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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jpg

 

 

 

일본의 압박으로 나라가 뒤숭숭한때 뒤늦게 조정에서는 민승호 폭발 사건의 범인 체포에 힘쓴 결과 폭탄을 전한 범인을 잡고 보니 뜻밖에도 전 진주병사(晋州兵使)이었던 신철균(申哲均)으로 밝혀지었다
신철균의 죄상은 민승호집 폭발 사건 말고도 영의정 흥인군의 집 방화 사건의 방화범으로 적발되었다 .
신철균과 그의 청지기를 대역죄로 고문한 끝에 밝혀 낸 것이다

조정은 신철균과 이를 집행한 청지기 장가를 참형에 처했다.
민비가 암암리에 신철균을 국문 할때 대원군이 직접 지령 했는지 여부를 밝혀 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의 직접 지령이라는 근거는 표면에 나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뒤에서 이런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는 풍문은 세상에 돌아서 공공연한 비밀로 인정 되었다.
풍문이야 어쨋든 우선 일본의 통상 요구로 조선 조정은 어수선 하기만 하였다 .
신헌은 일본과 의조약 초문을 작성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선에 중국이 간섭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조선의 자주국 이라는 내용을 규정 하는 내용 이었다 .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과 청나라간의 끈끈한 관계를 이간질을 시키 위한 술책이 이었고 ,두번째로는 조선이 대원군 시대 이래로 굳게 닫힌 항구의 문을 열어 자기들이 마음 놓고 조선에 드나 들려고 하려는 목적이었다
우선 부산,원산, 제물포의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의 일정 지역에 일본인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

세째로는 조선 의해안선은 일본과 달리 복잡하여 장차 한국을 요리 하려면 지리를 파 악해야 하기 때문에 해안 측량권 인정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로이 측량하는 것을 허용 해달라는것이었다

네번째는 소위 치외 법권을 인정 해 달라는 것이었다 . 조선내의 그들이 저지르는 불법행위가 생길때는 조선 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지 않고 일본법에 의하여 처별 받도록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선의 법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인은 조선에서 일본법에 의해서만 보호를 받아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생전 처음보는 이러한 문서에 눈이 휘둥그래지었다
" 도대체 조약이 무어요? 옛날에는 이런 약조문을 나라와 나라 사이에 쓰지 않고도 청나라와 선린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일본인들이 왜들 이런 문서를 내는가?"

신헌도 일본인들이 모두 써와 가지고 내민 문서 로서는 처음 인지라 뾰죽히 답변할 전문성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도 서양 각국과 이런 조약을 썼답니다 ."
"허. 그자들이 예전에 없던 일 까지 요구 하는 구료 . "
"전하 , 일본은 우리 대표단에게 신식 국제법도 모르느냐는 조롱 까지 합니다 "
"국제법이 무어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약조라 할수 있습니다 "
"별 희한한 것을 다 쓰라는군....."
"전하 , 저들이 이 문서에 서명을 하면 배상이고 무어고 모든 것을 포기 하겠다고 합니다 ."
"......................"
결국 생전 해 보지도 않던 조약문에 일본 대표와 조선 대표간에 서명이 이루어지었다

제주도 귀양에서 돌아 온 최익현은 이즈음 자기의 과거 글 친구였던 유중교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
유중교(柳重敎)의 자는 치정이고 호는 성재이며 본관은 고흥이다.그는 1821년(순조 21) 설악면 선촌리에서 태어났다.5세때 화서 이항로 문하에 들어가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고, 12세때 부터는 중암 김평묵 문하로 옮기어 사서삼경을 배워 통달하였다.

21세때 이항로의 명을 받고 송원화 동사합편강목(宋元華 東史合編綱目)을 수정했으며 56세때 학행으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였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하여 입조를 요청하였으나 응하지않은 사람이었다 .

