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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 년 3 월 29 일 대왕대비 조씨의 이름으로 내린 서원 철폐령은 선비들에게는 보통 심각 한것이 아니었다 .
당황한 선비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것은 선비들이요 .사전에 치밀하게 서원의 비리를 낟낟히 조사 한후 ,밀어 부친 철퇴를 얻어 맞고 쩔쩔 매는 양반들 모습을 보고 즐기는 사람은 흥선 대원군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들이었다 .
백성들은 이 엄청 난 조치에 어리둥절하였다

서원 철폐령은 신분 사회 였던 조선을 근본 부터 흔들어 놓는 조치였다 .
임금은 나이가 어리었고 대신들은 이하응의 소위 대원위 분부가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바른 소리하나 못하였으며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감히 조정에 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
그래도 그동안 세도가 당당했던 장동 김씨들 (안동 김씨들을 장동 에 살았기 때문에 장동 김씨 라고도 부른다 )치하에서는 유생들이 상소라도 올릴수 있었다 .상소를 올리면 장동 김씨 조정은 하던 정책도 다시 되 돌아 보는 여유가 있었다 .
그러나 흥선 대원군 치하에서는 서슬이 시퍼런 대원위 분부만 있었지 아래서 위로 올리는 상소란 용납을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입 단속을 하면서 조정의 하는 일에 대하여 입 한번 뻥끗도 못 하였다 .

조선은 신분 사회였다 .
조선 신분 사회는, 여느 다른 나라와 다르지 않게 각국의 신분사회의 특징과 방법과 형태만 약간씩 다르지 별반 다른게 없다 .
1800 년대 세게 각국의 신분제도는 거의 공통적으로 태어 날 때 부터 이미 결정 되어 있었다 , 신분의 세습, 직업의 세습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신분 사이의 통혼도 금지되었으며 신분에 따른 특유한 생활 양식, 즉 의복이나 교육등은 고정적이며 폐쇄적인 사회였다 ,
근대의 업적주의(業績主義)를 중심으로 하는 변동적이며 개방적인 근대 사회 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식민지 시대 일본 사가들은 ,이러한 세계 각국과 같은 신분제도가 유독 조선 왕조 시대만 존재 하였던 것 같이 부풀렸고 이를 기화로 조선 왕국의 신분 제도를 폄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분제도는 우리나라 보다도 중세 유럽에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는것을 그냥 넘겨서는 안될 대목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국왕과 귀족, 성직자, 시민, 등으로 나누어진 4 개의 계급으로 신분이 구분 되어 있었고 인도를 보아도 현재 까지 신분제도가 남아 있지만 그들의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보아도 승려나 왕족 , 무인, 평민,노예로 4개의 신분사회로 구성 되어 있었다 .
고대 유럽 사회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 ·로마에는 귀족, 평민, 자유민, 노예등 4계급의 신분 사회로 나누어저 있었는데 많은 지역에서 그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조선도 마찬 가지였다 .
일본 식민 사가들은 조선 왕국이 유럽의 시민사회와 같이 조선이 급하게 근대화로 변하지 못한 것은 안동 김씨들만의 잘못 이라고 몰아 부치며었다 .
반대로 흥선 대원군 만이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크게 개화 한것 같이 말하고 있다 . 이렇게 식민 사관을 주장 하는 자들은 자기들 식민지 정책 입맛에 맞게 역사를 왜곡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일본 식민지 시대의 사학자들은 그렇다치고 해방 후 일부 국내 사학자들 까지도 흥선 대원군 만이 나라를 건진 영웅이고 나라를 망친 것은 안동 김씨들과 무능한 고종 임금이며 영특한 여우 같은 명성황후 때문 이라고 묘사하고 있었다 .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그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얘기인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
그이유로 그러한 주장 이면에는 ,일본 제국 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정신적 맥을 끊으려는 의도로 유림을 폄하 하기 위한 그들의 음흉한 술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우리나라 해방후 사학자들은 맹목적으로 그들의 식민 역사관을 베끼고만 있었으니 한심 하다 하지 않을수 없다.

여기서 잠간,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중국의 신분제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진· 한 (秦,漢)대의 신분제는 양인과 천인으로 단순히 2 원화 되어있었다. , 이것이 당나라 때에 와서 양,천인 뚜렷한 신분 제도로서 정비되었다.
그 바람에 우리나라 고려에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양· 천 신분의 구분을 엄격하게하는 제도를 모방 하였다.

