상에 물세라는 것도 있나?"
"이러다가는 별 희한한 세금도 다받겠군 "

1893 년11월 고부의 농민들은 이러한 조병갑의 수탈 행위에 격분 40 여명의 농민들이 전봉준에게 찾아가 관아에 호소하는 글을 써 달라 하여 수세를 물지 않게 해 달라고 조병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조병갑은 만나 주지도 않고 오히려 처벌 만 받는 곤욕을 치뤘다 .전주 감영의 전라 감사 에게도 진정 하였으나 조병갑에 대한 조대비의 후광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라 감사도 이를 묵살하였다 ,
이 말을 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분개하여 군수의 부당 함을 간했다가 모진 곤장으로 매 맞은일로 한달만에 병들어 죽는 일이 발생 하였다

젊은 전봉준은 1894년 1월 성난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를 공격 한다

농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 시키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워주었다
농민들은 관아를 쑥밭으로 만들고 조병갑이 막아 놓은 만석보를 헐어 내니 막혀 있던 물이 성난 파도 처럼 흘러 논마다 가득 채워 지었다
조병갑은 도망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이런 일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었다 .

조정은 오직 일본에 가 있는 김옥균이 다시 일본인들과 함께 제2의 구데타가 있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홍종우를 일본에 보내었는데 중국 상해로 피신한 김옥균을 그곳 호텔에서 사살하고 시체를 한성으로 가지고 왔다 . 조정은 역적 김옥균의 시체를 종로 네거리에서 능지 처참하여 시체를 내 걸었다 .

이런 와중에 전국 각지에서 좋지 않은 장계가 속속 도착하였다 . 전라도 고부군이 심상치 않았다 .김해에서도 백성들의 소란 보고가 들어왔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의비리 보고가 들어 왔다
뒤늦게 이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의금부에 지시 조병갑에게 죄를 묻고 섬으로 귀양 보내었다

조정은 용안 현감 박원명을 새군수로 내 보내었다 그는 전봉준과 농민들에게 유화책을 써서 간신히 해산 시키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장흥부사 이용태를 사건 조사관인 안핵사라는 직책을 주어 새 군수를 무시하고 오히려 농민들을 마구 잡아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농민들과 동학도를 반도로 몰아 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들이고 동학도의 집을 불 태우고 농민들을 잡아 들여 마구 매질 하였다

격분한 전봉준은 곤봉과 죽창, 무기고에서 빼어낸 창과 총을 들고 다시 관아를 다시 공격 한후 전봉준은 태인, 금구, 부안, 등지에있는 김개남과 약속 백산으로 집결 토록한다
모인 군사가 8 천명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 이들은 정읍, 고창, 영광, 함평을 삽시간에 점령하고 자꾸만 점령지를 넓혀 나갔다
조정에서는 홍계훈대장을 앞세워 관군 8 백명,대포2 문 기관포 2 문 으로 동학군을 얕잡아 보고 공격 하였으나 도교산 황토현에서 보기 좋게 관군이 패하고 만다
관군은 모두 죽고 홍계훈만 간신히 도망 전주성으로 도망 했으나 가는 곳 마다 동학군이 점령 갈곳없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동학군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거의 점령해 들어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나라와 일본에게 이들을 진압 해줄것을 요청 한다
앞서 천진조약으로 철수했던 청일 양국 군대가 동학란중 고종이 동학당을 없애기위하여 청나라에 김윤식 , 어윤중에게 청나라군사를 비공식 요청 한것이 청나라군이 다시조선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재빨리 들여왔다

대원군은 동학도 들이 승승 장구하자 동학도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다시 잡아 볼 욕심으로 전봉준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군을 처 부수라고 밀사를 보낸다

전봉준이 거느린 군사는 더욱 불어 10 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논산에 진을 치고 서울로 진격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7 일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근대적 훈련과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에게 크게 지고 만다 ,
이때 이고개에서 죽은 동학군의 시체가 산하를 뒤덮였고 냇물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였다 .

무참히 죽은 농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말에서 말로 옮겨진 슬픈 민요가 있었으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파랑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엄마죽은 넋새 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전봉준은 1895 년 3 월 29 일 일본군에게 체포 되어 사형을 당한다 그의 나이 42세 였다
이상이 전봉준의 소위 동학란의 전모 이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하였다 .
일본군이 동학란을 진압하자 일본의 입김이 거세지었다

