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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비는 서원 철폐로 인한 유생들의 반발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으나 생각 밖으로 수습이 잘 되는것 같자 한결 마음을 놓았다 .
궁도령이라고 부르던 이하응을 대원군으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그를 주무를수 있을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수렴 청정하는 자리까지 차지 하였으니 이제 그녀는 이 세상에 부러 울것이 없었다 .

더구나 흥선 대원군에게 대권을 쥐어 주게 한것이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
다만 조대비가 이명복을 왕으로 맞아 들이기 위하여 영의정 김좌근,도승지 민치상,기사관 박해철,김병익등이 이하응의아들 이명복에게 자기 죽은 남편 익종의 대통을 잇게한다는 대왕대비의 교지를 받들고 최상급의 가마 행렬을 갖추어 운현(雲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은 좋았으나 그에 비하여 집이 초라 했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

한나라의 왕이 태어난 곳이고 임금 아버지의 사저인데 초라하기 짝이 없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
집이 모두 낡아서 볼품이 없었고 사람이 거처 하는 방이 몇 개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더욱 마음에 걸리었다 .
도승지 민치상에 의하면 ,이명복을 고종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이하응의 집에 갔을때는 명복은 밖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연날리기를 하며 놀고 있었고 대왕 대비의 교지를 받은 후에 입귈할때도 출입문이 좁아서 하마트면 넘어 질번하여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고 전해 들었다 .

실제로 흥선군은 12 세 때 모친상을, 17 세 때 부친상을 당한 후 4 형제가 서로 의지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에 헌종 7 년(1841) 그가 22세 되던 해에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헌종 9 년(1843)에 비로소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으며, 헌종 11 년(1845)에 경릉수릉관(景陵守陵官)이 된 후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 하였을 뿐이었다 .

그러나 안동 김씨에 의해서 철종이 즉위한 이후로는 그나마 누리던 왕실과 종친으로서 위치가 위태롭게 되어 흥선군의 생활이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호조판서 이돈영(李敦榮)을 불렀다
"대원군이 궁전을 출입 하는데 시위(侍衛)는 차질 없이 잘 하고 계시오?"
"예그러 하옵니다 "
" 듣자니 대원군의 사저가 초라하기 그지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 나라의 임금이살던 곳이고 임금의 아버지가 살고 계신데를 그냥 그렇게 둘수야 있어요? 대원군 댁에 매달 쌀 10 섬과 돈 10 냥씩을 보내고 , 집을 고쳐 주도록 하시오 "
호조판서 치돈영은 조대비가 쌀 10섬과 돈 10 냥씩을 보내라는 말은 알아 듣겠는데 집을 어느정도 고쳐 주라는 것이 애매했다

"집을 고쳐주라 하셨는데 규모를 얼마 정도로 해야 하옵는지요?"
"아무래도 임금의 아버지가 사시는 곳이니 궁궐에 따르지 못하지만 궁궐 못지 않게지어야지요"
".................."
궁궐 못지 않게 지으라니 ,이돈영은 기가 막혔다 .
새로 지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 간다

그러나 섯뿔리 조대비에게 너무 과하다고 얘기 했다가는 대원군 귀에 들어 가는 날이면 언제 보복이있을지모른다 .

결국 나중에 운현궁으로 불리운 흥선 대원군의 사저 신,증축비의 지원은 17,830 냥 으로 결정 되었다 .
대원군의 사저를 짓는데 17,830냥이나 되는 나랏 돈을 도와 주다니 지금 까지는 왕실의 대군들이나, 다른 대원군 들에게는 이 만큼의 건축비를 도와 준 사례가 없었던 놀라운 비용이였다 .

이렇게 해서 건물이 준공 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 명, 소년 497 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건물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이름도 운현궁이라고 명명하였다
새로지은 운현궁은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 처럼 엄숙하였다.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는데 노락당이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었다 .왕이 노락당기를 지으라고 할 정도였으니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야인시절 흥선군이 김병학을 자기집에 불러 술잔을 나눌 때만 해도 왕족 치고는너무 초라한 집에서 살았다 .
김병학은 흥선군에게 감개가 무량하여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됩니다 "
하고 웃으며 무심결에 말하였다 .
"..................."
주위에서는 아무리 웃으게소리도 김병학이 감히 대원군 앞에서 좀지나치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흥선군도 하늘만큼 높이올라갔다고 추켜세우는 김병학의 소리를 무슨 뜻인지 잘안다 .
그러나 대원군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의아 해 했다 .
왜 그럴가?
그는 안동 김씨들 중에 유일하게 흥선군과 가깝게 지내며 마음이서로 통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런 말을 할수 있었다는 것을 일반인 들이야 모르고 있으니 그럴수 밖에없었다 ,
그는 세상이 바뀌어 덕을 보고 있는 사람중에 한 사람이었다

노락당은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회갑이나 잔치를하는장소이고 다음으로 크기가 비슷한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이 일상 거처하는곳으로 쓰게 되어 있다

운현궁이 얼마나 웅장한가 규모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 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 명의 수행원과 700 필의 준마가 동원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지금 보아도 운현궁의 규모는 엄청나다 .
운현궁은 현재 종로구 운니동 114-10에 위치되어있다 .
고종이12 세 까지 이곳에서 성장 하였으며 이제 운현궁 이라는 칭호와 함께 대원군의거처 다운 면모로 확장 ,증축 된 것이다 .
실로 운현궁의 웅장함은 대궐과 비길만 하여 그 담장 둘레가 수리에 가까웠고 4 대문이 있었다.
4 대문 중에는 궁궐과 운현궁 사이에 운현궁에 쉽게 드나 들수 있도록 공근문(恭勤門)까지 있었다 .
왕의 권력은 즉 대원군의 권력이 되어 버려 중앙 뿐만아니라 지방 곳곳에 이르기 까지 그의 위세가 떨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

이제는 조정을 통하지 않고 운현궁 안에 유사(有司)를 설치 하여 정보 수집 에서 부터 재원 징수에 까지 일일히 관여 하였다 .
나랏 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대왕 대비 조씨는 돈 걱정을 전혀 안 하였다 .
이렇게 돈에 눈이 어두운 조대비도 역시 한 여자에 불과했다 .
나라 살림이 어떻게 돌아 가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불쑥 불쑥 즉흥적으로 돈 쓸 일만 끄집어 내어 엉뚱한 일을 꾸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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