조선 왕조에 와서는 는 신분 구성은 흔히들 양반과 상놈의 두개의 신분으로 나누고있다 . 조선의 신분은 양인(良人) 신분과 천인(賤人) 신분으로 나누고 있었다 , 여기서 양인이란 천인이 아닌 사람을 모두 양인이라 불렀다.
양인이냐 ?· 천인이냐?의 신분 제도는 혈연, 직업, 토지 소유 관계 등에 의하여 나누어지었다
양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오랫 동안의 관직, 문벌, 토지 소유, 노비 소유 등의 자기들 끼리 경쟁을 통하여 특권적인 지배 신분층이 되었다.
이러한 특권적인 지배 신분층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법적으로 피지배 신분을 더욱 속박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관료 진출의 혜택이 주어졌고, 고급 관직을 독점 하였으며, 군역이 면제 되는 혜택을 받았다.
조선 왕조에서의 양인들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양인들이 지배 신분으로 양반이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또 다른 양인들은 하급 지배 신분으로서 중앙의 서리, 지방의 향리, 기술관, 토관, 군교들이 행세하였다

두번째 하급 지배 세력인 양인들은 양반으로 진출 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단지 전문 행정 요원이 되어 사무의 능률을 꾀하거나 실무 행정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데만 신경을 썼던것이다

양인에 속하는 양민은 천인은 아니었으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공민권이 주어져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관리도 될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여건상 이런 일들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농민 이외에도 상인과 공장을 운영 하는자들이 양민에 속하였으나,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조선에서는 상업과 수공업이 천시 되었기 때문에 사회 신분상 그들은 농민에 비하여 뒤처 질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을 잡고 있던 양반, 즉 양인들을 말살 시키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서원에 철퇴를 내린 대원군의 조치는 아이로컬 하게도 나중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조선 침략에 암적인 존재이며 저항 세력인 양인 계급의 양반과 지식인들 부터 먼저 무력화 시켜야 했다. 일본 총독부는 양반과 지식인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철저히 소탕에 이용 하였던것이다 .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화하는 과정에서 , 일본의 비하여 조선이 근대화 되지 못한 것이 오로지 안동 김씨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유독히 부각시키었다 . 일본 사학자들은 안동김씨 세력을 유림의 대명사 처럼 억지로 조작하여 조선의 정신적 지주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상대적으로 흥선대원군을 추켜 올리어야 했고 유림들을 폄하하여 조선의 정신적 맥을 끊으려는 음모를 꾸준이 진행 해왔던것이다 .

생각해보자 .
만일 고종이 임금이 되지 않았다고 가정 해보자 .
조선 왕국이 수구 세력이라고 몰아 부치는 안동 김씨 세력이 계속 집권을 하고 있었다고 가정 해보자 .
그러면 그후 조선이 일본인들이 말하는대로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는 근대화 되지 못하였을까?
조선은 근세로 접어 들면서도 계속 양반 상놈의 신분 사회로 계속 남아 있었을까?
고종이 없고 이하응이 없는 조선말기를 가상해 볼때 그 시대의 조선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수도 없다 .

유럽의 경우를 보자 .
유럽의 산업 혁명은 도시의 영향력은 직접적이고 막강하였다.
12 세기의 유럽은 도시가 현실을 주도 하였다.
봉건 귀족들은 도시에 귀속 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도시 주변의 농촌의 대부분의 땅은 도시로 흡수 되어 도시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 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신분사회는 경제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유럽의 도시 발전은 농촌의 사람들은 도시의 영향권 안에 들어 가지 않을수 없었다 .
급격히 변화 하고, 번영 하는 도시 사회는 점차 유럽의 중세의 신분적 차별은 무용 지물이 되었다
재력과 교양은 세습적인 귀족 신분은 전유물이 아니었다 .

유럽 사회에서는 상업과 금융업의 발달로 상업을 운영하는 교육이 실시 되었고, 많은 도시가 학교를 창설 하였으며, 부기와 상업, 서신 및 복잡한 신용거래가 보급 되었는데 이것으로 상업 종사자들의 학식은 유럽 귀족신분의 상류사회가 자연히 몰락하였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르네상스 문화의 주조를 이룬 것은 상류 계급이었다.
문학과 예술은 그들의 취미에 알 맞았고 그들의 사상을 대변하였으며, 사고 방식과 사회 풍습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이들 상류계급에 의해서였다. 상류 사회와 중산 계급 의 행동과 사상은 도시의 시민 생활 양식과 일치 되었고 유럽 사회는 자연스럽게 시민사회로 변하였다 .

아직도 일본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지금의 한국이 이 만큼 발전 한 것이 조선을 집어 삼키고 식민지화 한 일제 30년의 덕분이라고 말 하는 것을 보면 적반 하장도 보통 적반 하장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30 년이나 후퇴 시킨 장본인 들이니 말이다 .

어쨋든 역사는 흘러 가게 마련이다 .