동학란을 진압 할 목적으로 조선은 청에 원병을 요청 하였고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파견 함으로서 조선에는 또 다시 청나라와 일본간에 갈등이생기었다 .
그이유는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약화 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에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 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내 세웠다 . 남의 나라의 내정을 바꾸자는 수작이야 말로 언어 도단 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힘이 없었다 . 내우외환 이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거절로 회담은 결렬 되었고 결국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청일 전쟁은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은 청나라군이 조선에서 철수하고 청나라 요동 반도를 일본에 내 주는 것을 조건으로 소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이를 본 러시아,불란서, 독일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
그들은 조선에서 손을 떼라고하였다 .
하지만 일본은 어떤 방법을 쓰던지간에 조선을 요리 하려고 온갖 농간을 다부리기에이르렀다

대원군은 청나라 이홍장이 자기를 조선에 돌려 보내고 조선을 요리하려다가 오히려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청나라에 불리한 청일 강화 조약을 맺는것을 보고 청나라를 얏보게 되었다 .요동반도와 , 대만을 일본에 떼어준다는 조약을 보고 이홍장을 비웃었다 .
자기나라는통째로 일본과러시아가 노리고 있는줄 모르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그렇다. 기회가왔다 , 바보같은 군주와 여우같은 왕비를 이기회에 몰아내자)
손자이준용이가 펏듯 떠올랐다
이준용은 지금 일본공사로 일본에 가있다 .
이준용이를 왕으로 세워놓고 섭정의꿈을 다시 실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대역죄를 면치못한다 . 게다가 자기를 밀어주는 세력이 전혀 없지않은가? 일본도, 청나라도, 전봉준도, 통로는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내세우는 길밖에 없다 .
그러나 이계획도 암초에 걸렸다 .
이준용이 근간 조정으로 부터 소환령이 떨어 젔다는 소식이었다 .

을미년 3월 일본과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조선에는 일본으로서는 답답한날이었다 ,
러시아, 독일, 불란서의 3국 간섭으로 일본이궁지에몰린날이었다 .애써 할양받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넣은것이다 .
요동반를 일찌기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
요동반도가 청나라 수도 북경과 불과 얼마안되는 거리이므로 일본이 중국 수도 가까이 땅을 차지하면 세계 평화가 저해된다는 구실이었다 .
러시아의명분은 그럴듯하였다 .

독일과 불란서도 러시아에 동조 한것이다 .
일본은 기분이나빴지만 그렇다고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싸워서 그들의고집을 꺾을 힘은 없었다 .
결국 요동반도는 울며겨자 먹기로 일단포기하기로하였다 .
일본은 결국 얻은 것이 없었다 .

3국이모두 세계 평화를 내세우며 일본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고 완전 손을 뗀 청나라 대신에 조선 까지 포기 할수는 없었다 .
이런 판국에 일본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는 조선 조정은 아무도 없었다 . 왕은 동학란 진압 후유증으로 정신이 나가 있었고 대원군은 호시탐탐  재집권을 노리고 있었다 .
민비가 고종에게 말하였다
"전하, 가만히 보니 일본 이라는 나라도 별것 아닙니다 . 청나라와 피흘려 싸워서 얻은 요동반도 사용권도 러시아측의 한마디에 포기 하는 것을 보면 ..."
"그렇소 , 청나라를 격파하기에 동양의 맹주는 일본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러시아와 같이 큰 나라에는 당할수가 없는 모양이지요"
"일본이나 청국을 믿었다가는 큰일이나겠습니다"

" 우리나라로서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국 이라는데 주목해야합니다"
"전하, 이제 청나라도 일본이 러시아 한 마디에 꿈쩍 못하는것을 보고 우리나라 문제가 생길 때는 일본의 말을 따르지않 을것입니다 "
"그렇기는하오"
" 앞으로는 러시아에 힘을 빌려서 조선의 앞날을 개척 해야 할것 같습니다 "
" 허. 그런것은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 천하 대세가 어떻게 변할지를 알아 보고 해도 늦지않소"
고종은 아직도 황준헌의 조선 책략에서 조,일,중이 러시아를 견제하여야한다는 구절에서 벗어나지못하고 있었다 .

"전하, 이번기회에 일본공사와 밀착된 김홍집을 갈아 치우고 일본사람들 말이라면 껌벅 죽는 박영효도 갈아 치워야 합니다"
" 허허, 지금 조선에는  박영효 만한 인물이 없어요"
"전하 인물이 따로 있습니까? 찾아 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
"누가 좋겠소?"
"박정양이면 어떠 하올지요?"
"박정양?"
"................"

민비는 고종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이기회에 이준용 일당을 모두 하옥시켜야합니다 "
고종이 놀란다
"이준용 이라니오?"
이준용 이라면 대원군의 손자가이며 고종의 친족이 아닌가? 고존은 민비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전하 , 이렇게 일본이 힘을 못쓸때 불온한 무리들을 제거 해 버려야지 그냥 두면 큰 화가 됩니다"
"....................."