최익현 보다 10 살이 위이기는 하지만 이항로 의 수제자들로서 두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
"면암 ,제주도에서 어떻게 지내셨오? 이국 같이 먼곳이라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오래간 만에 만나는 두사람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세상 이야기로 바뀌었다 .
"성재, 그렇지 않아도 나라 꼴이 돌아 가는 것이 보기 싫어서 제주도로 돌아 가고 싶은 심정이요"

"허허, 면암같은 의인(義人)도 그런말을 하오? 봉기불탁속(鳳飢不啄粟)이라헸소만 면암의 그 굳은 절개의 심정은 알겠으나 요사이 조정에서 일본과 불평등하게 조선에 불리한 조항이 수두룩한 조약을 맺으려 한다는데 그런 말씀만 하신다면 이 나라는 누구를 믿는다는 말씀이오?"
"구체적으로 어떤것이랍니까?"

"일본인의 해안 측량권, 치외 법권 인정등이랍니다"
"듣기에는 왜인들이 먼저 우리 군사들에게 공격을 가하고 오히려 저희들의 배가 파손 되었으니 배상 하라고 하더라면서요?"
"그런것을 두고 적반 하장 이라는 것이지요"
"쯧쯧 ......조정 대신들은 무얼 하는거요? 4백년을 지켜온 나라에 왜적들이활개를 치게 만들고도 대신 이라고 앉아서 녹이나 받아 챙기려는 한심한 사람들.........."

최익현이 흥분 한다 .
"문제는 저 놈들이 요구 하는내용이 깊은 음모가 보인 다는것이오. "
최익현은 당장이라도 조정에 들어 갈듯한 기세였다
유중교가 말린다 .
"면암, 그렇지 않아도 장호근 이라는자가 상소문을 내었다지요"
"장호근? 그놈이 상소문 낼 자격이있나? 대원군 앞잡이 놈이........"
"장호근이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시오?"
" 전에 사헌부에 장령으로 있던 놈인데 대원군의 끄나풀이지요 . 그놈이 무슨 상소를 하였다고 합니까?"
"상소문이야 그럴듯 하지요 . 마땅히 군신 상하가 왜놈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들었소"
"그놈 대원군 장난에 놀아 나는 것 이지요 "
"그자가 주장 하는 것은 모든 백성이 합심하여 척화(斥和)하는 것 밖에 없다는 내용이랍니다 "

"그놈의 척화 또 나오는구먼, 나는 척화를 반대 하는 입장입니다 . 우리가 일본에 굴욕을 당하는 것은 국방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너무 많이 간파하고 있는 것은 그 척화라는 간판 때문입니다 .대원군이 나라를 망쳐 놓았어요 . 전국에 척화비나 세워 놓으면 저절로 국방력이 강화 된 답디까? . 그많은 백성들의 고혈로 빨아 들인 세금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
일본은 척화가 아니라 개화를 하지않았습니까?

일본도 이미 철종 임금때 부터인 24 년전 미국 사절단에게 강제로 일본의 문호개방
을 했죠 . 그때의 일본 일본에게 통상수교를 하려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덕천(德川) 정부에게 강요 했던 것인데, 폐리 제독은 미국의 태평양 방면 대함대를 거느리고 동경만에 달려 들었고 그 때 일본의 국민들은 그 쇠로 만들고 검게 빛나는 거대한 군함을 처음 보고 검은배라고 벌벌 떨었다고 하지않습니까?.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조선보다 먼저 발달 시킨 것은 그때 일본이 그것을 받아 들여 외국것을 일본화했기때문이었지요 .

일본이 척화에서 개화로 바꾼 지혜를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
그런데 우리 는아직도 척화 하고 있으니 문제지요"
유중교는 최익현이 방금한 말에 다소 의아했다
" 그러면 면암께서는 일본과 강화조약을 하자는 말씀이요?"
"허허, 성재 께서는 내말을 못알아 들으시는구먼요, 문제는 척화를 반대 하되 이번의 왜놈들 같은 놈들과 화친 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에요, 우리의 약점을 잡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놈들에게 비굴하게 굴복 한다는것이 부당하다는 얘기 입니다 , 목전의 위험만을 피하고자 강화를 맺으면 다음에무슨 장차 협박이 들어올지 모릅니다 "
"장차라....."
"그렇습니다 .도둑과 강화를 맺으면 우리도 도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허허..... 면암 말씀은 강화를 맺지 말아야 한다는 소견인데...."
."그렇습니다 .이나라는 이하응이라는 대원군이 망처놓고 아직도 권력의욕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사이에 일본놈들이 우리의 내부 약점을 알고 수작을 거는것입니다 "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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