그것이 운명이었던 의도적 이었던 말이다.
유럽에서 르네상스 문화를 주도 했던 계급이 상류사회 였다면 우리 문화의 상류사회도 양반 사회였다 .
세계의 역사 흐름을 살펴 보았을때 역시 역사의 수레 바퀴는 우리나라도 산업화 과정을 거치었을 것이고 상류 사회인 양반 사회는 자연히 몰락 하게 되었을 것이며 조선사회는 식민지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일본을 능가하는 근대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

조선의 상류 사회인 유생들을 하루 아침의 철폐령으로 서원을 없애 버리니 유생들은 갈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상업이나 금융업 같은 직장이 있어 받아 주는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
설혹 상업나 금융업이 있다하여도 그쪽 지식에 둔감한 유생들이 갈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독선적 서원 철폐령은 순전히 조선의 상류 사회를 무너뜨리는 효과 말고도 조선의 정신적 맥을 끊는 사태 까지 발전 할줄은 암도 몰랐다.

이를테면 진주성의 충민사경우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3 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의 영웅 김시민을 기리는 사당으로서 효종 3 년에 창건 해 헌종 8 년에 조정의 사액을 받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김시민의 사당을 철폐령으로 없애 버린것이다 .
그후 일제에 의해 그 터 마저 없애 버렸다.

전국적으로 서원 철폐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
전국의 유생들과 양반들이 대궐 문 앞에 나타나 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
대원군은 자기에 대한 반대 세력인 유생들을 탄압 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 공자가 다시 살아 난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양반들의 행패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서원은 선대의 유생들의 제사나 지내기 위해 있는 것임에도 그 지역에서 왕과 다름 없는 세도를 부리고 있었지 않으냐?. 이런 꼴을 어떻게 보라는것이냐?"
하고 눈섭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
양반들이라고 다 행패를 부린것도 아니고 또 유생들만의 제사만 지내는 장소도 아니었다.
당시 서원은 조선백성들에게는 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근대 교육기관으로 발전해나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그런데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지금 까지 사사건건 조정일에 관여하려는 유생들의 꼴을 볼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서슬에 양반들은 자괴에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
이에 일부 유생들은 보다 못하여 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이라고 까지 맹 비난까지 하였다.

서원철페 조치는 역설적으로 후에 일본을이 한국을 식민지 화하는데 도와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조선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 세력인 상류사회의 지식인들을 이미 대원군이 한풀 꺾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뒷날 일제 식민지시대 사가들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페 조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후에도 여전했다 .

그들의 속셈은, 당시 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단행한 것은 일부 말썽이 있었던 서원과 향사의 폐단을 부각시켜 , 양반과 유생들의 힘을 약화시켜 무력화 시킨 다음 그들의 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성취하려는 전방위적 음모였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생들을 무력화 시키므로서 손쉽게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자 했던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몰지각한 우리나라 일부 사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생을 부패 집단으로 호도하고 무법자 대원군을 전면에 부각 시키는데 열을 올리었다 .
사학자 뿐만도 아니었다 .운현궁의 봄, 전야 ,등 소설을 쓴 유명 작가들 작품에도 흥선대원군이 마치 조선을 지키는 수호신 처럼 받들어 쓰고있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과거 임진 왜란 때나 한일 늑약 때에도 그래도 최후 까지 왜적과 싸운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한 것은 역시 유생들 이었는데도 말이다 .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유교 이념을 고리타분한 이념이나 되는것처럼 폄하 하고 있으면서도 남한과 북한을 불문하고 아직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유교의 유일한 덕목인 충효를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

흥선대원군이 내 세운 서원 철폐령을 명분은 표면상으로는 양반들의 행패로 부터 일반 백성들의 피해 부담을은 경감 시키는데 있다고 표방 하고있다 .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문제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을 무시한 김씨들의 세도 정치를 부패정치로 몰고 가면서 정작 자기는 조선의 근대화 보다도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
흥선 대원군이 늘 말 버릇 처럼 내 세운 개혁은 결국 개혁이 아니라 기존 체제를 보완 유지하여 왕권을 강화 시키는 곳으로만 집중 하려고 한것 밖에 한것이 없다

흔히들 그를 실용 주의적 보수 정치가라고 일부 학자들은 추켜올리나 사실은 그와 다르다 .
그는 오로지 아들인 고종의 왕권 강화를 위하여서는 실용이고, 보수고 , 개혁이고를 헌신짝 처럼 취급, 오로지 왕권 강화에 만 눈독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흥선 대원군은 포도청에 명하여 대궐 앞에 모였던 유생들을 군졸들을 동원 한강 이남으로 끌어다 버리었다 .
끝 까지 버티는 유생은 의금부로 끌고가 감옥에다 처 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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