고종은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이준용을 못 마땅히 생각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

이준용은 흥선 대원군의 손자 이었다 .
1886년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이어 ·형조참의를 거쳐 대사성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김홍집 내각의 내부협판 ·통위사에 등용, 곧 칙명으로 유학차 일본에 갔다가 주차 일본공사가 되어있었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 개혁이라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조선을 집어 삼키려면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 할 수 있는 확립된 조선내의 친일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적극적으로 고종에게 파고 들었다 .

이노우에는 조선을 사실상 움직이는사람은 고종이 아니라 왕비와 대원군 이라는 것을 간파 하고 있었다 .
우선 대원군 부터 손아귀에 넣고 다음 민비도꺾어 놓아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
이노우에는 청나라가 철수한 마당에 무서울게 없었다.

 집요하게 고종에게 찾아가 조선은 소위 저들이 입버릇 처럼 말하는 개혁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
그렇다고 고종은 그의 말을 들어 주지않았다 .
앞서 일본이 러시아의 견제도 막아내지 못하는 주제에 조선에만 와서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꼬왔기 때문이었다 .

이렇게 일본공사가 궁궐을 제집 드나 들듯이 하던 시기에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노우에의 절친한 사이로 친일파인 김학우(金鶴羽)가 백주 대낮에 괴한에게 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
이노우에의 좋은 트집 거리가 생기었다. 그는 고종에게 찾아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법부협판 김학우를 죽인것은 대원군파가 저지른 범죄라며 범인체 포를요구하였다 . 일본과 수교를 반대하는 대원군파의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
자기들은 국왕을 깎듯이 모시려 하는데 대원군파들이 방해를 한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시기에 김학우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었다 .
김학우가 죽기전에 이준용과 대역 음모를 획책했다는 엉뚱한 자백을 체포된자들 입에서 자백을 받은것이다 .
김학우는 그당시 서울과 신의주간에 전신 시설 가설공사로 일본을 자주 드나 들었는데 일본에 가면 이준용을 자주 찾은것을 기화로 역모를 했다고 누가 모함을 한것이었다 .
어쨋든 이준용은 김학우 사건에 휘말리어 유배를 가고 말았다 .

일본의 움직임을 살피던 청나라 원세개는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 가게되니 자연히 조선은 친일 김홍집 내각이 들어 서게 되었다 ,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 파의 친일 정부는 소위 국정 개혁 이라는 것을 단행하였다.
오나가나 개혁 이라는 간판은 잘 써 먹었다

일본공사 오토리(大鳥)는 소위 5개조 개혁안 이란 것을 내 놓았는데 , 조선 정부는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 공사는 대원군을 포섭 하기 시작하였다
권력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는 대원군은 민씨 일파를 제거 하는조건으로 그들에게 합세 하였다

1894 년 7 월 부터 대원군의 또 다시 섭정이 다시 시작 되었다
왕명으로 중대 정무와 군무는 대원군의 결재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제1차 김홍집 친일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김홍집·김윤식·김가진 등 17 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군국 기무처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급조했다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일본 공사는 군국 기무처라는 중앙과 지방의 제도·행정·사법·교육·사회 등 제반 문제에 걸친 사항을 3 개월 동안 208 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을 만들게하고 . 정치제도도 바꾸어 개국 기원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다.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 아문(八衙門)으로 개편,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또 국왕의 인사권· 재정권·군사권 등을 박탈 하거나 축소하였다.
군국 기무처는 의정부와 8 아문을 정부의 실질적 집권 기구로 만들어 권력을 집중시키고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수립 한것이다.

그리고 의정부와 8 아문을 원할하게 운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부에서 관장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또 신식 화폐 장정에 의한 은본위 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하였다.
또한 문벌 반상제도 혁파, 문무존비 구별의 폐지, 노비의 매매 금지, 연좌율 폐지, 조혼금지, 과부 재가 허용 등 조선 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된 여러 제도와 관습에 대해서도 바꾸었다

얼마 있다가 일본공사는 일본식으로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 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을 개편하고 월봉제도를 수립하였다.
지방 행정구역은 8 도를 23 부 337 군으로 개편 하였다

지방관으로 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 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 행정 체제를 중앙에 예속 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도량형을 개편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다.

사법제도는 행정 기구에서 분리 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2심제가 채택되었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서 특별법원을 두었다.

서울에 경무청을 두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지방은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을 맡아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하였다.

모든것이 일본이 하자는 대로 바꾸어 나갔으니   조선 조정이 정신이나 제대로 차리고 하는 짓인지 도무지  알수 없는 사태가 벌어 지고있었다


이렇게 모든것을 일본식으로 바꾸던 박영효가 1895년 반역 음모 혐의로 정계에서 쫓겨나 일본에 망명 하면서 끝나는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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